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사실의 형광등이 지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흰색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손가락 끝에서 나던 하얀 빛은 이제 손목까지 번져 있었다. 경찰 조사관 이름표에 적힌 '이 경감'이라는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다시 한 번 정리해주시겠어요?"
경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은의 귀에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이미 세 시간을 이 방에서 보냈다. 자신의 능력, 조직과의 거래, 의뢰들. 모든 것을 자백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었다.
"박지은입니다. 다섯 살 때부터 기억을 지우는 능력이 있었어요."
지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이미 몇 번을 반복했기에,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 년 전 교통사고 이후로 더 강해졌고, 조직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용당했습니다. 돈을 받고 남의 기억을 지웠어요. 트라우마, 범죄 증거, 부끄러운 과거들... 모두."
경감은 펜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피해자가 몇 명인가요?"
지은은 손을 펼쳤다. 손가락을 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워버린 기억들을 세는 것이었다. 그 숫자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조직에서 돈을 받을 때마다 기록했으니까.
"정확히는... 스물일곱 명입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가 철썩 넘어갔다.
"스물일곱 명의 기억을 완전히 소거했다는 뜻이군요. 그들은 자기 인생의 일부가 없어졌다는 걸 모를 텐데."
"네. 그들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지은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무언가 가슴 안에서 철렁했다. 스물일곱 명. 스물일곱 개의 구멍. 스물일곱 명의 불완전한 삶. 그리고 자신—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경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손이 떨리는데, 괜찮으세요?"
"능력을 써서입니다."
"능력을?"
"남의 기억을 지울 때마다, 제 기억이 사라져요. 지운 기억의 무게만큼. 그래서..."
지은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 순간 경감의 얼굴이 변했다. 동정이 아니라, 끔찍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당신이 지운 기억이 사라진다?"
"네."
"그럼 당신도 기억을 잃고 있다는 뜻이네요."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생각했다. 투명해진 얼굴.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뚝으로 번진 하얀 빛. 그리고 어제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의 색깔이 뭐였는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지난주에 먹었던 음식, 어린 시절 친구의 이름, 엄마와 함께했던 작은 순간들. 하지만 점점 더 중요한 것들이 빠져나갔다.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웃음, 엄마와의 약속들.
지은은 손가락 끝의 하얀 빛을 바라봤다. 그것은 단순한 증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천천히 소멸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조직의 리더는 누구세요?"
"강태현입니다. 기억 중개인이라고 불렸어요."
경감의 손이 멈췄다.
"강태현? 그 강태현?"
"네."
조사실이 조용해졌다. 경감이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지은은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손을 다시 바라봤다. 손가락 끝의 하얀 빛이 더 밝아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천천히 소멸해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박지은씨, 이건 당신의 선택이었나요? 아니면 강요당했나요?"
그 질문에 지은의 눈이 들렸다.
"처음엔 선택이었어요. 돈이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나중엔... 강요였습니다."
"어떻게 강요했나요?"
"엄마를 협박했어요. 저를 통제하기 위해서."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떨렸다.
경감은 다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뭔가를 적었다. 지은은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에 대해 생각했다. 다섯 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그것. 사고 이후 강해진 그것. 돈이 되었던 그것. 그리고 자신을 천천히 죽여가고 있던 그것.
'축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은의 입술이 움직였다.
'저주였어.'
경감이 펜을 내려놨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지은은 자신이 원래부터 알고 있던 답을 말했다. 이 순간을 위해 밤새 생각했던 답을.
"더 이상 능력을 쓰지 않겠습니다."
"능력을?"
"네. 제 능력이 저를 죽이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의 기억을 지울 때마다, 저는 제 기억을 잃어갔습니다. 누군가를 잊게 했고, 결국 저는 누가 되어버렸는지를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연함이었다.
"저는 엄마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제 능력으로 엄마의 기억을 지우면 엄마는 고통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깨달았습니다. 기억을 지우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요. 함께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요."
조사관은 입을 다물고 지은을 바라봤다. 몇 초의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면 당신이 포기하겠다는 것은..."
"네. 제 능력을 포기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지은이 손을 펼쳤다. 손가락 끝의 하얀 빛을 마주했다. 그것은 자신의 일부였다. 다섯 살부터 가지고 있던 일부. 하지만 이제 그것을 놓아야 했다.
지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더 이상 누구도 해치지 않겠다. 더 이상 누구도 잊게 하지 않겠다.'
그 결심이 가슴을 가득 채웠을 때, 무언가가 변했다.
손가락 끝의 하얀 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손목까지 번져 있던 빛이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손등으로. 손가락 끝으로.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다.
지은의 손이 다시 자신의 손이 되었다. 평범한, 따뜻한, 살아있는 손이 되었다.
그 순간 무언가 가슴 안에서 터졌다. 두통이 사라졌다. 손의 떨림이 멈췄다. 마치 몸 전체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사슬이 한 번에 풀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다른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은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했던 소풍. 엄마가 만들어주던 계란말이.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웃음.
그리고 그 기억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은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신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신음이었다. 능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신이 지워버린 기억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부터 사라져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먼저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피해자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지운 기억들의 무게만큼, 자신의 기억이 역순으로 사라진다는 설정. 그것이 이제 현실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은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것은 기억일 뿐, 엄마에 대한 사랑은 기억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자유야."
지은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떨어지면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억눌린 것들이 터져 나오는 눈물. 해방의 눈물이었다.
경감이 상자에서 물티슈를 꺼내 밀었다. 지은은 그것으로 눈물을 닦았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손목이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다.
"조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후 진술서 작성과 법적 절차가 있겠지만, 당신의 증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현을 체포하면, 조직이 해체될 거예요. 그게 제 소원입니다."
조사관은 지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의심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가셔도 됩니다."
지은은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조사실의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이준호였다.
그는 밤새 경찰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은의 얼굴이 나타나자, 그가 몇 걸음을 재빠르게 내딛고 다가왔다.
"지은이."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지은은 그 목소리 안에 자신을 담아두고 싶었다.
이준호가 지은을 안아줬다. 지은의 머리가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곳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살아있는 소리. 따뜻한 소리.
"잘했어. 이제 넌 자유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지은은 처음으로 진정한 안도감을 느꼈다. 더 이상 누구를 해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더 이상 자신이 소멸해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더 이상 거짓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응."
지은이 대답했다.
"이제 자유야."
경찰서 밖의 밤거리는 조용했다. 해안 도시 소호의 밤은 항상 이렇게 조용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이준호가 자신의 차 열쇠를 꺼냈다.
"요양원 가야지?"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응. 엄마가 기다리고 있어."
차는 조용히 도시의 야경을 헤쳐나갔다. 회색 빌라촌이 흘러갔고, 낡은 카페가 흘러갔고, 항구 거리가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해변이 나타났다. 새벽의 해변은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지평선의 끝에서는 이미 새로운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요양원 앞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새벽 다섯시였다.
이준호는 차 안에 남기로 했다. 이 순간은 둘만의 시간이어야 했다.
지은이 요양원으로 들어갔을 때, 간호사가 눈을 떴다.
"어머니가 밤새 일어나 계셨어요. 계속 누군가를 찾으셨어."
지은은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 창밖으로 새벽 해가 들어오고 있었다. 모서리 방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했다.
"엄마."
방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침대에서 누군가가 일어났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유미영이 서 있었다. 회백색 머리카락, 주름진 얼굴, 하지만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던 사람이 마침내 그를 만난 것처럼.
"누세요?"
엄마가 물었다.
지은의 심장이 철렁했다. 엄마가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 치매가 진행되었거나, 아니면 밤의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거나. 하지만 지은은 멈추지 않았다.
"엄마, 저예요. 지은이."
유미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가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인식이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것. 본능적인 무언가.
"지은이?"
엄마가 중얼거렸다. 마치 먼 과거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처럼.
"응, 엄마. 저예요."
지은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유미영은 지은을 바라봤다. 기억하지 못하는 눈으로. 하지만 그 눈 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다리던 누군가를 마주한 눈.
"들어와."
엄마가 말했다.
지은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침대에 앉았고, 지은은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 저 왔어. 이제 우리 함께하자."
유미영이 지은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차갑고 가늘었지만, 그 안에는 힘이 있었다.
"그래. 우리 함께하자."
엄마가 말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하지만 사랑은 기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기억을 초월한다.
지은은 엄마를 안아줬다. 작아진 엄마의 몸. 그 안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살아있는 소리. 따뜻한 소리.
요양원의 창 밖으로, 새벽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색깔은 주황색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새로운 하루를 칠하고 있는 것 같은 색깔이었다.
지은은 엄마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능력이 더 이상 울부짖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딸로서, 따뜻한 포옹 속에서, 엄마와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은이 가진 가장 큰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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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순간,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요양원 방 밖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지은은 엄마를 조심스럽게 놓아주고 일어섰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지은이 받았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차갑고, 위협적인.
"박지은.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그것은 강태현이 아니었다. 더 위험한 누군가였다.
"당신이 경찰에 자백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게 있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강태현은 조직의 일부일 뿐이야. 진짜 주인은 따로 있어.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신 같은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
지은의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능력은 사라졌지만, 두려움은 남아 있었다.
"당신의 엄마는 여전히 우리 손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 우리는 당신 같은 것들을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의 엄마... 그 할머니는 우리의 가장 좋은 인질이야."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방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었고, 창밖으로는 새벽 해가 떠 있었다.
하지만 지은의 눈에는 그 햇빛이 더 이상 희망으로 보이지 않았다.
조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