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기억
경찰서를 나온 지은의 발걸음은 불안정했다. 사흘 밤을 새운 탓도 있지만, 손목까지 번진 하얀 빛이 사라진 후 몸 전체가 깃털처럼 가벼워진 느낌 때문이었다. 능력을 포기하는 순간, 세상의 무게가 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경찰관 진준혁은 지은을 배웅하며 말했다. "강태현은 국제 도주를 시도했어. 잡힐 거야."
지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말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요양원의 엄마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택시 안에서 지은은 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요양원 간호사의 전화 기록이 남아있었다. 아침 6시, 7시, 8시. 세 번. 엄마가 자신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지은은 운전사에게 주소를 알려주고 창밖으로 흐르는 소호 시내를 바라봤다. 회색 빌라촌, 낡은 간판들, 항구 냄새. 이 도시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은 자신은 완전히 달라졌다.
요양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9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은은 뛰어갔다.
엄마는 거실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하얀 헝겊을 비비고 있었고, 그것을 놓았다 집었다를 반복했다. 지은이 다가가자 엄마의 손이 멈췄다.
"지은아?"
목소리는 불확실했다. 마치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데 정말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는 톤이었다.
"응, 엄마. 난 지은이야."
지은은 엄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 사흘간 경찰서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결연함은 이 순간 무너졌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엄마가 더 불안해할까봐.
유미영은 딸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무언가가 떠올라 하는 노력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는 노력. 그 과정이 보였다.
"너... 내 딸이지?"
"응. 난 엄마의 딸이야. 박지은이야."
"박지은..."
엄마가 중얼거렸다. 마치 낯선 이름을 소리 내어 확인하듯. 그런 다음 갑자기 손을 뻗어 지은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아, 그래. 지은이다."
엄마의 목소리에서 갑자기 확신이 나타났다. 기억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으로부터. 지은은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가 자신을 기억한 게 아니라, 자신을 '느껴'낸 것이라는 것을.
"내가 버리지 않았어. 절대 버리지 않았어."
엄마의 말이 떨렸다. 마치 이 말을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한다는 듯이. 지은은 엄마의 품에 안겼다. 그 품은 예전보다 작아 보였다. 하지만 안정감은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요양원 간호사가 아침 식사를 권했을 때 지은은 엄마를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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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이후의 날들은 낯설었다.
지은은 자신의 손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하얀 빛이 나타나지 않는다. 투명해지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손이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자꾸만 불안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 때, 손이 떨렸다.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몇 초간 멈춰 있다가 이준호가 물었다. "괜찮아?"
"응. 그냥... 손이."
"손이 뭐?"
"없어."
지은은 손을 펼쳤다. 하얀 빛도, 초능력도 없었다. 그저 손이 있을 뿐이었다.
일주일 후, 지은은 박수진을 찾아갔다.
"기억 포기 후 이런 증상 있어?"
"뭔데?"
"손이 떨린다. 자꾸만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할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리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박수진은 지은을 바라봤다. 오래 바라봤다.
"그건 당연한 거야. 넌 지금 너 자신을 재정의하는 중이야. 초능력이 없는 박지은이 누구인지를 찾는 중."
"그게 뭔데?"
"모르면 찾는 거지. 엄마와 함께 찾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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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일 후, 지은은 소호 항구 근처의 낡은 건물 2층 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준호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목재 테이블, 오래된 에스프레소 머신,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빌라촌. 여름 햇살이 테이블 위에 직사각형으로 떨어졌다.
"라테 한 잔, 아메리카노 두 잔."
지은은 에스프레소를 분사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더 이상 하얀 빛도 나타나지 않았다. 능력을 포기한 순간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은, 밀크 좀 데워줄 수 있어?"
이준호가 뒤에서 물었다. 가죽 앞치마를 두른 그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알았어."
지은은 스팀 노즐에 밀크를 갖다댔다. 하얀 거품이 부풀어올랐다. 그 거품을 보면서 지은은 웃었다. 예전에는 흰색을 보면 자신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투명해지는 손가락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커피 거품일 뿐이었다.
정오쯤, 카페 문이 열렸다. 엄마였다.
유미영은 매일 이 시간에 온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매번 처음 온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카운터를 보고 지은의 얼굴을 마주친다.
"어서오세요."
지은은 직원처럼 인사했다. 그리고 몸을 숙여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 난 지은이야. 넌 내 엄마고, 우리는 함께 있어."
유미영은 지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눈이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뭔가를 기억하려는 듯한 노력이 보였고, 그 다음 포기했다. 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온전한 웃음이었다.
"그래. 우리 함께 있네."
엄마가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지은이 매번 준비해두는 자리였다. 엄마는 그 자리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이 기억했다.
지은은 엄마를 위해 따뜻한 우유를 준비했다. 설탕을 한 숟가락 넣고, 계피 가루를 살짝 뿌렸다. 엄마가 좋아하는 맛. 엄마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맛.
"고마워, 지은아."
엄마가 잔을 들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치매의 진행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은은 그것을 보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엄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함께."
"응, 함께."
엄마의 손이 안정되었다.
오후 1시. 박수진이 카페에 들어왔다. 코트를 벗으며 지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의사 박수진은 주 2회 카페에 나타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원래는 지은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정말로 이곳의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제 엄마 어땠어?"
수진이 카운터에 기대며 물었다.
"좋았어. 어제는 내 손을 계속 잡고 있었어. 말도 별로 안 했는데."
"기억이 남아있는 건가?"
"아니야. 기억은 없는 것 같아. 하지만... 뭔가 편안한 거 있잖아. 누군가를 안고 싶을 때 그런 기분."
수진이 웃었다. "기억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았구나."
"응. 드디어."
지은이 아메리카노를 만들며 말했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준호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할머니. 유진숙 할머니였다.
"할머니, 앉으세요. 여기 자리 있어."
이준호가 할머니를 조심스레 이끌었다. 할머니는 요양원을 나온 지 얼마 안 됐다.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할머니가 테이블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가 유미영을 보았다.
"어, 당신..."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이 분은 내 친구야."
유미영이 말했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할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 없이도 나는 웃음. 지은은 그 웃음을 보며 깨달았다. 엄마가 자신에게 보여주던 그 웃음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오후 3시. 카페는 조용했다. 손님이라곤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수진뿐이었다.
지은은 앞치마를 벗었다.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엄마, 우리 나가볼까?"
지은이 손을 내밀었다. 엄마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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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해변이었다.
소호 항구의 해변은 여름과 겨울의 경계에 있었다. 아직 따뜻했지만 해는 빨리 져 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은과 엄마, 그리고 이준호와 박수진, 유진숙 할머니가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돗자리를 깔았고, 누군가 라테를 준비했고, 누군가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엄마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이 사람 누군데?"
엄마가 지은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지은이야. 엄마."
"지은? 내가 아는 지은?"
"응. 엄마 딸 지은."
엄마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해는 더 내려갔다. 주황색에서 분홍색으로, 분홍색에서 보라색으로.
"그런 딸이 있었나?"
엄마가 웃었다. 기억이 아니라 직관으로 웃었다.
"있었어. 지금도 있고."
지은이 엄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이준호가 박수진을 바라봤다. 수진이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이준호는 지은 옆에 앉았다. 아주 가까이.
지은은 해를 바라봤다. 해가 점점 더 내려갔다. 하늘은 검어졌다. 별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하늘이었다.
지은은 별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엄마도 따라 세기 시작했다. 엄마는 다섯 번째 별에서 멈췄다. 기억이 끊긴 것이었다. 하지만 지은은 계속 세었다. 엄마를 위해서.
"저기 저 별, 봐. 제일 밝지?"
지은이 엄마의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으로 별을 가리켰다.
"어?"
엄마가 따라봤다.
"저 별이 우리 별이야."
"우리?"
"응. 엄마랑 내 별."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 없는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사랑이 있었다. 지은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갈망 '엄마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고 싶다'는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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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이 더 흘렀다.
지은은 카페에서 일하며 엄마를 돌봤다. 매일 정오, 엄마는 카페에 온다. 매번 처음인 것처럼. 하지만 지은은 더 이상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새로운 만남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엄마의 기억은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날 엄마는 지은을 낯선 사람으로 대했다. 그 다음날은 지은을 자신의 어머니로 착각했다. 하지만 지은의 손을 잡는 순간, 엄마의 얼굴은 항상 부드러워졌다. 따뜻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것이 전부였다.
6개월이 흘렀다.
카페 문을 열 때마다 지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초능력이 없는 자신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인 게 아니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손으로 엄마의 손을 잡고, 이 손으로 커피를 만들고, 이 손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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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더 흘렀다.
엄마의 기억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매일 아침, 지은이 엄마 옆에 앉으면 엄마는 웃었다. 따뜻한 웃음. 그것이 전부였다.
카페는 여전히 소호 항구 근처에 있었다. 지은은 여전히 그곳에서 일했다. 이제 그곳은 그저 카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은이 엄마와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장소였다.
여름이 돌아왔다. 정확히는 2년 전 그날로부터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은이 능력을 포기한 날.
해변에서 지은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기억나?"
"뭘?"
엄마가 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처음? 언제?"
엄마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은은 기억했다. 모든 것을 기억했다.
"오늘. 매일이 오늘이야."
지은이 말했다.
"그래?"
엄마가 웃음을 흘렸다.
"그럼 좋은 오늘이네."
지은은 엄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더 이상 초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이 손은 충분히 따뜻했다. 충분히 강했다.
해는 떠올랐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지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엄마가 먼저였다. 기억 없이, 그저 본능으로.
지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투명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따뜻하고 단단한 손으로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