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고빙수의 퇴고본
강태현의 손가락이 핸드폰 화면을 스르륵 넘겼다. 지은의 엄마가 카페에 앉아 있는 영상이었다. 회색빛 머리, 구부정한 등, 창밖을 바라보는 떨리는 손. 3분짜리 영상은 지은을 10초 만에 숨 막히게 했다.
"너의 선택이 그녀의 안전을 결정해."
강태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신사적이었다. 마치 친구에게 조언해주는 것처럼.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칼날 같은 압박이었다.
"48시간이야. 고등학교 교사 이준호의 기억 3년치를 지워. 그럼 이 영상은 사라질 거고, 엄마는 안전할 거야. 아니면..."
영상이 끝났다. 강태현은 말을 잇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무섰다. 자동차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요양원 앞 골목길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내일 오후 2시, 소호 항구 창고에서 만나자. 혼자 와. 그리고 이준호의 기억을 준비해."
강태현이 추가했다. 핸드폰 화면이 바뀌었다. 요양원 지하주차장의 CCTV 영상. 검은 차량 옆에 선 남자 두 명. 김도훈과 또 다른 인물이었다. 지은은 이준호가 자신을 만난 이후로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는 것을 강태현이 파악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24시간 거기 있을 거야. 혹시 경찰 같은 생각 하지 마. 이미 손을 썼거든."
통화가 끝났다. 지은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 속에 갇혔다. 하나는 48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또 하나는 이준호라는 사람을 지우는 데 걸리는 심리적인 시간. 그 둘 사이의 간격을 채우는 것은 엄마의 목숨이었다.
저녁 6시 28분. 지은은 여전히 골목에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집으로 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고, 요양원으로 가면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둘 사이의 어딘가에서 시간만 흘러갈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손을 잡았다.
"지은아."
이준호였다. 검은 코트, 축축한 머리, 걱정으로 주름잡힌 이마. 마치 오래전부터 이 골목에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의 손이 지은의 손목을 감싸 잡았다.
"뭐 해? 이 시간에 여기서?"
지은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설명할 수 없었다. 아니, 설명하면 이준호가 더 위험해진다는 걸 알았다. 강태현의 협박이 이미 이준호를 겨냥하고 있었다. 3년의 기억. 아마도 이준호가 지은을 만난 이후의 모든 기억이 대상일 것이었다.
"카페 가자."
이준호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질문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그는 지은의 손을 놓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소호 해안도로의 야경이 그들을 감쌌다. 가로등이 밝혔다. 저 멀리 항구의 빨간 불이 깜빡였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수진이 이미 앉아 있었다. 테이블 앞에는 따뜻한 초콜릿과 식어가는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지은이 자리에 앉자 수진이 먼저 말했다.
"이준호가 연락했어. 넌 지금 상황이 뭔지 말해야 해."
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입술이 떨렸다.
"말하지 마. 위험해."
"위험한 게 뭐야?"
수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이준호가 수진의 어깨를 톡 쳤다.
"낮춰."
그러고는 지은을 똑바로 봤다.
"넌 지금 뭔가에서 도망치고 있어. 그게 뭔지 말해."
지은은 손가락을 봤다. 하얀 빛이 희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48시간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 빛은 점점 밝아질 것이었다. 이준호를 지울 때마다 자신의 기억이 역순으로 사라진다는 것. 3년을 지우려면 얼마나 많은 자신의 것을 잃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라는 것을.
"강태현이 내 조직이... 이준호 기억을 지우라고 했어. 48시간 안에. 그 대신 엄마가 살 거고... 안 하면..."
말이 끊겼다. 지은의 목구멍이 조여왔다.
"안 하면?"
이준호가 물었다. 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지은의 손을 찾았다. 따뜻했다. 지은은 그 온기가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밝혀지는 하얀 빛을 희석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사고를 당할 거야. 자동차 사고, 또는 다른 뭔가. 그들은 할 수 있어. 난 봤어. 영상으로. 지하주차장에 차량이 있어. 요양원 앞에. 24시간."
수진이 테이블을 치고 일어났다.
"미쳤네. 이건 협박이야. 협박죄야. 넌 신고해야 돼. 경찰에."
"경찰 안 돼. 강태현이 경찰까지 손 써. 내가 지금까지 한 일들... 내가 지운 기억들... 그 대상자들 중에 경찰도 있어."
지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수진과 이준호를 번갈아 봤다.
"그리고 내가 이준호를 지우면... 난 3년을 잃어. 내 기억의 3년을. 너희를 만난 3년을. 아마도 더 잃을 수도 있어. 지운 기억의 무게가 크니까."
지은이 손가락을 펼쳤다. 하얀 빛이 더 밝게 번쩍였다.
"손가락부터 시작해. 이미 손목까지 올라왔어. 다음엔 팔이고, 그 다음엔... 난 누가 될 거야? 이준호를 지운 후에 거울을 봤을 때 그 얼굴이 누구 얼굴인지 알 수 있을까?"
침묵이 카페를 가득 채웠다. 라운드 테이블, 흰 컵, 그리고 세 사람. 밖에서는 해안도로의 자동차음이 들렸다. 멀리서는 배의 경적음이 울렸다. 소호의 밤 풍경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왔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럼 내가 너 대신 기억해줄게."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준호의 눈빛이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두려움도 없었고, 회피도 없었다. 오직 명확함만 있었다.
"우리가 만난 첫날. 넌 이 카페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어. 해가 질 때였어. 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난 알 수 있었어. 넌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매일 왔어. 넌 날 무시했어. 몇 개월을 무시했어. 그리고 어느 날부터 넌 내 눈을 봤어. 그 순간 난 알았어. 넌 혼자가 아니라는 걸. 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 누군가가 나였던 거야."
지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넌 충분해, 지은. 넌 이미 충분해. 넌 엄마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어. 기억이 없어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넌 거기 있거든. 그게 사랑이야. 기억이 아니라 현재야.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그게 전부야."
수진이 티슈를 꺼냈다. 지은에게 건넸다. 지은은 자신의 뺨을 만졌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가락의 하얀 빛이 눈물 위에서 반사되었다.
"우린 너를 놔주지 않을 거야."
수진의 목소리가 낮고 단호했다.
"내가 경찰 형에게 이미 연락했어. 상황을 설명했어. 협박이고 위협이고 불법 조직 거래라는 걸. 형이 뭔가 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있어. 넌 지금 혼자가 아니야."
이준호가 지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따뜻함이 전해졌다. 지은은 그것이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밝혀지는 하얀 빛을 녹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사랑이 능력을 삼키는 것처럼.
카페 문이 열렸다. 늦은 손님이 들어왔다. 지은은 그 순간 결심했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라는 것을.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것을.
핸드폰이 울렸다. 지은이 화면을 봤다. 엄마 유미영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딸, 너 어디야? 집에 와. 난 너랑 함께 있고 싶어. 제발."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결심 때문이었다. 지은은 핸드폰을 들었다.
"이준호. 넌 내일 오후 2시까지 어디를 가든 피해야 돼."
이준호가 물었다.
"넌?"
"난... 강태현을 만날 거야. 그리고 거절할 거야. 이준호를 지우는 것도, 조직도, 모든 걸."
"그럼 엄마가..."
"엄마가 위험해질 거야. 내가 알아. 근데 난 이미 너무 많이 잃었어. 엄마와의 기억, 너와의 시간, 내 자신까지. 더 이상은 못 잃어."
지은이 이준호의 눈을 봤다.
"그리고 엄마가 날 원하고 있어. 지금. 기억이 없어도 날 원하고 있어."
밤 11시 43분. 요양원 앞. 지은의 손가락은 밝은 하얀색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고, 손은 멈추지 않고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손은 더 이상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들려 있지 않았다. 그 손은 엄마를 만나기 위해 들려 있었다.
핸드폰에 강태현의 메시지가 또 들어왔다.
"48시간 타이머가 시작됐어. 넌 이미 24시간을 썼어. 남은 시간은 24시간. 이준호를 지우거나, 아니면 너의 엄마가 내일 오전 8시에 차에 치일 거야.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야."
지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요양원의 불이 밝혔다. 3층 창문에서 누군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작은 실루엣. 그것이 엄마였다. 지은은 달렸다. 계단을 올랐다. 3층 복도를 걸었다. 엄마 방 문을 열었다.
유미영이 돌아섰다. 눈이 흐릿했다. 지은을 인식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누구세요?"
그 말이 지은의 가슴을 갈랐다. 하지만 지은은 웃었다. 정말로 웃었다. 눈물 흘리며.
"난 지은이야, 엄마. 넌 내 엄마고, 난 넌 딸이야. 그게 전부야. 그게 영원해."
지은이 엄마를 안았다. 엄마의 몸이 뻣뻣했다가 천천히 지은을 안아주기 시작했다. 그 팔의 무게는 기억보다 무거웠고, 동시에 더 따뜻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현재였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지은의 손가락은 여전히 밝은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능력은 계속 깊어지고 있었다. 손목을 넘어 팔뚝으로 퍼지고 있었다. 지은은 자신의 청각이 변하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동시에 피부의 감각이 둔해졌다. 엄마를 안은 팔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지은은 이미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요양원 3층 복도는 형광등 아래 유독 길어 보였다. 지은은 엄마를 놓지 않은 채 침대로 데려갔다. 엄마의 몸이 침대에 닿자마자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핸드폰이 또 울렸다. 강태현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지은은 받았다.
"박지은?"
음침한 남자 목소리. 지은은 그 목소리를 알았다. 김도훈. 조직의 실행자. 강태현보다 더 위험한 사람.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지은의 몸이 얼었다.
"넌 지금 소호 요양원 3층이지. 네 엄마 옆에. 우리도 알아. 네 엄마가 지금 자고 있다는 것도. 자는 사람 몸을 움직이는 건 쉬워. 특히 계단에서."
"하지 마."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침대 옆에 선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그럼 내일 오후 2시, 강태현을 만나. 이준호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 그리고 다음 의뢰를 받을 준비를 해. 아니면..."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얀 빛이 더 밝아졌다. 이미 손가락 전체가 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손목을 넘어 팔뚝으로 퍼지고 있었다. 자신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거울을 봐도 자신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엄마가 뒹굴었다.
"...지은아?"
지은은 재빠르게 옆에 앉았다.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최대한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여기 있어, 엄마. 나 여기 있어."
"어두워. 너무 어두워."
"불을 켤게."
지은이 손가락으로 스탠드를 켰다. 하얀 빛이 방 전체를 밝혔다.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불안으로 가득 찬 눈. 지은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의 투명함이 엄마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난 여기 있어. 계속 있을 거야."
엄마가 조금씩 진정되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지은은 그렇게 한 시간을 앉아 있었다.
밤 12시 47분. 휴대폰에 또 메시지가 들어왔다. 사진이었다. 요양원 지하주차장의 CCTV 영상. 검은 차량 한 대. 그 차량 옆에 선 남자 두 명. 김도훈과 또 다른 남자.
메시지 본문: "우린 24시간 여기 있을 거야. 그리고 내일 오후 2시까지 기다릴 거야. 아니면 사고는 우연처럼 보일 거야. 넌 알잖아. 우리가 얼마나 깔끔하게 일하는지."
지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손가락만이 아니라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분노. 자신의 능력이 오직 기억을 지우는 것뿐이라는 분노. 누군가를 보호할 수 없다는 절망감.
하지만 동시에 지은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자신의 능력의 메커니즘을. 지운 기억의 무게만큼 자신의 기억이 역순으로 사라진다면, 역으로 자신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면서 그 과정에서 능력의 기반 자체를 소거할 수 있다는 것을.
지은의 손이 떨렸다. 이 방법은 지금까지 시도한 적이 없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자신의 기억을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대가였지만, 의도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먼저 지우면서 능력을 역으로 무효화시킨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자해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엄마의 손을 놓고 방을 나갔다. 복도 끝의 창문으로 갔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지하주차장의 불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안에 검은 차량이 있었다. 정말로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이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은? 이 시간에?"
"내일 학교 가지 마. 어디든 가지 마. 집에만 있어. 문을 잠가. 창문도 잠가."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난 내일 모든 걸 끝낼 거야. 그 전까지만 버텨. 제발. 넌 내가 잃을 수 없는 사람이야."
지은은 전화를 끊었다. 이준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다음 박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진아."
"지은? 뭐야? 새벽 1시인데?"
"내일 경찰 형한테 내 주소를 알려줄 수 있어? 그리고 내일 오후 3시까지 나한테 연락 없으면... 강태현을 신고해 줄 수 있어?"
"지은, 뭔 소리야? 너 뭐하는 거야?"
"날 믿어. 제발. 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 이번이 끝이야. 이번 이후로는 절대 능력을 안 쓸 거야. 제발. 약속해 줄래?"
침묵이 있었다. 그 다음, 박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알았어. 약속할게."
지은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창밖을 다시 내려다봤다. 검은 차량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불꽃이 보였다.
지은은 결심했다. 내일은 강태현을 만나러 갈 것이다. 하지만 이준호의 기억을 지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버리러 갈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역으로 지우면서 능력의 기반을 소거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은은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엄마가 옆에서 자고 있는 이 순간이라는 것을.
지은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엄마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의 투명함이 엄마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지은은 눈을 감고 대기했다. 새벽을. 그리고 그 새벽이 가져올 마지막 선택을.
새벽 4시. 지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엄마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지은은 침대 옆에 메모를 남겼다.
"엄마, 난 조금 나갈 거야. 모든 게 끝나면 돌아올 거야. 그리고 이번엔 영원히 옆에 있을 거야. 사랑해."
지은은 메모를 침대 위에 놓고 요양원을 나갔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하지만 동쪽 하늘에는 희미한 빛이 시작되고 있었다. 새로운 날의 시작.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태현이었다.
"오늘 오후 2시. 소호 항구 창고. 혼자 와. 그리고 이준호의 기억을 준비해. 아니면 오전 8시, 기억해?"
지은은 대답했다.
"간다."
"좋은 여자. 그럼 오후 2시에 봐."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은 이제 완전히 하얀색이었다. 손목을 넘어 팔뚝까지 퍼져 있었다. 자신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더 이상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에 뜨거운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은은 알았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엄마를 지키려는 사랑. 이준호와 박수진을 지키려는 사랑. 그리고 자신을 지키려는 사랑.
지은은 걸었다. 해변을 향해. 오전 7시, 소호의 해변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파도 소리는 들렸다. 파도가 모래를 밀어내고, 밀어낸 모래가 다시 파도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
지은은 해변에 앉았다. 손가락을 펼쳤다. 하얀 빛이 모래 위에 흩어졌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호였다.
"지은, 지금 어디야? 나 너 만나야 해."
"항구 해변에 있어."
"나 지금 간다. 기다려."
지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다시 파도를 봤다. 파도는 계속 밀려왔다. 그리고 빠져나갔다. 그렇게 반복되는 그 움직임이 기억 같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기억이 그렇게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파도가 모래를 밀어내고 빼내도, 해변은 여전히 해변이라는 것.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선택한 이 결정이 가장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라는 것.
오전 7시 30분. 이준호가 해변에 나타났다.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지은을 보고 멈췄다.
"넌... 넌 뭐야? 손가락이..."
이준호가 지은의 손을 봤다. 완전히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는 손가락. 손목을 넘어 팔뚝까지 퍼진 투명함.
"난 내 능력을 버릴 거야. 오늘. 내 기억을 역으로 지우면서. 그 과정에서 아마 많이 잃을 거야. 근데 난 상관없어. 왜냐하면..."
지은이 이준호를 봤다.
"왜냐하면 넌 내가 잃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엄마도. 수진도. 넌 여기 있고, 엄마는 요양원에 있고, 수진은 병원에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것만으로 난 충분해."
이준호가 지은을 안았다. 지은의 투명한 손이 이준호의 등을 안았다.
"난 널 잃을 수 없어."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난 알아. 그래서 나도 널 잃지 않을 거야."
해변의 파도가 계속 밀려왔다. 그리고 밀려나갔다. 그렇게 반복되는 자연의 리듬 속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서 있었다. 하나는 투명해지고 있었고, 하나는 그 투명해지는 사람을 붙잡고 있었다.
오전 11시. 지은은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지은이 남긴 메모를 엄마의 손이 쥐고 있었다.
지은은 침대에 앉았다. 엄마의 얼굴을 봤다. 주름진 얼굴. 흰 머리. 하지만 그 얼굴 위에는 여전히 지은이 알던 엄마가 있었다. 기억이 없어도, 얼굴은 같았다.
"엄마, 난 지금 가야 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가야 해. 그럼 끝이야. 그 다음엔 영원히 옆에 있을 거야."
지은은 엄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손가락의 투명함이 엄마의 이마에 닿았다. 그 순간, 지은은 자신의 청각이 더욱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의 숨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촉각도 거의 사라졌다. 엄마의 피부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하지만 지은은 일어섰다. 요양원을 나갔다.
오후 1시 50분. 소호 항구의 창고 앞. 검은 차량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창고 문이 열렸다. 강태현이 나타났다. 그 뒤에 김도훈과 또 다른 남자들이 섰다.
"좋아. 왔네. 이제 끝내자."
강태현이 말했다.
지은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가락의 빛은 이제 팔 전체를 덮고 있었다. 손가락부터 팔뚝, 그리고 이제 어깨까지. 자신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준호의 기억을 지웠어?"
강태현이 물었다.
지은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아니."
지은이 말했다.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명확했다.
"난 이준호를 지우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난 너한테 협력하지 않을 거야. 대신..."
지은이 자신의 팔을 봤다. 투명함이 계속 퍼지고 있었다.
"대신 난 내 능력을 버릴 거야. 완전히. 내 기억을 역으로 지우면서 능력의 기반을 소거할 거야. 그럼 난 더 이상 누구의 기억도 지울 수 없게 돼. 넌 날 쓸 수 없어."
강태현의 얼굴이 변했다.
"뭐라고?"
"이미 신고했어. 수진이 경찰 형한테 다 말했어. 협박, 위협, 불법 조직 거래. 모든 게."
그 순간, 창고의 문이 열렸다.
"박지은!"
이준호의 목소리였다. 수진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뒤에 섰다.
"너희..."
강태현이 말했다.
강태현이 움직였다. 하지만 경찰이 그를 막았다.
"박지은, 넌 지금 뭐하는 거야?"
이준호가 외쳤다.
"난... 난 내가 될 거야."
지은이 말했다. 자신의 얼굴이 거울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더 이상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는 사람이 아닐 거야."
오후 2시. 창고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지은의 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