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퇴고본

집에 돌아온 지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새벽 해변에서 이준호와 나눈 약속이 실재했는지 환각이었는지 분간이 안 갔다. 손목까지 번진 하얀 빛은 이제 거의 투명에 가까웠다. 거울 앞에 섰을 때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다는 걸 안다. 능력을 버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요양원으로 가는 길에 지은은 차 안에서 손가락을 펼쳤다 모았다를 반복했다.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하얀 빛이 더 이상 손가락을 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능력의 대가는 누적되고 있었다. 지은은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엄마가 있는 곳이었다.

요양원 3층 복도는 아침 햇빛으로 밝았다. 엄마 방 앞에 서자 심장이 철렁했다. 문을 열면 엄마가 자신을 알아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로 대할까? 지은은 손잡이를 돌렸다.

유미영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밖을 보는 그 모습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은이 들어서자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 눈이 흔들렸다. 인식의 흔들림이었다.

"엄마."

지은이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유미영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그 다음은 무언의 침묵이었다. 치매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몸은 기억하는 법이 있다고 수진이 말했었다. 지은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제 옆에 앉아도 돼요?"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아니라 몸의 언어였다. 지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엄마와 창밖을 함께 바라봤다. 소호의 항구가 보였다. 회색 건물들과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바다. 여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편했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은이 해야 할 말이 있었다. 5년을 미루어온 말들이었다.

"엄마, 제가 물어봐도 돼요?"

유미영의 손이 움직였다. 지은의 손을 찾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그리고 약했다. 하지만 확실했다. 그것은 분명한 신호였다.

"제가 어렸을 때... 엄마가 날 버렸어요?"

말하는 순간 지은의 목에 뭔가가 걸렸다. 5년 동안 누르고 살아온 질문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유미영의 손이 경직됐다. 엄마의 눈이 지은을 향했다. 그 눈은 분명히 깨어있었다.

"버렸다고? 누가...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은은 처음 봤다. 엄마가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유미영은 천천히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와 지은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듯이 앉았다. 의도하지 않은 제스처였지만, 그것은 무언의 사죄였다.

"내가 너를 버린 적이 없다. 절대 없어."

유미영의 손이 지은의 얼굴을 향했다. 양손으로 지은의 뺨을 감싸 안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엄마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넌 내 생명이야. 언제나 그래왔어. 너는...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이야."

지은의 눈물이 흘렀다. 입술이 떨렸다. 엄마의 손이 따뜻했다.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엄마의 손이 따뜻하다는 것이. 그 따뜻함이 버림이 아니었다는 것이.

"기억해. 넌 내 딸이고, 넌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엄마가 반복했다. 마치 주문처럼. 마치 그 말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지은은 엄마의 품에 안겼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자신이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것이. 엄마의 손 온기 속에, 그 떨리는 목소리 속에, 자신을 바라보는 눈 속에 남아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지은은 오랫동안 울었다. 5년 동안 지워내려던 모든 상처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엄마는 지은의 등을 토닥였다. 말없이, 오직 그 손짓으로만.

"미안해, 딸. 내가 너한테 잘해주지 못해서."

유미영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기억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죄책감만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기억해. 엄마는 너를 사랑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랑이야."

지은은 고개를 들었다. 엄마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 눈에는 여전히 자신이 살아있었다. 기억이 없어도, 자신은 엄마의 눈 속에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엄마. 전 알았어요."

지은이 말했다. 목소리에 더 이상 의심이 없었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였다. 지은이 고개를 들었을 때 박수진의 얼굴이 방 입구에 나타났다. 그 뒤로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지은."

수진의 목소리에 긴장이 스며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지은을 향해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직에 대한 신고를 수리했어. 경찰이 이제 너를 데려가야 해."

지은은 천천히 일어났다. 뒤에 남겨진 엄마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돌아서면 다시 안기고 싶었다. 다시 그 따뜻함에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갈 곳이 있었다. 능력을 완전히 버리기 위해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경찰이 지은의 팔을 잡았다. 강압적이지 않은, 그저 안내하는 손길이었다. 지은은 복도로 나갔다.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엄마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유미영은 방의 창가에 서 있었다. 손을 흔들고 있었다.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분명했다. 그것은 작별 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이었다.

'돌아와.'

엄마의 입술이 움직였다. 지은은 경찰차 뒷좌석에 앉았다. 창밖으로 엄마가 보였다.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지은은 엄마를 완전히 신뢰했다. 돌아올 것이라는 신뢰가, 자신이 엄마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는 신뢰가, 기억을 잃어도 사랑은 남는다는 신뢰가.

경찰차가 요양원을 떠났다. 뒷창으로 엄마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손가락의 하얀 빛은 이제 손목을 넘어 팔뚝까지 번져있었다. 능력 사용의 대가가 누적되어 나타나는 최종 단계였다. 하지만 이제 지은은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잃든, 엄마의 기억 속에는 자신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경찰서의 회색 벽은 마치 지은의 내면을 투영하는 거울 같았다. 조사실의 불빛이 너무 밝아서 눈을 떴을 수가 없었다. 책상 너머의 경찰관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강태현과의 첫 만남은 언제였습니까?"

지은은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떨렸다. 팔뚝까지 번진 하얀 빛이 불빛 아래에서 더욱 또렷해 보였다. 경찰관의 눈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 손... 의료 검사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상관없어요."

지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의료 기록은 조직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만 남았다. 능력을 버리는 것. 강태현을 법정으로 보내는 것. 그리고 엄마에게 돌아가는 것.

지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경찰관의 눈과 마주쳤다.

"알겠습니다.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은은 침을 삼켰다. 한 명씩, 차례대로. 경찰관의 노트북에 이름이 기록되었다. 진준혁. 김민준. 이소영. 박준호. 그리고... 이준호.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때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지막 의뢰 대상자는 이준호입니다. 고등학교 교사. 하지만 저는... 그를 지우지 못했습니다."

경찰관이 펜을 멈추고 지은을 바라봤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지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조사는 계속됐다. 강태현의 위치, 조직의 구조, 거래의 흔적들. 지은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박수진이 중간중간 커피를 가져왔다. 수진의 눈은 여전히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은은 이해했다. 친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이었다.

밤 열 시, 조사실의 불이 꺼졌다. 경찰관이 일어섰다.

"내일 다시 조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지은은 일어나려다 멈췄다.

"제 엄마는... 안전합니까?"

"현재 요양원에 순찰차를 배치했습니다. 강태현의 조직원들이 접근하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지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엄마가 안전하다. 그것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경찰서를 나갔을 때 밖은 이미 밤이었다. 소호의 야경이 검은 하늘 아래 흩어져 있었다. 항구 쪽에서는 배의 경적 소리가 들렸다.

박수진이 따라왔다.

"지은. 내일 병원에 와. 그 손을 검사해야 해."

"알았어."

"진짜야. 손목을 넘어 팔뚝까지 번졌다니... 이건 정상이 아니야."

지은은 자신의 팔을 들었다. 불빛 아래에서 하얀 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자신의 살이 투명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아. 그런데 수진."

"응?"

"나는... 이제 괜찮아."

수진이 지은을 바라봤다. 친구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명확했다.

"엄마가 나한테 말했어. 기억이 없어도 나는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고.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지은..."

"그래서 이제 난 무서워할 게 없어. 능력을 잃든, 기억을 잃든. 엄마가 나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박수진의 눈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넌 진짜 미쳤어.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아니야. 난 이제 정상이야."

지은은 친구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망 때문이었다.

"고마워, 수진. 정말."

"뭘... 친구잖아."

그들은 경찰서 앞 거리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밤바람이 불었다. 소호의 밤은 조용했다. 배경음은 오직 파도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음악뿐이었다.

"이준호는?"

수진이 물었다.

"모르겠어. 조직 때문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그가 알고 있어. 새벽 해변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경찰이 조직을 수사하면서 그 일도 들었어. 이준호가 직접 신고했거든."

지은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가... 신고했다고?"

"응.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거라고. 3년 전 너와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박수진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있었다.

"저 남자, 정말 미쳤네. 너 때문에."

지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준호. 그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지우려 했던 사람. 3년의 기억. 하지만 결국 지우지 못했던 사람.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

그 의문이 지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신고. 조직을 신고했다는 것.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니, 자신이 돌아올 수 있도록.

"난 가볼게."

"요양원은 내일이야. 경찰이 조사 때문에 오늘은 면회를 제한했어."

"그래도 가야 해."

지은은 박수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항구 방향으로 걸어갔다. 밤의 소호는 낮과 다른 도시였다.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의 호흡처럼.

소호 해변에 도착했을 때 밤 열 두 시를 넘겼다. 해변은 텅 비어있었다. 파도 소리만 반복되었다.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지은은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손가락의 하얀 빛이 파도에 반사되었다. 마치 자신이 빛이 되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투명해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안녕."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은은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 이준호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손에 담요를 들고 있었다.

"날 기억해?"

이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네. 기억해요."

"좋아. 정말 좋아."

이준호가 다가왔다. 지은의 어깨에 담요를 걸쳐줬다. 그것은 조용한 행동이었지만, 모든 것을 말했다.

"경찰에서... 많이 힘들었겠네."

"괜찮아요."

"거짓말하지 마."

이준호가 지은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에는 수많은 밤이 담겨있었다. 기다림의 밤들. 불안함의 밤들. 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는 희망이 있었다.

"난... 넌 왜 나를 지우지 않았어?"

이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것 같았다.

지은은 바다를 봤다. 파도는 계속 밀려왔다. 빠져나갔다. 다시 밀려왔다. 끝없는 반복. 하지만 그 반복 속에는 리듬이 있었다.

"당신이 중요했거든요."

"더 중요한 게 있잖아. 엄마. 엄마를 보호하는 게..."

"엄마도 있고, 당신도 있었어요."

지은이 이준호를 봤다.

"그리고 난... 이제 알았어요. 뭔가를 지우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라는 걸. 함께 견디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이준호는 말이 없었다. 다만 지은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이 지은의 하얀 손가락을 감쌌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난 3년을 잊었어. 그 3년 동안의 모든 걸."

"아니야. 난 지우지 않았어."

"그걸 어떻게..."

"능력을 쓰지 않았거든."

이준호의 눈이 커졌다. 마치 처음으로 지은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 3년은?"

"남아있어. 당신의 기억 속에."

지은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그리고 난... 그 기억 속에 있고 싶어요."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밤바람이 불었다. 지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손가락의 하얀 빛은 이제 팔뚝을 넘어 어깨에까지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자신이 투명해지든, 기억을 잃든, 능력을 버리든. 엄마의 기억 속에 자신이 남아있고, 이준호의 기억 속에 자신이 남아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경찰에 신고해줘서 고마워."

지은이 말했다.

"미안해. 더 빨리 할 수 없었어."

"이제 충분해."

그들은 밤새 해변에서 함께 있었다. 말 없이. 단지 함께. 파도의 리듬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가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되어가는 그 모순 속에서.

새벽이 밀려왔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지은의 손가락은 이제 목까지 번져있었다. 투명함이 전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은의 눈은 명확했다.

"가야 해."

"알아."

이준호가 지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약속해줄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게."

"네. 약속해요."

그 약속은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뢰였다. 기억이 없어도 남는 것. 기억을 잃어도 남는 것.

사랑이었다.

---

새벽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 지은은 자신의 손을 봤다. 목까지 번진 하얀 빛. 투명해져가는 손가락들. 하지만 그 투명함 속에서 무언가가 더욱 명확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박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진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지은을 향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사 계속할 준비됐어?"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끝낼 시간이야."

조사실로 들어가는 순간, 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경찰이 이를 제지했지만 지은은 화면을 봤다. 요양원에서 온 전화였다.

심장이 철렁했다.

"받아도 되겠습니까?"

지은이 경찰에게 물었다. 경찰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박지은 씨입니까? 이건 소호 요양원입니다. 혹시 유미영 보호자 분이신가요?"

지은의 손이 떨렸다.

"네. 저 딸입니다."

"어머니가... 계속 누군가를 찾으셨습니다. 아침부터 말이에요. 저희 직원들도 누가 필요하신지 몰라서... 혹시 본인이신가요?"

"저... 지금 가야 할 일이 있는데..."

"어머니가 정말 불안해하세요. 자꾸만 창밖을 보시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지은은 조사실 벽을 봤다. 회색 벽.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거울 같은 벽. 그리고 그 벽 너머에는 엄마가 있었다.

"조사를 마친 후 요양원으로 가겠습니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경찰관이 지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이해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조사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지은은 강태현의 조직에 대해 모든 것을 말했다. 위치, 구조, 거래 방식.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자신의 능력이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지은은 능력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손가락에서 나오는 하얀 빛을 느끼면서, 그것이 자신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은은 선택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되겠다고.

오후 두 시, 조사가 끝났다.

"강태현은 현재 도주 중입니다. 하지만 곧 체포할 겁니다. 당신의 증언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 되겠습니까?"

"요양원으로 가는 거죠?"

지은은 놀라 경찰을 봤다.

"당신 엄마가 계속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건 중요합니다. 그게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한다는 신호예요. 가세요."

지은은 경찰서를 나갔다. 택시를 탔다. 요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자신의 손을 봤다. 목까지 번진 하얀 빛. 이제 곧 전신이 투명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요양원의 3층 복도는 조용했다. 엄마의 방 앞에서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침부터 계속..."

간호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지은은 방을 열었다.

엄마는 창가에 서 있었다.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엄마."

지은이 부르자, 유미영이 돌아섰다.

그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엄마의 눈이 커졌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하지만 그 눈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기억은 없을지 모르지만, 감정은 남아있었다.

"당신이... 내 딸?"

엄마가 물었다.

"네, 엄마. 전 지은입니다."

"지은... 그런 이름의 딸이... 있었나?"

기억이 흐릿했다. 하지만 엄마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상해. 넌 내가 찾던 사람인 것 같아."

엄마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 방식은 분명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수천 번이나 반복해온 익숙한 제스처처럼. 엄마의 손가락이 지은의 손가락 사이로 자연스럽게 끼워졌다.

"정말... 그런 것 같아."

지은은 엄마를 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손가락의 하얀 빛은 이제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지은의 몸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엄마의 품 속에서, 지은은 가장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기억 속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함께 속에서.

투명해지는 손가락들이 엄마의 등을 감싸안았다. 지은은 그 감각에 집중했다. 엄마의 체온. 엄마의 심장박동. 엄마의 숨결.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그것이 충분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요양원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3층 복도의 창문으로 소호 항구가 보였다. 배의 불빛이 검은 바다 위에서 흔들렸다.

경찰청 특수팀은 그 시각 소호 항구의 남쪽 창고 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태현의 조직 거점을 압수수색하기 위해. 지은의 증언이 정확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었다.

강태현은 아직 도주 중이었다. 하지만 시간 문제였다. 조직의 구조가 드러났고, 거래처들이 적발되었다. 그의 체포는 이제 시간 문제였다.

경찰청 본부의 한 사무실에서 박수진은 지은의 조사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친구의 증언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요양원의 3층 방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엄마와 딸. 기억을 잃은 자와 투명해져가는 자. 하지만 그들의 손은 놓이지 않았다.

손을 잡는 방식이 바뀌었다. 지은의 손이 이제 반투명이 되자, 엄마는 더욱 단단하게 잡았다. 마치 사라지는 딸을 붙잡으려는 절박함으로.

"여기 있어. 엄마가 여기 있어."

유미영이 중얼거렸다. 기억은 없었지만, 감정은 명확했다. 무언가를 잃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붙잡으려는 사랑.

"내가 놓지 않을게. 절대로."

엄마의 손이 더욱 단단해졌다. 지은의 투명한 손이 엄마의 손 안에 명확하게 느껴졌다.

지은은 눈을 감았다. 투명해져가는 자신의 몸. 사라져가는 기억들. 하지만 엄마의 손 온기는 여전히 명확했다. 엄마의 손이 더욱 뚜렷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투명해질수록 엄마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창밖의 소호 항구에서는 경찰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강태현의 조직 거점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되었다. 그의 최후는 이제 임박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지은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은은 이미 자신의 싸움을 끝냈다. 능력을 버리는 대신 얻은 것이 있었다. 엄마의 사랑. 이준호의 신뢰.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투명해져가는 손가락. 사라져가는 기억. 하지만 남는 것들이 있었다.

엄마의 품 속에서 지은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강태현은 곧 잡힐 거야.'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여기 있었다. 엄마의 기억 속에. 이준호의 기억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속에서.

투명해져가는 손가락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지은은 엄마를 한 번 더 안았다.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

기억을 잃은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기억이 없어도 남는 사랑. 그것이 유미영이 지은에게 남긴 것이었다.

밤이 깊어갔다. 요양원의 복도는 조용했다. 3층 방의 불도 천천히 꺼져갔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두 손은 놓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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