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흰 달이 중천이다. 정보 관아의 서고 불빛이 유일하게 밤을 가르고 있을 무렵, 나는 전생의 기억 속 한 장면을 되짚고 있었다.
황제의 개혁 정책 담당자들이 회의실에서 침묵하던 모습. 그들의 눈빛이 흔들렸던 이유. 정책 실행이 지연되기 시작한 원인.
셀레나가 이미 그들을 손에 넣었다.
손가락을 펼쳤다. 여전히 창백했다. 기억을 꺼낼 때마다 손가락의 온기는 조금씩 사라졌다. 처음엔 손끝에서만 차가움이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손바닥 절반까지 얼음처럼 식어 있었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천천히 죽어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멈출 수 없었다.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대가는 감수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황제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 그 감정 앞에서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가고 있었다.
"카이나."
목소리와 함께 서고 문이 열렸다. 카이였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걱정이 함께 떠 있었다.
"황제께서 부르신다. 이번엔 긴급이다."
나는 펼쳤던 손가락을 천천히 주먹으로 쥐었다. 창백한 손가락들이 사라졌다.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슨 일인가?"
"정책 담당자들이 잇달아 사직 청원을 내렸다. 신분제 철폐 정책, 조세 개혁, 노예 해방 정책. 모두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본 그대로다. 셀레나가 그들을 회유했을 것이다. 금전으로, 지위로, 혹은 협박으로.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같은 시간에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정책이 너무 급진적입니다. 우려가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재검토해야 합니다.'
"황제께선?"
"분노하신다. 아니, 혼란스러워하신다. 이렇게 동시에 사직을 내릴 리 없다고. 뭔가 있다고 느끼신다."
카이가 내 눈을 마주쳤다.
"황제께선 당신을 부르고 싶어하신다. 모두가 등을 돌릴 때, 당신만이 이 상황을 읽을 수 있다고 믿으신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황제를 돕는 것이 맞는지, 조종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황제가 나를 신뢰하는 것이 정말 신뢰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의존인지도.
하지만 이 순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자."
황궁의 밤은 낮보다 더 위험했다. 그림자가 더 많았고, 침묵이 더 무거웠기 때문이다. 테렌이 나를 맞이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다.
"참모께서 오셨군요."
'참모'라는 단어에는 경의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조종자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황제께서 기다리신다."
황제의 방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황제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표정을 마주했다. 그것은 분노도, 혼란도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대는 알 것이다. 왜 그들이 모두 동시에 사직했는가."
황제 레인은 책상 위의 서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회유당했습니다."
나는 아무런 꾸밈 없이 답했다. 증거가 필요 없다. 황제는 이미 알고 있다. 단지 확인이 필요할 뿐이다.
"누구에 의해?"
"왕비 폐하입니다."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왕비를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정략결혼이지만, 그래도 같은 황실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생각한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전생에서 나라를 멸망시킨 것도 그 왕비였다.
"그대는 어떻게 확신하는가?"
황제가 내게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다른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대는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있는가. 그대 없이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나는 침묵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당자들을 직접 만나봐야 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렌과 함께 가거라. 그리고 그대의 판단을 믿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손가락이 또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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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을수록 황궁의 거리는 더 조용했다. 나와 테렌은 첫 번째 담당자인 에릭의 관저로 향했다.
에릭은 신분제 철폐 정책의 핵심 담당자였다. 전생에서 그는 황제의 개혁을 가장 진심으로 지지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사직을 낼 리 없다. 회유당했다는 뜻이다.
관저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에릭은 나를 본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참모께서... 이 시간에..."
"왜 사직하셨습니까?"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돌려 말할 시간이 없었다.
에릭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나를 보다가 테렌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정책이 너무 급진적입니다. 우려가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재검토해야 합니다."
정확히 그 말이었다. 전생과 같은 단어, 같은 어조. 이것은 회유당한 자들의 통일된 대사였다.
"누가 그렇게 말하도록 가르쳤습니까?"
에릭의 손이 떨렸다.
"나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거짓이었다. 그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신의 딸이 몇 살인지 아십니까?"
에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은 이미 받았을 것입니다. 편지나 그림을 그렸을 법한 종이. 그 옆에는 칼이 있었을 것입니다."
"참모! 더 이상..."
테렌이 나를 제지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당신의 딸을 그릴 것입니다. 정책 실행이 계속되면. 당신의 딸을 그림처럼 조각낼 것입니다. 그렇게 협박했을 것입니다."
에릭이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 나는... 딸을 지키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에릭의 눈을 마주봤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는 그를 동정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내 안에는 차가운 계산만 남아 있었다. 어떻게 그를 설득할 것인가. 어떻게 그를 황제 편으로 돌릴 것인가. 어떻게 그를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
"당신을 보호하겠습니다. 당신의 딸도. 그 대신 정책을 계속 진행하십시오."
"그것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에릭이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절망과 희망이 함께 떠 있었다.
"황제의 이름으로 약속하겠습니다."
나는 황제의 이름을 사용했다. 내 이름이 아니라. 하지만 내가 그 약속을 지킬 것이었다. 황제가 아니라 나.
에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사직을 철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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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담당자는 황실 회계를 담당하는 드노반이었다. 그는 에릭과 달랐다.
"왕비 폐하께선 정책이 중단될 경우, 나에게 자작 작위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평민입니다. 자작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드노반은 정직했다. 그는 거짓을 지을 수 없었다. 아니면 지을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의 진심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자작 작위보다 더 큰 것을 드리겠습니다."
"뭔데요?"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드노반은 내 말을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했다. 나는 그에게 두 가지 선택을 제시했다. 지금 탐욕을 취하고 나중에 죽거나, 지금 참고 나중에 살거나.
그는 정책 진행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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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담당자는 이미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결정을 내린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미셀. 그는 에릭도 드노반도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셀레나의 편이었다.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하십니까?"
미셀이 물었다. 그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말입니까? 아니면 황제를 조종하기 위해서입니까?"
내 손가락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 질문은 나 자신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정책을 진행하지 않으면, 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신분 갈등으로 내전이 일어나고, 경제는 붕괴되고, 결국 외세의 침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가족도 그 속에서 죽을 것입니다. 왕비께선 당신을 협박했지만,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미셀의 표정이 변했다.
"당신은 나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당신... 미래를 아십니까?"
나는 침묵했다. 침묵이 가장 명확한 대답이었다.
미셀의 눈빛이 공포로 물들었다.
"정책을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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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방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손가락은 창백했고, 목소리는 무감정했으며,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세 명을 설득했다. 아니, 조종했다. 협박했다. 진실을 무기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것이 효과적이었다.
"정책 담당자들은 모두 사직을 철회할 것입니다."
나는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안도감 뒤에는 다른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감정이었다.
의존.
"그대 없이 어떻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황제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황제는 나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책임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가 내게 물었다.
"당신이 정말 나를 돕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인가?"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내가 황제에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 그것이 황제의 입에서 나왔다.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황제의 의심이 내 모든 선택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마주해야 할 진실이었다. 그 진실 앞에서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의심에 응하겠다는 선택.
창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날아왔다.
황제의 창이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이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테렌이 황제를 밀어냈다. 화살이 황제가 서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암살자다!"
테렌이 외쳤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손가락은 여전히 창백했고, 내 마음은 여전히 차가웠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감정이 사라져 반응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더 깊은 곳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황제의 의심에 대한 응답. 내가 조종자인지 보호자인지 증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겠다는 거부.
황제가 나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이 라벨을 움직였다.
왕비는 황제의 의심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황제에게서 멀어질 순간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금이었다.
창밖에서 또 다른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엔 나를 향한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