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새벽 2시 10분.

카운터 옆 의자에 앉은 정석진의 손이 떨렸다. 내 손도 떨렸다. 10년 만에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이렇게 낯설 줄은 몰랐다.

"민준이가 이 동네에 있었구나."

정석진이 중얼거렸다.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침묵의 무게가 드러났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며 한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엄마는... 어디야?"

엄마. 그 단어는 내 안에 봉인된 것이었다. 절망 속에서 이 카페를 인수한 지 1년. 그 이전의 기억들은 마치 누군가 손으로 지워낸 것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내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지워낸 것이었다. 엄마가 나를 찾으러 왔을 때, 내가 거절했을 때, 그 이후를 돌아보는 것은 마치 손가락을 불에 집어넣는 것 같았다.

"...모르겠어요."

겨우 그 말만 나왔다.

정석진은 한참을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슬픔인지 안도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를 버렸지."

"아니에요."

내 목소리가 나왔다. 거짓말처럼 들렸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버린 건 내가 아니었다. 내가 버린 건 다른 누군가였다. 그리고 그 죄책감이 나를 이곳까지 몰아왔다.

정석진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이 카페 곳곳을 훑었다. 벽에 붙은 사진들, 테이블 위의 잔들, 따뜻한 조명. 마치 이 공간을 읽으려는 것처럼.

"자식들이 이 동네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어."

그가 천천히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거칠었지만, 그 안에 뭔가 다른 것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카페에서, 누군가의 손님으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을 받아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은 위로가 아니라 고백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침묵했다.

정석진이 나를 다시 봤다. 그 눈빛이 변했다. 마치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읽으려는 눈빛이었다.

"단절은 회복될 수 있어."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목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내가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던 밤들. 내가 누군가를 거절했던 그 얼굴들. 그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는 왼손으로 입을 덮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괜찮아?"

정석진이 물었다. 첫 번째 질문이었다.

"네.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문제였다. 아버지가 견딜 수 없는 진실을 더 이상 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석진은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새벽 2시의 카페는 조용했다. 밖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시골의 밤은 도시의 밤과 달랐다. 도시의 밤은 항상 누군가의 불빛으로 가득 찼지만, 여기의 밤은 진짜 밤이었다. 아무도 없는 밤.

"고마워. 여기 와서 정말 좋아."

정석진이 일어섰다. 그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아까는 절망으로 가득했던 표정이 아니었다. 여전히 슬픔이 있었지만, 그 아래 뭔가 가벼워진 것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서 작은 돌 하나를 빼낸 것처럼. 그 돌이 아주 작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조금 더 곧게 펼 수 있게 해주는 돌.

내 가슴이 철렁했다.

이게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의 무게였다. 이게 내가 매일 느꼈던 왼손의 저림의 정체였다. 누군가의 절망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순간, 그 무게가 온전히 내 손으로 이동한다는 것. 아버지의 어깨에서 내려온 돌이 이제 내 손에 있다는 것.

"민준아, 다음에 또 와도 돼?"

정석진이 문을 열며 물었다.

"예."

나는 대답했다.

정석진이 떠난 후 카페는 더 조용해졌다. 나는 한 손으로 카운터를 잡고 있었다. 반대쪽 손은 떨렸다. 왼손의 저림에 더해 오른손까지 떨리고 있었다. 골든핑거 능력의 대가. 손가락으로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마다, 그 무게가 내 손에 남는다는 것.

나는 테이블에 기대앉았다. 의자가 아닌 테이블에. 마치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걸 몸으로 표현하려는 것처럼.

카페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 얼굴은 창백했다. 눈 아래가 검었다. 도시에서 벗어나려고 시골까지 왔는데, 도시의 피로가 여전히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야근 후 새벽 5시에 거울을 봤을 때의 그 얼굴. 번아웃 직전의 얼굴.

'내가 또 무너질 수도 있겠다.'

그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손님들의 상처를 들을 때마다 내 상처도 함께 떠올랐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도, 유미라가 눈물을 흘릴 때도, 이준호가 "누군가는 내 실패를 좋아할까"라고 물었을 때도. 매번 내 것이 섞여 나왔다.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말들, 누군가에게 받은 말들, 누군가를 버린 죄책감들.

나는 일어섰다. 카운터에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 손님을 위한 게 아니었다. 나를 위한 것이었다. 새벽 2시 30분, 카페의 주인이 혼자 마실 커피.

첫 잔을 한 모금 마신 순간 문이 열렸다.

파란 옷의 할머니였다. 박할머니였다.

"여기 따뜻하네."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마치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 할머니의 손에는 낡은 사진이 들려 있었다.

"박할머니, 그 사진..."

내가 말을 꺼냈다.

"이 카페 전 주인이 날 많이 도와줬어. 정말 많이."

할머니가 사진을 내 앞에 놨다. 사진 속에는 할머니와 한 남자가 함께 웃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하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퍼즐의 조각이 거의 맞는데 딱 맞지 않는 그런 느낌. 내 기억이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내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외상성 기억상실이 아니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지워낸 것이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데요?"

내가 물었다.

"글쎄, 난 모르겠어. 넌 왜 모르는 거야?"

할머니가 내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 눈빛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그런 눈빛. 그 눈빛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다. 단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뿐.

"할머니..."

내가 다시 말을 꺼내려던 순간, 카페 문이 또 열렸다.

이번엔 파란 정장을 입은 여자였다. 낮에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뭔가 낯았다. 마치 내가 알고 있어야 하는 누군가인 것처럼.

"여기가 '온기'네."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이 나를 훑었다. 그 순간 내 왼손이 저렸다. 아니, 저린 게 아니었다. 마비됐다. 왼손의 저림이 극에 달해 마비되는 순간이었다.

"서민준 사장님?"

여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정확히 발음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름처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도시에서의 번아웃이 한 번 더 시작되는 것처럼. 이번엔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박할머니는 여자를 보더니 자리를 일어났다.

"난 가봐야겠어. 아이고, 이 시간에 깜빡했네."

할머니가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그 눈빛은 거짓이 아니었다. 순수했다. 할머니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고, 나와 이 여자가 만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할머니, 잠깐..."

내가 팔을 뻗었다.

"민준아, 넌 강할 거야. 넌 이미 충분히 강했어."

할머니가 내 손을 한 번 쥐었다. 그 손의 온기는 아버지의 손과 달랐다. 아버지의 손은 떨렸지만, 할머니의 손은 안정적이었다. 마치 나를 내려놓는 손처럼.

할머니가 나가갔다. 카페에는 나와 파란 정장의 여자만 남겨졌다.

"오셨네요."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톤이 낮았다. 비즈니스톤이 아니었다. 뭔가 더 깊은 것이 있는 목소리였다.

"누신데요?"

나는 물었다.

"김효선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여자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더 자세히 봤다.

"여기 카페를 인수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달 정도요."

내가 답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김효선이 카페 전체를 둘러봤다. 비어 있는 테이블들, 벽에 붙어 있는 사진, 카운터 위의 커피 잔들.

"손님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이 카페에 대해서."

"여기 따뜻하다고."

내가 대답했다. 그 순간 김효선의 눈이 변했다. 무언가를 확인한 눈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생각이 드네요. 이 카페, 예전에 다른 주인이 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끊었다.

김효선이 의자에 앉았다. 손님처럼. 아니, 손님보다는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누군가처럼.

"저는 이 카페를 인수하고 싶어요."

"뭐라고?"

"이 카페를 사고 싶다는 뜻이에요. 당신이 이 카페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김효선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손님들에게 하고 있는 게 뭔데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거죠."

내가 대답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당신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치유를 파는 거예요."

김효선이 일어섰다. 그리고 내 얼굴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당신은 그걸 할 때마다 무너지고 있어요."

내 가슴이 철렁했다.

"왜 이런 얘기를..."

"왜냐하면 저도 그 카페의 이전 주인을 알고 있거든요."

김효선이 말을 이었다.

"당신도 그 사람의 손님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카페를 인수하셨던 거고. 그리고 그 사람이 이 카페의 이전 주인이었을 거고. 그래서 새벽 3시에 이 카페를 찾아온 거고."

내가 일어섰다. 의자를 밀어냈다. 카페 안에 소음이 울렸다.

"진정하세요."

김효선이 손을 들었다.

"저는 적이 아니에요. 그냥... 같은 종류의 누군가일 뿐이에요."

"같은 종류?"

"네. 그 카페의 이전 주인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 아니, 정확히는..."

김효선이 말을 멈췄다.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당신처럼요."

김효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그 사람 때문에 뭐가 달라졌어요?"

내가 물었다.

"제 인생이 구원받았어요. 그리고..."

김효선이 말을 멈췄다.

"그 사람이 사라졌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안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퍼즐의 조각들이 한 번에 맞춰지려는 소리처럼. 하지만 그 그림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그림이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찾아야 해요."

김효선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아니라."

"뭐라는 거야?"

내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손님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돌봄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3시의 카페에서, 나와 이 여자 사이에는 뭔가 절망적인 것이 떠다니고 있었다.

내 두 손이 동시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왼손의 저림과 오른손의 떨림. 누군가의 상처를 받아낼 때마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 능력의 대가가 극에 달한 것이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내가 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누구예요?"

김효선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마치 내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눈빛처럼.

"당신이 찾아야 해요. 당신이 직접."

그 말을 남기고 김효선은 나가갔다. 카페 문이 닫혔다. 시계는 여전히 새벽 3시였다.

나는 테이블에 다시 기대앉았다. 이번엔 의자에 앉지 않고 테이블 위에 기대앉았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계속 표현하고 싶은 것처럼.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도시의 번아웃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손님들을 돌보면서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게 뭔가. 손님들의 상처를 듣고 위로하면서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게 뭔가.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내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 카페의 이전 주인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왜 사라졌을까.

그리고... 왜 나는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없을까.

새벽 3시 30분, 카페 '온기'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울음인지, 내 울음인지, 아니면 이 카페의 이전 주인의 울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필요했다.

도시에서 달아나온 이 시골 카페에서, 나는 처음으로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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