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밤 2시 52분. 침대 위의 어둠 속에서 전화음이 울렸다.
"뭐야, 이 시간에."
목소리가 걸쭉했다. 신체 감도 54%. 현실의 감각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너... 혹시 리셋 능력 있는 거 아니야?"
준호는 벌떡 일어났다. 게임 내 기억이 현실로 새어나왔다는 뜻이다. 침대 옆 탁자에서 안경을 집어 들고 귀에 붙였다.
"뭔 소리야."
전화 너머는 민준이었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 있잖아. 마치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대하는데, 넌 내 걸 자세히 알아. 여러 번 만난 거 같은데..."
침묵. 준호의 손가락이 폈다 쥐어졌다.
"민준아. 넌 리셋되지 않았어. 난 리셋될 때마다 너를 만났고, 넌 매번 처음이었어. 그런데 넌... 기억하고 있었어?"
"응. 자는데 갑자기 꿈이 아닌데 꿈 같은 기억들이 떠올라. 넌 날 죽인 적도 있고, 나랑 울면서 앉아있은 적도 있고, 나를 믿지 않은 적도 있어. 근데 모두 너였어. 그리고... 모든 기억에서 넌 날 버렸어."
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건 세계관 설정에 없는 현상이었다. 리셋 능력은 자신만의 것이어야 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초기화되어야 했다. 그런데 민준은—
"그럼 지금까지 몇 번 만난 거야?"
"모르겠어. 근데 많아. 진짜 많아. 그리고... 넌 계속 미안하다고 했어. 근데 내가 더 미안해야 할 것 같아. 왜냐면 난 너를 버렸거든."
준호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밤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신체 감도 저하로 인해 그 감각도 둔했다.
"민준. 오늘 밤 게임 접속해. 황폐한 광산에서 만나자."
"응."
통화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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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접속. 리셋 카운터를 확인했다: 8/100. 92회를 이미 썼다. 8회만 남았다.
황폐한 광산 입구. 민준이 서 있었다. 낮에 보던 모습과 달랐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양손이 떨리고 있었다.
"너... 진짜 다른 사람이 되었네."
민준이 준호를 보자마자 말했다.
"리셋을 거듭할 때마다 넌 점점 더 차가워졌어. 처음엔 배신감에 복수하려던 눈이었는데, 마지막 즈음엔... 뭔가 포기한 눈이었어."
"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리고 난 너한테 버림받는 걸 몇십 번이나 반복했어."
민준이 무릎을 꿇었다. 게임 내였지만, 그 자세는 현실 같았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준호는 민준을 일으켜 세웠다.
"넌 상위 길드의 압박을 받고 있어. 류준혁이 넌 다음 제거 대상이라고 했어. 넌 왜 기억하고 있는 거야?"
"모르겠어. 그냥... 넌 리셋할 때마다 날 살려줬어. 몇십 번이나. 그 과정에서 뭔가 연결된 거 같아."
준호는 민준의 말을 되짚어 생각했다. 반복 접촉. 그것이 답일지도 몰랐다. 리셋 능력자와 지속적으로 만나는 플레이어는 점진적으로 기억의 동기화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세계관의 규칙이 깨지는 게 아니라, 다른 규칙이 작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계속 기억해. 그리고 살아남아. 이번엔 다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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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준호는 리셋을 결정했다. 이번엔 현우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했다. 리셋 카운터: 9/100이 되었다.
첫 번째 리셋. 황폐한 광산에서 시작. 준호는 류준혁을 따라다녔다. 류준혁은 길드 홀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자는 게임 내 최상위 길드 '이그니스'의 리더, 현우였다.
"약한 링크 제거 진행률은?"
현우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50% 정도입니다. 준호라는 놈이 방해하고 있어서..."
"그놈은 이미 죽어야 했는데?"
"리셋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리셋?"
현우가 웃었다. 그 웃음은 광산의 벽을 울렸다.
"게임 초기 시스템 중 하나네. 그런 건 무시해. 어차피 그놈도 약한 플레이어일 거야. 신흥 세력 '라이즈'라는 게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더 신경 쓸 대상이야."
준호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라이즈? 그런 쓰레기 길드는 태어나기 전에 없애버리면 된다. 류준혁, 넌 크림슨을 정리해. 라이즈로 유입되는 인원들을 추적하고 제거해."
"예, 리더."
현우가 돌아섰다. 준호는 그의 뒷모습을 본 순간 이해했다. 이 게임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가 누군지를.
리셋. 카운터 10/100.
두 번째 리셋. 준호는 현우의 길드 홀을 침입했다. 이그니스의 자원실. 거기에 남겨진 문서들은 엄청났다. 게임 내 주요 던전의 독점권, 상위 길드들과의 연합 계약, 그리고 '약한 링크 제거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체계적인 플레이어 제거 계획.
준호는 그 문서를 사진으로 찍으려다 경비에게 걸렸다. 도망치다 죽었다.
리셋. 카운터 11/100.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준호는 계속 리셋했다. 현우의 일정을 추적했다. 그의 움직임 패턴을 분석했다. 이그니스의 구조를 파악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게임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걸. 현우와 이그니스가 모든 걸 장악하고 있다는 걸. 약한 플레이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정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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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돌아왔다. 침대 위의 준호. 신체 감도는 이제 34%였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둔해졌다. 리셋 카운터: 21/100. 79회를 썼다. 21회만 남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은이었다.
"준호. 현우가 움직였어. 게임 커뮤니티에 라이즈의 정보가 떴어. 아직 공식 길드는 아니지만, 현우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
준호는 일어났다. 현실의 몸이 무거웠다.
"지은아. 우린 너무 약해."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준호는 자신의 절망을 느꼈다.
"그래.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거야."
지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민준이, 소연이, 나, 그리고 낙오자 길드의 47명. 그리고 넌 우릴 리셋으로 지켜줄 수 있어."
"그들도 죽어야 한다는 뜻인데?"
"응. 그리고 우린 살아나야 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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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접속. 준호는 민준을 만났다. 길드 홀의 한 모서리. 밤 11시경.
"넌 진짜 미안해?"
"응."
"정말로?"
"응. 그래서 크림슨 떠날 거야. 오늘 밤에. 너 때문에 몇십 번이나 죽을 뻔했고, 몇십 번이나 날 버리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어. 이제 그만할 거야."
민준의 얼굴이 단호했다.
"라이즈로 와."
"응."
둘이 길드 홀을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류준혁이 나타났다.
"어? 너?"
류준혁은 준호를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는 죽어야 했는데?"
준호가 웃었다. 그 웃음은 게임 내 그 어떤 NPC의 웃음보다 현실 같았다.
"난 이미 죽었고, 살아났어."
류준혁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난 앞으로도 계속 죽고 살아날 거야. 넌 날 막을 수 없어. 현우도 막을 수 없어."
준호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왜냐면 내 뒤에는 이미 47명이 서 있거든."
류준혁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라이즈?"
"응. 우린 이제 시작이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길드 홀의 천장에서 폭발음이 났다.
현우의 길드원들이 들어왔다.
"류준혁. 그놈을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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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로그아웃. 침대에 누운 준호. 신체 감도 24%. 리셋 카운터: 22/100. 78회를 썼다. 22회만 남았다.
천장의 검은 자국을 바라봤다. 그 패턴이 이제 숫자로 보였다.
22.
그것이 남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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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47분. 신체 감도 24%의 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고생이었다. 손가락이 0.5초 늦게 반응했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은이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 현우가 길드장 회의를 소집했어. 지금 길드 홀에서. 주제는 '라이즈 제거'. 내가 몰래 녹음했어.
음성 파일을 눌렀다.
"라이즈라는 신흥 세력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크림슨의 류준혁과 연결되어 있으며, 체계적으로 우리의 정보망을 침투하고 있습니다."
현우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명확했다.
"명령은 간단합니다. 조기에 제거하세요. 그들이 공식 길드 신청을 하기 전에. 게임의 패권은 강한 자의 것입니다. 약한 자들의 연대? 그런 건 존재할 수 없어요."
음성 파일이 끝났다. 그 다음은 현우의 독백이었다.
"라이즈? 그런 쓰레기 길드는 태어나기 전에 없애버리면 된다. 준호? 누군데 그놈?"
준호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현우는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리셋 능력자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이미 현우를 22번 이상 추적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준호의 가장 큰 무기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준호는 받았다.
"누구세요?"
"현우야. 이그니스의 길드장 현우다."
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현우가 현실에서 전화를 걸었다는 건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뜻이었다.
"어? 어떻게..."
"게임 내 정보망을 통해 너의 실명을 알아냈어. 준호. 너는 라이즈의 리더지? 아니다. 너는 그보다 더 뭔가 다르지."
"뭘..."
"넌 날 추적하고 있어. 계속.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그 능력이 뭐야?"
침묵.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현우가 자신의 리셋 능력을 알아챘다는 게 가능한가?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넌 날 막을 수 없거든. 게임의 패권은 강한 자의 것이고, 난 이 게임에서 가장 강한 자야."
현우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근데 넌 뭔가를 잃고 있어. 리셋할 때마다 뭔가를. 신체 감도? 그래. 넌 점점 약해지고 있어. 반면 난 계속 강해지고 있고. 그 차이가 벌어질수록 넌 더 절망할 거야."
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내일 오후 3시. 길드 홀에서 만나자. 그리고 라이즈의 모든 멤버를 데려와.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게 너에게 더 큰 고통일 테니까."
현우의 목소리에는 이미 승리가 담겨 있었다.
"넌 날 이길 수 없어. 왜냐면 넌 이미 지쳐 있거든."
통화가 끝났다.
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검은 자국들이 22개로 보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신체 감도 24%의 몸이 더욱 무거워졌다.
22번.
그 안에 모든 걸 끝내야 했다.
현우를 이기거나, 아니면 자신과 라이즈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창밖을 봤다. 밤 11시. 거리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 속에서 준호는 결정했다.
다음 리셋에서 모든 걸 걸어야 한다는 걸.
22번. 그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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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접속. 밤 10시 32분. 게임 내 오전 2시 36분.
길드 홀에는 이미 이그니스의 길드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라이즈의 멤버들을 포위했다. 47명 모두.
현우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모든 게 정해진 것처럼.
"준호. 마지막 제안이야. 라이즈를 버려. 그럼 넌 살려줄게. 넌 충분히 흥미롭거든."
준호는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24번의 죽음이 담겨 있었다.
"거절."
"그럼 죽어."
현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그니스의 길드원들이 라이즈를 향해 검을 들었다.
그 순간, 준호는 움직였다.
긴 검을 뽑아 현우의 공격을 받아냈다. 신체 감도 24%의 몸이지만, 24번의 리셋 기억이 현우의 모든 동작을 예측하게 했다. 현우가 왼쪽으로 베려는 걸 알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현우가 뒤로 물러나려는 걸 알고 앞으로 돌진했다.
"불가능해. 넌 어떻게..."
현우의 놀라움이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그건 너무 늦었다.
라이즈의 47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지은이가 현우의 뒤쪽 길드원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첫 번째 화살이 왼쪽 경비의 어깨를 관통했다. 두 번째 화살이 오른쪽 경비의 다리를 찔렀다. 지은이는 화살을 재장전하며 계속 공격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이미 몇십 번을 반복해 온 동작이었다.
민준이가 현우를 향해 달려왔다. 그의 검이 현우의 방패를 부딪쳤다. 불꽃이 튀었다. 민준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계속 베고, 찌르고, 휘둘렀다.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몇십 번의 버림받음 끝에,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47명의 버려진 플레이어들이 이그니스의 길드원들과 교전했다. 미희가 앞줄에서 방패를 들었다. 그 뒤로 검사들이 이어졌다. 약한 플레이어들이지만, 그들은 죽음을 알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강했다.
소연이라는 여성 궁수가 왼쪽 측면에서 연속으로 화살을 날렸다. 그녀는 한 번도 빗지 않았다. 매 리셋마다 준호와 함께 싸워 온 기억이 근육에 배어 있었다.
이그니스의 길드원 하나가 쓰러졌다. 그 다음, 또 다른 하나가 쓰러졌다. 라이즈의 멤버 하나도 죽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도 죽었다. 하지만 라이즈는 계속 전진했다.
준호는 현우와 검을 맞댔다. 현우가 위에서 내려치자, 준호는 검으로 받아냈다. 반동으로 몸이 밀렸다. 신체 감도 24%의 몸이 반응하는 데 1초가 걸렸다. 그 1초 사이에 현우가 다시 공격했다.
준호는 회피했다. 하지만 느렸다. 현우의 검이 그의 팔을 스쳤다. 피가 흘렀다. 신체 감도 저하로 인해 통증도 둔했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자신의 몸이 반응하지 않는 공포. 그것이 준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넌 약해지고 있어."
현우가 웃었다.
"리셋할 때마다 넌 더 느려져. 그 능력의 대가가 너무 크지 않아?"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공격했다. 현우의 예상을 벗어나는 각도로. 24번의 리셋 속에서 배운 현우의 약점을 노렸다.
현우의 왼쪽 옆구리. 그곳은 현우가 항상 방어를 약하게 하는 지점이었다.
준호의 검이 현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현우가 비명을 질렀다.
"불가능해! 넌 어떻게 내 약점을..."
"24번이야."
준호가 말했다.
"난 이 순간을 24번 겪었어. 넌 모르지만, 난 이미 넌 이겼어. 24번 이겼어."
현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라이즈의 47명이 그를 막았다.
민준이가 현우의 뒤를 쳤다. 현우가 무릎을 꿇었다.
"이게... 약한 자들의 연대?"
현우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확신이 아니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약한 자들이... 모이면..."
준호는 검을 들었다. 신체 감도 24%의 팔이 떨렸다. 하지만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24번의 기억이, 그리고 47명의 믿음이 그의 팔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제 끝이야."
검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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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났을 때, 길드 홀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그니스의 길드원 대부분이 쓰러져 있었다. 라이즈도 많은 멤버를 잃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어섰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죽음에 익숙했으니까.
현우는 죽었다.
지은이가 준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우리가 이겼어."
"응."
"이제 뭐 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드 홀의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신체 감도 24%의 몸이 반응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준호의 마음 속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다. 24번의 리셋 속에서 참아 온 것들. 배신감, 복수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마침내 끝났다는 절망감. 현우를 죽였지만, 그것이 자신의 신체를 되돌려주지는 않는다는 깨달음.
준호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승리의 웃음이 아니었다. 신체 감도 24%의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터져 나온 웃음. 그 안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잃은 것들에 대한 인식. 이 승리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깨달음.
민준이가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형. 우리가 이겼어. 현우가 죽었어. 이제 끝이야."
하지만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끝이 아니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게임 내에서의 승리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신체 감도 24%. 리셋 카운터 25/100. 75회를 이미 썼다.
25회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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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로그아웃. 침대에 누운 준호. 신체 감도 12%. 리셋 카운터: 25/100.
75회를 썼다.
25회만 남았다.
천장의 검은 자국들을 봤다. 이제는 25개가 아니었다. 더 많은 자국들이 생겨 있었다. 자신이 리셋할 때마다 하나씩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리셋의 횟수이자, 동시에 사라져 가는 자신의 신체 감도를 나타내는 지표였다.
준호는 웃음을 삼켰다. 승리의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핸드폰이 울렸다. 민준이었다.
"형! 우리가 이겼어! 현우가 죽었어! 게임 커뮤니티에서 난리야! 라이즈가 이그니스를 이겼대!"
"응."
"형, 우리 이제 뭐 해?"
침묵. 준호는 천장의 자국들을 세고 있었다. 25개, 아니 그 이상의 자국들.
"계속 싸워. 아직 끝나지 않았어."
"뭐가?"
"류준혁. 그리고 크림슨. 그리고..."
준호가 천장의 검은 자국들을 봤다.
"우리 자신."
통화가 끝났다.
25번의 기회. 그 안에 모든 걸 끝내야 했다. 현우를 죽였지만,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리고 준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도,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잃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