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질서의 균열

김도현은 모니터 앞에서 여덟 번째를 돌려봤다. CCTV 영상 시간대 11시 43분. 승객 탑승 기록이 없는데 객실에 남자가 앉아 있다. 화면을 더블클릭했다. 11시 40분. 11시 30분. 그 남자는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승차 기록 없이 객실에만 존재한다.

그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건 말이 안 돼."

입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크고 날카로웠다. 지하철역 기술실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지난주 지하철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떠올랐다. 강남역에서 청년 최준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투신 직전에서 돌아섰다. 종로3가에서 노부부가 50년 만에 재회했다. 이태원역에서 직장 상사가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고 울었다. 모두 밤 11시 이후였다. 모두 지하철 내에서였다. 모두 이준호가 탑승한 객실에서였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중심에 이준호가 있었다.

김도현은 다시 한 번 영상을 재생했다. 이준호의 얼굴이 프레임에 들어왔다. 제복 깃이 정돈되어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뭔가를 보고 있었다. 승객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이준호의 몸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승객의 어깨에 닿았다. 그 다음 장면은 끝이었다. 영상이 끝났다.

김도현은 영상을 멈추고 한 장면을 캡처했다. 이준호의 얼굴. 그의 눈빛 안에 뭔가가 있었다.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결정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것은 범죄가 아니었다. 이것은 도움이었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

밤 11시 15분, 지하철 객실.

이준호는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차갑다. 아침부터 손이 차가웠다. 기억의 온도가 내려갈 때마다 신체도 함께 식어가는 것 같았다. 어제는 무엇을 잃었을까. 내일은 무엇을 잃을까. 이런 질문들이 계속되면 언제쯤 완전히 없어질까.

객실 문이 열렸다.

"이준호."

김도현이 들어왔다. 제복을 입지 않았다. 사사로운 방문이라는 뜻이었다. 이준호는 그를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것을. 눈빛이 달랐다.

"뭐 하세요?"

이준호의 목소리는 일정했다. 승무원의 목소리였다.

김도현은 한 걸음 더 들어왔다. 객실 문이 닫혔다. 밤 11시의 지하철은 사실상 두 사람만의 공간이었다.

"넌 뭐야?"

단도직입적이었다. 김도현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지난주 강남역. 영상 봤어. 승객 탑승 기록이 없는데 객실에 있더라. 종로3가도 마찬가지고. 이태원도. 모두 너랑 관련이 있어. 그리고 그 이후로 뭔가 일어났어. 도시 전체에서. 말이 안 되는 일들이."

김도현의 손가락이 펼쳐졌다. 스마트폰 화면이 이준호의 얼굴에 맞춰졌다. CCTV 영상이었다. 이준호가 손을 뻗고 있는 모습. 그 손가락 끝에 뭔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빛인지, 그림자인지.

"이건 뭐야? 카메라 오류? 아니면... 넌 뭔가 특별한 거야?"

이준호는 영상을 봤다.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그 손가락이 누구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손가락이었는지 알았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일을.

"저는... 단지 승무원일 뿐입니다."

"거짓말이야."

김도현이 한 발 더 다가왔다. 이준호는 한 발 물러났다.

"내가 본 것들은 거짓말이 아니야. 네 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거짓말이 아니야. 그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거짓말이 아니야. 그들은 울고 있었어. 그들은 웃고 있었어. 그들은 뭔가 받았어. 그리고 그 대가가... 너한테 가고 있는 거 같아."

이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넌 변했어.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 눈빛이 비어 있어. 마치...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데 거울이 없는 사람처럼. 그리고 나는 경찰이야. 이상한 일들을 보는 게 내 일이야."

김도현은 스마트폰을 내렸다. 이준호를 똑바로 봤다.

"넌 뭔가 잘못된 거야. 넌 그걸 알아?"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 해. 제발. 넌 자신을 파괴하고 있어."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김도현의 얼굴이 변했다. 진지함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이준호는 처음 봤다. 경찰 김도현의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것. 연민이었다.

김도현의 입가가 떨렸다. 한두 번 말을 꺼냈다 닫았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난 너를 잡을 수 없어. 왜냐면... 넌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 않으니까. 오히려... 넌 희생하고 있어. 그게 더 무서워. 왜냐면 넌 멈추지 않을 테니까."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한테 경고하는 것뿐이야. 계속 이러다 가면, 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될 거야. 단지 손가락만 남는 거야. 누군가를 도와주는 손가락만."

김도현은 스마트폰을 다시 들었다. 화면을 넘겼다. 사진들이 떴다. 강남역 청년의 가족 재회 사진. 종로3가 노부부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 이태원역 직장 상사가 눈물로 얼굴을 적신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

"이 사람들이 뭘 얻었는지 봐. 그리고 넌 뭘 잃었는지 생각해 봐. 이게 공평한 거 같아?"

이준호는 사진들을 봤다. 그들의 행복한 얼굴. 그들의 눈물. 그들의 재회. 모두 자신의 손가락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잃었다. 첫사랑의 얼굴을 잊었다.

"난 널 감시할 거야. 넌 그걸 알아. 그리고 언젠가 넌 내게 진실을 말할 거야. 그때까지... 최대한 오래 견뎌. 알겠어?"

김도현은 돌아섰다. 객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하나 더. 넌 혼자가 아니야. 널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도 넌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 그들의 눈빛 봤어? 그건 사랑이야. 그걸 잃지 마."

그는 나갔다. 객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정말 떨렸다. 그 손가락들이 만들어낸 것들. 그 손가락들이 빼앗아간 것들. 모두가 자신의 것이었다.

---

밤 11시 32분.

박민지는 강남역 플랫폼 끝에 서 있었다. 담배를 물고 있었다. 최근 피우기 시작한 담배였다. 이준호를 도와줄 방법이 없을 때 손가락이 할 일이 필요했다. 담배는 그것을 채워줬다.

그녀는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이준호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을까. 반년 전이었다. 지하철 경영진 교육 프로그램에서. 그때 이준호는 웃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 눈빛을 좋아했다.

지금, 그 눈빛은 없었다.

박민지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폐 깊숙이 연기가 들어왔다. 잠시 숨을 참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와 함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플랫폼의 모니터들이 시간을 표시했다. 밤 11시 34분.

박민지는 담배를 끝까지 피웠다. 필터까지. 입술이 따가웠다. 그녀는 담배를 내버렸다. 신발로 밟았다. 재가 흩어졌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이준호'라는 이름이 떴다. 박민지는 놀라 휴대폰을 들었다.

"준호?"

통화를 연결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단지 바람 소리만 들렸다. 지하철이 달리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누군가의 숨소리.

"준호, 넌 뭐 해?"

박민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민지... 난 지금..."

이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목을 빌려 말하는 것 같았다.

"넌 뭐 해? 왜 전화를 한 거야?"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내 능력이 아직 남아 있는지. 내가 아직 나인지."

박민지는 말을 잃었다.

"그런데 넌 뭐 해? 왜 플랫폼에 있어?"

이준호가 물었다.

"나는... 너를 찾으러 왔어. CCTV를 확인해 봤어. 지난 일주일간 너가 탄 모든 열차의 영상을. 너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그걸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박민지는 플랫폼 끝의 CCTV 카메라를 가리켰다. 작은 카메라였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우리가 있다고. 날 봐. 우리가 너를 보고 있다는 걸. 넌 아직도 누군가의 친구야."

박민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지하철 교육 프로그램에서 늦게까지 남아 커피를 마시던 날. 그가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던 밤. 그의 웃음이 자신을 얼마나 따뜻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넌 누군가의 아들이야.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야."

객실 반대편에서 이준호는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있었다. 그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박민지... 고마워."

"그럼 이제 멈춰. 제발. 더 이상 아무도 도와주지 마. 넌 이미 충분히 했어."

박민지가 말했다.

"알았어."

이준호가 대답했다. 그 말은 약속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함께 떠올랐다. 정말 멈출 수 있을까. 멈춰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멈추는 게 가능할까.

통화가 끝났다.

박민지는 휴대폰을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플랫폼은 여전히 밤 11시 3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는 변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무언가는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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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38분.

이준호의 어머니 최지은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아들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없었다. 지난 일주일간 아들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이름도 몰랐다. 목소리도 몰랐다. 마치 낯선 사람처럼.

최지은은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에 아들의 얼굴이 떴다. 프로필 사진. 예쁜 웃음이 담겨 있었다. 언제의 사진이었을까. 그 웃음이 언제 사라졌을까.

그녀는 휴대폰을 내렸다. 대신 노트북을 켰다. 아들의 의료 기록에 접근했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받은 모든 검진 기록. 예방접종 기록. 그리고 지난 일주일간의 기억 손실 패턴.

최지은은 데이터를 분석했다. 스프레드시트 위의 숫자들이 일정한 리듬을 그리고 있었다. 아들이 기억을 잃는 시간. 매번 밤 11시 이후. 매번 정확히 같은 간격.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화면 속 패턴이 너무나 명확했다.

그것은 자발적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의도가 담긴 타이머였다.

최지은의 호흡이 빨라졌다. 손이 떨렸다. 그녀는 기록을 프린트했다. 종이가 프린터에서 나올 때마다 결연함이 생겼다. 이 데이터가 증거가 될 것이다. 의학적 근거가 될 것이다. 아들을 지킬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다.

최지은은 현관으로 나갔다. 밤의 서울이 그녀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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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2분.

서준영은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지만 마시지 않았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표면에 얇은 막이 생겼다.

테이블 위에는 사진이 있었다. 이준호와 자신의 사진. 대학 축제 때. 그 남자가 웃고 있었다. 정말 순수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그 사진을 들었다. 바라봤다.

"잘 지내? 내 얼굴 아직도 기억해?"

혼잣말이었다. 누구도 듣지 않을 혼잣말.

그녀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눈물이 사진 위에 떨어졌다.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너...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서준영은 사진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를 보는 것이 너무 아팠다. 그의 눈빛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너무 아팠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최지은'이라는 이름이 떴다. 이준호의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서준영이 통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이준호의 어머니예요. 혹시 우리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아뇨,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이상한 걸 발견했어요. 우리 아들의 기억 손실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어요. 밤 11시 이후로만 일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시간대에 지하철을 타고 있어요. 혹시 아시는 게 있어요?"

서준영은 순간 깨달았다. 이준호가 밤 11시 이후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그의 기억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

"어머니, 저 지금 준호를 찾으러 갈게요. 그 기록들을 가지고 있으세요?"

"네, 가지고 있어요."

"그럼 저랑 함께 지하철역으로 가요. 우리가 함께라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준영은 사진을 들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카페를 나갔다. 밤의 서울을 향해.

---

밤 11시 48분.

지하철 객실은 다시 텅 비었다. 이준호는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김도현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박민지의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_"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될 거야. 단지 손가락만 남는 거야."_

_"넌 아직도 누군가의 친구야. 누군가의 아들이야.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야."_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 그 손가락들이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의 뭔가가 사라졌다. 어머니의 목소리. 첫사랑의 얼굴. 친구들의 이름. 모두.

하지만 이제 무언가가 달랐다.

박민지가 플랫폼에 있었다. 최지은이 의료 기록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준영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찾고 있었다. 그를 도와주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

객실 문이 열렸다.

남자가 탔다. 정장을 입은 40대 정도의 남자. 하지만 이준호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일반 승객이 아니라는 것을. 눈빛을 마주쳤을 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의 승객들은 눈빛 안에 소원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비어 있었다. 깊고 검은 우물처럼.

"이준호, 맞지?"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네?"

"난 유지현이야. 넌 나처럼 특별한 거 알아?"

유지현이 이준호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다. 마치 시간을 의도적으로 늘리고 있는 것처럼.

"뭘 말씀하는지..."

"장난치지 마. 넌 알아. 넌 뭔가를 할 수 있지. 사람들의 소원을 현실로 만드는. 그리고 그 대가로 뭔가를 잃어. 맞지?"

이준호의 입이 다물어졌다.

유지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깨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도 그랬어. 한때는. 넌 내가 걸었던 길을 지금 따라가고 있어."

유지현의 눈빛이 변했다. 깊은 검은색에서 더욱 진해졌다. 마치 자신의 능력을 포기한 대신 뭔가 다른 것을 얻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당신은... 뭐예요?"

"너처럼 특별한 사람이었던 사람. 하지만 난 선택했어. 멈추기로. 그리고 그 대신 다른 것을 얻었어."

"다른 것?"

"자유. 그리고 힘. 넌 계속 도와주다가 자신을 잃어갈 거야. 하지만 난 다른 방법을 찾았어. 그 능력을 누군가에게 넘기는 거지."

유지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넌 이미 중독되었어.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에. 그 쾌감에.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모든 도움에는 대가가 있어. 그리고 그 대가는 항상 누군가에게 간다. 너는 그 누군가가 너라는 걸 이제 알았어. 근데 계속 할 거야. 왜냐면 멈추는 게 더 무서우니까."

"당신이 뭐를 아세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넌 정말 모르겠니? 난 너의 미래야. 너의 선택이 만든 결과. 난 이미 겪었으니까. 그리고 넌 지금 내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고 있어."

객실이 어두워졌다. 조명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난 너한테 제안이 있어."

유지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 능력을 내게 넘겨줄래? 그럼 넌 더 이상 잃지 않아도 돼. 대신 난 그걸 가지고 뭘 할지 알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넌 자유로워질 거야."

이준호는 그 손을 봤다. 검은 우물 같은 눈빛. 비어 있는 표정. 그리고 자신의 미래라고 주장하는 이 남자의 손.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능력을 잃으면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손을 잡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계속 무언가를 잃어갈 것이다. 결국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다.

"만약 안 한다면?"

이준호가 물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항이었다.

"그럼 난 다른 방법을 쓸 거야. 그 능력을 빼앗을 수도 있고. 아니면... 넌 계속 도와주다가 자신을 완전히 잃을 거야. 둘 중 하나. 그리고 어느 쪽이든 넌 결국 내게 올 거야."

유지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선의의 미소가 아니었다. 확신의 미소였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계산한 사람의 미소.

그 순간, 객실 문이 열렸다.

한승재가 들어왔다. 그는 유지현을 봤다. 유지현은 한승재를 봤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준호는 깨달았다. 한승재가 유지현과 같은 종류의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유지현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됐어."

한승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오래전에 정해진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그것은 이준호의 선택을 강제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미?"

유지현이 일어섰다. 그는 이준호를 한 번 더 봤다. 그의 눈빛에는 기대와 위협이 함께 담겨 있었다.

"생각해 봐. 그리고 내일 밤에 답을 줘. 아니면... 내가 답을 대신 정해줄게."

유지현이 객실을 나갔다. 한승재는 그를 따라가는 척했지만,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이준호를 봤다. 그의 눈빛에는 동정과 경고가 섞여 있었다.

"넌 선택해야 해.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유지현도 알아. 난 왜 이 시간을 정했는지도. 그리고 그 약속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거야."

한승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경고였다. 또는 동정이었다. 이준호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넌 혼자가 아니야. 그걸 잊지 마."

한승재가 나갔다.

이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객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제 그 조용함은 고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폭풍 앞의 침묵이었다. 선택을 강요하는 침묵이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 손가락들이 만들어낸 것들. 그 손가락들이 빼앗아간 것들. 그리고 그 손가락들이 아직도 할 수 있는 것들.

그는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 끝에서 희미한 빛이 흘렀다.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직도 가능했다. 그 능력은 여전히 그의 것이었다.

밤 11시 52분. 지하철은 계속 달렸다. 어디론가. 끝이 없는 어딘가로.

플랫폼에서는 박민지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지하철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역 입구에서는 최지은과 서준영이 만났다. 의료 기록과 사진을 들고. 그들은 함께 지하철로 내려갔다. 아들을 찾기 위해. 그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객실 안에서는 이준호가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가락에서 흐르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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