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요양원 3층 복도는 저녁 햇빛으로 주황색이었다.

지은이 엄마 방 문을 밀었을 때, 유미영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소호 항구가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있던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서며 지은을 바라봤다.

"어디 있었어?"

그 말이 지은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눈빛은 선명했다. 하지만 그 눈에는 지은을 아는 빛이 없었다.

유미영은 딸의 얼굴을 자세히 본 후, 천천히 일어섰다. 초점을 맞추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흐렸다.

"누세요?"

지은의 숨이 멈췄다.

"엄마..."

"죄송한데, 누신가요?"

엄마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묻어났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경계심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잊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지은은 엄마를 안으려 했다. 약간 굽은 등과 마른 어깨가 팔에 닿았다. 엄마의 손이 지은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여전히 따뜻했고, 여전히 엄마의 손이었다. 하지만 지은은 그 손길을 기억하지 못했다.

호떡의 맛이 없었다. 엄마의 웃음이 없었다. 엄마와 걸어다니던 골목의 색이 없었다.

지은은 엄마를 더 꼭 안았다. 현재의 온기만 남겨두고 싶었다. 과거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과거가 지은을 죽이고 있었으니까.

"엄마, 내가 어렸을 때 나 어땠어?"

지은의 목소리는 작았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묻는 것 같은 질문이었다.

유미영은 지은을 한 팔 길이 떨어지게 한 후, 딸의 얼굴을 들었다.

"너? 넌 정말 밝았어. 항상 엄마 손 잡고 다니며 웃었어. 엄마가 힘들 때, 넌 엄마 옆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냥 옆에만 있었어. 그게 엄마를 살렸어."

지은의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손가락이 지은의 뺨을 스쳤을 때, 유미영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뜨거워? 손가락이 뜨거워."

지은의 손가락에는 희미한 흰 빛이 맺혀 있었다. 엄마는 그 빛을 본 후, 다시 지은의 눈을 바라봤다.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안았다.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았다. 어둠이 소호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첫 번째 별이 나타났다. 엄마가 지은의 손을 잡았다.

"기억이 없어도 상관없어. 넌 내 딸이고, 넌 내 옆에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 말이 지은을 깨웠다. 모든 것을 이해했다. 엄마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자신이 엄마의 기억 속에 이미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손길이, 이 순간이 사랑이라는 것을.

지은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

박수진이 요양원 로비에 나타났을 때는 밤 열 시였다. 지은은 요양원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식히고 있었다. 수진은 의사 가운을 벗지 않은 채로 앉았다.

"지은, 넌 뭘 하려고 그래?"

수진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엄마를 구하려고 능력을 쓰는 거야? 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야."

지은은 커피잔을 만지고만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엄마랑 함께 있어. 그게 진짜 구원이야."

수진의 손이 지은의 손등을 덮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의사의 손이 아니라, 친구의 손이었다.

"넌 기억을 잃고 있어, 지은. 네 눈이 자꾸 흐릿해져. 내가 의사로서 봐도 그래. 네가 이대로 가면... 넌 사라져 버려."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지우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엄마가 고통받지 않게, 엄마가 편하게 죽게. 하지만 지은, 그게 아니야. 함께 견디는 게 사랑이야. 엄마 손 잡고, 엄마와 밥 먹고, 엄마 옆에 있어주는 게 사랑이야."

지은은 처음으로 울먹였다. 수진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지우고 싶던 것은 엄마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감이었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

밤 열한 시,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강태현이었다.

지은은 요양원 밖 계단에 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잘했어, 지은아."

강태현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조용한 목소리가 가장 위험했다.

"이제 넌 나한테 더 빚진 거야. 다음 의뢰는 더 클 거야. 거절하면 넌 잃을 게 많아."

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자신을 잃고 싶지 않으면, 계속 일해. 알겠어?"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하늘을 봤다.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기억이 떨어지고 있었다. 뇌 안의 실이 하나씩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지은은 거울을 봤다.

자신의 눈이 예전보다 더 흐릿했다. 얼굴이 낯설었다. 손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손가락에서는 희미한 흰 빛이 나왔다.

지은은 손가락을 펼쳤다. 희미한 빛이 욕실을 밝혔다. 어제보다 더 강해졌다. 능력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라지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강태현의 메시지였다.

**72시간 안에 다음 의뢰를 해. 아니면 엄마한테 뭔가 불행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

지은의 손이 떨렸다. 거울 속의 낯선 얼굴도 함께 떨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어제보다 더 창백했다. 눈동자가 희미해졌다. 손가락의 흰 빛은 손톱 끝부터 손가락 관절까지 밝은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은은 욕실 수도를 틀었다. 물이 손가락을 적셨다. 흰 빛이 물에 반사되며 일렁였다. 닦아도,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사라지고 있는 거였다.

핸드폰을 들었다. 강태현에게 답장을 할까. 아니면 무시할까. 둘 다 위험했다. 응답은 거절의 신호고, 침묵은 협박의 신호였다. 지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요양원으로 향하는 길, 지은은 소호의 거리를 걸었다. 항구의 냄새가 났다. 소금과 생선과 녹슨 철의 냄새. 이 냄새를 몇 번이나 맡았을까. 하지만 지은은 이 냄새가 언제부터 이 도시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항구를 걸었던 기억도 없었다. 지워졌거나, 아예 없었거나.

요양원 3층에서 엄마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유진숙 할머니가 옆에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지은이다!"

할머니가 먼저 지은을 봤다. 엄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다시 맞혔다. 그 몇 초 동안 지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누구세요?"

엄마의 목소리였지만, 지은을 보는 눈은 낯선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유미영의 손이 할머니의 손을 더 꼭 쥐었다. 경계심이 아니라 불안감이었다.

"엄마, 나야. 지은이."

지은이 다가갔다. 엄마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가 웃으며 엄마의 손을 꼭 쥐었다.

"유미영, 이게 누구야?"

할머니가 부드럽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누구세요?"

엄마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지은은 엄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 나 지은이야. 당신의 딸."

엄마가 지은의 얼굴을 찬찬히 봤다. 뭔가를 기억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흐렸다. 입술이 움직였다. 말을 하려다 멈췄다.

"아, 미안해요. 내가 기억을 못 해서. 죄송해요."

엄마의 목소리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괜찮아, 엄마. 괜찮아."

지은이 엄마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의 흰 빛이 엄마 손등을 비추었다.

"아, 뜨거워."

엄마가 손을 빼려 했다. 지은은 더 꼭 잡았다.

"괜찮아. 나야. 너의 딸이야."

엄마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기억이 없는데도, 무언가가 그 손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엄마는 지은을 다시 안았다. 몸이 떨렸다.

할머니가 일어섰다. 지은을 바라보고 천천히 문을 닫았다. 두 사람만 남겨두고.

---

오후 2시,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수진이었다.

"지은, 너 지금 어디야?"

"요양원."

"집으로 와. 지금 당장."

수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있었다. 지은은 엄마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집으로 향했다.

수진은 이미 지은의 집 안에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 보여줘."

지은은 손가락을 펼쳤다. 수진이 손가락을 잡고 의사의 눈으로 검사했다.

"이게 뭐야? 지은, 이게 뭐예요?"

수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능력이 깊어지고 있어.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지은은 말을 멈췄다. 손가락의 끝이 따끔거렸다. 마치 신경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수진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친구였는데, 그 이름은 마치 물 위의 파문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뭐? 그리고 뭐?"

"... 미안해. 뭐라고 할 말이 있었는데."

수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은, 너 지금 뭘 기억 못 했어? 내 이름?"

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이거 봐."

수진이 지은의 팔을 잡아 욕실로 끌고 갔다. 거울 앞에 섰다.

"이게 뭐야?"

수진이 지은의 손가락을 거울에 비추었다. 손가락의 흰 빛이 거울 속 얼굴을 밝혔다. 그 얼굴은 지은의 얼굴이 아니었다. 또 다른 누군가였다.

"너의 뇌 상태가 좋지 않아. 기억 손실이 가속화되고 있어. 지은, 이대로 가면 넌 완전히 소실돼. 너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려."

지은은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손가락의 빛이 그 얼굴을 밝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강태현이 뭐래?"

"다음 의뢰를 72시간 안에 하라고."

수진이 거실을 오갔다. 발걸음이 빨랐다.

"거절해."

"거절하면 엄마가 위험해."

"지은!"

수진이 돌아섰다. 지은의 양 어깨를 잡았다.

"넌 지금 자신을 잃고 있어. 넌 누가 되고 싶어? 능력 있는 기억 소거자? 아니면 엄마의 딸?"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수진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낯설지 않았다. 친구의 눈빛이었다.

"엄마가 너를 못 알아봤어. 아까 본 거 있어. 넌 울고만 있었어."

"알아."

"그럼 이제 뭘 할 거야?"

지은은 손가락을 펼쳤다. 흰 빛이 수진의 얼굴을 비추었다. 손가락 끝에서 뜨거운 열이 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능력 때문에 내가 사라지는 거 맞아. 근데 이걸 포기하면... 강태현이 엄마를 해칠 거야. 수진, 난 뭘 해야 돼?"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능력을 쓸 때마다 자신의 일부가 소실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능력을 써서 내가 사라지거나, 능력을 안 써서 엄마가 위험해지거나. 둘 다... 둘 다 죽음이야."

수진은 지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도움을 청해."

"뭐?"

"너 혼자가 아니야. 경찰에 신고해. 강태현의 협박을 신고해."

"그럼 내가 기억을 지운 사람들은?"

"... 그건 나중에 생각해. 지금은 너를 살려."

지은은 고개를 흔들었다. 경찰. 그건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들은 모두 불법이었다.

"지은, 넌 피해자야. 강태현이 너를 협박하고 있어."

"나는 피해자가 아니야, 수진. 나는 공범이야."

수진의 손이 지은의 손을 더 꼭 쥐었다. 하지만 그 손도 점점 멀어져 보였다. 지은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말의 의미가 흐릿했다. 마치 물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지은, 너는 이미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지만 너는 할 수 있어. 넌 강태현의 협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게 유일한 길이야."

---

밤 열한 시,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태현이었다.

"지은아, 의뢰 받았어?"

"아직."

"아직? 72시간이 얼마나 남았는 줄 알아? 48시간이야. 지금부터 48시간. 그리고 이번 의뢰는 좀 특별해."

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해 고등학교 교사, 이준호. 그 남자를 기억 소거해."

지은의 손이 떨렸다.

"그 남자가 뭘 했는데?"

"그건 상관없어. 그 남자의 지난 3년간의 기억을 다 지워. 학생들과의 추억, 동료들과의 관계, 모든 걸."

"그럼 그 남자는?"

"그 남자는 새로 시작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거야. 그게 우리 일이잖아."

강태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지은, 이번엔 다르게 할 거야. 의뢰가 끝나고 나면, 넌 그 남자에게 접근하지 말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니까.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너도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거. 이준호처럼."

지은의 숨이 멈췄다.

"넌 더 이상 누구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돼. 엄마도, 수진도, 이준호도. 아무도 너를 알 수 없게. 그게 진정한 자유야, 지은아."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창밖을 봤다. 소호의 밤거리가 보였다. 불이 켜진 가게들, 걷고 있는 사람들. 모두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친구였다.

그리고 그 중에 이준호가 있었다. 지은은 그를 기억했다. 서해 고등학교에서 만난 그 남자. 자신을 걱정해주던 눈빛.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따뜻함. 그 모든 것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강태현은 이준호뿐만 아니라 자신도 지우려고 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아무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엄마도 자신을 모르는 사람. 수진도 자신을 모르는 사람. 모두가 낯선 사람이 된다.

지은은 휴대폰을 들었다. 이준호의 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나야. 오늘 카페에 올 수 있어?"**

답장이 바로 왔다.

**"지은이! 요즘 어땠어? 오늘 카페에 있어. 와."**

지은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는 순간, 뇌 안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현이 끊어지는 음악처럼.

내일 아침, 자신은 그 남자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준호와의 만남도, 말도, 모든 것이.

지은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손가락의 흰 빛이 천장을 밝혔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열이 났다. 뜨거운 열.

그 순간, 지은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강태현의 협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능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강태현을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지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손가락이 아니라 마음이 떨렸다. 결정의 떨림이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진, 나 경찰에 신고할래. 모든 걸."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은... 정말?"

"응. 나는 사라질 수 없어. 엄마의 딸이니까."

지은은 핸드폰을 들고 경찰청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화면은 선명했다. 자신의 얼굴도 거울에서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거울을 봤다. 손가락의 빛이 거울 속 얼굴을 밝혔다. 그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이제는 다른 무언가가 보였다. 결정의 빛이었다. 자신을 되찾는 빛이었다.

지은은 핸드폰의 번호 입력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경찰청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한 자리씩, 천천히.

손가락의 흰 빛이 화면을 밝혔다. 엄마의 손을 비추던 그때처럼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의 떨림이었다. 자신을 지키려는 떨림이었다.

번호 입력이 끝났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경찰청입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저는 신고하고 싶습니다."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분명했다.

"기억 소거 능력을 이용한 협박과 강요죄로 신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에 연루되었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경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질문이 이어졌다. 지은은 모든 것을 말했다. 강태현의 협박, 이준호의 의뢰, 자신의 능력, 그리고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통화가 끝났을 때, 지은은 창밖을 봤다. 소호의 밤거리가 조용했다. 첫 번째 별이 나타나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봤던 별처럼.

지은은 손가락을 펼쳤다. 흰 빛이 손 전체를 밝혔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그 빛은 자신을 지키는 빛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빛이었다.

거울에 비친 손가락을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엄마의 손을 비추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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