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기억의 파편

밤 열 시 오십 분.

지하철 1호선 승무원실의 형광등이 울린다. 나는 명단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손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떨린다. 손가락 끝이 자주 떨린다. 언제부터였지? 일주일 전? 아니면 더 오래전부터?

기억이 안 난다.

휴대폰을 꺼냈다. 갤러리를 열었다. 어머니 사진. 서준영 사진. 친구들 사진. 사진만 있다. 얼굴은 있는데 감정이 없다. 마치 교과서에 붙어 있는 역사 인물 사진처럼.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는데, 왜 이 사람과 함께했는지는 모른다. 왜 이 사람이 나에게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린다. 팔뚝까지 경련이 내려온다.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지 않는다. 한 박자 걸렸다가 두 박자 뛴다. 내 몸이 나를 배신하고 있다. 아니다. 나 자신이 나를 배신하고 있다.

오후 여섯 시, 박민지가 전화했다.

"너 지금 뭐 해?"

"퇴근 준비."

"내가 갈게.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박민지는 오후 여덟 시에 내 집 앞에 섰다. 현관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그냥 섰다. 나는 감시카메라로 그녀를 봤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나는 문을 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뭐 해?"

"집 가."

"뭐라고?"

"가. 지금."

전화를 끊었다. 박민지는 오 분을 더 섰다. 그리고 돌아갔다. 나는 감시카메라로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자주만큼 떨렸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떨리게 한 건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도 떨리게 하는데.

오후 아홉 시, 어머니가 왔다. 열쇠로 문을 열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내 집의 열쇠를 갖고 있었다.

"준호."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감정 없는 음파다. 나는 안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누군지도. 하지만 그 관계의 온기는 0도다.

"뭐야."

"넌 엄마를 잊어가고 있지?"

나는 부인했다. 하지만 부인하는 목소리 자체가 거짓이었다.

"아니."

"거짓말하지 마. 엄마 목소리를 못 들으면서? 엄마 얼굴을 자꾸 사진으로만 보면서?"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내 소파에. 그녀는 그곳에 앉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권리의 무게를 나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뭐 일어난 거야? 무슨 약을 먹었어? 정신과?"

"아니."

"그럼 뭐야?"

나는 거실로 나갔다. 어머니를 마주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나 밤 열한 시에 출근해야 해."

"지금 아홉 시 오십 분인데?"

"준비가 오래 걸려."

나는 침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오후 열한 시, 나는 지하철 객차에 혼자 있었다. 마지막 열차는 항상 내 것이었다. 내가 탈 때는 없었던 사람들이 나타나는 객차. 나는 그들의 눈빛을 마주치고, 그들의 진짜 소원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준다. 그리고 무언가를 잃는다.

이번엔 뭘 잃을까?

여섯 번째 손님이 탔다.

칠십 대 여성. 회색 머리. 등이 굽어 있었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고등학교. 교실. 창밖. 누군가의 웃음. 햇빛. 나는 책상에 앉아 있고, 누군가가 내 등을 친다. 따뜻한 손. 따뜻한 웃음. 따뜻한 햇빛.

모두 사라진다.

그녀의 진짜 소원이 무엇인지 나는 알았다.

'평생 숨겨온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느꼈다. 그녀가 누굴 해쳤다는 것. 그녀가 누굴 외면했다는 것. 그녀가 누굴 버렸다는 것. 그 모든 비밀이 가슴 속에서 부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면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거라는 희망이 그녀를 이 객차로 끌어왔다는 것.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주세요."

그녀는 입술을 떨리며 말했다.

"내 아이... 아이를..."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았다. 교실의 햇빛이 사라지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비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에게 미칠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도시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편지를 열었다. 삼십 년 만에. 그 편지는 자신의 어머니가 쓴 것이었다. 그는 울었다. 그리고 용서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내려갔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고마워요."

그녀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나는 혼자 남겨졌다.

손이 떨렸다. 팔이 떨렸다. 다리가 떨렸다. 전신이 경련했다. 고등학교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누구와 앉아 있었나? 누가 내 등을 쳤나? 그 사람이 누구였나?

기억이 없다.

아니다. 기억이 있다. 하지만 감정이 없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고등학교를 다녔던 것처럼. 마치 내가 나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일기장 앱을 열었다. 내가 쓴 글들이 있었다. 매일 밤 나는 무언가를 기록했다. 왜? 무엇을 잃을까봐?

글을 읽었다.

'오늘 어머니의 목소리를 잃었다.'

'오늘 서준영의 얼굴을 잃었다.'

'오늘 친구들의 이름을 잃었다.'

'오늘 고등학교를 잃었다.'

내가 쓴 글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나는 느껴진다. 이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글이 아닐까 하는 의심. 나는 누가 이런 글을 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썼을 리가 없다.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일 리가 없다. 내가 이렇게 무너지는 사람일 리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내 글이다. 내 손이 썼다. 내 감정이 흐르고 있다. 아니다. 내 감정이 흐르지 않고 있다.

한승재가 탔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넌 뭔가 잃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뭔지 알아?"

여전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자신이야. 그런데 넌 아직도 모르지? 이 모든 게 왜 일어나고 있는지."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이 내 뼈까지 스며들었다.

"넌 지금 누군가를 위해 기억을 잃고 있는 게 아니야. 넌 너 자신을 찾기 위해 잃고 있는 거야."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내 얼굴과 겹쳐 보였다. 아니, 겹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같은 얼굴이었다.

"곧 알게 될 거야. 정말 곧."

그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밤 열두 시 십 분, 김도현이 나타났다.

역 승강장에서.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빨리 내려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안 된다. 돌아보면 그 눈빛이 내 마지막 남은 기억도 빼앗아갈 것 같았다.

거리로 나왔다. 밤의 서울. 밤의 거리. 밤의 나.

휴대폰이 울렸다. 서준영이었다.

"우리 정말 좋은 친구였어. 뭐 일어난 거야?"

목소리가 울음섞여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네, 우리 좋은 친구였어. 하지만 난 너를 모르겠어. 난 너의 얼굴이 뭐였는지 모르겠어. 난 너와 뭘 했는지 모르겠어.

나는 전화를 끊었다.

골목을 헤맸다. 어디로 가야 할까? 집? 아니다. 집에는 어머니가 있다. 직장? 아니다. 직장에는 박민지가 있다. 그들은 모두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밤의 거리에서 멈췄다.

거울 같은 건물의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이 사람이 나일까? 내가 이 모습일까? 내가 이렇게 창백했나? 내가 이렇게 텅 비어있었나?

나는 내 얼굴을 모른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박동한다. 손가락이 경련한다. 몸 전체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누구인가?

지하철 승무원 이준호.

하지만 그게 뭔데? 그 이름이 누굴 가리키는데? 내가 그 이름을 가지기 전에 나는 누였는가? 내가 그 이름을 잃기 전에 나는 누였는가?

---

집으로 돌아간 건 새벽 세 시였다.

어머니는 거실의 소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이 켜져 있었다. 텔레비전은 음소거 상태. 그녀는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준호."

그녀의 목소리는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엄마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 목소리가 나를 안아주던 온기는 없었다. 남은 것은 음파뿐이었다.

"어디 있었어? 밤새 전화했어. 응답이 없고..."

그녀가 일어났다. 나에게 다가왔다. 내 팔을 잡았다.

"넌 내가 누군지 모르는 눈을 하고 있어."

내 침묵이 대답이었다.

"엄마가 뭐 잘못했어?"

그녀의 목소리가 깨졌다. 눈물이 맺혔다.

"정말 뭐 잘못했길래 내 아들이 이러는 거야?"

나는 그녀의 손을 벗어났다. 침실로 들어갔다. 뒤에서 그녀가 무언가를 더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들을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갤러리를 열었다. 사진들이 떠올랐다. 엄마 사진. 서준영 사진. 친구들 사진. 직장 사진. 거리 사진.

사진 속의 내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르겠다.

---

아침이 왔다.

나는 밤새 자지 않았다. 누워만 있었다. 천장만 봤다. 아침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휴대폰에 문자가 있었다. 박민지였다.

"너 괜찮아? 요즘 좀 이상해. 퇴근 후에 집에 올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또 다른 문자. 서준영이었다.

"미안해. 어제 전화할 거 아니었어. 근데 진짜 뭐 일어난 거야? 혼자가 아니야. 혼자 싸우지 마."

또 다른 문자.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이준호. 난 누군가? 너는 나를 알아야 한다. 밤 11시에 만나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나는 그 문자를 다섯 번 읽었다. 그 문자가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심장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새벽 여섯 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밤 열한 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열일곱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집을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갔다. 낮의 지하철은 평온했다. 사람들이 오갔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누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확신이 있었다.

플랫폼을 걸었다. 역무실 쪽으로 갔다.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제 그대로 입고 있었다.

"이준호?"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김도현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자세히 봤다. 내 눈을 들여다봤다.

"뭐 일어났어? 얼굴이..."

"괜찮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목소리가 낯설었다. 이 목소리가 내 목소리일까?

"아니, 정말 괜찮아? 며칠 전부터 뭔가 이상한데..."

그는 내 팔을 잡았다.

"너 뭐 하고 있는 거야? 정말로."

그의 목소리에 진정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지하철에서 뭐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는 나를 돕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누가 나인지 모르는데, 누가 날 도울 수 있을까?

"정말 괜찮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벗어났다.

그는 내 팔을 다시 잡았다.

"준호. 너 정말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러면 안 돼. 뭐라도 말해. 뭐든."

그의 눈빛에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내가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절망. 나를 잃어가는 것 같은 절망.

"마지막 열차를 타지 마."

그가 갑자기 말했다. 내 팔을 더 세게 잡았다.

"제발. 준호. 밤 열한 시 이후로는 지하철에 타지 마. 제발."

"왜요?"

"그냥... 그냥 타지 마. 뭔가 이상해. 너 이상해. 그리고 그 열차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보는 눈이 흔들렸다.

"제발. 내 말을 들어."

나는 그의 손을 벗어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밤 열한 시.

나는 다시 지하철에 탔다.

객차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맨 뒤 자리에 앉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이준호. 난 누군가? 너는 나를 알아야 한다. 밤 11시에 만나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마지막.

그 단어가 내 가슴을 짓누렸다.

한 명의 승객이 탔다.

노인 여성이었다. 회색 머리, 주름진 얼굴, 구부러진 등.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그녀의 진짜 소원이 무엇인지.

"평생 숨겨온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입을 열지 않았는데,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영혼의 목소리가.

"아무도 모르는 비밀.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만이라도 말해주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말씀해주세요."

그녀는 입술을 떨리며 말했다.

"내가 누구의 아이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정말 누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엄마가 날 낳고 버렸어요. 난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지금까지 내가 누인지 모르고 살았어요."

그녀는 계속 말했다.

"내가 누구의 딸인지 알고 싶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 죽기 전에 한 번만... 내가 누인지 알고 싶어요."

나는 그 순간을 알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내가 이 노인의 소원을 이루어주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완전히 잃을 것이다. 그것은 내 정체성의 마지막 조각이 될 것이다. 그 이후로는 내가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거절하려 했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거절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소원을 외면하고 내 마지막 조각을 지킬 수 있었다. 내 정체성의 마지막 흔적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니, 나는 깨달았다.

그녀가 나와 같다는 것을. 그녀도 자신이 누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오래, 훨씬 더 깊은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내가 거절하면 그녀는 영원히 자신을 잃은 채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루어주면, 그녀는 마지막이라도 자신이 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죽음 직전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잃든, 그녀가 얻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것.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하나씩 잃으면서 느낀 공포와 절망을 통해.

"이루어드리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객차가 밝아졌다.

도시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 노인의 기록을 찾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노인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 노인의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만났다. 처음으로.

"엄마. 엄마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가 정말 너의 딸이야?"

"내 딸이지. 넌 내 딸이야."

두 사람이 안았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내 고등학교 시절이 사라지는 것을.

그 시절의 모든 것이. 친구들의 웃음이. 첫사랑의 손을 잡던 그 느낌이. 나를 정의하던 그 시간들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다. 그 시절을 누군가와 함께 보낸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이준호일 뿐이다. 이름만 남은 껍데기.

---

밤 열한 시 이십 분.

객차는 다시 텅 비었다.

나는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내 이름은 이준호다.

하지만 이준호는 누구인가?

나는 모른다.

진짜 모른다.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나는 받았다.

"이준호."

한승재의 목소리였다.

"이제 넌 충분히 잃었어. 이제 넌 나를 만날 준비가 되었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 난 너를 찾으러 온 사람이야. 넌 나를 알아야 해. 왜냐하면 난 너처럼 잃어본 사람이거든."

"제가... 누굴 잃었나요?"

"넌 지금까지 남을 잃은 줄 알았지? 하지만 넌 너를 잃었어. 넌 지금 너 자신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어. 그리고..."

그는 멈췄다.

"그리고 이제 곧 깨달을 거야. 이 모든 일의 진짜 이유가 뭔지. 넌 누군가를 위해 기억을 잃은 게 아니야. 넌 너 자신을 찾기 위해 잃고 있는 거야. 너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마치 내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그리고 이제 넌 준비가 됐어. 이제 넌 나를 만날 준비가 됐어."

전화가 끊겼다.

객차가 흔들렸다.

다시 한 명의 승객이 탔다.

어두운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검은 머리. 창백한 얼굴. 내 얼굴.

그는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각 발걸음이 객차를 울렸다. 그는 내 옆에 앉았다. 아니, 앉은 것이 아니라 겹쳐졌다. 마치 두 개의 영상이 포개어지는 것처럼.

"안녕, 이준호."

나는 그를 봤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이것이 진짜 끝이라는 것을.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내 미소와 정확히 같았다.

"넌 아직도 모르지? 넌 아직도 자신이 누인지 모르지?"

"당신은... 누구죠?"

"난 너야."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와 겹쳤다.

"난 너의 미래야."

그는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내 손과 만나는 순간, 나는 느꼈다. 두 손이 하나로 녹아드는 것을. 우리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그리고 난 너의 처음이기도 해."

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와 동시에 울렸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내 귀에 들어왔다. 아니,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이미 같은 사람이었다.

객차가 밝아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가 이루어준 모든 소원들. 다섯 번의 소원. 다섯 번의 기억 손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나를 찾기 위해 기억을 버렸다. 나는 나를 완성하기 위해 나를 해체했다. 그리고 지금 모든 조각이 모아졌다.

하지만 그 조각들이 만드는 형태는 무엇인가?

나는 한 사람인가, 아니면 두 사람인가?

그 순간, 객차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내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말한 적 없는 말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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