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패턴의 시작

화장실 거울에서 낯선 표정의 자신을 본 이준호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약지부터. 그게 자신의 습관이었나? 아니면 누군가의 습관이 자신에게 묻어난 건가?

경찰청 기억복원실. 회색 파티션으로 나뉜 좁은 방. 이준호는 세 번째 피해자 임수현의 기억 수집 용기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테이블 가장자리를 꾹 눌렀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준호, 괜찮아?"

한지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프로파일러로서의 직관이 발동했는지, 아니면 그저 동료의 얼굴 색깔이 회백색에 가까워 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준호는 용기를 들었다.

"지금 진입하려고."

"피로가 심해 보이는데. 어제 세 번 했잖아."

"네."

짧은 응답. 대화를 끝내려는 신호였다. 한지은은 문턱에 멈췄다. 자신이 말해야 할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런 표정이었다. 결국 그녀는 돌아섰다.

이준호는 용기를 벗어 놓았다. 안에는 투명한 액체. 그 속에 임수현의 최후의 순간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다중 외상. 첫 번째 피해자는 목 졸림, 두 번째는 칼상, 세 번째는 이미지가 다르다. 더 잔인했다. 더 의도적이었다.

손가락을 액체에 담갔다.

침입. 기억의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 세계가 뒤집혔다.

임수현의 눈으로 보는 세상.

12월 16일 오후 11시 47분. 서초구 한 오피스텔의 복도. 형광등 아래 그림자가 다가온다.

음성이 들린다. 남자의 음성. 낮고 차분한.

"안녕."

"누, 누구세요?"

임수현의 목소리가 떨린다. 기억이 가속한다. 손가락이 보인다. 약지부터 구부렸다 펼치며 문고리를 잠근다. 정확한 움직임. 마치 누군가가 이미 이 행동을 몇 번이나 연습한 것처럼.

그 손은 이준호의 손이었다.

이준호는 기억 속에서 몸을 날렸다. 아니다, 그럴 수 없다. 기억 속에서는 관찰자일 뿐이다.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냥 봤다.

손이 목을 누른다. 임수현의 목이 움직인다. 자신의 손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왜 도망쳤어?"라고 묻는다. 자신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넌 날 봤잖아. 첫 번째에, 두 번째에"라고 속삭인다.

기억이 끝났다.

이준호는 의자에서 떨어져 나갔다. 손가락이 떨렸다. 약지부터 구부렸다 펼치며. 멈추려고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상 있어?"

박철수 부서장이 현관에 나타났다. 50대 초반, 짧은 머리, 얼굴은 항상 긴장 상태였다. 그 얼굴이 지금 이준호를 보고 있었다.

"기억 오염 같습니다."

거짓이었다. 이준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두 번째 피해자와 패턴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고드렸고, 세 번째는 더 심합니다. 범인의 외형이 일관되지 않습니다."

박철수는 이준호의 얼굴을 20초 동안 봤다. 그 시간이 20년처럼 느껴졌다.

"내일 정오까지. 범인을 특정해. 우리의 마지막 기회야."

그리고 떠났다.

이준호는 기억 수집용 용기를 정리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약지부터.

그날 저녁. 정신과 의사 윤태희의 상담실.

흰 벽, 회색 소파,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이준호는 소파의 끝에 앉았다. 가능한 한 멀리.

"기억이 확실한가?"

윤태희는 이준호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안경을 쓴 얼굴. 나이는 50대 후반. 10년 전부터 이준호를 봐온 의사였다.

"네.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당신이 모르는 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10년 전 교통사고 이후, 당신은 간헐적으로 3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의 기억 공백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3년 전부터 능력을 쓸 때마다 1시간씩 기억을 잃기 시작했어요. 최근 몇 개월간은 그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의사, 이건 진찰이 아니라…"

"당신의 뇌 스캔을 다시 봤습니다. 전두엽의 손상 부위가 확대되고 있어요. 특히 의사결정과 충동 억제를 담당하는 영역이 말입니다. 손실의 가속도가 심각합니다."

이준호는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그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불빛들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당신이 해결한 20건의 사건. 모두 당신이 범행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약지가 떨렸다.

"그럼 내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윤태희는 기다렸다. 그 침묵 속에서 이준호는 세 번째 피해자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의 손.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얼굴. 하지만 자신이 아닌 뭔가.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태희가 말했다.

이준호는 상담실을 나갔다. 의사의 경고가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신 안에 누군가 다른 것이 있다는 그 사실이, 그것이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그 확실성이.

밤 10시 43분. 자신의 집.

이준호는 욕실 거울 앞에 섰다. 손가락을 들었다. 약지부터 구부렸다 펼쳤다. 구부렸다 펼쳤다.

그 움직임이 기억 속 범인의 움직임과 정확히 일치했다.

세 번째 피해자의 기억에서. 문고리를 잠그는 순간. 손가락이 약지부터 움직였다. 그 다음 검지. 그 다음 중지. 항상 그 순서였다.

이준호는 이것이 자신의 습관인지 언제부터인지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없었다. 그 시간들이 지워져 있었다. 아니, 다른 누군가가 그 시간들을 살았다.

화장실 전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뭐지?"

전기 문제인가 싶어 천장을 봤다. 그 순간 거울 속의 자신이 이미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자신의 웃음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내려왔다. 이준호의 눈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더 차갑게, 더 계산적으로. 입 모양도 달랐다. 이준호의 입은 공포로 벌어져 있었지만, 거울 속 남자의 입은 천천히 올라갔다.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얼굴의 근육을 조종하는 것처럼.

그 남자가 손을 들었다. 약지부터.

이준호는 뒤로 물러섰다.

현재 시간 기억이 1시간 통째로 사라졌다.

밤 11시 43분. 이준호는 욕실에서 깨어났다. 왜 여기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거울 위의 메모는 읽을 수 있었다.

"내일 정오. 나를 찾아."

필체는 자신의 필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필체보다 더 자신을 닮아 있었다.

욕실 타일 위의 물흔적을 보다가 이준호는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약지부터.

'내일 정오. 나를 찾아.'

글씨체는 자신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더 각지고, 더 무거웠다. 마치 같은 펜을 쥔 다른 손이 쓴 것처럼. 이준호는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종이가 손에서 축축했다. 아니면 손이 축축한 걸까.

거울을 다시 봤다. 자신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정상이었다. 정상적인 창백함, 정상적인 공포. 하지만 뭔가 다른 게 있었다. 눈빛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관찰하는 방식이 아니라, 판단하는 방식으로.

이준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23시 43분. 밤 11시 43분. 그 전의 기억은 없었다. 저녁 10시 43분부터 지금까지 1시간이 날아가 있었다. 기억복원 능력을 쓰지 않았는데도.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렸다. 약지부터.

새벽 2시 17분. 특수수사팀 사무실.

이준호는 세 번째 피해자 임수현의 기억 영상 기록을 다시 재생했다. 모니터 위의 화면은 피해자의 눈으로 본 범행 현장이었다. 침대, 벽지의 곰팡이, 천장의 누수 자국. 그리고 범인의 손.

약지부터 구부렸다 펼쳤다. 구부렸다 펼쳤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화면에 겹쳐 봤다. 각도가 정확히 맞았다. 손가락 길이, 손톱 모양, 손등의 혈관 위치. 모든 것이.

"왜 여기 있어?"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이준호는 깜짝 놀라 모니터를 끄려 했다. 한지은이 이미 화면을 봤다. 세 번째 피해자의 기억. 범인의 손. 그리고 이준호의 손.

한지은이 모니터를 끄려는 이준호의 손목을 잡았다.

"한지은…"

"이게 뭐예요?"

한지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프로파일러로서의 목소리였다. 개인적인 감정이 제거된, 순수하게 수사적인 목소리. 그것이 더 무서웠다.

"기억 오염 패턴을 분석하고 있었어. 세 피해자의 기억에서 범인의 신체 특징이 불일치한다고 했는데, 다시 보니까…"

"다시 보니까 뭐예요? 범인이 당신이라는 게 보여?"

침묵.

한지은은 모니터를 더 자세히 봤다. 그 다음 이준호를 봤다. 이준호는 한지은의 눈 속에서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거기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다. 범인이.

"당신이 세 번째 현장에 있었어요. 기억 속에서 명확하게 보여요. 손가락 움직임, 신체 위치, 심지어 옷까지. 당신이 입은 검은 니트가 보여요."

"그건…"

"당신이 입은 검은 니트. 지금도 사무실 옷장에 있는."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변명도, 설명도, 부정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을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박철수 부서장한테 보고할 거예요?"

한지은이 물었다. 그 질문은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선언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 기억 오염이 있을 수 있고…"

"또 그 말을 해요? 기억 오염? 준호, 당신이 거기 있었어요. 세 번째 피해자의 눈으로. 명확하게."

"내가 할 리 없어. 나는 그 시간에 여기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한지은이 기다렸다. 이준호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준호 자신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에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누가 되어 있었는지. 자신의 몸을 누가 조종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없어. 그 시간의 기억이 없어."

이준호가 말했다.

한지은의 표정이 변했다. 의심에서 공포로. 그 공포는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 자신의 곁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다.

"당신이…"

"나도 모르겠어. 내가 뭔지."

이준호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한지은은 한 발 물러섰다. 그 거리 속에서 무언가가 끝났다. 팀원으로서의 신뢰가, 동료로서의 관계가. 그리고 이준호가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현실이.

"당신이 그림자예요?"

"내가 그림자인지, 내 안의 누군가가 그림자인지, 나도 모르겠어."

이준호는 사무실을 나갔다. 뒤에서 한지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철수 부서장에게 보고할 거예요. 당신을 위해서야."

당신을 위해서. 그 말이 가장 무서웠다. 이준호는 복도에서 멈춰 섰다. 손가락이 약지부터 떨렸다. 그 떨림을 멈추려고 주먹을 쥐었지만, 주먹 속에서도 약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끝내기 위해서.

새벽 3시 42분. 이준호의 집. 침실.

침대 아래의 박스를 꺼냈다. 검은 장갑이 들어 있었다. 두 켤레. 새것과 낡은 것. 새것은 자신이 본 적 없는 물건이었지만, 낡은 것은 뭔가 익숙했다. 착용감이, 손가락 배치가. 마치 자신의 손이 이미 몇 번이나 이 장갑을 끼고 무언가를 했던 것처럼.

손가락이 떨렸다. 약지부터.

상자 속을 더 파헤쳤다. 향수 병. 여성용 향수. 라벨을 봤다. 세 번째 피해자 임수현의 옷에서 나던 향수와 같은 브랜드였다. 아니. 같은 향수였다. 같은 병이었다. 반쯤 비어 있는 같은 병.

손이 떨리며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병의 무게가 현실이었다. 이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이준호는 숨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손목시계. 자신이 찬 적 없는 시계. 하지만 배터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록한 시간은 어제 오후 8시. 세 번째 피해자가 살해된 시간.

이준호는 박스 밑바닥을 봤다. 메모들이 있었다. 자신의 필체가 아닌 필체로 쓴 메모들. 날짜, 장소, 피해자의 이름, 그리고 간단한 기억 기록들. 자신의 또 다른 인격이 남긴 증거들.

첫 번째 메모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12월 15일 강남역 모텔. 최유라. 목 졸림.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순간, 이준호의 숨이 멎었다. 조용했다는 건 무엇인가. 고통이 없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저항이 없었다는 뜻인가.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렸다.

두 번째 메모를 집어 들었다.

'12월 22일 서초동 주택가. 박지현. 칼상. 그녀가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소리쳤다.'

이준호는 메모를 내팽개쳤다. 손가락이 떨리며 바닥을 두드렸다. 약지부터. 구부렸다 펼쳤다. 구부렸다 펼쳤다. 멈출 수 없었다. 그 손가락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세 번째 메모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려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12월 29일 송파동 고시원. 임수현. 다중 외상. 다 했다. 이제 그들이 나를 찾을 거다. 그들이 나를 찾게 해야 한다.'

다 했다. 그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범행을 다 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자신을 완전히 지웠다는 뜻인가. 아니면 자신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인가.

이준호는 메모를 떨어뜨렸다. 손가락이 구부렸다 펼쳤다. 구부렸다 펼쳤다. 그 리듬이 심장박동처럼 규칙적이었다. 그 리듬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철수였다.

"준호. 새벽에 미안해. 그런데 한지은이한테 연락이 없어. 너한테 했대?"

이준호는 메모들을 보고 있었다. 박스 속의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한 일들을 보고 있었다. 아니. 자신 안의 누군가가 한 일들을.

"준호?"

"네. 잠깐 연락했어요. 세 번째 피해자 기억 분석 때문에."

"그래. 그럼 됐어. 아, 그리고. 새로운 시체가 나왔어. 강동구 아파트. 네 번째 피해자. 그림자의 패턴이 맞아. 넌 지금 어디야?"

이준호는 메모들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이 약지부터 떨렸다. 네 번째 피해자. 그 이름이 메모에 없었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이름.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인가. 아니면 이미 일어났지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인가. 아니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한 일인가.

"집이에요."

"지금 현장으로 와. 시간이 없어. 아침 뉴스에 터질 거야. 우리가 이 사건을 완전히 망친 거야, 준호. 이게 마지막이야. 마지막."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박스를 다시 침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약지부터 떨렸다. 그 떨림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그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의 거리.

새로운 피해자. 네 번째 피해자.

그 이름이 메모에 없다는 건 무엇인가. 아직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하러 가는 건가. 그것을 막으러 가는 건가. 아니면 그것을 완성하러 가는 건가. 자신의 의지로 가는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강제로 가는 건가.

이준호는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이 이미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자신의 웃음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남자의 눈이 차갑게 내려왔다. 그 입이 천천히 올라갔다.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내가 또 했나?"

거울 속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메모지가 거울 밑에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메모지.

'넌 이미 알고 있어. 이제 와.'

필체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것보다 더 자신을 닮아 있었다. 이준호는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약지부터 떨렸다. 그 떨림 속에서 그는 알았다. 이제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택인지, 다른 누군가의 강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준호는 집을 나갔다. 강동구로. 자신을 찾으러. 그리고 자신을 끝내러.

발걸음이 빨라졌다. 손가락이 약지부터 떨렸다. 멈출 수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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