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과 정체성의 붕괴
병실의 천장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됐을까. 시간의 개념이 이미 무너져 있었다. 의료 기록 파일의 종이가 손끝에서 끊임없이 떨렸다. 10년 전. 교통사고. 외상후 해리성 정체감 장애.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윤태희 의사는 병실을 나갔고, 나는 혼자였다.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구부러졌다. 왼손부터. 약지와 중지가 먼저 움직였다. 그 다음 오른손.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누군가 나의 신체를 조종하는 것처럼. 거울을 들었을 때 내 얼굴이 아닌 다른 표정이 보였다. 웃음. 아니,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
"이제 알았지?"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 내 음성대에서 울려 나왔지만, 그것은 절대 내 것이 아니었다. 더 깊고, 더 날것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최유라를 본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의 기억 속에."
그 말을 들은 순간, 나의 팔이 움직였다. 침대 옆 테이블에서 기억복원 장비를 집어 들었다. 내 손이 아니라 다른 손이. 다른 의지가. 나는 저항했지만 신체는 따르지 않았다. 의료용 센서를 관자놀이에 부착했다. 기계가 켜졌다.
"한 번 더 봐. 제대로 이번엔. 목격자의 눈으로."
그 목소리는 명령이 아니었다. 초대였다. 자신의 세계로의 초대.
기억의 진입. 기계음. 그리고 암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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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의 기억이 풀렸다.
강남역 인근 오피스텔의 복도. 시간은 밤 11시 56분. 최유라가 현관 앞에서 열쇠를 찾고 있었다. 손가락이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두운 회색 후드티. 검은 장갑.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목격자는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피해자의 목덜미. 그 아래의 맥박. 손가락이 어디로 향하는지.
최유라가 고개를 돌렸다.
"어... 누세요?"
최유라의 동공이 확장됐다. 손에 들었던 핸드백이 떨어졌다.
범인의 입이 열렸다.
"정의는 없어."
목격자는 그 말을 들었다. 정확히 같은 억양으로. 정확히 같은 음정으로. 마치 누군가 반복해서 중얼거린 말처럼.
손이 최유라의 목을 압박했다. 손가락이 경동맥을 누르고 있었다. 최유라의 시야가 흔들렸다. 산소 부족. 뇌의 혈류 차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인 것—
거울.
현관 옆 벽에 붙은 작은 거울에 비친 범인의 얼굴. 눈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웃고 있었다. 최유라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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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의 천장이 다시 보였다. 의료 기록 파일이 손에서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내 손이—
내가—
"아니야."
목소리가 나왔다. 내 목소리였다. 진짜 내 목소리.
"아니야. 난 이러지 않았어."
거짓말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기억이 말하고 있었다. 목격자의 기억이.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거울을 잡았다. 침대 옆에 있던 작은 거울. 내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 내 눈이 아니었다. 입이 웃고 있었다.
"이제 알았지? 넌 살인자야."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넌 20명을 죽였어. 그리고 난 그들을 기억하고 있어. 넌 자꾸만 지우려고 했지만, 난 계속 남아 있어."
내가 거울을 내팽개쳤다. 유리가 깨졌다. 조각이 바닥에 흩어졌다.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의료 기록 파일에 있던 내용. 기억을 읽을 때마다 현재의 기억이 사라진다고 했다.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었나. 방금 전 일이 무엇이었지. 거울이 깨졌다. 그 다음은?
곧 간호사들이 들어올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이 떨렸다. 관을 뽑았다. 의료용 센서가 떨어졌다. 모니터가 경보를 울렸다.
문이 열렸다. 간호사 두 명이 들어왔다.
"환자님, 진정하세요. 침대로 돌아가세요."
나는 창문을 봤다. 8층. 아래로는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누군가 나를 찾고 있었다. 한지은이. 박철수가. 그들은 나를 알았다.
간호사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주사를 맞아야 해요. 진정제입니다."
나는 침대 옆의 의자를 집어 들었다. 간호사들이 멈췄다. 나는 창문을 향해 던졌다. 유리가 깨졌다. 밤바람이 들어왔다.
8층. 떨어질 수는 없다. 하지만 밖으로는 나갈 수 있다. 복도. 계단. 그 아래 주차장.
나는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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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지하 2층 주차장. 나는 숨을 고르려고 했지만 고를 수 없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내 차는 어디에?
열쇠를 찾았다. 주머니에 있었다. 왜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차가 울렸다. 3열 앞. 검은색 제네시스.
나는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울렸다. 백미러를 봤다.
거기 또 다른 나가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실제로 앉아 있었다. 내 옆에. 같은 얼굴을 한 또 다른 나.
"이제 준비됐지?"
그것이 말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줄 시간이야."
주차장의 보안 게이트가 올라갔다. 내가 누른 것도 아닌데. 멀리서 사이렌이 들렸다. 경찰차. 여러 대.
나는 악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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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은은 경찰청 회의실에서 증거를 정렬하고 있었다. 사진들. 문서들. 이준호의 기록들. 3년간의 20건 사건 파일. 모두가 같은 패턴을 보였다.
박철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뭔가 찾았나?"
"네, 부서장님."
한지은이 사진을 펼쳤다.
"20건 사건의 모든 현장에서 이준호의 기억복원 능력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사건마다 목격자의 기억 속에 같은 인물이 나타났어요."
그녀가 또 다른 사진을 펼쳤다. 범행 현장의 증거물들. 검은 장갑.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노트. 이준호의 집에서 발견된 것들.
"모두 이준호의 것입니다."
박철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이것."
한지은이 마지막 파일을 열었다. 최유라의 기억 기록. 그 안에 적힌 문장.
"목격자의 기억 속 범인이 한 말입니다. '정의는 없어.' 이것은 이준호가 자신의 심리 기록에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던 표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박철수가 의자에 앉았다.
"이준호가 모든 범인이었다는 건가?"
"다른 인격입니다. 외상후 해리성 정체감 장애. 10년 전 교통사고 이후 나타난 증상입니다."
사이렌이 울렸다. 밖에서. 경찰청 건물 밖에서. 검은색 제네시스가 경찰차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도시의 밤을 가르며 달아나는 차. 그 안에 앉은 사람. 이준호.
박철수가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모든 차량에 지시한다. 용의자 이준호를 확보하라. 위험 인물이다. 무장 대응 준비."
한지은은 모니터를 봤다. 이준호의 차가 강남대로로 나왔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뒤에서 경찰차들이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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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조사실.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대면에는 박철수가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신뢰했던 부하가 연쇄살인범이었다는 현실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자백해."
그가 말했다.
"모든 것을."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오는 건 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의는 없어."
박철수가 뒤로 물러났다. 신뢰에서 배신감으로, 배신감에서 공포로. 그의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준호... 넌..."
"나는 이준호가 아니야."
조사실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변했다. 눈이 검어졌다. 입이 웃음으로 뒤틀렸다.
"우린 같은 거야."
그 목소리. 내 목소리. 하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20명. 모두 정의를 거스른 자들이었어."
다른 인격이 말을 이었다. 조사실의 조명이 깜빡였다. 내 시야가 흐릿해졌다. 또 얼마나 많은 기억을 잃었나. 지금 이 순간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최유라는 피해자의 증언을 조작했고, 김준호는 증거를 은폐했고, 이수진은..."
거울 속에 또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웃음. 그리고 광기.
"우린 그들을 처벌했어. 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박철수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공포가 그의 얼굴을 잠식했다.
"그게 정의라고 생각하나?"
나의 진짜 목소리가 나왔다. 이준호의 목소리. 절망으로 가득 찬.
"아니야. 난... 난 그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어."
손가락이 떨렸다. 기억이 또 사라지고 있었다. 이 조사실에 들어온 게 언제였지. 박철수가 뭐라고 했지. 내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가 섞여 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이 안 된다.
조사실의 거울 앞에서 두 개의 눈이 마주쳤다. 하나는 절망으로 가득했고, 하나는 광기로 빛났다.
"넌 약해. 그래서 나를 만들었어."
다른 인격이 웃음을 터뜨렸다.
"10년을 기다렸어. 넌 자꾸만 정의를 찾으려고 했지만, 정의는 없었어. 그래서 나는 만들어졌어. 정의를 만드는 손으로."
조사실의 조명이 다시 깜빡였다. 그 순간 거울이 흔들렸다. 내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거울을 향해.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것이 하고 있었다.
"이준호!"
박철수가 소리쳤다. 무력감이 그의 목소리를 떨게 했다.
"이준호, 손을 빼!"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팔이 거울에 닿았다. 유리가 갈라졌다. 손가락이 갈라진 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통증이 아니라 다른 감각이 흘러들었다.
또 다른 세계.
어두운 공간. 그 안에서 20개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죽인 사람들. 내가 아닌 것이 죽인 사람들. 구분이 없어졌다.
"정의는 없어."
내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하지만 우린 계속 남아 있을 거야."
내 팔이 거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유리 조각이 팔을 베었다. 피가 흘렀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준호!"
박철수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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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복도에서 한지은이 조사실의 녹화 영상을 봤다. 그 안에서 벌어진 일. 이준호의 얼굴이 변했다. 표정이 바뀌었다. 눈의 광채가 달라졌다.
그것은 이준호가 아니었다.
"저것이... 다른 인격?"
한지은의 옆에 선 윤태희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상후 해리성 정체감 장애. 이준호 안의 또 다른 인격. 10년을 기다려온 인격이 이제 완전히 표면으로 올라왔어요."
영상 속에서 조사실의 조명이 깜빡였다. 그 순간 거울 속의 모습이 두 개로 보였다. 이준호. 그리고 그것.
"우리를 분리할 수 없어. 우린 하나야."
목소리가 겹쳤다. 두 목소리가 동시에.
"그리고 이제 세상도 알 거야."
한지은의 손이 떨렸다. 영상 속에서 이준호의 손이 거울에 닿았다. 유리가 갈라졌다. 손가락이 갈라진 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조사실에서 비명이 들렸다. 깨지는 소리. 그리고 경찰들의 외침.
한지은이 달렸다.
조사실 문을 열었을 때, 그곳은 비어 있었다.
테이블만 남아 있었다. 의자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거울.
거울의 유리는 갈라져 있었다. 손가락이 들어갔던 자리.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손은 없었다.
거울 조각들 사이로 또 다른 세계가 보였다. 어두운 공간. 그 안에서 두 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한지은은 거울을 봤다. 그 안의 눈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초대하듯.
"정의는 없어."
거울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린 계속 있을 거야."
윤태희 의사가 한지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를 거울에서 멀리 떨어뜨리려는 듯.
"보지 마. 그것을 보면 안 돼."
하지만 한지은의 손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거울을 향해. 의지와 무관하게. 마치 누군가 그녀의 손을 조종하는 것처럼.
박철수가 그녀를 잡았다.
"한지은, 물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또 다른 피해자를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
하지만 한지은의 손가락이 거울 조각에 닿았다. 그 순간, 거울 속의 눈들이 밝아졌다.
조사실의 모든 거울이 깨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