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정각. 객실이 울린다.
아니, 울리는 게 아니라 숨을 쉬고 있다. 지하철 객실 전체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가슴을 부풀렸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나는 손잡이를 놓고 중앙에 선다. 모두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어머니가 있다. 강한 손가락으로 좌석 끝을 움켜쥐고 있다. 그 얼굴은 나를 향해 있지만 초점이 없다. 마치 안개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사람처럼.
박민지는 객실 반대편에 서 있다. 내 눈과 마주치려고 애쓰지만, 매번 시선이 빗나간다. 마치 내가 투명한 것처럼.
서준영은 창가에 앉아 있다. 손가락으로 차창을 훑는다. 밤의 터널이 검은 물감처럼 흘러가고, 그녀는 그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다. 자신의 이름일까. 아니면 자신을 기억했던 누군가의 얼굴일까.
강남역 승강장이 지나간다. 그곳에는 김도현이 서 있다. 플랫폼 끝에서 객실을 따라가듯이. 그의 입은 뭔가를 말하고 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두터운 유리와 속도가 그의 목소리를 삼킨다.
한승재는 문 옆에 선 채 나를 본다. 그의 눈빛은 슬프다. 마치 십 년 전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 손님이 있다.
그는 맨 뒤쪽에 서 있다. 객실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의 신체도 명확하지 않다. 마치 그 사람이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윤곽선 없는 검은 그림자 같은.
하지만 그의 소원은 느껴진다.
명확하고, 절실하고, 아주 가깝고, 너무나 익숙한 소원이.
'누군가 내 존재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깨닫는다.
그것이 나라는 것을.
내 미래다. 모든 기억을 잃은 후의 나. 타인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고 남은 것이 없어진 그 순간의 나. 거울을 봐도 낯선 얼굴이고, 사진을 봐도 누구인지 모르는 그 나.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그 나가, 이제 마지막 소원으로 나타났다.
내 존재를 기억해달라고.
내 손이 떨린다.
"안 돼. 준호."
한승재의 목소리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온다. 객실의 조명이 그의 얼굴을 밝힌다. 눈 아래 주름이 깊다. 십 년을 기다린 사람의 주름이다. "그 손을 들면 안 돼. 그러면 정말로 끝이야."
"끝이 뭐냐고요."
내 목소리가 나온다. 내 목소리인데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마치 누군가가 내 성대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넌 완전히 사라져. 여기 있는 누구도 너를 기억하지 못해."
한승재가 한 발을 더 내디딘다. 어머니가 일어난다. 박민지가 움직인다. 서준영도. 그들이 나를 향해 걸어온다.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엄마."
내가 말한다. 그 단어는 음성 신호일 뿐이다. 감정이 없다. 어머니는 멈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우리 아들. 넌 내 아들이 맞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내 귀에는 그저 주파수인데, 그녀의 입술 움직임만으로 알 수 있다.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박민지가 내 손을 잡는다.
"준호. 깨어. 이건 환상이야."
"환상?"
내 손이 그녀의 손을 느낀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그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너는 아직 선택할 수 있어. 지금이라도."
한승재의 음성이 객실에 울린다. 그의 손이 내 어깨에 닿는다. 그는 나를 뒤로 끌어당긴다. "이 손님을 외면해. 그러면 넌 돌아올 수 있어."
"돌아온다?"
"네 기억 속으로. 네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거기 있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는 남아 있어."
나는 뒤를 본다. 한승재의 얼굴을 본다. 그의 눈에 비친 나는 누구인가.
"넌?"
"십 년 전에 나도 선택했어. 손님을 외면했어. 내 모든 기억을 지키고 싶어서."
한승재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마치 누군가 그의 입을 막고 있는 것처럼.
"그 손님은 지금도 계속 탄다. 계속 기다린다.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그게 이 능력의 저주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객실이 움직인다.
종로3가역이 지나간다. 을지로 입구. 을지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종로5가. 종로3가.
같은 역들이 반복된다.
같은 터널 구간이 반복된다.
마치 우리가 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이 열차는 목적지가 없어."
한승재가 말한다. 그의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진다. 그는 좌석에 앉는다. 마치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선택하는 순간까지 계속 돈다. 넌 어디로 가든 같은 객실에 있어. 같은 손님과 함께."
나는 뒤를 돌아본다.
마지막 손님이 더 가까워졌다. 그림자의 형태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세계 자체가 그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준호."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른다. 그녀는 내게 다가온다. 한승재도 막지 않는다. 그녀의 손이 내 얼굴에 닿는다. 주름진 손가락이 내 뺨을 쓸어올린다.
"엄마가 여기 있어. 내가 여기 있으니까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그녀의 손을 느낀다. 따뜻함. 그 단어를 안다. 하지만 그 감각과 단어 사이에 다리가 없다.
"미안해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미안함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어머니의 눈물이 떨어진다.
박민지가 내 손을 더 강하게 쥔다. 서준영은 창밖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나를 본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인다. 내 이름을 중얼거린다. 반복해서.
"준호. 준호. 준호."
마치 이름 자체가 주문인 것처럼.
그 순간, 객실 안에 다른 존재가 나타난다.
유지현이다. 어디서 온 것인가. 객실 문은 닫혀있었고, 어떤 역도 지나가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는 거기 있다. 정장 차림으로. 그의 손이 들어올려진다. 내 방향이 아니라 마지막 손님의 방향으로.
"이제 끝이야. 넌 이미 선택한 거야. 계속 손님을 도울 거면."
유지현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는 내 능력을 빼앗으려고 한다. 나는 안다. 이 순간, 그의 손이 닿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것을.
그러나 무언가가 막힌다.
유지현의 팔이 멈춘다. 마치 무형의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는 내게 다가올 수 없다.
"뭐야!"
그의 목소리가 객실에 울린다. 그는 다시 시도한다. 한 발, 또 한 발. 하지만 매 발걸음마다 그의 몸이 옅어진다. 마치 역상을 띄운 필름처럼. 마치 이 세계에서 점점 삭제되는 것처럼.
"이건 안 돼! 이건—"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 전에, 그는 사라진다.
객실에는 다섯 명만 남는다. 어머니, 박민지, 서준영, 한승재. 그리고 나.
그리고 마지막 손님.
"그 손님은 빼앗을 수 없어."
한승재가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차분하다. "능력은 도구가 아니야. 선택이야. 타인의 선택을 강제하려는 자는 이 세계에서 축출돼. 그게 규칙이야."
한승재는 일어난다. 그리고 나를 본다. 그의 눈은 깊다. 십 년을 견딘 눈이다.
"이제 넌 진짜로 선택할 수 있어."
객실이 다시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터널이 천천히 밝아온다. 마치 새벽이 오고 있는 것처럼.
나는 뒤를 돌아본다.
마지막 손님이 이제 명확하게 보인다. 그의 형태가 선명해진다. 그의 얼굴이 보인다.
그것은 내 얼굴이다.
모든 기억을 잃은 후의 내 얼굴. 눈빛이 없는 내 얼굴. 하지만 거기에는 간절함이 있다. 절실한 소원이 있다.
'누군가 내 존재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내가 모든 손님을 도운 이유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증명을 그렇게 원했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손님 앞에서, 나는 다른 것을 본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어머니의 손. 박민지의 손. 서준영의 눈물. 한승재의 슬픈 눈빛.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내 기억이 아니라, 타인들의 기억 속에 남겨진 나. 그것이 나의 진정한 존재다.
나는 손을 내려본다.
마지막 손님의 손이 닿으려 하는데, 어머니의 손이 더 따뜻하다. 박민지의 손이 더 단단하다. 서준영의 눈이 더 절실하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박민지의 손을 잡는다. 서준영의 손을 잡는다.
내가 선택한 것은 잃어버린 기억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남은 사람들이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겨진 나. 박민지가 알고 있는 나. 서준영이 찾던 나. 이들의 기억 속에 내가 존재한다.
그 순간, 마지막 손님이 비명을 지른다.
"아니야! 내 존재를 기억해줘! 제발!"
그의 몸이 급속도로 투명해진다. 마치 세상에서 삭제되는 것처럼. 마지막 손님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진다. 하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객실이 폭발한다.
아니다. 객실이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빛으로 변한다.
나는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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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다.
아침이다. 지하철 차고지의 회전판 위에서. 아침 6시. 정상적인 지하철 차량 안에서. 아무도 없다. 단지 나와 나의 유니폼과 나의 휴대폰이 있을 뿐이다.
몸을 일으킨다. 어제 밤이 무엇이었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 손이 따뜻하다.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따뜻함이 남아 있다.
휴대폰의 화면을 켠다. 5개의 부재중 전화. 어머니에게서. 박민지에게서. 그리고 한 통은 알 수 없는 번호에서.
메시지도 있다.
어머니: "준호야, 너 괜찮아? 밤새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어."
박민지: "준호. 뭔가 있었어? 어제 밤 이상했어. 답장해."
알 수 없는 번호: "선택을 했군요. 좋은 선택이에요. —한승재"
나는 거울을 본다.
내 얼굴이 있다.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지난밤과는 다르다. 지난밤의 내 얼굴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얼굴에는 누군가의 기억이 남아 있다. 눈빛이 남아 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우리 아들.' 그 말에 담긴 확신. 박민지의 손. 내 손을 놓지 않으려던 그 힘. 서준영의 눈물. 나를 찾던 그 눈물. 이 모든 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한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기억이다. 하지만 지켜낸 것이 있다. 타인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밤 11시가 올 때까지 남은 시간은 17시간.
내가 지켜낸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밤 11시 이후, 내가 무엇이 될지 알아야 한다.
손가락을 펼친다.
따뜻하다.
여전히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