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밤 11시 이후

누군가의 손이 나를 놓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온기를 느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체온. 내 기억에서 사라진 모든 얼굴들도 이런 온기를 가졌을 거다. 어머니의 손, 박민지의 손, 서준영의 손. 그들이 나를 붙잡은 그 순간의 온기.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손가락이 기억한다. 육체가 기억한다.

객실이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속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얇아졌다. 밤 11시 59분과 자정 사이의 그 영역에서 열차는 움직이지만 도착하지 않는다. 나는 손잡이를 놓고 선로 위에 섰다. 플랫폼도 없고, 객실도 없고, 오직 철로만 있는 공간. 어둠 속에서 미래의 나—모든 기억을 잃은 나—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넌 나야."

목소리가 없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느껴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내게 전달되었다.

한승재가 말했다. "마지막이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손님을 도우면 넌 완전히 사라진다. 하지만 능력을 포기하고 그 손을 잡으면, 넌 남겨진 기억들 속에서만 살 수 있어. 어느 쪽이든 넌 끝난다."

그의 말이 맞았다. 두 선택 모두 죽음이었다. 하나는 소멸이고, 하나는 박제였다.

"결정해."

나는 손가락을 굽혔다. 그리고 펼쳤다.

**펼쳤다.**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미래의 나를 향해 손을 내밀려던 팔이 멈췄다. 팔꿈치에서부터 무게가 내려앉았다. 그것은 결정이 아니라 항복이었다.

"나는 누구야?"

내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이준호야. 어머니의 아들이고, 박민지의 동료고, 서준영을 사랑했던 사람이고, 김도현에게 쫓기던 사람이고..."

내 말이 끝나지 않았다. 객실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금속음이 아니었다. 사람의 울음소리였다.

"준호!"

어머니의 목소리가 객실 안에서 터져 나왔다. 내 기억에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몸은 기억했다. 등 위의 모든 세포가 떨렸다. 나는 객실로 돌아가려 했다. 발이 선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준호, 넌 아직도 우리 아들이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그 목소리 속에는 수십 년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어린 나를 안고 밤새 울음을 달래던 밤들. 내가 처음 학교에 간 날 현관에서 기다리던 모습. 아프던 날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던 손의 온기.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기억 못 해도 상관없어. 엄마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박민지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손 놓지 말아. 제발."

그녀의 손이 내 팔목을 잡았다. 손가락이 내 피부에 닿은 순간, 온기가 흘러들었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현재였다. 지금 이 순간의 온기. 그녀는 내 눈을 마주쳤다. "넌 내 옆에서 수백 번 웃어줬어. 난 그 웃음을 잊지 않았어. 넌 아무도 아니가 아니야. 넌 내 친구야."

서준영이 내 등 뒤에서 나를 안았다.

"돌아와."

그녀의 목소리도 내 기억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팔이 내 가슴을 누르는 순간, 뭔가 깨어났다. 감정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이 팔이 누구의 팔인지 몸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 귀에 속삭였다. "날 기억 못 해도 돼. 난 너를 기억하니까. 우리가 함께 본 모든 밤을 기억하니까."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 말이 이미 나왔다.

"나는 놓지 않기로 했어."

김도현이 플랫폼의 끝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눈만 보였다. 그 눈에는 더 이상 추적자의 냉정함이 없었다. 그저 증인의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내가 선택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기록하고 있었다.

한승재가 사라졌다.

유지현도 사라졌다.

미래의 나만 남았다. 손을 내밀고 있던 그것. 모든 기억을 잃은 내 모습. 그것이 다시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렸다. 천천히. 조용히.

객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역 방향이 아니었다. 선로가 굽어졌다. 곡선을 따라 객실은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던 지하철역이 사라지고, 터널이 사라지고, 모든 표지판이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의 팔에서 돌아섰다. 박민지와 서준영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창을 향했다.

도시가 보였다.

밤의 서울이 아래로 펼쳐졌다. 객실이 도시 위로 떠올랐다. 철로가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루어준 모든 소원들이 도시의 곳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강남역 앞 오피스텔. 그곳에서 누군가가 연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을지로의 낡은 카페. 그곳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었다.

구로디지털단지의 야근 자리. 그곳에 누군가의 편지가 도착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반짝였다. 기적들이 도시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것이 내가 한 일인지 몰랐다. 기억이 없었다.

"이게 우리가 했던 거야?"

박민지가 물었다.

"네가 했어. 너 혼자."

내가 대답했다.

객실이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정말로. 속도가 0이 되었다.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선로 끝에서.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들이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 박민지와 함께 찍은 사진. 서준영과의 추억. 임성호와 함께한 밤. 친구들의 웃는 얼굴. 모든 기억이 이미지로 보존되어 있었다.

나는 이 사진들을 감정적으로 못 본다. 하지만 누군가는 본다. 누군가는 이 이미지들을 통해 나를 기억한다.

"우리가 너를 기억하고 있어."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서 넌 여기 있어."

박민지가 말했다.

"넌 아무도 아니가 아니야. 넌 우리의 누군가야."

서준영이 말했다.

나는 휴대폰을 보았다. 화면에는 내 얼굴이 있었다. 내 얼굴이 아니라 내 얼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의 나였다. 그들의 눈에만 존재하는 나.

객실의 문이 열렸다.

밖은 밤이었다. 하지만 밤 11시가 아니었다. 그 이후였다. 시간 밖의 밤. 열린 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박민지와 서준영의 손도 놓았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객실 밖으로 나갔다. 선로 위로.

김도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옷깃에 붙어있던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것이 그의 작별인 것 같았다.

나는 선로를 따라 걸었다.

뒤에서 객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다시 도시로, 아니면 다른 곳으로.

내 발 앞에 역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는 역이 아니었다. 표지판이 없었다. 플랫폼도 없었다. 단지 선로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이 나를 보았다.

그의 눈이 나와 만났다. 나는 그의 '진짜 소원'을 감지하려고 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안녕."

그 사람이 말했다.

"난 누구야?"

내가 물었다.

"그건 넌 알아야 해."

그 사람이 웃었다. 그 웃음이 누구의 웃음인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나 자신의 웃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일도 올 거야?"

"모르지."

내가 대답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깊어질 뿐이었다.

나는 선로를 따라 걸었다. 뒤를 보지 않았다. 어머니도, 박민지도, 서준영도, 김도현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객실도 사라졌다.

오직 나와 밤만 남았다.

그리고 밤 너머에, 누군가 또 다른 소원을 품고 대기 중이었다. 내가 그들을 도울지, 내 자신을 지킬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 확실했다.

내 손가락이 따뜻했다.

누군가의 손이 나를 놓지 않고 있었다.

---

나는 선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밤이 더 깊어졌다. 선로 위의 불빛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뒤에서 앞으로. 마치 내가 걸어온 길을 지우듯이.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을 지우듯이. 하지만 어둠이 나를 삼키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다른 빛이 나타났다.

도시의 불빛이었다.

선로를 따라 펼쳐진 밤의 서울. 강남역의 오피스텔 창문들. 을지로의 낡은 카페 불. 구로디지털단지의 야근 조명. 명동의 가로등. 강변의 한강공원 불. 모든 것이 보였다. 그 불빛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깨어있었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내가 도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소원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그 순간. 강남역 앞에서 연인을 다시 만난 여자. 을지로 카페에서 죽은 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게 된 어머니. 구로디지털단지에서 갑작스러운 승진 통보를 받은 직장인. 그들의 삶이 내 선택으로 인해 구부러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그들은 기억한다. 그들의 인생에 나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내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시간이 나타났다. 밤 11시 58분.

마지막 두 분이었다.

내가 이 밤을 마무리할 시간이 거의 다 왔다는 뜻이었다. 곧 자정이 될 것이고, 지하철은 운행을 멈출 것이고, 더 이상의 손님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낮이 올 것이고, 나는 평범한 승무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제복을 입고, 안내 방송을 하고,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정말 평범할까?

나는 선로를 따라 걸었다.

역이 나타났다. 이번엔 내가 아는 역이었다. 강남역. 마지막 정차역. 나는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객실 문을 열었다.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도, 박민지도, 서준영도, 김도현도, 한승재도.

오직 내 그림자만 객실 안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객실에 들어갔다. 운전석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 그 손잡이를 수백 번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기억이 사라졌으니까. 그래도 손은 안다. 손은 이 손잡이의 형태를 기억한다. 손가락이 맞닿아야 할 곳을 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았다.

창 밖을 봤다. 밤 11시 59분.

마지막 1분이 남았다.

그 1분 동안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나? 아니면 자신으로 남는 것이었나? 둘 다인가? 아니면 그 구분이 의미 없는 것인가?

밤 12시가 되었다.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선로 위를 향해 움직였다. 역을 떠나 다시 도시로. 다시 밤의 서울로. 또 다른 손님을 태우기 위해? 아니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나는 창 밖을 봤다.

도시의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 불빛 속에는 누군가의 삶이 있었다. 누군가의 소원이 있었다. 누군가의 눈물과 웃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는 이 지하철에 탈 것이다.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들의 눈빛을 마주칠 것이다. 그들의 진짜 소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택해야 한다.

손을 내밀 것인가? 아니면 손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말을 나눌 것인가?

지하철이 또 다른 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이 비어있었다. 하지만 곧 누군가 탈 것이다. 밤 11시를 넘어선 누군가. 자신의 소원을 품은 누군가.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

객실 문이 열렸다.

밖은 여전히 밤이었다.

그 밤 속에서, 누군가 한 발을 내디뎠다. 플랫폼의 가장자리에서 객실 안으로. 그 사람의 눈빛이 나를 찾았다. 절박함이 담긴 눈빛. 이전의 손님들과 달랐다. 더 깊었다. 더 위험해 보였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쳤다.

그리고 한승재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그래도 할 거니?"

나는 입을 열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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