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미라
유미라가 문을 열고 들어선 건 오후 2시쯤이었다.
검은색 원피스에 흰 스니커즈를 신은 여자였다. 얼굴은 밝았지만 눈동자에 뭔가 흔들리는 게 있었다. 나는 카운터에서 일어섰고, 그 순간 왼손 약지와 중지가 저리기 시작했다.
"어서오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골든핑거가 깨어나는 신호였다.
유미라는 자리에 앉으면서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메뉴판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누군가가 말을 꺼내기까지 기다리는 것. 그게 이 카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일이었다.
"여기... 처음 와봤어요."
"네."
"근데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
내 왼손이 또 저렸다. 이번엔 더 강했다. 손끝이 마치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유미라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 눈빛 속에는 절망이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지 시험하려는 눈빛이었다.
"사실 저...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웃어요. 밝고 명랑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거든."
그녀가 테이블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그었다.
"근데 여기 들어서는 순간, 그 가면을 벗고 싶었어요."
"가면을?"
"네. 왜일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침묵이 그녀에게 말해줄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제가 누군가에게 판단 없이 받아질 수 있을지... 시험하려고 온 거예요. 이 카페에."
유미라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목소리였다.
"제 과거는... 깨끗하지 않아요."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더 세게 그었다.
"고등학교 때 저... 친구들이 올린 사진 때문에 전학을 갔어요. 지금도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항상 조심해요. 웃고, 밝게 굴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내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가 말하는 과거는 단순한 '깨끗하지 않음'이 아니었다. 그건 상처였다. 깊고 오래된 상처.
"사람들이 알면 실망할 만한 일들이 있어요.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처럼 살아왔어요."
그녀가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제 진짜 모습을 봐줄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을 알아도 저를 받아줄 수 있을까요?"
내 손가락의 저림이 멈췄다. 동시에 내 가슴이 철렁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그녀의 말 속에서 자신을 봤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모든 것을 잃기 전 내 모습.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받아지고 싶었던 그 간절함.
"받아질 수 있어. 여기서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위로가 아니었다. 이건 약속이었다.
"시험 통과했어."
유미라의 눈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내려오는 그 물줄기가 정말 오래되었던 것처럼 보였다. 마치 수년을 견뎌온 눈물이 한 번에 터진 것처럼.
"정말요?"
"응."
나는 그녀에게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유미라는 그걸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계속 울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종류의 울음이었다. 상처가 아닌 해방의 울음.
시간이 지났다. 유미라는 계속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로.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카운터에서 그녀를 지켜봤다. 누군가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받아준다는 것의 무게를 느끼는 그 얼굴을.
오후 4시쯤 유미라가 일어섰다.
"가야 돼요."
"네."
"여기... 좋아요. 자꾸만 올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뭔가를 깨달았다. 누군가가 내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 내가 만든 이 낡은 카페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공간이라는 것. 내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억지 미소가 아니었다. 진짜 미소였다.
유미라가 떠난 후, 카페는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카운터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심하게. 호흡이 빨라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손가락 끝이 찌릿거렸다. 이건 공황장애의 신호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누군가를 위해 소진된 감정이 남긴 자국이었다. 유미라의 상처를 받아주는 과정에서 내 상처도 함께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었고, 그녀의 외로움이 내 외로움이 되었다.
내가 받아주려고 했던 것이 실은 나 자신이었다.
왜 자꾸 울 것 같지?
손가락이 떨렸다. 그 떨림이 누군가를 부르는 신호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부르는 신호인 것 같았다.
밤이 내려앉았다.
카페의 조명만 켜져 있었다. 창밖은 시골의 어둠이었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손님들의 상처를 받아주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내 상처도 함께 올라오는 것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몰랐다.
왼손이 또 저렸다. 이번엔 누군가를 부르는 신호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호였다.
천천히 일어섰을 때, 박할머니가 말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후 3시쯤 들었던 그 목소리.
"민준아, 저 아이... 유미라 아이 말이야. 저 아이도 혼자인 것 같아."
그때는 그냥 흘려넘겼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박할머니는 어떻게 유미라가 혼자라는 걸 알았을까. 나처럼 감지한 걸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던 걸까.
박할머니가 카운터에 놓고 간 사진이 떠올랐다. 낡고 색이 바래진 사진. 그 사진 속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그걸 보지 않으려고 했다. 돌아섰다. 외면했다. 손도 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진 속에 누가 있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발걸음이 카운터로 향했다. 사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나는 손을 뻗지 못했다. 그 대신 사진을 밀어냈다. 사진이 카운터 끝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것도 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걸 본다면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박할머니가 말하려던 것이 떠올랐다.
"저 아이 말이야, 이 카페 전 주인이 날 많이 도와줬다고 했어. 근데 지금은 그 분이..."
박할머니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내가 외면했으니까. 하지만 그 미완의 문장이 자꾸 맴돌았다. 이전 주인이 박할머니를 도와줬다. 그리고 유미라도 그 사람을 알고 있다. 아니, 그 사람이 유미라를 도와줬다. 어떻게? 언제? 왜?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무릎이 흔들렸다. 카페 사무실. 낡은 책상 위에는 이전 주인이 남긴 물건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나는 3주 동안 한 번도 정리하지 않았다.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거기에는 편지가 있었다. 이전 주인이 남긴 편지. 봉투에는 이름이 써 있었다.
*'민준에게'*
내가 읽지 말아야 할 편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걸 펼쳤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자신도 돌봄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카페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받은 영혼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넌 그들을 치유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들이 널 치유하고 있다. 그걸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더 있었다.
*'그리고 민준. 내가 왜 떠났는지 알고 싶으면, 손님들을 잘 봐. 그들의 이야기 속에 모든 게 있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편지의 나머지 부분은 지워져 있었다. 펜으로 긋다가 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말을 멈춘 것처럼.
편지를 읽으면서 내 목이 메였다. 이 말이 누구에게서 나온 건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전 주인. 이 카페를 나에게 넘겨준 그 사람. 나는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계약은 중개인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편지는 나를 알고 있었다. 나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나는 편지를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리고 숨을 쉴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내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밤새 나는 깨어 있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천장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계속 저렸다. 이제 그 신호의 의미가 무서웠다. 누군가를 부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신호라는 걸 알았으니까.
편지 속 미완의 문장이 자꾸 떠올랐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그 뒤에 뭐라고 쓰려던 걸까. 나는 그걸 알고 싶지 않았다. 알면 무언가가 끝날 것 같았다. 이 낡은 카페에서의 조용한 삶이 끝날 것 같았다.
새벽 2시.
카페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정석진이 들어섰다. 오후에 왔던 그 중년 남자. 자식을 찾고 있다던 그 남자.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눈빛이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서 있는 방식이 다했다. 마치 누군가를 찾아낸 것처럼.
그는 카운터 앞에서 멈췄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입술도. 마치 뭔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혹시... 여기가..."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정확히는 나를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를 확인하듯이.
그 눈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읽었다. 입술 모양. 손가락의 길이. 얼굴 골격.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나와 겹쳤다.
내 왼손이 저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신호였다. 이건 누군가를 부르는 신호가 아니었다. 이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신호였다. 3주 동안 내가 거부하고 외면하고 돌아섰던 그 신호였다.
"아버지?"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몰랐다.
정석진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입이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물이 흘렀다.
"민준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10년의 침묵. 단절된 관계. 돌아오지 않는 시간. 그리고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던 후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얼굴을 봤다. 내가 거부해왔던 얼굴. 카페에 들어왔을 때부터 뭔가 친숙했던 그 얼굴. 나는 그걸 깨닫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깨닫고 있었다.
이 카페의 손님들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박할머니가 왜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을 알고 있었는지. 유미라가 왜 이 공간에 끌렸는지. 이준호가 왜 계속 돌아오는지. 그리고 정석진이 왜 새벽 2시에 문을 열고 들어섰는지.
모든 게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손님들을 위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님들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편지에서 읽었던 그 말이 맞았다. 일방적 치유는 없다. 모든 게 상호적이었다.
"왜... 왜 이제 왔어?"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정석진이 한 발 다가섰다. 조심스럽게. 마치 내가 도망칠까봐.
"박할머니가... 박할머니가 말해줬어. 이곳에 누군가 있다고. 누군가 여기서 손님들을 돌보고 있다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게 너인 줄은... 몰랐어. 민준이가 여기 있을 줄은... 처음엔 그냥 카페라고만 했거든. 이름도 안 말해줬어."
정석진이 다시 한 발 다가섰다.
"근데 박할머니가 말했어. 손님들이 자꾸 돌아온다고. 이 카페를 떠나지 못한다고. 마치 누군가가 자신들을 잡아두는 것처럼.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생각한 게..."
그가 목을 가다듬었다.
"내 아들도 그런 사람이었어. 누군가의 상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그런데 그 때문에 내가..."
정석진의 목소리가 끊겼다.
"내가 너를 못 봐줬어. 너의 상처를 못 봐줬어. 그래서 넌 여기로 왔고,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봐주기 시작했어. 그게 맞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석진이 반복했다. 그것만 말할 수 있었다.
"10년을 기다렸어. 너를 찾기 위해. 하지만 찾을 수 없었어. 그래서 포기했어. 너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근데 박할머니가... 박할머니가 말해줬어. 이 카페에 누군가 있다고. 그리고 그 사람이 너처럼 상처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고."
정석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때 나는... 내 아들이 맞다는 걸 알았어. 왜냐하면 넌 여전히 누군가를 돌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못 해준 것을 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해주고 있었어."
내 왼손이 더 이상 저리지 않았다.
그 대신 가슴이 떨렸다. 마치 누군가 내 가슴을 열고 들어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