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절할 수 없는 의뢰
강태현의 사무실은 회색 건물 15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은의 손가락이 떨렸다.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이 어제보다 밝다. 능력이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능력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기억이 더 빨려나간다는 뜻이었다.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했을 때, 지은은 호떡의 온기를 떠올리려 했다. 엄마가 시장에서 사줬던 그 호떡. 하지만 그 맛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그림을 지우듯이. 엄마의 웃음소리도 그랬다. 초등학교 때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엄마의 모습도 그랬다.
엄마를 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밀려올 때, 휴대폰이 울렸다.
강태현이었다.
지은은 통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강태현이 창문 앞에 서 있었다. 햇빛이 그의 등을 비추고 있어서 얼굴이 어둡게 보였다. 의도적인 연출이었을 것이다.
"왔구나."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지은은 그 속의 냉기를 알고 있었다. 5년을 함께한 관계가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었다.
"의뢰는?"
지은이 묻자 강태현이 돌아섰다. 그가 들고 있는 파일을 탁자에 놓았다.
"이 남자. 이름은 진준혁. 서해경찰청 마약수사팀 소속이다. 우리의 협력자였지만, 최근 검사와 거래를 시작했다. 그 남자의 우리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야 한다. 거래, 돈, 협박. 모든 것."
지은이 파일을 펼쳤다. 진준혁은 45세 정도로 보였다. 경찰관치고는 얼굴이 어두웠다.
"왜 나한테?"
"누가 더 잘하겠는가?"
강태현이 웃었다. 그 웃음은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웃음이 아니라, 도구가 제 기능을 하는 것을 확인하는 웃음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우리는 깨끗해진다. 그리고 넌 자유야. 엄마랑 평화롭게 살 수 있어. 요양원 비용도 내가 댈게. 아무도 너희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지은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그 약속을 믿고 싶었다. 그 약속을 믿으면, 지금 이 선택이 정당해질 것 같았다. 자신의 손가락이 하는 일이 정당해질 것 같았다.
"대상자는?"
"소호 해변 카페. 내일 오후 3시. 혼자 나온다. 마주치고 손을 잡고 끝내면 된다."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서 나가려 할 때 강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은. 이게 마지막이야. 정말로."
그 말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지은은 믿기로 했다. 믿지 않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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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지은은 요양원에 들렀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창밖으로 밤바다가 보였다. 지은은 침대 옆에 앉았다. 엄마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엄마."
"응, 지은아."
엄마가 지은을 봤다. 눈빛이 맑았다. 오늘따라 유독 맑았다.
"내일 못 올 수도 있어."
"왜?"
"일이 있어서."
지은은 엄마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이 손의 온기를 기억하려고. 엄마가 지은의 열을 재주던 손길을 기억하려고. 하지만 기억은 자꾸만 흐릿해졌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괜찮아. 너 할 일 해. 엄마는 여기서 잘 있을게."
엄마가 지은의 손을 쓸어줬다.
"하지만 약속해. 꼭 와."
"응. 약속할게."
지은은 거짓말을 했다. 아니면 모를 수도 있다. 내일 이후의 자신이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엄마를 기억할 수 있을지. 그것도 모를 수도 있다.
지은은 그 밤 병원 근처 모텔에서 잤다.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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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2시 50분. 지은은 카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해변이 보였다. 파도가 잔잔했다. 엄마와 함께 왔던 그 해변이었다.
손이 떨렸다.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이 규칙적으로 맥박을 친다. 곧 일어날 일을 예감하는 듯이.
3시 정각. 진준혁이 들어왔다. 휴대폰을 보며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그가 지은의 테이블 근처를 지나갈 때 지은이 손을 들었다.
"여기."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은이 미리 준비한 약이 든 커피를 건넸다. 그는 의심 없이 마셨다.
5분. 약효가 나타나기까지 정확히 5분이 걸렸다. 남자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의식은 남아있지만 신체는 지은의 지시에만 반응하는 상태였다.
지은이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남자도 따라 일어났다. 지은은 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그의 이마에 올렸다.
"미안해."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이 폭발했다.
그 순간—
호떡의 온기가 지은의 손가락을 타고 사라진다. 엄마 손의 질감이 흐릿해진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교문 앞에서 부르던 목소리가 먹먹해진다. 엄마가 지은을 안아주던 따뜻함이 차갑게 식어간다.
기억이 빨려나간다. 지은의 기억이. 엄마와의 모든 시간이.
"안 돼. 안 돼…"
지은이 중얼거렸다. 손에 뜨거운 액체가 흐른다. 코피다. 손가락의 빛이 처음 본 것처럼 밝아진다. 아니, 더 밝다. 거의 하얀색에 가까운 빛이 손가락을 태우고 있다.
지은이 쓰러진다. 카페의 천장이 돌아간다. 사람들의 비명이 멀리서 들린다.
하지만 지은의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엄마의 목소리다.
"지은아, 어디 아파? 엄마한테 말해."
그런데 그 목소리도 점점 흐릿해진다. 지은은 엄마를 기억하려 한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려 한다. 하지만 그림이 맞춰지지 않는다. 엄마가 누군지 모를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정체성을 빼앗기는 듯한 공포.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공포.
검은 것이 눈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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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천장은 하얀색이었다. 지은이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은 그 천장이었다. 심전도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옆에는 박수진이 앉아 있었다.
"지은!"
수진이 벌떡 일어섰다. 지은의 손을 잡았다.
"미쳤어. 뭐 한 거야? 경찰이 연락했어. 카페에서 남자가 쓰러졌대. 넌 왜 거기 있었어?"
지은이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에 뭘 했더라? 누굴 만났더라?
"수진…"
"뭐?"
"엄마. 엄마 이름이 뭐더라?"
수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엄마 이름. 이름이 생각이 안 나."
수진이 지은을 끌어안았다. 지은이 느꼈던 공포가 순간 누군가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수진의 팔이 지은을 꼭 안았다.
"유미영. 엄마 이름은 유미영이야."
"유미영…"
지은이 중얼거렸다. 그 이름을 반복했다. 자꾸만 잊힐 것 같아서. 계속 반복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의사는 혼수상태에 빠졌던 것이 신경계의 일시적 마비였다고 했다. 원인은 불명이었다. 머릿속에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은은 알고 있었다. 이건 신체의 이상이 아니라 기억의 이상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누군가에게 빨려나갔다.
저녁 8시. 이준호가 병원을 찾아왔다. 손에는 따뜻한 국이 들려있었다.
"수진이한테 들었어. 괜찮아?"
그가 국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지은은 그의 얼굴을 봤다. 낯설지 않았다. 이 사람의 이름도 기억났다. 이준호. 하지만 이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흐릿했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응."
"뭐가 있었어?"
이준호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준호가 잠시 지은을 봤다. 그 눈빛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추궁하지 않았다.
"지은."
"응?"
"넌 지금 누구랑 있고 싶어?"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준호가 계속했다.
"조직이랑? 아니면 엄마랑?"
그가 말을 멈췄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멈췄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이준호가 물었다. 지은이 고개를 저었다.
"카페에서. 넌 혼자 앉아있었어. 커피를 주문했는데 손이 자꾸 떨렸어. 컵을 떨어뜨릴 뻔했고, 난 그걸 받았어."
지은은 그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없었다. 지워진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의해.
"그 시간이 기억 안 난다면 넌 나를 만날 필요 없어. 우리가 시작한 건 그때니까."
이준호가 일어섰다. 국을 들었다.
"엄마한테 가. 그게 맞는 선택이야."
그는 병실을 나갔다. 지은은 혼자 남겨졌다.
창밖으로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서해의 밤은 검고 깊었다. 지은은 휴대폰을 들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다 멈췄다. 엄마를 뭐라고 부르지? 엄마의 얼굴이 명확하지 않았다. 기억이 뭉그러져 있었다.
화면에 알림이 떴다. 요양원에서 보낸 메시지였다.
"박지은님. 어머니께서 계속 딸을 찾으시며 창밖을 보고 계세요. 혹시 오실 수 있으신지요?"
그 다음 메시지는 엄마의 음성 메시지였다. 지은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딸, 어디 있어? 너 없으니까 집이 텅 빈 것 같아. 빨리 와."
목소리는 낯설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안에 있는 것들은 낯설지 않았다. 불안. 기다림. 사랑.
지은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신었다.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었다. 다크서클이 심했다. 얼굴이 창백했다. 그리고 눈빛이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가 이 얼굴에서 중요한 것들을 빨아낸 것처럼.
지은은 거울을 외면했다. 병실을 나갔다. 복도의 형광등이 환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은은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이 이전보다 훨씬 밝았다. 거의 하얀색에 가까웠다.
지은이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이 손가락이 진준혁의 기억을 빼앗았다. 자신의 기억도 빼앗았다. 이 손가락이 모든 것을 망쳤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지은이 나갔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강태현이었다.
"의뢰 완료됐나?"
"응."
"좋아. 그럼 우린 깨끗해진다. 이제 넌 자유야. 엄마랑 행복하게 살어."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그 경찰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기억이 지워졌으니까 증거는 못 찾겠지만."
"그럼 나는?"
"넌?"
강태현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넌 카페 CCTV에 없어. 이미 지웠거든. 완벽하게. 넌 존재하지 않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강태현은 덧붙였다.
"그 대신 다음 의뢰가 있을 때 거절하지 말아. 이게 마지막이라는 건 거짓이었어. 미안해, 지은."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병원의 로비에 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구도 지은을 보지 않았다. 강태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지은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도 없고, CCTV에도 없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도 없다.
그런데 엄마의 기억 속에만 남고 싶었다. 엄마가 잊기 전에.
지은이 걸음을 옮겼다. 병원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서해의 밤공기는 짠내가 났다.
요양원까지 15분이었다. 지은은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는 지은을 봤지만 보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냥 목적지만 입력했다. 지은은 창밖을 봤다. 소호의 밤거리가 지나갔다. 뒷골목도 지나갔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거래를 했는지 생각이 났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억이 없었다. 그것들도 빨려나갔다.
택시가 요양원 앞에 섰다. 지은이 내렸다. 건물 불이 따뜻하게 켜져있었다. 로비에는 간호사가 한 명 있었다.
"박지은님. 어머니가 계속…"
지은이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간호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3층. 엄마의 방이 있는 층이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마지막 문. 그 문 앞에서 지은은 멈췄다. 손을 들어 노크를 하려다 멈췄다. 엄마를 기억하지 못할까봐. 엄마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봐. 그 두려움이 밀려왔다.
문을 열었다.
엄마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밤바다가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엄마."
지은의 목소리에 엄마가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엄마의 얼굴이 확실해졌다. 기억이 돌아왔다. 아니다. 기억이 돌아온 게 아니라 현재가 기억을 대체했다. 이 순간이 모든 기억을 압도했다.
엄마의 눈빛이 맑아졌다.
"지은아?"
엄마가 불렀다. 자신의 딸의 이름을 맑게 불렀다.
지은이 엄마를 안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기억을 지우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은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은 이미 하얀색에 가까워져 있었고, 능력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지은이 엄마를 안는 순간, 뭔가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엄마의 몸에서 따뜻함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지은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이 엄마를 비추고 있었다.
능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대상자의 기억만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지은 자신의 기억과 함께 주변인의 기억도 함께 소거되는 방향으로.
엄마가 지은의 얼굴을 바라봤다. 손을 들어 지은의 뺨을 쓸어줬다.
"넌… 누구니?"
엄마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 맑음이 천천히 사라져갔다.
지은은 그 순간 알았다. 자신의 능력이 이미 엄마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지은이 엄마를 안은 순간, 지은의 기억과 함께 엄마의 기억도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지은은 엄마를 놓지 못했다.
"엄마, 나야. 지은이야."
"지은…?"
엄마가 중얼거렸다. 그 이름을 반복하려 했지만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엄마!"
지은의 절규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엄마의 눈에는 낯선 사람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