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4화 「추적의 시작」

밤 11시 정각, 지하철 객차는 나만의 무대였다.

문제는 무대 위에서 나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거였다.

어제는 어머니의 목소리였고, 그제는 첫사랑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제 밤—친구 태준이의 웃음소리. 사진 속에 그의 얼굴은 있지만,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의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엄마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어도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그저 글자일 뿐이었다.

"이준호, 괜찮아? 요즘 엄마한테 인사도 안 하고... 뭔가 있으면 말해줄 수 있겠어?"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남의 소원을 현실로 만드는 대신 내 자신을 하나씩 빼앗기고 있다고. 그걸 누구에게 말하나.

열차가 강남역에 멈췄다. 승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나는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했다. 제 목소리였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하철 승무원 이준호의 그것. 자동화된 음성.

밤 11시 3분.

남은 승객은 다섯 명. 아니, 여섯 명이었나?

누가 탔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기억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의 영혼이 울부짖는 소원—그것만은 명확했다.

객차의 맨 뒤 좌석에 앉은 여자가 있었다. 50대 후반, 옷이 구겨진 채로. 그녀의 눈빛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알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가 나를 용서해줬으면 좋겠어.*

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죄책감, 후회,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슬픔.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네?"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 눈물을 받아주기로 결정했다.

결정하는 순간, 세상이 뒤틀렸다.

강남역 승강장의 추모관. 그곳에서 누군가 그녀의 아이 사진 앞에서 울고 있었다. 한 젊은 남자. 아마 그녀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중얼거렸다.

*엄마... 미안해. 난 엄마를 용서했어. 진작에.*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어린 시절 기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안아주던 엄마의 팔. 그 팔의 감촉이 사라졌다. 온기가 없어졌다. 나는 알고 있다—엄마가 나를 안았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객차의 손잡이를 쥐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남은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차는 다시 움직였다. 강남역을 떠났다.

밤 11시 14분.

다음 승객은 남자였다. 35세쯤 되어 보였다. 회사 로고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 있었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검었다. 그의 눈빛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또 알았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줬으면 좋겠어.*

그의 소원은 돈이 아니었다. 승진도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 그를 보아주고, 그의 가치를 인정해주길 원했을 뿐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투명한 존재였다. 나처럼.

나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순간, 그의 직장 사무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사무실 중앙, 그의 책상 위에 대형 모니터가 놓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떠 있었다.

*김준식 대리, 올해 최우수 사원*

그 순간 사무실의 모든 동료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박수가 울렸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준식이 정말 잘했어. 이번 프로젝트 전부 준식이 덕분이야."

그는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다가 결정했다.

그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기로.

그 순간, 내 안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끊어졌다.

이번엔 뭐가 사라졌을까.

나는 깨닫지 못했다. 단지 가슴 한구석이 후끈거렸고, 그 자리에는 공허함만 남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술 마시던 날이었다. 태준이와 함께 강남역 근처 포장마차에 앉아 있던 나.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고 우렁찬 그 웃음. 하지만 그 웃음을 지을 때 그의 얼굴이 어땠는지—그 표정이 사라졌다. 음성만 남고 얼굴은 지워졌다. 마치 누군가 사진에서 얼굴만 오려낸 것처럼.

나는 손을 떨며 휴대폰을 들었다. 태준이와의 사진을 찾았다. 함께 웃고 있는 우리. 하지만 그의 표정은 더 이상 생생하지 않았다. 이미지로만 존재했다.

"고마워요."

그 남자도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는 웃음을 지었다. 자동화된 미소.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그가 내렸다. 플랫폼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남았다.

밤 11시 23분.

객차 내 CCTV가 내 얼굴을 기록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휴대폰이 울렸다. 박민지였다.

"준호야. 지금 어디야? 요즘 자꾸 연락이 안 되는데..."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2분 후, 또 다른 전화. 엄마였다.

"아들, 밥 먹었어? 요즘 자주 못 봐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1분 후, 또 다른 전화. 김도현이었다.

"이준호.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이번엔 다른 톤이었다. 위협이 아닌 것 같았다. 걱정. 실제 걱정.

나는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정말? 그럼...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필요 없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그때였다.

객차에 한 명이 더 탔다. 나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검은 옷, 냉정한 눈빛. 그는 나를 보았다. 아니, 관찰했다.

그의 눈빛이 내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나는 그의 진정한 소원을 감지하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의 눈빛 뒤에 숨겨진 욕망이 파도처럼 밀려왔을 텐데. 그 영혼의 울음이 내 안에 울려 퍼졌을 텐데.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그의 눈빛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또는 너무 많아서 내가 감지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안녕, 이준호."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당신 누구세요?"

"날 아는 건 아직 이르지."

그는 웃었다.

"다만 너는 뭔가 특별한 사람 같아. 그게 뭔지... 궁금하지 않아?"

나는 뒤로 물러섰다.

"당신이 뭘 원하는 거예요?"

"너 같은 사람."

그가 말했다.

"너처럼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 그 방법이 뭔지 알고 싶어. 아니면... 그 방법을 나도 배우고 싶어."

나는 침을 삼켰다. 공포감이 솟구쳤다.

"모르겠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너는 사람들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 수 있지. 그 대신 뭘 잃어가고 있고."

그가 한 발 더 다가왔다.

"하지만 내가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건 이거야. 정말로... 계속 잃어야 하는 거야?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내 심장이 멈췄다.

"뭐... 뭘 말하는 거예요?"

"말해줄 수 있어. 너처럼 되는 법. 누군가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법."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려면 먼저 날 따라와. 그럼 모든 게 명확해질 거야."

나는 그의 손을 보았다.

그 손에 잡혀가면, 나는 어떻게 될까.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나는 결정해야 했다.

그의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나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안 됩니다."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문으로 향했다. 플랫폼으로 나가려고. 그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잠깐."

그가 팔을 잡았다.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이었다.

"너는 자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선택할 기회가 있어. 지금이 그 순간이야. 내 말을 들어봐."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의 눈빛은 차갑지만 진지했다. 마치 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그 말이 맞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 자신을 잃고 싶었던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 능력을 사용하고 있던 건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 하지만 완전히 밀어낼 수 없었다. 그것이 나를 흔들었다.

"당신이 뭔지 모르니까 못 따라갑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플랫폼의 찬 공기가 내 얼굴을 때렸다.

열차는 다시 움직였다.

그 남자는 창문 너머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마치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이.

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역 밖으로. 밤거리로.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 37분.

내가 마지막 열차를 놓쳤다. 아니, 의도적으로 내려왔다.

밤거리는 조용했다. 강남역 주변의 오피스텔이 저 멀리 반짝였고, 편의점의 형광등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한 발 한 발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

휴대폰이 울렸다.

박민지였다.

이번엔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준호야."

"네."

"너 지금 어디야? 음성으로 위치 켜줄래?"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요즘 넌 자꾸 이상해. 밤마다 어디 가고, 전화도 안 받고, 직장에서도 멍때리고..."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다른 감정이 있었다. 두려움.

"민지, 미안해."

"미안하는 것보다 말해. 뭐가 문제야? 혹시 누가 너한테 뭔가 한 거야?"

내가 대답하려던 순간, 옆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준호."

어머니였다.

밤 11시 40분. 강남역 앞 거리에 어머니가 나타났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엄마는 이 시간에 집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 있었다. 겉옷을 대충 입은 채. 박민지가 위치를 물어봤을 때 어머니도 함께 움직였던 것이었다. 아들을 찾기 위해 밤거리로 나온 것이었다.

"엄마? 뭐 하는 거예요?"

휴대폰을 귀에서 떼었다. 박민지의 목소리가 물었지만 들리지 않는 척했다.

"너 밤마다 나가잖아. 엄마가 따라왔어."

최지은. 내 어머니.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낯설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음파.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랐다. 눈물이 맺혀 있었다.

"따라오시면 안 돼요."

"왜? 뭐가 그렇게 비밀이야? 너 뭔가 나쁜 일에 빠진 거 아니야?"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아들, 말해줄래? 엄마한테."

나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렸다. 그게 얼마나 잔혹한지 깨달으면서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하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는 알아. 넌 변했어. 넌 더 이상 내 아들 같지 않아. 뭔가... 자꾸 멀어지는 것 같고."

내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그것도 빠르게 흐릿해졌다. 내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어서.

"엄마, 집 가세요."

"아니야, 넌 먼저 나한테 말해."

그녀는 놓지 않았다. 팔을 잡은 손.

"뭔가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줄래? 제발."

그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간절함을 충분히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이미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도, 그 말에 담긴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음파일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풀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하지만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들..."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걸어갔다. 자신의 어머니를 뒤에 남겨두고. 그녀의 울음이 들려도 귀를 막은 채.

밤거리는 더 추웠다.

내 휴대폰은 계속 울렸다. 박민지. 김도현. 그리고 이름 없는 번호들. 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답할 말이 없었으니까.

나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형광등의 밝은 빛이 나를 맞이했다. 편의점 직원은 나를 보고 눈을 돌렸다. 심야 시간의 손님은 그런 것이었다. 존재하지만 무시되는.

나는 커피를 샀다. 마실 생각은 없었다. 단지 뭔가를 들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창밖으로 밤거리를 봤다. 강남역 앞 거리. 여기저기 사람들이 있었다. 밤 11시 50분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움직이고 있었다. 술 취한 직장인, 집에 가는 야근 직원, 밤새 돌아다니는 청년들.

그들 모두가 내 손님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나.

하지만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닐 거였다.

"혹시 괜찮으면 앉아도 돼?"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내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려고 했다.

박민지였다.

"어? 민지? 뭐 하는 거예요?"

"뭐 한다고? 너 따라왔지. 엄마한테 위치 물어봤어. 그 다음에 여기 찾았어."

그녀는 내 대면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너 정신 차려.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니까."

"민지, 미안해. 난..."

"미안하지 말고 말해. 뭐가 문제야? 정말 말할 수 없는 거야?"

그녀의 눈빛은 예리했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동료의 눈빛. 하지만 그 아래에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내가 알지만 말할 수 없는 무언가.

"민지. 넌... 나한테 뭔가 물어본 적 있잖아. 내가 뭔가 빠뜨린 게 없냐고."

"응. 요즘 자주 멍때리니까."

"맞아. 난 뭔가를 잃어가고 있어."

나는 말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실의 일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뭘 잃어가고 있어?"

"기억. 사람. 나 자신."

박민지는 침을 삼켰다.

"그게 뭔 소리야?"

"난... 할 수 없는 말이 있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이 얼마나 잔혹한 거절인지 알면서도.

그녀는 나를 오래 바라봤다. 마치 내 얼굴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듯이.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알겠어. 그럼 이것만 기억해 줄래? 넌 혼자가 아니야. 뭐가 됐든 말이야."

그녀가 내 손을 쥐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물리적 접촉만 감지할 뿐, 그것이 전하는 감정까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들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면.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말고 조심해. 정말."

그녀는 일어섰다. 그리고 떠났다.

편의점은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이미 식은 커피.

휴대폰을 봤다. 밤 11시 58분.

2분이 남았다.

지하철역으로 가야 했다. 다시 마지막 열차로.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편의점을 나갔다. 강남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플랫폼은 거의 비어 있었다. 몇 명의 야근 직원들만 있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였다. 어딘가 가야 하는데, 왜 가는지는 모르는.

마지막 열차가 들어왔다.

나는 탔다.

객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한 명이 있었다.

그 남자가 또 있었다.

"안녕, 이준호. 난 한승재야. 앞으로 우리 자주 만날 것 같으니까 이름이라도 알아두는 게 좋을 거 같아."

한승재.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당신이 뭔지 알 때까지 안 따라가겠습니다."

"알겠어. 그럼 천천히 보여줄게. 뭐가 진짜인지."

그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준호, 너는 이미 깨달았어야 해. 넌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면서 자신을 잃는 게 아니야."

"뭔 말이에요?"

"넌 원래부터 자신을 잃고 싶었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 욕망을 현실화하는 거. 이 능력은 그걸 위한 도구일 뿐이야."

내 심장이 멈췄다.

"그게... 뭔 소리예요?"

나는 그의 말을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거부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신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소원을 들어주고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내 안에 그것을 원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이.

"시간이 되면 알게 될 거야."

그가 일어섰다. 그리고 문 쪽으로 갔다.

"아, 그리고 준호. 다음부터는 도망치지 마. 넌 이미 충분히 잃었어. 이제는 뭘 되돌릴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해."

문이 열렸다.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했다.

한승재는 내렸다.

나는 혼자 남았다. 다시.

객차는 다시 움직였다. 밤의 도시를 가로지르며. 그리고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거울 속 사람은 누구였나.

내 이름은 이준호였고, 내 직업은 지하철 승무원이었고, 내 나이는 27살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엇이었나.

나는 알 수 없었다.

밤 11시 59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라고 떴다. 누구였을까. 박민지? 엄마? 아니면 다른 누군가?

나는 받지 않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았다. 누구에게 연락할 것인가. 누구에게라도 연락할 수 있는가.

그 순간, 객차의 문이 다시 열렸다. 다음 역에 도착했다. 누군가 탑승하려는 실루엣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것이 누구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열차는 계속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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