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압박의 극점

박철수 부서장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이 사건이 우리의 마지막 기회다."

부서장실의 창문 너머로 서울 야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밤 11시 20분. 여섯 시간 전 강서구 오피스텔에서 발견된 다섯 번째 피해자. 이름은 박수진, 26세. 목에 난 자국, 팔에 난 칼상, 복부의 관통상. 패턴이 뚜렷했다. 그림자의 손가락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경찰청에서 몇 번이나 보고를 요청했나? 서장이 내 목을 조르고 있어. 언론은 '신의 손'이라던 당신을 영웅으로 띄웠다. 그 영웅이 이제 와서 실패한다?" 박철수가 책상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떨렸다. "당신의 능력이 정말 있는 건가?"

내가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그림자는 계획적이고 지능적이다. 기억복원만으로는—"

"그럼 뭘 더 하겠다는 거냐?"

침묵.

박철수가 내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아래로 절박함이 보였다. 이 사람도 모서리에 밀려 있었다. 30년 경찰 경력, 마지막 승진 기회, 그리고 나라는 도구. 나를 통해서만 그의 경력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했잖아. 3년간 20건을 풀었다고 했잖아."

내가 느낀 건 분노가 아니었다. 공포였다.

20건의 사건 파일들이 떠올랐다. 내 책상 서랍에 놓인 그 파일들. 내가 해결했다고 생각한 모든 사건들. 그리고 집 옷장에서 발견한 검은 장갑.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노트북. 손가락이 자동으로 구부러지던 증상.

거울 속의 다른 얼굴.

"당신이 정말 능력이 있다면, 이 사건을 풀어야 한다. 지금."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범인일 가능성을 부서장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3년간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내가 잡은 범인들은 누구였는가? 내가 해결한 정의는 무엇이었는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박수진의 기억에 진입하겠습니다.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 겁니다."

박철수가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이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고맙다. 당신이 우리 팀을 살려줄 거야.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사무실을 나가며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기억복원 전문가 이준호? 아니면 거울 속의 웃음을 가진 그 남자? 아니면 둘 다?

의료팀이 있는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준호, 이건 위험해."

의료팀 팀장 박의사가 헤드셋을 들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50대 중반의 진지한 표정. 나는 그동안 이 사람의 경고를 몇 번이나 무시했는가?

"마지막 기억복원 이후로 당신의 기억 손실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어. 역순 붕괴 현상이 시작된 거야.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영역이다. 한 번 더 능력을 사용하면..."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충분하지 않아. 당신의 뇌는 이미..."

나는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이전과는 다른 떨림이었다.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라, 결단의 떨림이었다. 나는 진실을 알아야 했다. 설령 그것이 내 정체성을 무너뜨린다 해도.

"박수진의 기억 샘플은?"

박의사가 한숨을 쉬었다.

"준비되어 있어. 하지만—"

"연결해주세요."

의료 장비실로 들어갔다. 모니터, 뇌파 측정 기계, 그리고 박수진의 기억 샘플이 담긴 용기. 투명한 액체 속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떠다녔다. 기억의 흔적들.

헤드셋을 썼다.

침투. 진입.

---

박수진의 눈으로 세상이 보였다.

오피스텔 방.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시간은 오후 3시 30분쯤. 박수진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피로한 표정. 병가 중인 몸.

문이 열렸다.

남자. 경찰 신분증을 들고 있는 남자. 박수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신뢰. 안도감. 경찰이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진 씨? 저는 경찰청 특수수사팀의 이준호 경사입니다."

내 목소리.

하지만 다른 톤이었다. 더 낮고, 더 차갑고, 더 날카로웠다.

"그림자 사건 수사를 위해 목격자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박수진이 일어났다.

"저는 목격자가 아닌데요?"

"당신이 본 건 알고 있습니다."

남자가 다가섰다. 박수진의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기억 속에서도 그 두려움이 전달됐다.

"뭐... 뭐가요?"

"내가 누구인지."

손이 목을 잡았다. 박수진의 시야가 흐려졌다. 손가락이 조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검은 눈동자. 웃음. 내 얼굴이 맞다. 하지만 그 눈빛은 내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날 봤어. 날 봤어."

칼이 나타났다.

팔에 난 상처. 복부의 통증. 박수진의 마지막 생각은 경찰이라는 믿음이 어떻게 죽음으로 변했는가였다.

---

내가 깨어났을 때, 의료장비가 울리고 있었다.

"준호! 준호!"

박의사가 나를 잡고 있었다. 내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몸 전체가 식어가고 있었다.

"기억이... 기억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몰랐다.

"역순 붕괴가 시작됐다. 빨리 병실로 옮겨야 해."

누군가 나를 들었다. 들것 위에 놓였다. 천장이 흰색이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뇌파가 불규칙해요."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이상 신호입니다."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침 먹은 음식. 박철수의 목소리. 부서장실의 풍경. 모두 안개 속으로 빠져갔다.

현재가 사라졌다.

오직 남은 건 거울 속의 웃음과, 그것이 누구의 웃음인지 알 수 없는 공포뿐이었다.

---

회의실에 누워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팀원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지은, 김민준, 그리고 누군가 더 있었다. 그들의 이름이 뭐였더라?

"준호, 들려? 준호?"

여자의 목소리. 따뜻한 목소리.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기억이... 없어요."

내 목소리였나? 거울의 목소리였나?

한지은이 내 손을 잡았다.

"뭘 기억이 없다는 거야? 지금 뭐가 기억이 없어?"

"지금. 지금이... 뭐예요?"

팀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박수진 기억복원은?"

"누구세요?"

"당신이 능력을 썼어. 30분 전에."

30분? 나는 30분 전이 뭐였는지 몰랐다. 내 기억은 역순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현재부터 과거로, 깊어지는 어둠 속으로.

그리고 그 어둠의 끝에서, 누군가 웃고 있었다.

거울 속 아니면 내 안의 누군가가.

나는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 압박의 극점

회의실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준호. 정신 차려."

한지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 귀는 아직 기억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박수진의 마지막 비명음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내 심장박동은 정상이 아니었다.

"기억 손상 정도가 심각합니다."

의료팀 박의사가 내 팔뚝에 혈압계를 감았다. 수은주가 160까지 올라갔다. 내려오지 않았다.

"역순 붕괴?"

김민준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감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걸 느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사람. 내가 실패하기를 바라던 사람.

"네, 뇌 영상을 다시 봤는데, 현재 시간 기억부터 역순으로 소실되고 있습니다. 30분 전 기억이 대부분 손상됐고, 지금 상태로는..."

박의사가 말을 끝내지 않았다. 끝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누구인지도, 왜 여기 누워 있는지도, 그리고 내 안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준호. 박수진의 기억은?"

한지은이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이 나를 직시했다. 그 눈빛 속에는 나를 구하려는 마음과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동시에 떠 있었다.

"...기억이 안 나요."

거짓말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했다. 박수진의 목이 조여가는 느낌도, 그 순간의 쾌감도, 그리고 그것이 내 손이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나는 끝장이 났기 때문이다.

"박수진은?"

"모르겠습니다."

"준호, 진심으로 말해."

한지은이 내 어깨를 잡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증거 없는 의심은 결국 동료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나는 천장을 봤다. 회의실의 천장이었다. 그 천장이 내 세상의 끝인 듯했다.

"당신들이 뭘 하고 있어?"

박철수 부서장이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10명의 팀원들이 모두 그를 향해 돌아섰다.

"의료팀 진단에 따르면 경사 이준호의 기억복원 능력 사용에 따른 뇌 손상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역순 붕괴 초기 증상이 나타나고 있고, 이 상태로 현장 투입은 불가능합니다."

박의사가 보고했다. 그의 톤은 의료 전문가다웠다. 감정이 없었다.

박철수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박수진의 기억은?"

"확인 중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거짓이었다. 나는 박수진의 죽음을 목격했다. 내 손으로. 내 얼굴로. 내 목소리로.

그런데 그게 정말 내 손이었나?

"확인 중이라니? 지금 이 시간에?"

박철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무실 문들이 닫혔다. 다른 팀원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건 쇼였다. 내 무능함을 증명하는 퍼포먼스.

"부서장님, 의료팀의 권고는 경사 이준호의 즉각적인 휴직입니다."

박의사가 다시 말했다.

"휴직? 우리 부서가 이 사건을 놓치면 끝이다."

박철수가 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빛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넌 내 마지막 카드다. 넌 실패할 수 없다.*

"그림자는 계속 움직일 겁니다. 매일 하나씩. 박수진 다음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현장을 장악하지 못하면 더 많은 피해자가..."

"몇 건이었지? 지난 3년간 우리가 해결한 사건이."

박철수가 물었다.

"20건입니다."

"20건의 명탐정이 지금 이 모양이냐?"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차가웠다. 회의실의 온도가 떨어진 듯했다.

"부서장님, 의료적으로는..."

"의료? 이건 의료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정의의 문제다."

박철수가 돌아섰다. 한지은에게로.

"지은. 준호의 심리 상태는?"

한지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나를 봤다. 눈빛이 흔들렸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추가 심리 평가가 필요합니다."

"그럼 지금 당장 해."

"부서장님, 기억 손상 상태에서는..."

"지금 당장."

박철수의 목소리가 끝을 의미했다.

---

심리 평가실은 조용했다.

한지은이 나를 마주 앉혔다. 그녀의 손에 펜과 설문지가 있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건 건 나였다.

"지은, 미안해."

"뭐가?"

"모르겠어.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겠어."

한지은이 펜을 내려놨다.

"준호. 너 정직하게 말해봐. 지금 몸이 어때?"

"모르겠어요."

"기억은?"

"없어요."

"뭐가 없어?"

"지금. 지금이 뭐인지."

한지은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공포가 그 눈에 담겨 있었다.

"준호. 우리가 해온 사건들. 너는 뭐라고 생각해?"

"정의를 실현한 거죠."

내가 대답했다. 그것이 박철수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답이었다.

"정말?"

한지은이 물었다.

"네."

"그럼 박수진은?"

침묵.

내 입이 다물어졌다. 박수진의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돌아왔다. 오피스텔의 침대. 경찰 신분증. 그리고 손.

내 손.

아니면 거울 속 그 남자의 손.

"준호?"

한지은이 내 손을 잡았다. 내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괜찮아?"

"네."

거짓말.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나는 박수진을 죽였다. 또는 내 안의 누군가가 죽였다. 그리고 지금 그 누군가는 내 안에서 웃고 있었다. 거울 속처럼.

한지은이 펜을 다시 들었다.

"너는 지난 3개월간 뭐하고 지냈어?"

"사건을 풀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르겠어요."

"기억이 없어?"

"네."

한지은이 메모를 했다. 그 펜질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마치 내 무능함을 기록하는 것 같았다.

"그림자가 누구라고 생각해?"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 아니면 모르고 싶어?"

한지은이 펜을 내려놨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프로파일러의 눈빛. 나의 거짓을 읽으려는 눈빛.

"준호.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어?"

"2년 8개월입니다."

"맞아. 그 시간 동안 나는 너를 지켜봤어.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정의감도 강하고, 팀원들을 생각하고, 힘들어도 사건을 놓지 않아. 하지만..."

한지은이 말을 멈췄다.

"하지만?"

"최근에 너는 변했어. 기억을 잃고 있어. 같은 질문을 반복해. 손가락이 떨려. 그리고 너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어. 내가 틀렸어?"

내 심장이 멎었다.

"틀렸어요."

"진짜?"

한지은이 내 눈을 봤다. 그 눈에는 자비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신뢰는 없었다.

"준호. 너는 도움이 필요해. 심리 치료가 필요해. 의료팀이 말한 역순 붕괴는 진짜 위험해. 그것만 아니라, 너는 정신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뭐라고 생각해요?"

"...알 수 없어."

---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박철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진단 중입니다."

"진단이 필요해? 그림자가 지금 또 누군가를 죽이고 있을 수도 있는데?"

박철수가 내 앞에 섰다.

"우리 부서가 이 사건을 놓치는 순간, 나도 끝이고 넌 더더욱 끝이다. 넌 20건을 해결한 명탐정이 아니라, 의료팀에 의존하는 무능한 초능력자가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초능력도 믿을 수 없는 거고."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박철수 피해자의 기억은 확인했습니까?"

김민준이 물었다.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은 이미 나를 범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아직입니다."

"아직? 당신이 능력을 썼는데?"

"기억 손상이 있어서..."

"기억 손상? 아니면 기억을 숨기는 거 아닙니까?"

김민준이 서 있었다. 모든 팀원들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박철수가 내 앞에 다가섰다.

"준호. 너는 이 사건을 풀어야 한다. 그것만이 너를 구하는 방법이다. 그림자를 잡아. 그럼 모든 게 설명된다. 박수진의 기억도, 너의 기억 손상도, 모든 게."

"부서장님..."

"박수진이 누구를 봤어? 기억에서 말해."

"기억이..."

"말해!"

박철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회의실의 벽들이 울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검은 눈동자. 웃음. 그리고..."

"그리고?"

"내 얼굴이었습니다."

침묵.

모든 팀원들이 숨을 멈췄다.

"내... 얼굴?"

박철수가 물었다.

"네."

"그건 기억 오염이다. 증거 오염. 김민준, 이건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

박철수가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준호. 다시 한 번 해. 박수진의 기억에 다시 진입해. 이번엔 더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의료팀에서는..."

"의료팀은 상관없다. 넌 할 수 있다. 넌 20건을 해결한 사람이다. 이 한 건을 더 할 수 있다."

박철수가 나를 내려다봤다.

"박수진의 기억에 다시 진입해. 그리고 그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봐. 누구인지 정확하게."

나는 박철수를 봤다. 그의 눈빛은 절망했지만 욕심은 죽지 않았다. 나를 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구하려고 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일어섰다.

"지금 여기서?"

"네."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내 손이 떨리는 건지, 거울 속 그 남자의 손이 떨리는 건지 모르겠다.

"준호."

한지은이 나를 막았다.

"의료팀이..."

"상관없습니다."

나는 헤드셋을 썼다.

박철수가 박수진의 기억 파일을 나에게 넘겼다. 검은 화면. 파일 로드 중. 로딩바가 천천히 채워지고 있었다.

내가 박수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내 기억은 역순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

사무실의 냄새.

박철수의 목소리.

그리고 그 전의 기억들.

모두 안개 속으로 빠져갔다.

현재가 사라졌다.

오직 남은 건 박수진의 기억과, 그 안에서 내가 본 얼굴뿐이었다.

검은 눈동자.

웃음.

그리고...

"그 얼굴이 누구냐고!"

박철수가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얼굴이 내 얼굴이었고, 동시에 내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 중 어느 것이 진짜 내가 아는 건 누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깨어났을 때, 세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나는 회의실의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의료 장비의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옮기고 있었다.

"준호! 준호!"

한지은의 목소리.

"뇌파가 임계선을 넘어갔습니다!"

박의사의 목소리.

"역순 붕괴가 시작됐다. 지금 당장 병원으로!"

누군가의 목소리.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사라졌다.

오직 남은 건 거울 속 웃음뿐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공포.

내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천장이 흐려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건, 내 자신의 웃음이었다.

또는 거울 속의 웃음이었다.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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