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포겟

지하 2층의 조용한 방에서 고객의 눈을 마주쳤을 때, 나는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정말 지우고 싶으세요?"

유미라라고 소개한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데, 눈가에 자주색 다크써클이 진하게 팬 상태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비틀며 말했다.

"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 기억만 없어도 숨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포겟의 상담실은 심리상담소로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정교한 공간이다. 회색 톤의 벽지, 간접조명, 낮고 푹신한 소파—모든 것이 고객의 불안감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었다. 창문은 없다. 강남역 인근의 지하 오피스텔 2층에 위치한 포겟은 겉으로는 조용한 심리상담소지만, 실제로는 서울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거래소다.

"그럼 시작할게요. 편하게 누우세요."

유미라는 소파에 누웠다. 천장의 조명이 부드럽게 어두워졌다. 나는 그녀의 손목에 센서를 부착했다. 맥박, 뇌파, 신경 전위를 감지하는 기기들이었다. 포겟의 기술은 겉보기에는 심플하지만, 내부는 최첨단이다. 나는 고객의 기억을 '읽는' 게 아니다. 그들의 신경을 자극해 특정 기억으로 이동하게 하고, 그 기억의 신경 회로를 추적한 뒤 완벽하게 끊어버리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나는 매일 해낸다.

"무엇을 지우고 싶으신가요?"

"직장 상사의 손이 내 어깨를 만지던 기억. 그리고... 그 후의 기억들. 모두요."

유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순간, 세상이 변했다.

그 장면들이 내 뇌에 흘러들었다. 야근하던 사무실. 사람이 없는 시간. 뒤에서 감싼 팔. 거부했지만 막혔다. 목소리. 숨. 공포.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것들—밤마다 반복되는 악몽, 직장 가는 길의 두려움, 누군가에게 만져지는 것에 대한 공포.

나는 그 기억을 따라갔다. 신경의 미로 속을 헤매며 그것이 정확히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 찾아냈다. 뇌의 해마, 편도체, 전전두엽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 기억의 중심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왼손 검지가 공중을 스쳤다.

진짜 움직임은 신경 자극이었다. 뮤즈라고 부르는 능력이 발동했다. 그 기억의 신경 회로가 끊어졌다.

유미라의 얼굴이 변했다. 눈썹이 펴졌다. 입가가 올라갔다.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중독된다.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이 바로 내 존재 이유라고 나는 믿었다.

"끝났어요."

유미라는 눈을 떴다. 천천히 일어났고,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울음이 터졌다. 하지만 슬픔의 울음이 아니었다. 해방의 울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약물도, 최면도, 치료도 불가능한 것을 나는 해낸다. 타인의 고통을 근본에서 제거한다. 그것이 나의 기술이고, 나의 자부심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했다.

머리가 띵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나는 의자에 손을 짚었다. 이건 매번 일어나는 일이었다. 기억을 지울 때마다 나는 대가를 치렀다. 삭제된 그것과 정확히 같은 크기의 내 기억이 사라진다.

이번에는 무엇이 흐릿해졌을까?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 톤, 그 음정, 그 감정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처럼 색이 바래는 것처럼. 동시에 눈앞이 어두워졌고,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음이 울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박준호?"

유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괜찮습니다. 정상입니다."

나는 일어섰다. 얼굴에 미소를 붙였다. 이건 고객이 알면 안 되는 부작용이다. 나는 항상 평온하고 통제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고객의 신뢰를 만든다.

유미라는 나에게 현금 봉투를 건넸다. 포겟은 카드 거래를 받지 않는다. 모든 것이 현금이고, 모든 것이 비공식이다. 그것이 합법적 회색지대에 머물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다음에 또 필요하면 찾아올 수 있나요?"

"물론이죠. 언제든 문을 열어두겠습니다."

유미라는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나는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포겟의 입구는 겉으로 보면 그냥 어두운 복도일 뿐이었다. 간판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알고 있는 사람만 찾아온다.

나는 다시 상담실로 들어갔다. 센서들을 정리하고, 기록을 저장했다. 모든 기억 데이터는 암호화되어 별도의 서버에 보관된다. 법적으로는 의료기록이고, 실제로는 증거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오후 2시 반, 포겟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다른 고객이었다. 서른대 초반의 남성. 그는 불면증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꿈을 지우고 싶다고. 나는 그를 상담실로 안내했고, 같은 절차를 반복했다. 그의 기억 속에는 반복되는 악몽이 있었다. 어두운 골목. 비명. 누군가를 보는 것. 나는 그것을 지워줬다.

또 다른 기억이 내 뇌에서 사라졌다. 이번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명확하지 않은 윤곽. 희미해지는 미소. 동시에 손가락 끝이 저렸다. 마치 누군가 내 신경을 건드리는 듯한 통증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손을 주무르며 증상을 무시했다.

오후 3시, 나는 강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포겟 근처의 한 카페였다. 이곳은 내가 자주 오는 장소다. 고객을 만나는 중립지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카페의 주인은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 강남이라는 동네가 그렇다. 누구나 누군가의 비밀을 가지고 있고, 그 비밀을 존중하는 것이 예의다.

내 휴대폰이 울렸다. 미등록 번호였다.

"네?"

"박준호 씨?"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차분했다.

"그렇습니다만?"

"서울 강남경찰서 형사 이준영입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커피잔을 내려놨다. 경찰이라는 단어가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게 멈췄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데요?"

"지금 말하기보다는 직접 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포겟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포겟이 뭐죠?"

내가 물었다. 모르는 척했다. 처음 들은 척했다.

"당신이 운영하는 곳 아닙니까? 강남구 압구정동 오피스텔 지하 2층."

침묵이 흘렀다. 형사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특별히 어려운 건 아니니까, 편한 시간에 만나면 됩니다. 다만 이 일은 좀 중요하거든요."

형사의 목소리에는 협박이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알겠습니다. 1시간 뒤에 포겟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가 끝났다.

나는 다시 커피를 집었다. 손이 떨렸다. 경찰이 포겟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직접 찾아온다는 것. 이건 단순한 조사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빠르게 카페를 나갔다.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후의 강남은 여전히 바쁘고 시끄러웠다. 클럽들, 미술관들, 주얼리 숍들이 즐비한 거리. 이 동네의 모든 것은 비밀을 감춘다. 고급스러움 뒤에 숨겨진 거래들. 나도 그 일부였다.

포겟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확인했다. 상담실이 깨끗한가. 기록들이 안전한가. 고객 명부가 보이지 않는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자꾸 떨렸다.

오후 4시 정각, 문이 두드려졌다.

나는 문을 열었다. 남자가 서 있었다. 서른다섯 살 정도. 회색 코트, 차분한 표정. 그의 옆에는 한 명의 경찰관이 더 있었다.

"박준호 씨입니까?"

형사가 물었다.

"네."

나는 대답했다.

형사가 폴더를 들어 올렸다. 그 안에는 수십 장의 사진과 기록이 들어 있어 보였다.

"연쇄 실종 사건, 아시죠?"

"뉴스에서 봤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좀 물어봐야 할 게 있습니다. 특히... 당신이 지워준 고객들의 기억과 관련해서요."

나의 심장이 정지했다.

형사가 계속했다.

"우리가 가진 목격자 진술과 당신의 데이터가 정확히 일치합니다. 같은 장면, 같은 시간, 같은 비명. 그런데 서로 다른 고객들의 기억에서 나왔어요. 고객 A는 골목에서 여성의 비명을 들었다고 했고, 고객 B는 차량 번호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고객 C는 범인의 얼굴을 봤다고 했어요. 이 세 가지가 모두 같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기억들을 모두 지워줬습니다."

폴더 속의 사진들이 보였다. 실종된 여성들의 얼굴. 그들의 이름. 그들의 나이. 그리고 그 중 일부가 내 고객이었다는 깨달음이 몸을 통과했다.

목이 건조해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박준호."

형사가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이 지워준 기억들 속에 정확히 무엇이 있었는가, 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당신이 정말 모르고 있었는가, 입니다."

나는 형사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의심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그 확신 속에는 내가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내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하지만 목은 자꾸 경련했다.

"형사님, 저는 고객의 비밀을 지키는 입장입니다. 의료인의 비밀유지 의무죠. 심리상담사로 등록되어 있으니까요."

"그 등록이 진짜 심리상담이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였는지가 문제입니다."

형사가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포겟의 상담실 내부를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숨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이쪽으로."

나는 형사를 상담실로 안내했다. 벽에는 심리학 관련 자격증들이 붙어 있었다. 모두 가짜였다. 하지만 보기에는 그럴듯했다. 책장에는 심리학 서적들이 줄지어 있었다. 내가 구매한 것들이었다. 한 권도 읽지 않았지만, 배경으로는 충분했다.

형사는 천천히 둘러봤다.

"고객들이 여기서 뭘 했나요?"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트라우마 기억 같은 것들.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 특정 기억을 재처리하거나 중화시키는..."

"중화시킨다는 게?"

형사가 눈을 좁혔다.

"기억은 감정과 묶여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트라우마가 되고 어떤 사람은 아닙니다. 감정 반응의 강도가 다르거든요. 저는 그 감정 반응을 조정하는 일을 합니다. 기억 자체를 지우는 게 아니라, 기억에 붙어 있는 감정을 분리하는 거죠."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럴듯했다. 내 목소리는 안정적이었고,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자꾸 움직이려 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자연스럽게 내려놨다.

"그렇다면 당신의 고객들이 기억한 장면들이 모두 동일하다는 건 어떻게 설명합니까?"

형사가 폴더를 펼쳤다. 데이터 출력물이 보였다. 내 고객 A의 기억 기록이었다. 그 다음은 고객 B, 고객 C의 기록들. 모두 같은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야밤의 골목.

비명.

차의 엔진음.

그리고 범인의 실루엣. 하지만 얼굴은 흐릿했다.

나는 화면을 스캔했다. 이 데이터들은... 내가 지워줬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어떻게 이걸 얻었지?

"데이터는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접근이..."

"저희가 영장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시스템 접근 권한을 얻었어요."

형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 거 아닙니까?"

내가 반박했다. 공격적으로 나가는 게 낫다. 방어만 하면 의심만 커진다.

"범죄 수사 중입니다. 다른 문제가 있으면 나중에 소송하시면 됩니다."

형사의 태도가 변했다. 이제 협상 상대가 아니라 용의자를 다루는 태도였다. 그 변화가 명확했고, 그것이 내 불안을 증폭시켰다.

"박준호. 당신이 지워준 기억들이 모두 같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다섯 명의 여성이 실종되었고, 그들 중 일부가 당신의 고객이었어요.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는 같은 장면이 반복됩니다. 이건 우연일까요?"

형사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의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아니면 당신이 의도적으로 고객들의 증거를 없애고 있는 건가요? 혹은 고객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 걸 알고도 기억을 지워준 건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목이 메었다. 침을 삼켰다.

"고객들은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지우고 싶다고. 저는 그들의 요청에 응했을 뿐입니다."

"요청만으로 충분합니까? 당신은 정말 그 기억이 삭제해야 할 것인지 확인했나요? 고객 A가 왜 그 기억을 지우고 싶었는지 물어봤나요? 그게 정말 트라우마였나요, 아니면 증거 은폐였나요?"

형사의 질문이 정확했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질문이었다. 나는 고객들의 기억을 읽었지만, 그들이 왜 그것을 지우고 싶어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하는 게 더 편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깊이 눈을 감고 있었는지. 고객들의 기억 속에 흐르는 공포,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을 나는 보았으면서도 보지 않기로 선택했다. 형사의 질문이 맞았다.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는가? 아니면 알면서 외면했는가?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객이 원했습니다. 그게 제 기준입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의 기준이 문제입니다."

형사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는 것이 더 약해 보일 것 같았다.

"한 명의 고객이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증거를 지워줬어요. 그럼 당신은 공범입니다. 법적으로 공범입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살인. 그 단어가 상담실에 떨어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저는... 그런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형사가 사진을 펼쳤다. 실종된 다섯 명의 여성들이 보였다.

"이 여성들은 지난 3년간 실종되었습니다.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고객들의 기억 데이터에는 이들이 피해를 입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섯 개의 서로 다른 기억 속에, 같은 구조의 범죄가 반복되고 있어요. 그리고 범인은..."

형사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증거를 지워줬으니까요. 당신이 증거를 없애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범인을 잡았을 겁니다."

"그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방어적으로 들렸다. 나는 그것을 깨달았고, 다시 침착함을 되찾으려 했다.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기억 삭제를 요청했습니다. 저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 것뿐입니다. 그들의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걸 지우고 싶었는지는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형사가 다시 폴더를 닫았다.

"당신은 고객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검증하지 않았어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이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면,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지워줬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다섯 명의 여성이 죽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거는 당신의 손에서 사라졌습니다."

형사의 말이 정확했다. 그리고 그게 가장 무서웠다.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손가락이 주머니 속에서 움직였다. 형사는 이미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형사님, 저는 법을 어긴 게 없습니다. 제 능력이 법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이건 조사입니다. 기소가 아니라."

형사가 상담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당신의 모든 고객 기록과 데이터를 압수합니다. 저희가 더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변호사 없이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의 선택입니다. 다만 이 수사에서 당신이 협력할수록, 당신의 입장은 나아질 겁니다."

형사가 경찰관에게 신호했다. 경찰관이 나의 컴퓨터로 다가갔다.

"잠깐, 기다려요."

내가 손을 들었다.

"뭐하는 거죠?"

"데이터 백업을 지우겠습니다. 고객의 정보 보호 차원에서."

내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자동화된 명령어들. 이미 준비된 백업 삭제 프로그램.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나는 이미 가장 위험한 데이터들을 정리해뒀다.

왜 미리 이런 프로그램을 준비했을까?

그 순간 내 손은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저질렀던 일들의 무게를 어딘가에서 느끼고 있었던 걸까? 나는 그 질문의 무게를 느꼈다. 그 안에 숨겨진 것들—내가 얼마나 오래 이 일을 해왔는지,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깊이 이 세계에 빠져 있는지. 나는 그 모든 것에 답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화면이 깜빡였다. 파일 삭제 중... 100%.

"완료됐습니다."

내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은 여전히 떨렸다.

형사는 이미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당신, 경찰이 올 거 예상하고 있었나요?"

"아니, 단지..."

"단지 뭐?"

"고객의 정보는 매우 민감합니다. 언제든 삭제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게 일반적입니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형사는 증거를 잡을 수 없었다. 컴퓨터 로그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순간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하면 손이 더 떨릴 것 같았다.

경찰관이 컴퓨터를 가져갔다. 모니터, 키보드, 본체. 포겟의 심장이 빠져나갔다.

"박준호, 추가 조사 대상입니다. 연락처 변경하거나 도망치면 안 됩니다."

형사가 나가갔다.

포겟이 조용해졌다.

나는 벽에 기대앉았다. 손이 떨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감정도 올라왔다. 불안 뒤에 숨겨진 것. 호기심. 그리고 무언가 더 어두운 것.

형사가 말했다. 고객들의 기억 속에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고. 다섯 명의 여성이 실종되었고, 그들을 해친 누군가가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고객 기록들을 떠올렸다. 고객 A, B, C, D, E. 모두 다른 시간에 왔고, 모두 다른 이유를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는 같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 살인을 봤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저질렀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포겟의 불이 꺼져 있었다. 형사들이 켜놨던 조명 외에는. 상담실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컴퓨터도 없고, 기록도 없고,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내 뇌에는 모든 것이 남아 있었다. 고객들의 기억. 그들이 본 것들. 그들이 느꼈던 공포. 그리고 그 공포 속에 숨겨진 진실.

나는 생각했다.

고객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 그들의 기억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야 한다. 경찰이 놓친 것이 뭔지. 내가 왜 그 기억들을 지워줬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내 고객 중에, 진짜 범인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휴대폰을 켰다. 고객 기록들을 찾아봤다. 이미 경찰에게 넘겨진 것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모든 것이 남아 있었다. 각 고객의 이름, 얼굴, 그들이 말했던 것들.

첫 번째 고객은 유미라였다. 성희롱 기억을 지우고 싶다고 했다. 그 뒤로는?

두 번째, 세 번째... 그들은 모두 다른 이유를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 데이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같은 밤. 같은 비명. 같은 공포.

나는 유미라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끊겼다.

"안녕하세요?"

유미라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더 조심스러운 톤이었다.

"유미라 씨, 저 박준호입니다. 포겟의."

침묵이 흘렀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이 지우고 싶었던 기억... 정말 성희롱만 있었나요?"

"왜 이런 걸 묻습니까?"

유미라의 목소리가 변했다. 경계심이 가득했다.

"경찰이 왔어요. 당신의 기억 데이터를 압수해갔습니다."

"......"

"당신이 본 게 뭐예요? 그 밤에 당신이 정말 본 게 뭐였어요?"

나는 물었다. 하지만 유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전화 너머로 들리는 것은 숨소리뿐이었다. 그리고 그 숨소리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더 이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유미라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른 고객들의 번호를 찾았다. 두 번째 고객. 세 번째 고객.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침묵. 경계. 그리고 거절.

나는 포겟의 문을 나갔다. 강남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클럽들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도시의 비밀들이 하나씩 깨어나고 있었다.

나도 이제 비밀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경찰의 용의자.

그리고 누군가의 공범.

아직 나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알아야 했다. 경찰보다 먼저.

왜냐하면 내 손으로 그들의 증거를 지워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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