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의실의 증거
회의실의 공기는 자명종처럼 팽팽했다.
"폐하께서 추진하시는 신분제 철폐 정책은 백성들의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왕비 셀레나의 목소리는 꿀처럼 부드러웠다. 황제 레인의 우측에 앉은 그녀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키며 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정보 관아 참모로서 황제의 좌측 끝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모든 동작이 사전에 준비된 무대 연기라는 것을 안다.
전생에서 이 장면을 본 것이다.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책상 아래, 나의 손가락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을 꺼내는 대가였다. 어제 밤새 정리한 왕비의 비밀 서신들을 떠올리는 순간, 손끝부터 감각이 사라졌다. 나는 손을 펼쳤다 다시 주먹을 쥐었다. 반복했다. 마치 생명을 확인하듯.
"신분제는 나라의 기틀입니다. 갑자기 그것을 무너뜨린다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백성의 안정이라면, 점진적인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셀레나는 손가락을 세웠다. 그 손가락이 황제를 향할 때마다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녀는 정말 능숙했다. 반박이 아닌 '걱정'으로 포장한 반대, 절대 명령이 아닌 '제안'의 형태로 제시된 지시. 황제는 자신이 설득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것이 조종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도.
목이 건조해졌다. 침을 삼켜도 목은 더 말라갔다. 마치 누군가가 내 안의 모든 수분을 빨아내는 것처럼.
"그렇다면 카이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황제의 목소리가 나를 건졌다. 회의실의 모든 눈이 나에게 쏠렸다. 테렌의 시선은 칼처럼 예리했다. 그는 나를 재단하고 있었다. 왕비는 웃음이 묻어나지 않도록 입가를 조정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왕비께서 말씀하신 점진적 개혁은 타당합니다. 다만, 그 '점진성'이 어디까지인지가 중요합니다."
"뜻이 무엇인가?"
황제가 기울인 몸을 더 기울였다. 나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의존의 신호였다.
"전하, 혹시 이 문서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펼쳤다. 전생에서 왕비가 황족 원로회와 주고받은 비밀 서신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과거 장면을 재현했다. 그 편지가 쓰인 방, 셀레나의 손글씨, 봉인된 왁스의 색깔까지. 모든 것을 기억 속에서 끌어내어 현실로 옮겨 담았다.
글씨까지 동일하게 재구성했다.
셀레나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이것은... 어디서?"
"정보 관아의 자료입니다."
거짓이었다. 이것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기억은 현실이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계획이 실제로 진행 중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신분제 철폐 정책이 시행되는 지역에서 의도적으로 소동을 일으킬 계획입니다. 귀족과 평민의 충돌을 유도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신분제 철폐 정책이 혼란을 초래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주도한 개혁은 실패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내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기계가 정보를 출력하는 것처럼.
"무슨 소리를 하는가!"
황족 원로 루시안이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화염으로 타올랐다.
"평민 출신 여인이 황족을 모욕하다니! 폐하, 이것이 신뢰할 수 있는 참모의 말인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오히려 이 여인이 황제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것 아닌가요?"
테렌이 손을 들었다. 황제를 보호하려는 제스처였다.
"증거가 있는가?"
황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는 루시안을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 묻는 것은 나에게였다.
"3일 후입니다. 신분제 철폐 정책 시행 지역인 남부 도시 카르벨에서 의도적인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방법으로 그것을 미리 감지하고 진압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진범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자백할 것입니다."
나는 황제를 바라봤다.
"전하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전하께 사실만 제시합니다. 판단은 전하의 것입니다."
황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나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면서도, 동시에 무언가를 포기하려 했다. 신분제 철폐 정책. 그의 꿈. 왕비의 의견 앞에서 결국 물러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심장이 무감각해졌다.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 심장이 돌로 변하는 것처럼.
내가 황제를 설득했을 때, 그는 내 말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고, 황제는 나를 더욱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도움인가, 아니면 조종인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판단할 능력을 이미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회의실의 공기는 얼어붙었다. 테렌은 여전히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셀레나는 얼굴에 미소를 띄웠지만, 눈은 죽어 있었다.
"카르벨의 행정관에게 전령을 보내라. 그리고..."
황제가 나를 바라봤다.
"카이나, 그대가 직접 현장에 가 주겠는가?"
"명령하신다면, 가겠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신뢰받는 참모의 자세였다. 감정 없는 복종의 모습이었다.
"가서 그 음모를 부숴다오. 그리고..."
황제가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받아 일어섰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나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그대를 믿는다."
황제의 눈이 나를 포착했다. 그 눈빛 속에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신뢰? 의존?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하,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합니다."
황제의 손이 멈췄다.
"저는 전하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하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정책이 성공한다 해도, 언제든 다시 음모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단지 이번 위기를 막을 뿐, 앞으로의 모든 위기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대는... 나를 경고하는가?"
"네. 저는 전하께 경고합니다. 저를 너무 신뢰하지 마십시오. 신뢰는 맹목이 되고, 맹목은 조종을 부릅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테렌의 시선이 더욱 예리해졌다. 그는 이제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원하는 바였다.
나 자신도 내 감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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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벨로 가는 길은 3일이었다.
나는 정보 관아의 군사 담당관 카이의와 함께 말을 탔다. 테렌은 황제의 호위를 위해 궁에 남아 있었지만, 그의 부하 둘이 우리를 따랐다. 신뢰도 감시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황실의 방식이었다.
"정말 소동이 일어날까?"
카이의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없었다. 카이나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증명된 예측을 따르는 것이었다.
"일어난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어떻게 알아?"
"안다."
이것이 나의 모든 설명이었다. 카이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만, 나를 신뢰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신뢰는 오직 결과에 기반했기 때문이었다.
카르벨에 도착한 것은 3일째 아침이었다.
도시는 평화로웠다. 신분제 철폐 정책이 시행되려는 지역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귀족의 저택이 있는 북쪽 구역과 평민의 거주지인 남쪽 구역이 명확히 나뉘어 있었지만, 아직 충돌의 조짐은 없었다.
나는 행정관 저택에 도착했다.
"카이나 참모께서 오셨군요."
행정관은 신경질적인 인물이었다.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눈은 자꾸만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엇이 두려우신가요?"
"신분제 철폐 정책이 시행되는 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귀족들이 계속 불평을 하고, 평민들은 계속 소요를 일으킬 것 같고..."
"그것을 막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책상에 앉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왔습니까?"
행정관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귀족 측에서는 '정책에 반대하는 평민들을 자극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평민 측에서는 '귀족들을 자극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양쪽을 모두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왕비였다. 셀레나는 양쪽 진영에 모두 손을 뻗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충돌을 일으키려 한 것이었다.
내 손가락이 또 차가워졌다. 행정관의 말을 들으며 전생의 기억을 더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팔까지 얼어붙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문질렀다.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이 정책 시행일입니다. 정오에 공식 선포식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카이의를 바라봤다.
"북쪽 귀족 거주지에 군대를 배치하세요. 남쪽 평민 거주지에도 군대를 배치하세요. 하지만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그렇게 하면 소동이 일어났을 때 즉시 진압할 수 있겠군요."
"네."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 끝이 여전히 창백했다.
나는 광장 한구석에 서서 기다렸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정장을 입고 당당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평민들은 낡은 옷을 입고 불안한 눈빛으로 섰다. 두 진영 사이의 공기는 폭발 직전의 화약처럼 팽팽했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누가 먼저 움직일 것인가. 누가 신호를 받았는가. 내 기억은 정확했지만, 현실은 항상 예측을 벗어났다.
행정관이 선포문을 읽기 시작했다.
"신분제 철폐 정책에 따라, 모든 백성은 동등한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그 순간이었다.
북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귀족을 공격했다. 남쪽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평민을 공격했다. 소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내 심장은 뛰지 않았다. 내 손은 떨리지 않았다. 나는 신호를 보냈다.
황제의 군대가 나타났다.
테렌의 부하들이 지휘하는 군대는 두 진영 사이를 가로막았다. 폭력은 즉시 진압되었고, 선동자들은 포박되었다.
나는 포박된 선동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라벨의 부하들이었다. 왕비의 비밀 조직원들이었다. 내 기억이 맞았다. 현실이 내 기억을 따랐다.
광장은 진정되었다. 행정관은 다시 선포문을 읽었다.
"신분제 철폐 정책에 따라, 모든 백성은 동등한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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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황제를 만났다.
그는 정보 관아 입구에 서 있었다. 테렌이 곁에 있었지만, 황제는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벨의 보고를 들었다. 그대의 예측이 정확했다. 선동자들은 모두 왕비의 조직원이었다. 그들의 자백에 따르면, 셀레나는 처음부터 신분제 철폐 정책을 실패로 만들려고 했다."
황제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의 눈에는 무언가가 깨어지고 있었다.
"그대 없이 나는 어떻게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을까?"
황제의 목소리는 약했다. 의존의 음성이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전하께서는 이미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길을 제시할 뿐입니다."
이것도 거짓이었다. 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이끌고 있었다. 마치 왕비가 했던 것처럼. 그런데 내가 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더 이상 판단할 수 없었다. 기억을 사용할 때마다 내 감정은 조금씩 죽어갔다.
"그렇다면 계속 나의 길을 밝혀주겠는가?"
"명령하신다면."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그대를 신뢰한다."
황제의 손이 나의 머리에 내려왔다. 그 손은 따뜻했고, 나의 머리는 차가웠다.
테렌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예리해졌다. 그는 이제 확신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황제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옳은 의심이었다.
황제는 나를 풀어 보냈다. 나는 정보 관아로 돌아갔다.
정보 관아의 복도에서 테렌이 나를 가로막았다.
"카이나."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황제께서 당신을 신뢰하신다. 하지만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것이 맞습니다. 당신은 의심해야 합니다."
"당신이 황제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말인가?"
"저는 황제를 돕고 있습니다. 그것이 조종인지 도움인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입니다."
테렌의 눈이 차가워졌다.
"내일 왕비 심문에서 당신이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한다면, 나는 당신을 직접 고발하겠다. 황제께 당신의 진정한 의도를 밝혀드리겠다."
"그렇게 하십시오."
나는 그의 위협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전에 왕비의 음모가 얼마나 깊은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황제는 저를 더욱 신뢰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고발은 질투로 들릴 것입니다."
테렌의 주먹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나를 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나는 테렌을 지나쳤다.
정보 관아의 밤은 깊었다.
나는 기록실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펼쳤다. 창백한 손가락.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 팔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가슴까지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 추위가 계속되면, 언제쯤 나는 완전히 감정이 없는 괴물이 될 것인가?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기록실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숨겼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라벨이었다. 왕비의 비밀 조직원. 그는 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
그는 나를 찾고 있었다.
내일 왕비 심문 전에 나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라벨의 눈이 기록실을 훑었다. 나는 선반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내 숨은 고르지 않았다. 기억을 사용한 후유증이었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호흡까지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라벨이 한 발 더 들어섰다. 그의 단검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반사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계산했다. 전생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라벨의 암살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였다.
내 판단이 흐려졌다. 기억을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이 차가운 것만이 아니었다. 내 생각도 느려지고 있었다. 라벨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라벨이 선반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