릴로

# 새로운 시작

강남역 4번 출구 앞, 준호는 택시에서 내려 거리를 바라봤다. 5년 전의 서울과 지금의 서울은 달라 있었다. 건물들이 더 높아졌고, 가로등이 더 밝았으며, 사람들의 손에는 더 큰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시간: 오후 5시 12분.

전시회 시작까지 48분이 남았다.

준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강남역에서 갤러리까지는 도보로 15분. 충분했다. 지금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과거처럼,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현재는 불완전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솔이였다.

"아빠, 어디야? 이미 와?"

"강남역 근처야. 천천히 가고 있어."

"그... 그럼 괜찮아?"

목소리가 작아졌다. 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버지 앞에서는 조심스러웠다. 그 불안감을 준호는 알고 있었다. 과거의 여러 시간선을 거쳐 누적된 상처들이 그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번은 회귀가 아닌, 진정한 현재였다.

"응, 기대돼. 너의 그림 보고 싶어."

침묵. 그리고 솔이의 숨소리.

"아빠... 미안해.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준호의 목에 뭔가 걸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현재에 있다는 증거였다.

"미안한 건 아빠야. 그런데 솔이, 이제부터는 미안해하지 말고 함께 있자. 아빠가 여기 있으니까."

또 다른 침묵. 그리고 울음.

"응... 응."

전화는 끝났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강남 거리의 저녁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5년 동안 놓친 햇빛이었다. 회귀 시간선 속에서도 느낄 수 없던 햇빛이었다.

---

갤러리는 아직 조용했다. 개장 15분 전이었다. 준호가 문을 밀고 들어서자, 솔이가 전시장 중앙에 서 있었다. 딸은 아버지를 보고 얼굴을 들었다.

25세의 한솔이. 중학교 때 그 작은 딸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불안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눈빛 속에는 경계가 남아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의 시간선들에서 몇 번이나 그 눈빛을 마주쳤었다.

"솔이."

준호가 천천히 걸어갔다. 서두르지 않았다. 달려가지 않았다. 단지 현재 속에서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아빠."

딸이 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준호는 솔이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살아 있는 손이었다. 회귀 시간선에서 몇 번이나 잡았던 손과는 다르게, 이 손은 확실했다. 현재의 손이었다.

"전시회, 함께 봐도 돼?"

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그림은 검은색과 파란색으로 가득했다. 추상적이었지만, 준호는 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건 아빠가 사라진 날이에요."

솔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아빠가 없던 5년 동안... 저는 매달 같은 그림을 그렸어요. 항상 같은 날. 아빠가 올 것 같은 그 날."

준호는 그림을 봤다. 정말로, 그 그림들은 모두 같은 패턴이었다. 다른 색깔, 다른 형태이지만, 중심에는 항상 같은 감정이 있었다. 기다림. 그리고 희망.

"아, 이건 언제 그렸어?"

준호가 한 그림을 가리켰다. 2015년 4월 25일. 자신이 처음 회귀했던 날이었다.

솔이가 멈췄다.

"어? 아빠가 어떻게 날짜를 아는데요?"

"미술 날짜가 적혀 있잖아."

거짓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거짓도 필요했다. 과거의 모든 시간선을 알고 있다는 것을 딸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는 미쳐 보일 것이었다. 현재 속에서 준호는 단순한 아버지여야 했다. 딸의 그림을 보며 감동하는 아버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 이 그림은요..."

솔이가 다음 그림을 가리켰다. 밝은 주황색으로 채워진 그림이었다. 중앙에는 두 손이 맞닿아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을 상상하며 그렸어요. 2020년 7월 12일. 그 날 아빠가 깨어났다고 연락받았거든요."

2020년 7월 12일. 준호가 마지막으로 회귀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솔이가 정확히 알고 있었구나."

"네... 그 날 전시회 초대 메시지 보냈어요. 아빠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준호는 안다. 그 떨림이 무엇인지. 그것은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서 만나는 순간의 감정이었다.

"미안해."

준호가 말했다.

"아니에요! 아빠, 제발... 미안해하지 말아 줘요. 제가 아빠가 깨어났을 때 만나러 가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고..."

"미안한 건 내 차례야. 그런데 솔이, 이제부터는 미안해하지 말고 함께 있자. 아빠가 여기 있으니까."

준호는 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너의 그림, 정말 아름다워. 아빠가 자랑스러워."

솔이의 얼굴이 변했다. 그 얼굴에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5년 동안, 여러 시간선을 거쳐서도 본 적 없던 미소였다. 이 미소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 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요?"

"응, 정말이야."

전시회장의 다른 그림들도 이어졌다. 각각의 그림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준호가 회귀했던 날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준호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로서 딸의 작품을 봤다. 그리고 감동했다.

마지막 그림에 도달했을 때, 전시회장의 문이 열렸다. 첫 번째 관객이 들어왔다.

그것은 지영이었다.

"어, 이 분..."

지영이는 잠시 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아, 환자분이신가요? 아니, 혹시... 작가분의?"

"제 아버지예요."

솔이가 대답했다.

지영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 그렇군요. 정말 멋진 전시회네요. 이 그림들, 정말 마음이 가네요."

준호와 지영이는 눈을 마주쳤다. 지영이는 준호를 모르고 있었다. 5년간의 간호, 그 모든 기억이 회귀의 대가로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속에서, 그것으로 충분했다.

"함께 봐도 될까요?"

준호가 물었다.

"네, 물론이죠."

세 사람은 전시회장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지영이는 각 그림을 자세히 봤다. 그리고 때때로 감탄했다. 솔이는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준호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재 속에서의 목소리를.

전시회장을 나올 때, 지영이가 준호에게 말했다.

"정말 좋은 딸분이 계시네요. 그리고... 이 그림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어요. 정말 사랑스럽네요."

"네, 정말 그래요."

준호가 대답했다.

지영이가 떠난 후, 준호와 솔이는 전시회장 밖으로 나왔다. 강남의 저녁 거리는 여전히 바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었다. 준호도 이제 그들 중 하나였다. 더 이상 시간을 거슬러가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아빠, 전시회 어땠어요?"

"정말 좋았어. 솔이의 마음이 보였어."

"그렇...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들은 갤러리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따뜻했다. 준호는 아메리카노를, 솔이는 초콜릿을 마셨다. 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현재 속에서의 침묵은 그렇게 좋은 것이었다.

"아빠, 혹시... 앞으로도 전시회에 와 줄 거예요?"

솔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응, 매번 갈 거야."

"정말요?"

"정말이야. 이제부터는 아빠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약속할게."

솔이의 눈빛이 변했다. 그 불안감이 조금씩 걷혀나가고 있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작되고 있었다.

---

밤 11시 50분, 준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중환자실의 침대는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퇴원 수속이 남아 있었다.

밤 11시 59분.

준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것이 마지막 회귀인지 아닌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자정이 되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준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회귀 능력은 끝났다.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현재에 영구적으로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불완전한 현재 속에서, 솔이와 함께 작은 순간들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충분했다.

병실 문이 열렸다. 민준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

"뇌파가 완전히 정상화됐네요. 정말 기적 같은 회복입니다. 내일 퇴원 허가를 내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의심이 없었다. 이상한 신호를 찾으려던 노력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의학의 영역이 아니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준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손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회귀 능력이 발동될 때마다 나타나던 그 미세한 진전도 사라져 있었다.

민준이 나간 후, 중환자실은 조용해졌다. 야간 근무의 간호사들이 복도를 돌아다니는 소리만 들렸다.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지영이 야간 점검을 하러 들어왔다. 그녀는 준호를 보고 잠깐 멈춰 서 있었다.

"어, 당신 환자분?"

지영이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처럼 깊은 친숙함이 없었다. 현재의 그녀는 준호를 모르는 간호사일 뿐이었다.

"네, 내일 퇴원합니다."

준호가 말했다.

지영이가 미소 지었다. 그것은 프로페셔널한 미소였다. 하지만 준호는 그 미소 속에서 앞으로 만들어질 따뜻함의 씨앗을 볼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회복 잘되셨네요."

지영이가 나갔다. 준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회귀 능력 없이, 단순히 현재 속에서 이 여인과 관계를 만들어가야 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것이 더 진실된 것이라고 준호는 이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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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준호는 퇴원 수속을 마쳤다. 5년 동안 입원해 있던 병원을 나가는 길이었다. 입구에서 솔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딸의 얼굴에는 아직도 조심스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퇴원 축하해요, 아빠."

솔이가 말했다.

"고마워, 우리 딸."

준호가 솔이의 손을 잡았다. 현재 속에서의 손잡음이었다. 회귀 시간선에서 만들었던 완벽한 화해가 아닌, 불완전하지만 계속되는 만남이었다.

"아빠, 혹시... 앞으로도 계속 있어 줄 거예요?"

솔이가 물었다. 이전에 카페에서 했던 질문과 비슷하지만, 이번엔 목소리가 더 단단했다.

"응,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약속할게."

준호가 말했다. 이번 약속은 회귀 능력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 단순히 현재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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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후.

준호는 카페에서 솔이와 마주 앉았다. 딸은 새로운 전시회 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이제 거의 불안감이 없었다.

"그 다음엔 갤러리를 열고 싶어요. 제 그림들을 계속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요."

"정말이야?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이야."

준호가 말했다.

"아빠가 도와줄 거예요?"

"물론이지. 아빠가 함께할 거야."

그들은 계획을 세웠다. 완벽한 계획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속에서 함께 만드는 계획이었다.

또 다른 날, 준호는 지영이와 병원 근처 공원을 걸었다. 지영이는 이제 준호를 간호하는 간호사가 아니었다. 단순히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 정말 신기한 사람이에요."

지영이가 말했다.

"왜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현재를 살고 있던 사람처럼 보여요."

준호는 웃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오래전부터 현재를 살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을 뿐이었다.

"그냥... 현재가 좋아서 그런 것 같아요."

준호가 말했다.

지영이가 준호의 손을 잡았다. 현재 속에서의 손잡음이었다.

한 달 후, 준호는 재훈을 만났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옛 친구였다. 재훈의 얼굴에는 과거의 오만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준호, 정말 오래간만이야. 깨어났다고 들었어. 다행이야."

재훈이 말했다.

"고마워. 너는 어떻게 지내?"

"그럭저럭이지. 너처럼 극적인 일은 없었어."

그들은 카페에 앉았다. 준호는 재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과거의 경쟁심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현재 속에서 재훈도 변하고 있었다.

"솔이가 전시회를 한다고 들었어. 정말 자랑스럽겠네."

재훈이 말했다.

"응, 정말 자랑스러워."

준호가 대답했다.

"나도 가봐도 돼?"

"물론이지. 함께 가자."

그들은 웃었다. 과거의 시간선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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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강남역 근처의 작은 갤러리가 새로 개관했다. 간판에는 "한솔이 미술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개관식이 한창이었다. 흰 벽면에 걸린 그림들 앞으로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여 다니고 있었다.

준호는 갤러리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의 옆에는 솔이가 있었다. 딸은 이제 자신의 전시회를 설명하는 예술가였다. 그 옆에는 지영이가 있었다. 지영이는 더 이상 간호사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었다. 현재 속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정말 멋진 전시회네요."

손님이 준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제 딸이 그린 거라 더 자랑스럽습니다."

준호가 답했다.

전시회장 중앙에는 새로운 그림이 걸려 있었다. 큰 캔버스 위에 세 사람이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 딸,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여인. 그림의 제목은 간단했다.

"아버지가 마침내 돌아온 날"

준호는 그 그림을 바라봤다. 과거의 모든 시간선 속에서 그렸던 그림이 아닌, 현재 속에서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회귀 능력 없이, 단순히 아버지의 존재만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솔이가 매달 그렸던 그림들, 그 모든 시간선의 그림들이 현재에서 완성되었다.

"아빠, 어때요?"

솔이가 준호의 팔을 잡았다. 그 손의 온기는 5년간 만나지 못했던 딸의 손이 아니었다. 현재 속에서 매일 만나는 딸의 손이었다.

"정말 아름다워. 우리 솔이, 정말 자랑스러워."

준호가 말했다. 이 말은 회귀 시간선에서 했던 말이 아니었다. 현재에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지영이가 준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이 미소는 준호를 돌봐온 5년간의 간호사로서의 미소가 아니었다. 현재 속에서 함께 만든 추억들로 인한 미소였다.

"정말 멋진 그림이네요."

지영이가 말했다.

"우리 지영이가 옆에 있어서 가능했어."

솔이가 웃으며 말했다. 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거리감이 없었다. 현재 속에서 천천히 만들어진 신뢰가 담겨 있었다.

전시회장 한쪽 벽면에는 또 다른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것들은 솔이가 매달 그렸던 그림들이었다. 2010년 5월부터 시작된 모든 그림들이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회귀 시간선에서 그려진 그림들, 그리고 현재 속에서 새로 그린 그림들이 함께였다.

"이 그림들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 느껴져요."

한 손님이 말했다.

"네, 그래요. 아버지를 기다리던 시간,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온 후의 시간이 모두 담겨 있어요."

솔이가 대답했다. 딸의 설명 속에는 과거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없었다. 단순히 그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목소리였다.

준호는 갤러리의 구석에 앉아 있던 재훈을 보았다. 그는 한 달 전 우연히 만난 옛 친구였다. 재훈의 얼굴에는 과거의 오만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그림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민준 의사도 와 있었다. 그는 준호의 회복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 전시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의료적 관심보다는 순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전시회장에 남은 사람들은 준호, 솔이, 지영이,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뿐이었다. 준호는 갤러리의 불을 하나씩 끄기 시작했다.

"아빠, 내일도 와 줄 거죠?"

솔이가 물었다.

"응, 매일 올 거야."

준호가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이제부터는 매일 함께할 거야."

준호가 말했다. 이 약속은 회귀 능력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 단순히 현재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소중했다.

마지막 불을 끈 준호는 갤러리 입구에 섰다. 서울의 밤거리가 보였다. 5년 동안 보지 못했던 거리였고, 회귀 시간선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었던 거리였다. 현재 속에서의 거리였다.

"아빠, 뭘 봐요?"

솔이가 물었다.

"그냥... 현재를 봐. 우리의 현재를."

준호가 말했다.

지영이가 준호의 손을 잡았다. 현재 속에서의 손잡음이었다. 이전 시간선들에서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의 손잡음이었다.

세 사람은 갤러리를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은 밤의 거리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더 이상 시간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현재 속에서의 이 순간이 충분했다.

불완전하지만 따뜻한, 그 순간으로.

그리고 내일도 함께할 것이다. 회귀 능력 없이, 단순히 현재 속에서.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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