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오자 길드의 전략가
게임 접속 화면 앞에 앉은 지 3시간. 손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는다.
신체 감도 51%.
숫자일 뿐인데, 그게 뭐 하는 소린가. 손끝의 감각이 솜뭉치처럼 둔해졌다는 뜻이다. 어제 침대에 누웠을 때 얼굴을 비비는 것도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현실의 신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 게임 속 나만 자꾸 깨어난다.
황폐한 광산. 또 여기다.
리셋을 거듭할수록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상해 보였다. 민준이도, 소연이도, 지은이도. 그들은 내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고,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대한다. 오늘은 처음이라고, 그 말투로.
NPC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느껴진다.
혼자다. 확실히, 절대적으로 혼자다.
게임 속 모든 것이 나의 반복 속에서만 의미가 있고, 밖에서는 모두가 초기화되어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괴리감이 쌓이고 쌓여서 어제쯤엔 밥을 먹고도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현실도 게임도 아닌, 어딘가 어두운 공간에 떠 있는 기분.
"너, 처음 오는 거 맞지?"
목소리가 들렸다. 황폐한 광산 구석진 동굴 입구, 낡은 텐트 앞에 서 있던 플레이어가 나를 쳐다본다. 검은 후드를 쓴 여자 캐릭터. 스탯 창을 열 필요도 없다. 이름이 지은이라는 건 소연이가 이미 말했다.
"네," 나는 대답했다.
"이상한데. 넌 처음인데 왜 우리 텐트를 정확히 찾아왔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소연이에게서 들은 정보다. 지은이가 라이즈의 리더라는 것도, 이 텐트의 위치도, 지은이가 던질 질문까지도. 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다. 리셋의 기억은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알려줬어,"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지은이는 한 발 물러섰다. 그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나를 측정하는 시선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스캔했고, 특히 눈과 입가에서 오래 머물렀다.
"몇 번째야?" 지은이가 물었다.
"뭐가?"
"리셋."
나의 호흡이 멈췄다. 손가락이 저렸다. 신체 감도 51%인 이 마비된 손가락이 저리는 게 이상했다. 그건 감각이 돌아오는 건가, 아니면 공포인가.
"모르겠는데요."
"거짓말 하지 마. 눈을 봤어. 리셋된 사람들이 가진 눈이 있거든. 피로하고, 깊고, 무거워. 그 무게를 본 지 한 달쯤 됐는데..."
지은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지난 3개월간 게임 곳곳을 돌아다니며 리셋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처음엔 그저 추측이었다. 리셋 능력자들은 특정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 눈이 다르다는 것. 그렇게 한 명, 두 명을 만나면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셋된 사람들은 항상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 나타났다. 그들은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같은 행동을 했다. 그 관찰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추적을 시작했다. 3개월간의 기록, 수십 명의 리셋 능력자 중 생존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넌 좀 다르네. 상처가 더 신선해. 리셋이 얼마 안 됐거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지은이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이 낯설었다. 조롱이 아니라 안도의 웃음이었다.
"다행이야. 리셋이 있는 사람이 맞다면, 우린 이 미친 구조를 바꿀 수 있어."
"구조?"
"게임의." 지은이가 텐트 안을 손짓했다. "들어와. 설명해 줄게. 근데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어. 여긴 낙오자들의 공간이야. 버려진 애들, 제거 대상, 혼자가 된 애들. 우리는 여기서 정보를 나누고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텐트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게임의 공간 왜곡을 이용한 인테리어였다. 벽면에는 수십 장의 메모와 지도가 붙어 있었다. 그 중엔 플레이어 이름, 레벨, 길드 정보가 빼곡했다.
"저 리스트는?" 내가 물었다.
"확인된 희생자들. 상위 길드의 '쿼터'를 채우기 위해 버려진 애들이야. 47명."
47명. 숫자가 무겁게 떨어졌다.
"상위 길드가?" 나는 천천히 물었다.
"이그니스. 게임 서버 최강 길드야. 그들은 자신들의 순위를 유지하기 위해 중위 길드들에게 압박을 준다. '이번 달 약한 링크 제거하고 보고해'라는 식으로. 중위 길드들은 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성원 중 가장 약한 놈을 던진다. 그게 우리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지은이의 얼굴을 봤다. 그녀는 이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을 것 같았다. 같은 설명을 다른 버려진 플레이어들에게 몇십 번이나 했을 것 같았다.
"왜 하는 거야? 이 정보 수집을..."
"왜냐면 증거만 있으면 이 구조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거든. 게임 운영진에 보고하면, 길드 간 의도적인 살인은 명백한 약관 위반이야. 이그니스가 지시한 증거, 크림슨이 따른 증거. 그걸 모으면 이 모든 게 끝난다."
내 가슴이 철렁했다. 복수 같은 건 생각도 안 했다. 다만 배신감에 짓눌려 있었고, 이 반복되는 루프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은이의 말은 다르다. 이건 탈출이 아니라 역전이었다.
"그런데..." 내가 천천히 말했다. "증거를 어떻게?"
지은이가 나를 봤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너야. 넌 리셋이 있잖아."
목이 메었다. 정말로 메었다. 신체 감도 51%인 이 마비된 신체에서 처음으로 뭔가가 느껴졌다. 눈물이 나올 뻔했다. 리셋을 거듭할수록 깨달아온 절망—혼자라는 절망, 아무도 내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절망, NPC 세상에 떠 있다는 절망이 한순간 균열을 냈다.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린 여기 있어."
지은이의 말이 들렸다. 또렷하게, 명확하게. 처음으로 다른 플레이어가 나의 기억을 인정했다. 나를 NPC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누군가로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감도 51%인 손가락이, 정말로 떨렸다. 마비된 신체 속에서 감각이 돌아오는 신호였다.
"작전을 짜자,"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류준혁과 현우의 대화를 기록해야 해. 내가 리셋을 통해 매번 다른 타이밍에 접근하면서 대화를 들을 수 있어. 그걸 정리하면..."
"증거가 된다," 지은이가 끝을 맺었다.
지은이는 벽면의 메모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류준혁의 일정이 부분적으로 적혀 있었다.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길드 홀 지하 회의실. 그 시간에 류준혁은 어디론가 간다.
"여기다," 지은이가 손가락으로 표시했다. "이 시간에 누군가 만나. 우리는 그게 현우라고 추측했는데, 확실하지 않았어. 넌 확인할 수 있겠지?"
"리셋을 통해 매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어."
지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봤다. 이번엔 다른 눈빛이었다. 신뢰의 눈빛. 아, 이런 감정도 있구나. 누군가 내 기억을 믿어준다는 게 이렇게 무거운 감정이구나.
"그런데 시간이 없어. 넌 리셋이 100회 한정이잖아."
"92회 써버렸어. 8회 남았어."
지은이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그럼 더 빨리 움직여야 해. 이번 주 화요일, 류준혁을 추적해 봐. 현우와 만나는 게 확실해지면, 우리는 다음 리셋부터 본격적으로 대화를 기록하기 시작할 거야."
"어떻게?"
"게임 내 음성 녹음 기능이 있어. 불법은 아니지만, 길드 홀 내부에선 음성 차단 필드가 있어서 못 썼거든.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어."
지은이는 게임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조각난 부품들이 들어 있었다. 서로 다른 플레이어가 만든 아이템들이었다. 게임 시스템은 개별 아이템은 추적할 수 있지만, 조합된 아이템의 출처를 완벽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지은이는 그 허점을 이용했다.
"이걸 조립하면 초소형 음성 녹음 장비가 돼. 게임 내 재료로 만들었거든. 길드 홀의 음성 차단 필드도 뚫 수 있어. 내가 이미 테스트했어."
나는 그 부품들을 봤다. 지은이가 얼마나 오래 이것을 준비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넌 언제부터 이렇게..."
"처음부터? 아니야. 처음 리셋된 사람을 만났을 때부터. 그게 3개월 전이야."
지은이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무거움이 있었다.
"게임 시작 후 처음 한 달 만에 리셋된 사람을 봤어. 그 사람은 내 말을 안 들었어. 자기 방식대로만 살다가 결국 100회 리셋 한계에 도달했어. 그리고 영구 강제 탈출당했어. 게임에서."
나는 숨을 멈췄다.
"그 이후로 나는 깨달았어. 리셋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걸. 혼자면 더더욱. 그래서 나는 리셋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어. 그들에게 필요한 건 복수도 아니고, 강함도 아니라, 함께할 누군가라는 걸 알았으니까."
내 목에 뭔가 걸렸다. 감정이 올라왔다. 그동안 나를 NPC처럼 느껴왔던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를 같은 종류의 사람으로 본 누군가를 만났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를 구하기 위해 이미 수많은 시간을 준비해왔다.
"고마워," 내가 말했다. 목이 메었다.
"고마워할 건 나야. 넌 리셋이 있잖아.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넌데, 혼자였어. 지금 너는 혼자가 아니야. 우린 여기 있어."
지은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의 온기가 느껴졌다. 신체 감도 51%인 지금도, 명확하게 느껴졌다.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텐트 안에서. 게임 내 밤 11시 반. 현실의 밤 2시 40분쯤일 것이다.
"이제 작전을 정리하자," 지은이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내일 화요일 오전 10시. 류준혁이 길드 홀을 떠날 때 뒤를 따라가.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서 만나는지 확인해. 그게 현우라면, 그 다음 리셋부터 우리가 움직인다."
"만약 현우가 아니면?"
"그럼 다시 추적 대상을 바꾼다. 하지만 내 직감으로는 현우야. 이그니스가 중위 길드에 압박을 주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현우는 그 압박의 전달자일 거야. 류준혁과 만나는 건 지시를 내리거나 보고를 받기 위한 거고."
나는 지은이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깊이 게임의 구조를 분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정보 수집을 넘어, 게임 내 권력 관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할 수도 있어. 류준혁을 따라가다가 들킬 수도 있고, 현우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수도 있어."
"그래서 리셋이 있는 거야," 나는 말했다. "실패해도 상관없어. 다시 시도하면 되니까."
"그렇지만 리셋이 8회밖에 남지 않았어. 낭비할 수 없어."
지은이는 벽면의 메모를 다시 가리켰다. 그 안에는 류준혁의 생활 패턴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 8시에 길드 홀에 도착. 오전 10시에 지하 회의실로 이동. 그곳에서 30분 정도 머문 후 귀환. 이 패턴은 지난 한 달간 변하지 않았다.
"30분이 우리의 시간이야," 지은이가 말했다. "그 30분 안에 대화를 기록해야 해. 음성 장비를 설치하고, 녹음을 시작하고, 나중에 회수하는 것까지."
"한 번에는 못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래서 여러 번 리셋을 써야 해. 첫 번째 리셋에선 현우를 확인하고, 두 번째 리셋에선 음성 장비를 설치하고, 세 번째 리셋에선 녹음을 회수한다. 이렇게 분산시켜야 들키지 않아."
나는 지은이의 계획을 들으면서 놀랐다. 이건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정교한 작전이었다. 게임의 루프를 활용한 완벽한 전략.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어," 지은이가 말했다. "현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그래서 너는 절대로 혼자 움직이면 안 돼. 항상 다른 플레이어와 함께 있어야 해. 그래야 의심을 받지 않아."
"누구와?"
"민준이. 그 애는 이미 우리 쪽이야. 아직 모르겠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나는 민준이를 생각했다. 게임 내에서 몇 번 만난 플레이어. 그 애가 우리 쪽이라니. 뭔가 복잡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가," 지은이가 말했다. "내일은 화요일이야. 첫 리셋을 써야 해."
나는 텐트를 나가려 했다. 그 순간, 게임 인터페이스에 알람이 떴다. 길드 홀 근처에서 플레이어 감지 알람이었다. 누군가 이 구역에 들어온 것이다.
지은이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우리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황폐한 광산의 동굴은 어둡고, 텐트 안은 더 어두웠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길지 않은 거리에서. 누군가 황폐한 광산을 탐색하고 있었다.
게임 인터페이스를 통해 주변을 스캔했다. 레벨 45의 플레이어. 이그니스 길드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채팅 로그가 보였다.
—라이즈라는 신흥 길드의 움직임을 감시하라. 현우 님의 지시다.
내 손이 떨렸다. 라이즈? 그게 뭐지?
지은이가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아직 없는 길드야. 하지만 곧 생길 거야."
그녀가 웃고 있었다. 어두운 텐트 안에서, 추적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와중에도, 지은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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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의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황폐한 광산의 좁은 통로를 울리며 다가오는 부츠 소리. 텐트 안의 어둠 속에서 지은이와 나는 숨을 죽였다.
게임 인터페이스에서 추적자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50미터 → 40미터 → 30미터. 그는 우리 텐트 방향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 지은이가 입술만으로 말했다.
나는 천천히 인터페이스를 닫고 기척 없이 텐트 뒤쪽으로 몸을 낮췄다. 지은이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숨는 것뿐이었다. 게임 내 '숨기' 스킬을 활성화하면 움직임을 감지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충분히 가까워지면 들킬 수 있다.
추적자는 텐트 앞에서 멈췄다.
"누가 여긴 왔냐," 그가 중얼거렸다. 게임 인터페이스로 텐트를 스캔하는 중이었다.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리셋 카운터가 8/100으로 떨어진 지금, 함부로 죽을 수 없다. 이그니스의 플레이어와 싸운다면 내가 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리셋. 또 다시 24시간 전으로. 지은이와 짜놓은 작전도 리셋된다. 모든 계획이 초기화된다.
추적자가 텐트 입구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지은이가 움직였다.
그녀는 텐트 반대편에서 작은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동굴 깊숙한 곳으로. 돌이 벽에 부딪히며 소리가 났다. 탁.
추적자의 시선이 돌멩이가 나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즉시 그쪽으로 달려갔다. 텐트에서 멀어지며, 그의 발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지은이와 나는 서로를 봤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상인 것처럼.
"지금이야. 나가," 지은이가 속삭였다.
우리는 텐트 뒤쪽을 통해 빠져나갔다. 황폐한 광산의 또 다른 통로로. 추적자와 반대 방향으로. 나는 지은이 뒤를 따랐고, 그녀는 길을 아는 듯 재빠르게 움직였다. 게임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숨기' 상태에서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지은이는 이 동굴의 구조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고, 추적자의 감지 범위를 벗어났다.
5분 후, 우리는 황폐한 광산 입구에서 벗어났다. 게임 내 시간으로 밤 11시 45분. 길드 홀이 보이는 언덕 뒤에 몸을 숨겼다.
"저 놈은 계속 동굴을 헤맬 거야. 숨기 스킬 때문에 우리를 못 찾을 거고," 지은이가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 현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 그게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빠르다는 뜻이야."
"라이즈를 추적하라고 했어. 그런데 라이즈는 아직 없잖아."
"아직 없지. 하지만 곧 있을 거야. 현우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우리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는 뜻이야."
나는 지은이를 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선명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강한 건 확신이었다.
"그럼 더 빨리 움직여야 해," 내가 말했다. "내일 화요일이 맞지? 류준혁을 추적해."
"응. 그리고 준호, 한 가지 더 있어. 저 추적자가 현우에게 보고할 거야. 황폐한 광산에 누군가 있었다고. 그럼 현우는 더 많은 사람을 보낼 거야. 우린 시간이 정말 없어."
나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게임에서 로그아웃하고,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신체 감도가 떨어진 팔다리를 문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로그아웃하면 지은이는 혼자 남겨진다. 추적자가 돌아올 수도 있다.
"이제 로그아웃해," 지은이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넌 현실에서 좀 쉬어. 신체 감도가 51%라고 했잖아. 그 상태로 더 활동하면 문제가 될 수 있어."
"넌?"
"난 여기서 기다릴 거야. 낙오자 길드 사람들이 순찰 돌 테니까. 혹시 모르니 지켜볼 거야."
나는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은이의 표정을 봤을 때, 이건 제안이 아니라 결정이었다.
"조심해," 내가 말했다.
"넌 더 조심해. 현실에서 신체 감도 51% 상태면 위험해. 자동차 운전하지 말고, 뜨거운 것도 조심해. 신체 감각이 둔해지면 화상을 입어도 모를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이는 이미 여러 번의 리셋을 경험한 사람들을 봐왔다는 게 이 대사에서 드러났다. 그녀가 아는 것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내일 화요일, 오전 10시. 류준혁을 따라가," 지은이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길드 홀 지하 회의실로 가는 길. 거기서 현우를 만나는 거 확인해. 그리고 민준이와 함께 움직여. 혼자라고 보이면 안 돼."
"민준이는 어디서?"
"길드 홀 로비에 있을 거야. 그 애한테는 이미 말해 뒀어. 넌 그냥 자연스럽게 만나면 돼. 마치 우연인 것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이는 정말로 모든 걸 준비해 놓았다.
"이제 가," 지은이가 말했다.
나는 게임 메뉴를 열고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하얗게 변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검은 자국 패턴이 보였다. 신체 감도 51%인 팔다리가 묵직했다. 리셋 카운터는 8/100. 남은 기회는 92회.
92회 안에 이 모든 걸 끝내야 한다. 아니, 끝낼 수 있다. 지은이가 있으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내일 오전 10시. 류준혁을 추적한다. 그리고 다음 리셋에서 현우와의 대화를 기록한다.
게임의 구조를 바꾸는 것. 그것이 이제 내 목표였다.
그런데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밤 2시 52분. 누구의 전화일까.
화면을 켜 봤다. 발신인은 '민준'.
나는 한 번도 민준에게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다. 게임 내에서만 만났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번호를...
전화를 받았다.
"준호?"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임 내 목소리와 달랐다. 현실의 목소리였다. 떨리고 있었다.
"왜 전화를..."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난 너를 버렸어. 그런데 자꾸만 꿈에 나타나. 넌 왜 자꾸만 나한테 같은 말을 반복해? 그리고 왜 날 자꾸만 믿어줘?"
나는 침묵했다. 지은이가 이전 리셋 사이클에서 민준의 무의식에 닿아 있었다. 게임 루프를 벗어나 현실의 꿈속까지 스며든 메시지들. 그 반복이 민준을 흔들어 놓았다.
"내가 뭔가 이상해. 준호, 넌 뭐야? 정말로 뭐야?"
전화선 너머로 민준의 호흡이 들렸다. 가쁜 호흡. 공포의 호흡.
"난... 리셋된 사람이야," 내가 말했다. "민준, 난 시간을 돌릴 수 있어. 그리고 그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자꾸만 넌 같은 말을 들었던 거야. 너는 기억 못 했겠지만."
침묵이 흘렀다.
"지은이가 너한테 알려줬어. 현실의 번호를. 우리가 게임에서 만날 때마다 지은이가 너한테 말했어. 너는 매번 기억을 못 했지만, 너의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었어."
민준의 호흡이 조금 진정되었다.
"라이즈라는 길드를 만들 거야," 내가 계속했다. "넌 거기에 들어올래? 이번엔... 진짜로."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응. 응, 들어갈게. 미안해, 준호. 진짜 미안해."
"괜찮아. 다음부터는 달라질 거야."
전화가 끝났다.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게임의 구조가 흔들리고 있었다. 지은이, 민준, 그리고 내가 만드는 새로운 구조. 라이즈.
내일 화요일, 오전 10시.
모든 게 시작된다.
그런데 뭔가 불안했다. 류준혁 추적 중 예상 밖의 변수. 현우의 경호원. 게임 로그에 남겨질 흔적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일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