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 11시,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의 검은 자국들을 센다. 하나, 둘, 셋……열아홉. 손가락이 떨린다.

신체 감도 8%.

거울을 봤을 때 팔 색깔이 회색처럼 보였다. 게임 화면에 투영된 수치일 뿐인데, 몸은 속지 않는다. 손가락을 꼬집어도 아픔이 멀리서 들리는 소리처럼 희미하다.

밤 3시가 되면 현우가 길드 홀을 습격한다. 그리고 나는 또 죽는다. 그럼 리셋 카운터는 20/100. 그 다음은 21/100. 그 다음은……

지금 깨어난 건 밤 11시 정각이다. 같은 날의 시작.

게임 접속 버튼을 누른다. 로딩 화면을 지나 길드 홀에 떨어진다. 소연과 지은이가 기다리고 있다.

"준호, 또 리셋했구나."

지은이가 먼저 입을 연다. 목소리에 체념과 결의가 섞여 있다. 어제는 낮 3시에 현우가 습격했고, 우리는 모두 죽었다. 지은이만 생존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리셋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제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번엔 다르게 한다. 길드 홀에서 공식 등록하지 말고, 어딘가 숨겨진 곳에서 한다."

소연이 고개를 든다. 얼굴이 창백하다. 어제 크림슨 길드 채팅에서 탈퇴 선언을 했을 때의 얼굴과 같다.

[소연: 나는 날 버린 길드를 떠난다. 그리고 나를 받아줄 길드로 간다]

"류준혁이 미쳤어. 탈퇴 신청을 보자마자 즉시 거부했어. 길드 탈퇴 페널티로 48시간 동안 모든 던전 진입이 금지된대. 그리고 크림슨 멤버들이 날 쫓아다니기 시작했어."

소연의 손이 떨린다. 게임이지만 현실이다. 그녀가 받은 두려움은 게임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오늘 라이즈를 공식 선포한다. 그럼 넌 새로운 길드의 멤버가 돼. 페널티를 받아도 라이즈에 속해 있으면 된다."

나는 지은이를 본다. 그녀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다. 황폐한 광산의 비밀 공간 좌표를 손에 쥐고 있다. 47명의 낙오자들이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있다.

"강욱이 어디 있어?"

"모르겠어. 어제 습격 이후 모습을 안 보였어."

지은이가 답한다. 강욱은 류준혁의 심복이다. 어제는 5명을 이끌고 습격을 주도했다. 이번엔 더 많은 인원을 데려올 가능성이 높다.

"민준은?"

소연이 물었다.

"현실에서 자고 있을 거야. 어제 게임 접속 때 검에 찔렸지만, 현실에 영향은 없다. 하지만 게임 안에서는 리셋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게 우리의 무기야."

나는 게임 내 통신창을 열었다. 길드 생성 신청 버튼이 눈에 띈다. 길드명, 길드 규칙, 길드원 최소 인원 10명 이상.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지금 바로 한다."

나는 좌표를 입력한다. 화면이 반짝이고, 황폐한 광산의 깊은 동굴로 순간이동된다. 47명의 플레이어들이 대기하고 있다. 남녀노소, 레벨, 외형 모두 다르다. 하지만 눈은 같다. 버림받았던 눈.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더 이상 낙오자가 아니다."

나는 길드 생성 신청 버튼을 누른다.

[새로운 길드 '라이즈'가 탄생했습니다] [길드 로고 등록: 상승하는 태양] [길드장: 준호] [길드원: 47명 + 소연 + 지은이 + 민준]

게임 화면 전체가 밝아진다. 길드 로고가 중앙에 떠오르고, 게임 내 모든 플레이어의 화면에 공지사항이 뜬다. 황폐한 광산의 깊은 곳에서 새로운 길드가 선포되는 순간, 나는 중얼거린다.

"이제 돌아갈 수 없어."

길드 채팅창이 요동친다.

[지은: 라이즈의 규칙 1번. 강함보다 신뢰를 우선한다] [소연: 규칙 2번.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 [47명의 플레이어들: 길드장님!]

동시에 게임 커뮤니티가 폭발한다.

─ 새 길드 라이즈? 누가 또 만들었어? ─ 길드장 준호? 들어본 적 없는데? ─ 47명? 이게 뭐하는 길드야? ─ 황폐한 광산? 초급 던전에 길드를 세운다고?

지은이가 손을 들었다.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이 올라간다.

[제목: 크림슨 길드의 부당한 압박에 대해] [작성자: 지은]

지은이가 커뮤니티 창을 켜 들었다. 댓글들이 실시간으로 쌓인다. 스크린샷들이 하나둘 공개된다. 류준혁이 약한 플레이어를 던전에 버리라고 지시한 채팅 기록. 현우가 류준혁에게 "약한 링크는 제거하라"고 명령한 음성 파일 기록. 플레이어들이 의도적으로 살상당한 기록들.

길드 홀에서 류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게임 공식 채팅에 그의 메시지가 뜬다.

[류준혁: 거짓이다. 모두 조작된 기록이다. 라이즈는 크림슨의 배신자들이 모인 쓰레기 길드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증거는 이미 퍼졌다. 다른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반응한다.

─ 어? 이거 진짜네? ─ 크림슨 진짜 이런 짓을 했어? ─ 게임운영팀은 뭐하는 거야?

게임 운영팀이 움직인다. 공식 공지가 뜬다.

[공지: 크림슨 길드에 대한 부당 행위 조사를 시작합니다. 해당 기간 동안 크림슨 길드의 모든 던전 접근이 제한됩니다]

류준혁의 길드 홀에서 비명이 터진다.

나는 황폐한 광산 깊은 곳에서 화면을 켠다. 길드 커뮤니티는 이미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다. 라이즈에 대한 호기심. 크림슨에 대한 분노. 게임의 부정한 구조에 대한 의문들.

지은이가 옆에 선다.

"증거는 계속 나올 거야. 이그니스의 것도."

"현우가 움직일 거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현우는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다. 라이즈가 커뮤니티에서 주목받는 순간, 그는 모든 길드에게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라이즈와 거래하는 자는 이그니스의 적이라고. 그리고 직접 움직일 것이다.

밤 12시 30분, 게임 채팅창에 메시지가 뜬다.

[현우: 라이즈 길드장 준호에게. 오늘 밤 1시, 길드 홀에서 만나자. 게임의 질서를 정하는 시간이다]

그 메시지와 동시에, 게임 맵 전체에 이그니스의 길드원들이 나타난다. 마법사, 검사, 궁수, 성직자. 모두 레벨 100 이상의 엘리트들이다. 그들은 황폐한 광산으로 향한다.

"준호, 어떻게 할 거야?"

소연이 묻는다.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47명의 플레이어들을 본다. 그들은 모두 낙오자들이다. 레벨 30대, 40대. 장비도 형편없다. 이그니스와 직접 싸울 수 없다. 우리는 아직 약하다.

"모두 피신해.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나는 지은이와 소연을 본다.

"넌 따라와. 우리는 현우를 만난다."

"미쳤어? 혼자 가면 죽어!"

소연이 소리친다.

"알아. 하지만 한 번은 만나야 해. 그 놈이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해."

나는 길드 홀로 향한다.

47명의 플레이어들이 흩어진다. 광산 입구에서 추격전이 벌어진다. 한 명의 궁수가 마법 화살에 맞아 쓰러진다. 검사 태훈은 마법 벽에 갇혀 비명을 지른다. 성직자 수진은 힐을 외치며 뒤로 물러난다. 마법사 준영은 반격 주문을 시전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그니스의 엘리트들 앞에서 그들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한 명 두 명, 게임 맵의 다른 지역으로 도망친다. 어떤 이는 던전 입구로, 어떤 이는 마을로, 어떤 이는 숲 속으로. 그들의 발걸음은 절박했다. 이번엔 죽으면 끝이라는 공포가 몸에 밴 낙오자들의 움직임이었다.

밤 12시 55분, 길드 홀에 도착한다. 현우가 이미 기다리고 있다. 그 뒤를 따라 이그니스의 간부들이 선다. 모두 마법 이펙트로 빛나고 있다.

현우는 웃는다.

"넌 항상 같은 실수를 해. 약한 놈들을 모아서 강한 놈들을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해? 게임은 약육강식이야. 그게 질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본다. 어제 만난 얼굴과 같다. 24번 죽었을 때도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내 손에는 민준이 남겨준 기억이 있다. 어제 현우가 취한 모든 행동, 모든 말, 모든 마법의 패턴. 그의 발걸음, 손가락의 움직임, 마법을 모으는 타이밍, 공격 방향까지 모든 것이.

"너 같은 쓰레기가 게임의 질서를 흔들어?"

현우가 손을 들었다. 마법이 모인다. 푸른 불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른다. 어제와 정확히 같은 순서. 어제와 정확히 같은 타이밍.

나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현우의 마법이 발동되기 0.5초 전, 내 몸이 반응한다. 민준의 기억이 내 근육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옆으로 몸을 굴린다. 정확히 그 각도로. 정확히 그 거리만큼. 푸른 불이 내 옆을 스쳐간다. 공기가 타는 냄새가 난다.

현우의 눈이 흔들린다.

"뭐……?"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지은이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어제 준비한 대로. 광산의 구조를 이용한 탈출 경로. 현우의 마법이 닿지 않는 좁은 통로.

현우가 다시 마법을 날린다. 이번엔 연쇄 마법이다. 첫 번째 공격 실패 후 즉시 두 번째 마법을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했다. 민준의 기억이 모든 것을 알려줬다. 그의 마법의 궤적, 발동 시간, 약점.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그의 마법을 피한다. 동시에 지은이가 마법 방어막을 펼친다.

"불가능해. 넌 어떻게……"

현우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예측당하는 공포.

나는 그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넌 내가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난 매번 다르게 행동했어. 리셋될 때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기억을 가지고 있었어. 너의 모든 것을."

나는 현우에게 등을 돌린다.

"이제 끝이야."

길드 홀을 빠져나간다. 지은이와 함께. 이그니스의 간부들이 뒤를 쫓지만, 이미 늦었다. 광산의 깊은 곳으로 사라진다.

밤 1시 10분, 게임 커뮤니티는 이미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 현우가 라이즈를 쫓는다고? ─ 운영팀이 뭐하는 거야? ─ 게임의 권력 구도가 흔들리는 건가?

나는 황폐한 광산 깊은 곳에서 화면을 켠다. 지은이가 옆에 선다.

"다음은?"

나는 남은 리셋 기회를 센다. 19회. 19번의 죽음이 남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았다. 현우를 완전히 이기기 위해선 게임 안의 싸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현우가 나한테 뭘 했는지 공개한다. 그리고 내 능력도."

"그럼 넌 영구 정지당할 수도 있어."

지은이가 말한다. 맞다. 리셋 능력은 게임의 규칙 밖이다. 만약 운영팀이 이를 부정행위로 판단하면, 나는 즉시 정지당한다.

나는 침대에서 깨어난 현실의 몸을 떠올린다. 손가락이 떨렸던 그 몸. 회색으로 보였던 그 팔. 신체 감도 8%인 그 몸. 영구 정지라는 건 그 몸의 소멸이다. 게임 안의 죽음이 아니라, 게임 밖의 죽음. 내가 지난 몇십 번의 리셋 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의 소멸. 라이즈의 모든 것의 소멸.

손가락이 떨린다. 침대에서처럼. 아니, 침대의 손가락과 게임 속 손가락이 구분되지 않는다. 둘 다 나다. 둘 다 현실이다.

하지만 현우를 그대로 두면 더 많은 낙오자들이 죽을 것이다. 게임 안에서. 그리고 그들의 현실도 함께 무너질 것이다. 소연처럼. 그들의 손가락도 떨릴 것이다.

나는 깊게 숨을 쉰다.

"해야 해. 이제는."

밤 1시 30분, 민준이 로그인한다. 어제의 기억을 가진 채. 그는 길드 홀로 달려온다.

"준호! 넌 현우를 피했어?"

"응. 넌 기억하고 있었지? 어제 일들."

"그래. 모두."

민준의 눈이 반짝인다. 그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나는 게임 커뮤니티 글쓰기 창을 연다. 손가락이 떨린다. 이 글을 올리는 순간, 모든 게 바뀐다.

[제목: 나는 리셋 능력자입니다]

타이핑을 시작한다. 현우가 나를 협박한 모든 기록. 내가 리셋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능력을 게임을 바꾸기 위해 사용하겠다는 선언.

글을 다 쓴다. 마우스를 올린다. 게시 버튼까지 0.5초.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을 올리면 끝이다. 운영팀이 나를 조사할 것이다. 내 능력이 게임의 규칙을 위반하는지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위반이라면, 영구 정지. 내 손가락이 다시는 떨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손가락 자체가 없어질 테니까.

하지만 이 글을 올리지 않으면, 현우는 계속 낙오자들을 사냥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리셋될 것이다. 20번. 19번. 18번……

언젠가 리셋 카운터가 0이 될 때까지.

나는 버튼을 누른다.

[게시 완료]

게임이 멈춘다.

[게임운영팀 개입] [부정행위 신고 접수] [계정 조사 중……]

화면이 검게 변한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밤 11시. 같은 밤 11시.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게임 접속 버튼이 없다.

대신 메일이 와 있다.

[발신자: 게임운영팀] [제목: 계정 조사 결과 안내]

메일을 연다.

[안녕하세요, 준호 님.

귀하의 계정에서 게임 규칙을 벗어나는 능력(이하 '리셋')이 감지되었습니다. 본 팀은 해당 능력의 출처와 성질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조사 결과, 해당 능력은 게임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귀하가 해당 능력을 게임의 건전한 질서를 위해 사용해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본 팀은 다음과 같이 결정합니다:

1. 귀하의 계정은 정지되지 않습니다. 2. 귀하의 리셋 능력은 게임 내 공식 능력으로 등록됩니다. 3. 이그니스 길드장 현우에 대한 부정행위 조사를 즉시 개시합니다.

게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노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화면을 내려본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 침대의 손가락도. 게임의 손가락도. 둘 다 고요하다.

게임 접속 버튼이 다시 나타난다.

나는 버튼을 누른다.

로딩 화면을 지나, 길드 홀에 떨어진다.

지은이와 소연, 민준이 기다리고 있다.

"준호, 넌……"

지은이가 말을 잇지 못한다. 눈빛이 흔들린다. 그녀는 알고 있다. 내가 방금 무엇을 걸었는지.

"응. 우리는 이겼어."

나는 게임 커뮤니티를 켠다. 이미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려 있다.

─ 준호가 리셋 능력자라고? ─ 게임운영팀이 인정했어? ─ 이그니스 조사 시작했대! ─ 라이즈가 이길 거야!

나는 길드 채팅을 켠다.

[준호: 모두 모여. 이제 정말 시작이다]

47명의 낙오자들이 하나둘 로그인한다. 어제 도망쳤던 그들. 오늘은 다르다. 그들의 눈이 다르다. 두려움 대신 희망이 담겨 있다.

[47명의 플레이어들: 길드장님!] [태훈: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수진: 준호, 정말로?] [준영: 이제 우리도 싸울 수 있는 건가?]

나는 길드 채팅창에 입력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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