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거울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있었다.

비스듬한 조명 아래 비친 내 얼굴이 자꾸 낯설었다. 이마의 주름, 눈 밑의 그림자, 입가의 선—분명히 내 것인데 왜 자꾸 남의 얼굴처럼 느껴질까. 손가락으로 거울 속 관자놀이를 눌렀다. 까슬한 피부 감각이 전해졌다. 살아 있는 감각인데도 마치 남의 몸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준호야, 엄마다. 너 지금 뭐 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서 온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귀에는 그저 음파일 뿐이었다. 따뜻함도, 그리움도, 그 어떤 정서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말 자체는 들렸지만 그 뒤의 감정은 영구적으로 폐기된 상태였다.

"아, 네. 괜찮습니다."

"요즘 자주 안 보이는데, 뭐 있니? 일이 바빠?"

"네, 그런 편입니다."

나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마치 낯선 사람과 예의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전화 너머에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작은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럼 몸 조심해. 밤 근무 많지?"

"네, 조심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후 나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봤다. 얼굴은 여전히 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 뒤에 누가 있는지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

그날 오후, 박민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직원 휴게실에서 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강남역, 을지로, 구로디지털단지—그곳들이 모두 어딘가 다르게 보였다. 마치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여행지처럼.

"준호."

박민지가 내 옆에 앉았다.

"뭐해?"

"그냥... 노선도를 보고 있었어."

"노선도를 봐? 이걸 몇 번 돌렸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노선도를 내려놓았다.

"민지, 혹시 내가 최근에 뭐 달라 보여?"

"달라고? 넌 자꾸 멍때리고 있어. 거울 봤어? 눈빛이 죽어 있어. 그리고 자주 사람들을 잊는 것 같아. 강남역에서 탄 여자 있잖아. 넌 그 사람한테 자꾸 "처음 뵙겠습니다" 이러던데, 우린 그 사람 세 번 이상 봤어."

나는 답하지 못했다. 박민지가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정말 뭐 일어난 거야? 너 요즘 완전 딴 사람 같아. 혹시 병 있는 건 아니야?"

"아니야, 그냥..."

"그냥 뭐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억 손실이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민지, 만약에...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자신을 파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민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라고 했어?"

"아니야, 그냥..."

"준호. 뭔가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진짜 미칠 것 같아. 넌 요즘 뭔가 숨기고 있어.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

오후 8시쯤 서준영이 카톡을 보냈다.

*"요즘 어때? 오래 못 본 것 같은데 한 번 만날래?"*

나는 메시지를 읽었다. 그 이름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의 사진첩을 열었다. 서준영이라고 표기된 여자의 사진들이 있었다. 카페에서, 강변에서, 영화관 앞에서. 그녀와 함께 웃고 있는 내 사진들이었다.

하지만 감정이 없었다.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내가 저 사람과 가까웠구나. 하지만 그 온기, 그 감정의 온도는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남은 것은 정보뿐이었다. 이름, 얼굴, 추억의 좌표—하지만 추억 자체는 없었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요즘 바빠서 미안. 괜찮으면 나중에 만나자."*

그리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

밤 1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하철 차량 안은 한적했다. 밤 11시 이후 마지막 열차는 항상 이랬다. 낮의 붐빔은 사라지고, 깊은 적막만 남았다. 나는 통로를 돌아다니며 손잡이를 정리했다.

그때 플랫폼에서 누군가 탔다.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검은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고, 그의 손목에는 희미한 흉터들이 보였다. 그는 맨 뒤 자리에 앉았다.

나는 차량 점검을 위해 그 근처를 지나갔다. 그 순간, 그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보통의 승객들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가 그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절망. 마지막. 끝.

나는 멈췄다.

그의 진정한 소원이 흘러들어왔다. 목소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감정의 파동처럼.

*누군가 나를 구해줬으면 좋겠어. 이 모든 것에서. 이 삶에서.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또 다른 기억을 잃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 더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영구적으로 사라진다. 이미 어머니의 목소리는 음파로만 존재했고, 서준영은 사진 속 낯선 여인이 되었다. 친구들과의 추억도 흐릿해졌다.

이번에 이 청년을 도우면, 내가 정말 누구인지 하나 더 잃을 것이다.

나는 그 청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 하세요?"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세요?"

"당신은...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네."

그 순간, 도시 어딘가에서 기적이 시작되었다.

청년의 손목에 그려진 흉터들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그것들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강남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그 청년의 친구가 문득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걸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친구가 생각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 친구는 그 전화를 받았고, 눈물을 흘렸다.

지하철은 다음 역에 도착했다.

청년은 일어나 내려갔다. 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 안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

휴대폰을 들었다. 사진첩을 열었다. 친구들 사진이 있었다. 김준석이라고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대학 시절, 캠퍼스, 술자리, 여행. 그런데...

감정이 없었다.

그저 정보일 뿐이었다. 나는 이 사람과 가까웠다. 아, 그렇구나.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웃음도, 대화도, 그 모든 온도가 증발했다.

남은 것은 이름과 얼굴뿐이었다.

---

밤 11시 30분쯤, 한승재가 탔다.

그는 항상 같은 시각에, 같은 차량에 탔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정해진 시간표인 것처럼.

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다른 승객들과는 달랐다. 그의 눈빛에서 나는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의 진정한 소원, 그의 깊은 욕망—그 어떤 것도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또는 내가 감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한승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를 평가하는 듯한 표정. 그리고 다음 역에서 내려갔다.

---

김도현이 지하철역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CCTV 영상 출력본이 들려 있었다. 그는 나를 찾아 다니다가 역 플랫폼에서 나를 발견했다.

"이준호."

그가 나를 불렀다.

나는 돌아섰다. 그의 눈빛에는 의심과 무언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이거 봤어? 승객이 탈 때는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나. 이게 뭐야? 어떻게 설명할 거야?"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의 눈을 보았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뭔가 다른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의심만은 아니었다. 두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준호. 넌 뭐하고 있는 거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김도현은 영상을 내려놨다. 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괜찮아. 넌 그냥 조심만 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

퇴근 후, 집 욕실의 거울 앞에 섰다.

밤 11시 45분이었다.

거울 속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눈, 코, 입. 분명히 이준호라는 이름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 뒤의 사람은 누구인가.

어머니의 목소리는 음파가 되었고, 첫사랑은 사진이 되었고, 친구들은 이름표가 되었다.

내가 남은 것이 무엇인가.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낯설어졌다. 마치 내가 누군가를 계속 도와주다 보면, 결국 나는 이 거울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저 빈 껍질만 남을 때까지.

손을 거울에 대었다. 차가운 유리가 느껴졌다.

"내가 누구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도 낯설었다.

---

밤 11시 58분.

휴대폰이 울렸다. 한승재였다.

"이준호."

"네?"

"다음 열차가 올 거야. 또 다른 손님이 탈 거야. 그리고 넌 또 도와줄 거지?"

"어... 어떻게..."

"넌 계속할 거야. 왜냐하면 그게 넌 유일하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렇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됐어. 다음 열차를 봐."

통화가 끊겼다.

---

밤 12시 정각.

마지막 열차가 들어왔다.

플랫폼에 누군가 올라탔다. 또 다른 절망한 눈빛. 또 다른 소원. 또 다른 기억의 대가.

나는 천천히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 발걸음이 내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정말 잃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 밤 11시 지하철의 손님들 - 3화

굴뿐이었다.

---

밤 11시 30분쯤, 한승재가 탔다.

그는 항상 같은 시각에, 같은 차량에 탔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정해진 시간표인 것처럼.

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다른 승객들과는 달랐다. 그의 눈빛에서 나는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의 진정한 소원, 그의 깊은 욕망—그 어떤 것도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또는 내가 감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한승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를 평가하는 듯한 표정. 그리고 다음 역에서 내려갔다.

---

박민지가 차량 내에서 나를 붙잡았다.

퇴근 후, 지하철 역사의 좁은 통로에서였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한 발짝 물러섰다.

"준호. 진짜 뭐 일어난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가?"

"뭐가가 아니고. 넌 계속 멍때리고, 자꾸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눈이 흔들려. 요즘 자주 어머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고, 휴대폰에서 손을 못 떼고 있어. 뭔가 빠뜨린 게 있는 거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소리였다.

나는 웃음을 지었다. 어색한 웃음. "아니야. 그냥 피곤한 거겠지."

"거짓말하지 마. 우리 몇 년을 함께 일했는데."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우리가 정말 몇 년을 함께했나. 그 시간들이 내 기억 속에 정확하게 남아 있나.

"민지, 우리 처음 만난 게 언제였지?"

박민지의 얼굴이 굳어졌다. "갑자기 왜 그걸..."

"그냥 궁금해."

"3년 전 지하철 승무원 신입 교육에서 앉은 자리가 옆자리였어. 기억 안 나? 넌 그때 내 볼펜을 빌려갔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기억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나에게 말해준 이야기를 다시 듣는 것 같았다.

"민지."

"뭐?"

"나한테서 뭔가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박민지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 온기가 내게까지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병원 가. 진짜. 이런 말 하지 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

어머니의 전화가 울렸다.

밤 10시경, 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준호? 엄마야."

"네, 엄마."

"최근에 엄마를 잘 못 본 것 같은데, 뭐 있어?"

나는 밥을 삼켰다. "아니에요. 그냥 일이 바빠서."

"목소리가 이상한데. 뭐 아파?"

"아뇨. 괜찮습니다."

통화 너머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길고 조용한 숨. 마치 무언가를 참으려는 숨.

"준호. 혹시... 엄마한테서 뭔가 멀어진 거야?"

그 말에 나는 밥 숟가락을 놨다. "뭐가요?"

"뭐가 아니고. 엄마 감이 그래. 넌 엄마를 잊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들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 뒤의 감정이, 그 음파가 나를 흔들지 못했다.

"준호?"

"네. 사랑합니다. 엄마."

그 말도 공허했다.

---

강남역 근처의 카페에서 서준영을 만났다.

그녀가 먼저 연락했다. 문자로. "한 번 만날까?"

나는 왜 그 메시지에 응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가 그녀를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그녀의 얼굴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동안에.

"준호."

카페의 테이블에서 그녀를 보았다. 얼굴은 선명했다. 하지만 그 얼굴과 함께 흘러야 할 감정이 없었다.

"안녕."

나는 앉았다.

"우리 정말 친했잖아. 뭐 있어? 요즘 자주 피하는 것 같은데."

"피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뭐야? 넌 내 눈을 제대로 안 맞춰.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

나는 그녀의 눈을 봤다. 그 안에는 진심이 있었다.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하지만 그것이 나를 흔들지 못했다.

"서준영."

"응?"

"우리 처음 만난 게 언제예요?"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슬픈 웃음. "진짜 뭐 하는 거야. 대학교 동아리 회의에서 만났잖아. 넌 그때 내 노트를 떨어뜨려주고 줍는 척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기억이 정말 내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내게 말해준 이야기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미안해. 나... 기억을 잃고 있는 것 같아."

서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내가 누구였는지. 넌 누구였는지. 우리가 뭐였는지. 전부."

그녀의 눈이 빨개졌다. "그럼 병원 가. 진짜. 그게 웃음거리가 아니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페의 테이블 위에서 우리는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

밤 11시 정각.

지하철 마지막 열차에 탔다. 내 유일한 무대로 돌아왔다.

플랫폼에는 한 명의 청년이 올라탔다.

나이는 스물다섯 정도. 수척한 얼굴. 손목에는 무언가가 감싸여 있었다. 팔찌인 척 감싼 흰 밴드. 그 아래로는 흐릿한 흔적이 보였다.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내 안으로 파도가 밀려왔다. 그의 진정한 소원이. 표면적인 바람이 아닌, 영혼 깊은 곳의 울음이.

'누군가 나를 구해줬으면 좋겠다.'

그것이었다.

자살을 생각하는 누군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누군가. 그의 손목의 흔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 그를 도와주면, 내가 또 무엇을 잃을까. 어머니의 목소리, 첫사랑의 얼굴, 친구들과의 추억—그 다음은 뭘까. 내 이름인가. 내 얼굴인가. 내 존재 자체인가.

그런데도 나는 그를 봤다. 그의 절망한 눈빛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누가 해줄까.

나는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그가 나를 봤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지하철 승무원입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알아요.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나는 압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밴드 아래의 흔적이 느껴졌다. 차갑고 건조한 피부. 그 위에 내 따뜻한 손을 올렸다.

"누군가가 당신을 구해줄 거예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

청년이 내려가는 플랫폼을 봤다.

그리고 거기에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나이는 오십대 정도. 청년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청년은 그 여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안겼다.

그 순간, 청년의 손목의 흰 밴드 아래로 있던 흔적이 사라졌다. 마치 그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것을 봤다.

도시의 한 모서리에서 벌어진 작은 기적. 누군가의 인생이 미세하게 변곡하는 순간.

그리고 나는 동시에 느껴졌다.

내 기억이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을.

---

열차가 다시 움직였다.

나는 객실의 한 구석에 앉았다.

휴대폰을 꺼냈다. 갤러리를 열었다.

친구들의 사진이 있었다. 김준석. 이상호. 박준우. 그들과의 사진들.

하지만 그 사진 속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왜 이 사람들과 친했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뭘 함께했지?'

사진 속의 얼굴들이 낯설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인 것처럼.

나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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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50분.

나는 욕실의 거울 앞에 섰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거울을 마주쳤다.

거울 속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눈, 코, 입. 분명히 이준호라는 이름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 뒤의 사람은 누구인가.

어머니의 목소리는 음파가 되었고, 첫사랑의 얼굴은 사진이 되었고, 친구들은 이름표가 되었고, 대학 시절의 모든 추억은 공기가 되었다.

내가 남은 것이 무엇인가.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낯설어졌다. 마치 내가 누군가를 계속 도와주다 보면, 결국 나는 이 거울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저 빈 껍질만 남을 때까지.

손을 거울에 대었다. 차가운 유리가 느껴졌다.

"내가 누구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도 낯설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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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이 울렸다.

밤 11시 58분.

발신자는 한승재였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이준호."

"네?"

"다음 열차가 올 거야. 또 다른 손님이 탈 거야. 그리고 넌 또 도와줄 거지?"

목소리에 이상함이 있었다. 마치 미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어조.

"어... 어떻게..."

"넌 계속할 거야. 왜냐하면 그게 넌 유일하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렇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정확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시간이 다 됐어. 지하철 역에 나가. 다음 열차를 봐."

통화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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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2시 정각.

마지막 열차가 들어왔다.

나는 플랫폼에 내려갔다.

그리고 열차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올라탔다.

또 다른 절망한 눈빛. 또 다른 소원. 또 다른 기억의 대가.

나는 천천히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 발걸음이 내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밀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또는 내가 자발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 구분이 점점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정말 잃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열차의 문이 닫혔다.

그 안에서 또 다른 기적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무언가를 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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