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에 깬 것은 악몽 때문이었다. 숨이 막혀서였다.
2층 침실의 천장을 노려봤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이 지도처럼 흩어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공황장애였다. 이건 익숙했다. 서울의 회사 사무실에서도 자주 이랬다. 밤새 보고서를 쓰다가 갑자기 숨이 차오르는 경험. 손가락이 저리고, 눈앞이 흐릿해지고, 세상이 자꾸 좁아지는 그 느낌.
침대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다. 시골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도시에선 없던 냄새였다. 풀과 흙, 그리고 새벽이 가지고 있는 고요함. 숨이 천천히 돌아왔다.
카페 1층으로 내려갔다. 녹슨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섰다. 손가락이 여전히 저렸다. 그건 어제부터였다. 할머니가 들어섰을 때부터. 그 노인이 "여기 따뜻하네"라고 말하던 순간부터. 그리고 그 후로 계속 들어서던 사람들이.
손이 떨렸다. 커피를 내렸다. 검은 액체가 잔에 떨어졌다. 한 모금 마셨다. 쓸었다. 그게 좋았다.
오전 9시 45분.
문이 열렸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청년이었다. 어제는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스무 살쯤. 아니면 스물다섯.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종류의 지쳐 있음을 가진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청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마치 세상에 들리지 않으려는 듯이.
"어서오세요."
나는 말했다. 어제의 거절 목록은 벌써 포기된 상태였다.
청년은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 가장 어두운 자리. 그는 그곳을 선택했다. 주문하지 않고 그냥 앉았다.
나는 카운터에 섰다. 청년을 관찰했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리듬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신호를 보내려는 것처럼.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뭔가를 중얼거렸다.
내 왼손 약지와 중지가 저렸다.
"뭘 드릴까요?"
나는 물었다. 나도 모르게 청년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는 뭔가가 없었다. 목표. 방향. 그런 것들이 모두 없었다. 그곳엔 절망만 있었다.
"아메리카노."
"됐습니다."
나는 돌아섰다. 커피를 만들었다. 머신의 소리가 카페를 채웠다. 물이 떨어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청년은 여전히 테이블에 앉아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었다.
커피가 준비됐다. 나는 그의 테이블로 갔다.
"여기요."
청년이 커피를 받았다. 한 모금 마셨다. 아무 표정도 없었다. 마치 그것도 의무인 것처럼.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내 실패를 좋아할까요?"
청년이 물었다. 천천히. 마치 오래 생각한 끝에 터져 나온 말처럼.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나를 관통했다. 마치 내가 그 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침묵 속에서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대도시의 사무실. 밤을 새운 보고서. 전무의 목소리. "민준, 이번 분기 목표를 못 맞췄네." 내 얼굴에 흐르던 식은 땀.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것. 직책을 잃고, 신뢰를 잃고, 마지막엔 내 자신마저 잃었던 것.
청년의 모습이 겹쳤다.
나였다.
내 입이 열렸다.
"실패가 끝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누구의 말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내 말인지, 아니면 누군가 내 안에 있는 목소리인지.
청년이 눈을 감았다. 오래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고맙습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작았지만, 거기에는 뭔가가 있었다. 생명 같은 것. 아주 작은 불꽃 같은 것.
그의 눈동자가 나를 따라다녔다. 마치 내가 그의 세상에서 유일한 풍경인 것처럼.
나는 돌아섰다.
카운터로 돌아갔다. 손가락이 떨렸다. 온몸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에너지 같은 것. 아니, 감정 같은 것. 내 감정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것이.
가슴이 철렁거렸다. 공황장애가 밀려오는 신호였다. 호흡이 얕아졌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번엔 내 것만이 아니었다. 청년의 절망이 내 몸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를 잡았다. 손가락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호흡을 조절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세상이 자꾸 멀어졌다.
청년은 커피를 마셨다. 천천히. 그리고 한 시간을 더 앉아 있었다. 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나는 알았다. 그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오후 1시 15분.
청년이 일어났다. 돈을 놓고 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후드를 벗었다. 하늘을 봤다. 오후의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표정이 변해 있었다. 아주 미묘하게. 절망이 조금 옅어진 것처럼.
문이 닫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카운터에 기대어 내려앉았다. 왼손이 여전히 저렸다. 약지와 중지가 자꾸 떨렸다. 이제 그 떨림의 의미가 달라진 것 같았다. 신호에서 증거로. 누군가를 만났다는 증거로.
'저 청년은 누구지?'
나는 중얼거렸다.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청년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상처의 이름을. 대학 입시 실패. 부모의 기대. 그 무게 아래 짓눌린 이준호라는 이름을.
창밖을 봤다.
또 다른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카페 바닥에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들어서는 사람은 중년 남자였다. 어제 봤던 그 남자. 눈물이 어려 있던 그 사람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 남자는 카운터 옆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이곳이 자신의 자리인 것처럼. 마치 오늘이 정해진 약속인 것처럼.
"뭘 드릴까요?"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냥... 물."
그가 말했다.
나는 물을 따라 갔다. 손이 떨렸다. 물잔을 놓을 때도 손이 떨렸다. 그 남자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냥 잔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치 물 잔이 할 말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시간이 흘렀다. 오후 2시를 넘었다.
그 남자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 오후의 햇빛만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내 아들이..."
그가 갑자기 말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운터에 서 있었다. 그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
"내 아들이 이 동네에 있을 수도 있어."
그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난 어떤 얼굴로 만나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그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이제 와서."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왼손이 저렸다. 이번엔 더 강했다. 뭔가를 말해야 한다는 신호처럼.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신호처럼.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남자가 필요로 한 것은 내 말이 아니었다. 그가 필요로 한 것은 용서였다. 그런데 그 용서는 내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내 한 마디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내 능력의 한계가 명확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공황장애가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번엔 내 감정이 아니었다. 정석진의 절망이 내 몸을 휩싸고 있었다. 골든핑거는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정석진은 계속 앉아 있었다. 오후 3시가 되었다. 4시가 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물잔 위에서 멈췄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절망이 멈췄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건 절망이 깊어졌다는 뜻이었다.
나는 카운터에서 내려왔다.
그 남자의 테이블 옆에 섰다.
"괜찮으시면... 내일도 와도 돼요?"
나는 물었다.
그 남자가 나를 봤다. 눈빛이 변했다. 아주 미묘하게.
"응."
그가 대답했다.
정석진은 일어났다. 돈을 놓고 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어제보다 등이 더 구부러져 있는 것 같았다.
문이 닫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여전히 철렁거렸다. 공황장애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이건 신호가 아니었다. 이건 상처였다. 내 상처가 아닌 누군가의 상처가 내 몸에 남겨진 흔적이었다.
창밖을 봤다. 오후의 햇빛이 마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 멀리 산등성이가 검은 실루엣으로 떠올랐다. 시골의 오후는 도시의 오후와 달랐다. 여기선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할머니였다. 파란 옷의 할머니. 어제 처음 들어섰던 그 할머니였다.
"여기 따뜻하네."
그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어제는 그게 단순한 인사였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달랐다. 그건 확인 같았다. 마치 이곳이 자신이 알던 곳인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할머니가 나를 봤다.
"주인이 바뀌었네."
그 할머니가 말했다.
"네."
나는 대답했다.
"그 사람은 어디 갔어?"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왼손이 저렸다. 강했다. 할머니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르세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할머니가 나를 오래 봤다. 마치 내 안에 뭔가를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 사람도 힘들었나 봐."
할머니가 말했다.
"네?"
"이 가게의 전 주인. 그 사람도 혼자였어. 우리처럼."
할머니가 앉았다. 창가 자리에. 정석진이 앉았던 자리에.
"그 사람이 날 도와줬어. 말 없이. 그냥 앉아만 있어도 괜찮다고 해줬어. 나 같은 할머니도 누군가에게 필요할 수 있다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이 카페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이 손님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할머니는 전 주인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알고 있었다. 이곳이 무엇인지.
"그 사람 사진 있어?"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 예상한 것처럼.
"언젠가 준비가 되면 봐도 돼. 그땐 달라질 거야."
할머니가 말했다.
내 손가락이 저렸다. 강했다. 할머니의 말 속에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사진. 전 주인. 그리고 준비.
"어떻게 알아요?"
나는 물었다.
"그 사람이 날 그렇게 가르쳐줬거든."
할머니가 미소지었다.
오후 5시가 되었다.
할머니는 계속 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다. 그냥 앉아만 있었다. 창밖을 봤다. 어딘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카운터에서 할머니를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할머니가 필요로 한 것은 커피가 아니었다. 음식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느낌. 그것이었다.
나는 할머니 곁에 앉았다. 말하지 않고. 그냥 앉았다.
할머니가 내 손을 봤다.
"손가락이 떨리네."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건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신호야. 누군가를 부르고 싶다는 신호야."
할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런데 아직 준비가 안 됐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내 손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시간이 필요한 거야. 그 사람도 그랬어."
오후 6시 30분.
할머니가 일어났다.
"내일 또 와도 돼?"
나는 물었다.
"응. 매일 와야지. 이게 내 집처럼 되어야지."
할머니가 웃었다.
문이 닫혔다.
나는 혼자 남았다. 카페 안에는 오후의 빛만 남아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봤다. 여전히 떨렸다.
그런데 이제 그 떨림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신호에서 증거로 변했다.
그건 부르는 것에서 만남으로 변했다.
나는 창밖을 봤다.
시골 마을의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집들의 불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각자의 삶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이 카페에서.
이 손님들과.
내 왼손이 다시 저렸다.
이번엔 그것이 부르는 것 같았다.
다음 손님을. 또 다른 이야기를. 또 다른 상처를.
나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손을 씻었다.
그런데 이제 그 떨림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려졌다.
누가 올지 모르지만.
그들이 뭘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기다렸다.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카페 '온기'의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 아래.
나는 서 있었다.
그리고 문이 또 열릴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만난 세 사람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준호의 절망. 정석진의 후회. 할머니의 외로움. 그들의 상처가 내 손가락을 통해 울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말했던 그 사진. 그 사진 속의 전 주인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정말로 내가 찾던 답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정석진은 정말로 이 동네에 있을까. 오늘 들어온 청년 이준호의 나이는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사이. 그 남자가 말한 아들의 나이대와 맞을까. 청년의 얼굴에서 본 절망, 그것이 아버지를 만난 적 없는 자식의 절망은 아닐까.
마치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손가락이 계속 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