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울 속의 진실
의료팀의 백의가 내 시야를 채웠다. 병원 침대 위에서 나는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은 내 팔에 주사를 꽂고 있었다. 파란색 플라스틱 팔찌에는 '이준호·32세·의식 혼란·기억 소실'이라 적혀 있었다. 기억 소실. 그 단어가 자꾸 내 눈에 들어왔다.
"혈압이 좀 높네요. 진정제를 좀 더 줄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정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정체성의 마지막 타임라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윤태희가 들어왔다. 10년을 봐온 정신과 의사. 손에는 두꺼운 파일이 들려 있었다. 내가 보고 싶지 않던 파일.
"준호, 이걸 봐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윤태희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파일을 열었다. 첫 번째 페이지는 10년 전 교통사고 기록이었다. 2014년 5월 15일. 대학가 원룸 근처 교차로. 음주운전 차량이 나를 들이받았다. 신문 기사는 없었고, 경찰 기록도 대충 넘어갔다. 다만 내 뇌 스캔 이미지만 남았다. 왼쪽 관자놀이 부분이 하얀 줄무늬로 표시되어 있었다.
"뇌 외상 이후로 넌 간헐적 기억 소실을 보였어. 처음엔 일시적이었다. 며칠 단위의 기억이 떨어지는 정도. 그런데 6개월 뒤부터 패턴이 바뀌었어."
윤태희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2014년 11월의 기록. 내 필체로 쓰인 증상 기술이 있었다.
*'새벽 3시에 눈을 떴는데 기숙사 복도 벽이 부서져 있었다.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누군가 저지른 행동인데 내 손이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내 손가락이 떨렸다. 그 기억은 없었다. 완전히 없었다. 그런데 내 필체로 적혀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넌 진단을 거부했어. 기억이 없다고 했고, 실수라고 했고, 합리화했어. 하지만 임상적으로 넌 외상후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었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과거다."
손가락을 움켜쥐려 했지만 자동으로 구부러졌다. 또 그 증상이다.
"과거가 아니야, 준호. 넌 10년 동안 그 진단을 무시했고, 그 와중에 뭔가가 너 안에서 자라났어."
윤태희가 세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의 기록. 내가 경찰청에 입사한 이후의 기록들이었다. 상담 기록. 약물 처방. 그리고 내가 절대 기억하지 못하는 공백들.
"넌 3년마다 한 번씩 같은 패턴의 기억 공백을 겪었어. 그리고 매번 넌 그것을 무시했어.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어. 이번엔 그 공백이 다른 누군가를 만들어냈어."
"다른 누군가?"
"또 다른 인격. 너 안에 존재하는, 너지만 너가 아닌 누군가. 그게 왜 생겼을까? 왜냐하면 넌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넌 자신의 충동을 억눌렀고, 자신의 분노를 압박했고, 자신의 어두운 면을 거부했어. 그리고 그것들이 어딘가로 가야 했어."
내 가슴이 철렁했다. 윤태희의 말이 너무 선명했다. 기억복원 능력으로 타인의 기억을 읽을 때처럼 또렷했다.
"그 인격은... 그림자가?"
"그림자는 그 인격의 이름일 뿐이야. 진짜 이름은 너야. 너의 또 다른 이름. 그리고 그 인격은 너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어. 너의 20건 사건도, 너의 능력도, 그리고..."
윤태희가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이 내게 알려줬다. 그리고 너의 범죄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의사들이 뭔가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병실의 창문으로 가서 유리를 만졌다.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빛들. 누군가는 지금 저 불빛 아래에서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죽이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나는... 나는 둘 다일지도 모른다.
거울이 있었다. 병실 구석의 작은 거울. 세면대 옆에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으로 향했다.
내 얼굴이 비쳤다. 창백했다. 눈 아래에 검은 자국이 있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피폐해졌을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눈이... 내 눈이 맞나?
동공이 흔들렸다. 아주 미묘하게. 마치 누군가가 그 안에서 손을 흔드는 것처럼.
거울 속 입술이 움직였다. 내가 움직인 게 아니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입 모양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얼굴 근육을 조종하는 것처럼. 광대뼈가 경련했다. 턱이 튀었다.
"...안녕."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부드럽고, 위협적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지금까지 넌 날 숨겨왔지. 넌 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어. 근데 난 있었어. 항상 있었어. 그리고 넌... 넌 내 일을 자꾸 자기 일로 만들려고 했어."
내 손이 거울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내가 집은 게 아니었다. 거울을 집는 동작이 내 몸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것을 관찰했다. 마치 남의 몸을 보는 것처럼.
"진실을 알았잖아. 이제 다음 단계로 가야 해."
거울 속의 눈이 검어졌다. 동공이 확장되었다. 마치 그 안에 검은 구멍이 생기는 것처럼. 공허했다. 끝없이 공허했다.
비명이 나왔다. 내 목소리였나? 그것의 목소리였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내 몸이 뒤로 물러났다. 침대 쪽으로.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다른 것이 내 몸을 움직였다.
의료진이 들어왔다. 나를 침대로 옮겼다. 주사가 팔에 들어왔다. 세상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거울 속의 눈은 계속 검고 있었다.
윤태희의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준호, 들을 수 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제 선택해야 해. 그리고 그 인격은... 지금까지 넌 해결했던 모든 사건을 알고 있어. 20건 모두. 그 인격은 그 사건들의 진짜 범인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인격이 있는 이유는 넌 그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럼 난... 뭐가 되는 거야?"
침묵이 내려앉았다. 장시간의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나는 거울 속 또 다른 얼굴을 봤다. 그것이 내 얼굴이었다.
최유라의 기억을 다시 봐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증거였다. 마지막 피해자의 기억.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아니, 그 인격은 정확히 무엇을 했을까. 그리고 그 손이, 그 얼굴이 정말로 내 것일까.
"준호?"
윤태희가 물었다.
"날 봐줄 수 있어?"
내가 묻지만, 그것도 내가 아니었다.
"최유라의 기억에 다시 들어가. 이번엔 도망치지 말고 봐. 완전히. 그 인격이 뭘 했는지, 왜 그랬는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넌 그걸 봤을 때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거야."
병실 문이 열렸다. 윤태희가 나가갔다. 남겨진 침묵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최유라의 마지막 기억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의 목을 조였고, 그 얼굴은... 천천히 내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마치 거울 속에서처럼.
그리고 그 변하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드디어."
그 목소리가 속삭였다.
"넌 이제 나를 볼 준비가 됐어."
의료진의 손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주사 바늘이 팔을 뚫었다. 의식이 흐려지면서도 최유라의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웃음. 그 목소리. 그것이 내 목소리였다는 사실이 자꾸만 되풀이되었다.
"진정제를 놓겠습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천장의 형광등이 점점 흐려졌다. 그 속에서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내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준호."
윤태희가 침대 옆에 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떨리고 있었다. 10년 동안 나를 지켜본 사람의 목소리였다.
"넌 깨어날 때 뭔가를 기억하려고 하지 말아. 기억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이 커져. 그게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특징이야. 하나의 인격이 행동할 때 다른 인격은 그것을 보지 못하려고 한다. 하지만 신체는 기억한다. 손가락이 구부러지고, 목소리가 바뀌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것들이 신호야."
"그럼 난... 그 20건의 사건들을..."
"넌 그것을 했고, 동시에 하지 않았어. 그것이 가장 끔찍한 진실이야. 법적으로는 유죄야. 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넌 피해자일 수도 있어."
내 입술이 떨렸다. 손가락도 떨렸다. 다시 그 신호가 나타나고 있었다.
"10년 전 교통사고. 그때 뇌 외상이 생겼어. 넌 그걸 무시했어. 내가 권고했던 치료도, 심리 상담도, 약물 치료도 다 거부했지. 왜냐하면 넌 자신이 약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넌 정의의 집행자가 되고 싶었어. 명탐정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넌 그 인격을 만들어냈어. 아니, 그 인격이 스스로 나타났어. 넌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기 위해서."
"그럼 그놈이... 그 인격이 한 일들은?"
"그것도 넌 했어. 넌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넌 그것을 해결했어. 자신의 기억복원 능력으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사가 효과를 보고 있었다.
"진정해."
윤태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넌 선택할 시간이 있어. 넌 그 인격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어. 하지만 어느 쪽이든 넌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해.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야."
윤태희가 파일을 다시 펼쳤다. 그 안에는 10년 전 초기 진단서가 있었다. 그 위에는 그의 손글씨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
"환자는 이 진단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으로 예상. 심각한 거부 반응 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강요할 수 없음. 환자의 의료 자유도 존중 필요. 향후 상황 악화에 대비 필요."
나는 그 메모를 봤다. 10년 전 윤태희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침묵했다.
"왜..."
내 목소리가 떨렸다.
"왜 날 치료하지 않았어? 왜 날 방치했어?"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의료 윤리야, 준호. 환자가 거부하면 강요할 수 없어. 넌 명탐정이 되고 싶었어. 그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넌 진단을 거부했고, 난 그것을 존중했어.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넌 내가 지켜내지 못했어. 미안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은 10년의 무게를 갖고 있었다.
"한지은이가... 깨어났어?"
"어제 밤. 자살 시도에서 기사일분했어. 그리고 그 애가 말했어. 그 애를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몸을 떨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웅크렸다. 마치 숨겨진 짐승처럼. 그것이 깨어나고 있었다. 더 이상 거울 속에만 있지 않고.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준호."
윤태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최유라의 기억을 다시 봐야 해. 넌 그 기억 속에서 뭔가를 놓쳤어. 그 인격이 하던 마지막 말. 그것이 가장 중요해. 그것을 기억하면... 넌 모든 게 끝난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거야."
"뭐라고 했어?"
"넌... 봐야 해. 직접. 누군가 넌 말해주면 안 돼. 그것도 그 인격의 게임의 일부니까."
윤태희가 나에게 의료 기록 파일을 건넸다. 그 안에는 내 뇌 스캔 이미지들이 들어 있었다. 10년 동안의 변화를 보여주는 이미지들. 정상에서 점점 더 비정상으로 변해가는 뇌의 구조.
"이것도 넘겨줄 수 없었어. 의료 보호 기밀이거든. 하지만 이제... 넌 알아야 해. 모든 걸."
나는 파일을 들었다. 무거웠다. 10년의 무게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준호,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윤태희가 일어났다.
"그 인격은 넌 해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것도 넌 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해칠 거야. 계속.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칠 때까지. 그래서 넌 선택해야 해. 넌 그것을 멈춰야 해. 자신을 멈춰야 해."
그가 문을 나가갔다. 병실에는 침묵만 남았다. 나는 의료 기록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병실의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나는 거울을 봤다. 그 안에서 또 다른 얼굴이 웃고 있었다.
"드디어 넌 준비가 됐네."
그것이 속삭였다.
"이제 우리는... 진짜 시작할 수 있어."
나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최유라의 기억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 검은 동공 속로.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해줄 마지막 말을 들을 것이었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순간, 내 몸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다른 것이 내 몸을 움직였다. 거울로 향했다. 손이 거울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내 손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입에서 나오는 웃음이었지만, 내 웃음이 아니었다.
"넌 이제 내가 뭘 했는지 알 거야."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것이 내 몸을 완전히 장악하는 순간, 의식이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