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 11시 정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여전히 내 손가락인지 확인하려는 듯이. 어제 밤, 미래의 내가 나를 짓눌렀던 그 손길의 무게가 팔뚝에 남아 있었다. 아니면 그런 기억도 이미 사라진 걸까.
"안녕, 준호."
객실 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 없이 그 사람은 서 있었다. 검은 코트, 흐릿한 윤곽. 그리고 나를 보는 눈빛. 그 눈빛은 나와 같았다. 정확하게는, 내가 승객들을 볼 때 느끼는 그 감각과 동일했다. 하지만 역은 아니었다. 내가 그를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데 거울이 빛을 반사하지 않는 것처럼.
"한승재."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한숨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만났네. 정식으로."
천천히 객실 중앙으로 걸어온 그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난 밤들, 이 자리에 앉았던 수십 명의 승객들처럼. 하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그의 옷깃에서는 아무 소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흘러나온 것은 침묵이었다. 깊고 오래된 침묵.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줄 알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살이야. 느린 자살."
그 말이 내 가슴을 내려쳤다. 숨이 얕아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나도 그랬어," 한승재가 계속했다. "정확히 너처럼. 밤 11시, 지하철, 손님들의 소원. 그리고 매번 나는 뭔가를 잃었어. 처음엔 뭔지 몰랐어. 그냥 기억이 흐릿해지는 줄 알았어. 하지만 어느 날 깨달았어."
그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에 빛이 떠올랐다. 아니, 빛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손바닥 위에 펼쳐졌다. 여자의 얼굴. 웃고 있는 얼굴. 그 얼굴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여기가 뭐냐면," 한승재가 말했다. "내가 남긴 마지막 기억이야. 내가 멈춘 그 순간의 기억."
손바닥 위의 여자의 얼굴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음이었지만 그 웃음이 들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이 아니라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소리도 낸다. 냄새도 낸다. 온도도 가진다.
"나는 여기서 멈췄어. 그 여자를 마지막으로. 그 다음엔 손님들을 도울 수 없었어. 손님들이 탔을 때 그들의 소원이 느껴지지 않았어. 아니, 느껴졌는데 손을 뻗을 수 없었어. 왜냐하면..."
그가 손을 닫았다. 기억이 사라졌다.
"...이 여자를 잃고 싶지 않았거든."
내 목이 말라버렸다. 침을 삼켜도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난 누구인지 기억해.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이 여자와의 모든 순간도. 너처럼 사라지지 않았어. 왜냐하면 난 멈췄거든."
한승재가 일어섰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너도 멈춰야 해. 이 밤이 마지막이어야 해. 그리고 넌 너를 지켜야 해."
내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나는 물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집착해?"
"집착이 아니야," 한승재가 답했다. "미안함이야. 내가 멈춘 후로 지난 십 년, 나는 너처럼 된 사람들을 찾아다녔어. 밤 11시, 지하철, 능력. 그들을 멈추게 하려고. 그런데 대부분 늦었어. 이미 자신을 완전히 잃은 후였어. 그들은 껍데기만 남아 있었어. 너도 마찬가지야. 시간이 거의 없어."
객실이 흔들렸다. 지하철이 커브를 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지현이 있어," 한승재가 계속했다. "그놈은 다르거든."
객실 뒤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느린, 조롱적인 박수.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네."
유지현이 나타났다. 어제와 같은 정장, 어제와 같은 표정. 하지만 오늘 밤 그의 눈빛은 다르게 빛났다. 광기가 아니라 확신. 절대적인 확신.
"넌 뭐야?" 한승재가 물었다.
"뭐라고 생각해? 나도 너처럼 능력이 있었던 사람이지.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어."
유지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넌 멈춤으로써 지켰지. 그 여자를 기억했지. 좋지, 한승재. 근데 넌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멈춘 후에도 능력은 여전히 작동한다는 거야. 너처럼 멈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능력이 약해지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아. 그리고 그 능력을 다시 깨울 수 있다는 걸 넌 몰라."
유지현이 한 발 더 가까워왔다.
"이준호. 넌 선택해야 해. 한승재처럼 멈출래? 아니면 계속할래? 근데 계속한다면 넌 결국 아무도 아니 될 거고, 멈춘다면... 멈춘다면 넌 평생 이 능력의 노예야. 왜냐하면 능력은 절대 사라지지 않거든. 계속 손님들이 탈 거야. 그리고 넌 그들을 도울 수도, 도울 수 없을 수도 없게 될 거야. 그것보다 더 끔찍한 고통은 없어."
그의 말이 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이건 협박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말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미 무언가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한승재의 손, 유지현의 손, 아니면 더 거대한 무언가의 손. 그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선택한다는 환상뿐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다른 길을 제시해. 넌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어. 그럼 넌 자유로워져. 다시 너가 될 수 있어."
유지현이 손을 내밀었다. 한승재와는 다르게, 이건 구원의 손이 아니었다. 이건 덫이었다.
"그런데 그 능력을 받을 사람이 누구냐면..."
객실 앞쪽에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탑승했다.
여자였다.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나이와 맞지 않았다. 깊고, 오래되고, 수십 년의 피로가 담긴 눈빛. 내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진짜 소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손님들의 소원과는 달랐다. 그녀의 소원은 명확했고, 단순했고, 절망적이었다.
"날 죽여 줄 수 있어?"
나는 뒤로 물러섰다. 숨이 가빠졌다. 손이 떨렸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이건 이전의 손님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왔다.
"내 이름은 이준호야."
나는 얼어붙었다.
"뭐라고?"
"내 이름은 이준호야. 그리고 넌 나야. 더 정확하게는, 넌 나가 되려던 너야."
그녀가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깊은 비탄이 있었다.
"난 너처럼 모든 손님의 소원을 들어줬어. 십 년. 그리고 난 완전히 사라졌어. 내 이름도 잊었어. 내 얼굴도 잊었어.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그래서 난 새로운 이름을 가져야 했어. 내가 누구인지 다시 찾기 위해서. 그래서 난 이준호가 됐어. 네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객실이 회전했다. 아니, 내 머리가 회전했다. 내가 본 미래의 나. 그것이 바로 이 여자라는 말인가.
"그리고 이제 넌 나처럼 될 차례야. 유지현이 말한 대로, 넌 능력을 누군가에게 넘겨줘야 해.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녀가 손을 펼쳤다.
"...나야."
객실이 어두워졌다. 형광등이 모두 꺼졌다. 오직 그녀의 손바닥에서만 빛이 나왔다. 그 빛은 나의 기억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목소리. 첫사랑의 얼굴. 모든 것.
그리고 그 순간, 객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아들! 아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내 기억 속에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었다. 오직 음파로만 들렸다.
어머니가 객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나를 봤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낯선 여인이었다. 이 여인이 나와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은 알 수 있었다. 그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었다. 기억 없이도 흐르는 눈물이었다.
"당신 누구예요?"
내가 물었다. 최악의 질문이었다. 가장 끔찍한 말이었다.
어머니가 한 발 물러섰다. 그 한 발이 내 가슴을 부수는 것 같았다.
"아들... 넌 정신을 차려. 뭐 해? 왜 엄마를 낯선 사람처럼 봐?"
"미안해요. 난..."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 뭔가 기억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없는 사랑. 그것이 무엇인가. 감각은 있으나 정서적 연결이 끊긴 상태. 어머니의 손을 봤다. 손가락 마디가 굳어 있었다. 오랫동안 뭔가를 만들어온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이 만들어낸 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그 냄새가 누구의 것인지, 어디서 난 것인지, 내가 언제 맡아봤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은 감각을 따라오지 못했다. 내 눈은 그녀를 보지만 내 마음은 그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사랑할 대상을 인식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도 그 눈물의 이유를 모르는 것.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그 순간, 객실의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음 역, 홍대입구입니다. 홍대입구입니다."
정해진 안내였다. 정해진 목소리였다. 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여기 있었다. 객실 안에서 어머니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목소리는 역 이름을 안내하고 있었다.
두 개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있는 시간과 내가 없는 시간. 내가 선택하는 시간과 내가 선택당하는 시간. 그 두 시간이 겹쳐가고 있었다.
객실의 문이 열렸다. 자동으로. 아무도 누르지 않았는데. 객실이 역에 정차했다. 아무도 정차를 지시하지 않았는데.
홍대입구역의 승강장이 보였다. 텅 빈 승강장이었다. 밤 12시 10분. 아무도 있을 리 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승강장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박민지. 서준영.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수십 명의 사람들.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민지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나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고마움이 아니었다. 원망이었다. 내가 그녀를 도왔으면서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
"가?"
유지현이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객실 어딘가에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그녀의 기대를.
"당신은?"
나는 한승재를 봤다. 그는 내 옆에 서 있었다. 미래의 나도 여전히 손을 펼친 채 있었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난... 뭘 해야 해?"
나는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객실이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대입구역을 떠나면서.
그 순간, 한승재가 내 귀에 속삭였다.
"넌 아직도 선택할 수 있어. 단 하나의 선택이 남아 있어. 마지막 손님을 도울지, 아니면 자신을 지킬지. 그 선택이."
"그런데 마지막 손님은?"
내가 물었다.
한승재가 내 눈을 봤다. 그의 눈동자에 반사된 것은 내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아주 낯선 얼굴이었다.
"그건... 너야."
객실 스피커에서 다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음 역, 강남역입니다."
강남역. 모든 것이 시작된 곳. 첫 번째 손님을 도왔던 곳. 나의 어머니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곳.
객실이 강남역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승강장에서 누군가가 탑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였다. 아니,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내가 될 수도 없었던 누군가.
객실 내 상황이 더 명확해졌다. 한승재는 내 왼쪽에 서 있었다. 미래의 나는 객실 중앙에서 손을 펼친 채 기억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유지현은 객실 뒤쪽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객실 입구 근처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객실 중앙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뭘 할 거야?"
미래의 나가 물었다.
"너의 마지막 손님이 탑승하려고 해. 그리고 그 손님의 소원은..."
그녀가 손을 더 크게 펼쳤다. 손바닥에서 나오는 빛이 더욱 강해졌다. 그 빛은 내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치 사진이 바래는 것처럼.
"...너를 완전히 지우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다시 너가 될 수 있게. 그래서 난 내가 될 수 있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대답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손을 펼치고 있었다. 마지막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능력이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아들... 내 아들..."
그 울음이 내 가슴을 부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뭘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누군가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구는 선택할 수 없다. 도구는 오직 사용될 뿐이다.
객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마지막 손님이 탑승했다.
그 손님은 나를 바라봤다. 검은 정장, 차가운 눈빛. 유지현과 같은 냉정함이 흘렀다.
그리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