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해변의 모래는 지은의 신발 안으로 들어왔다. 불편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옆에 서 있는 엄마 유미영이 바다를 보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니까 기분이 좋네."
엄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처음 이 풍경을 보는 사람처럼. 지은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들이 자신의 손을 감싸는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지은은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아침 9시. 지은이 요양원을 방문했을 때 엄마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간호사는 "요즘 아침마다 그래요"라고 말했다. 지은은 엄마의 이불을 걷어냈다.
"엄마. 나야."
"어? 누구세요?"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지은의 가슴이 떨어내려갔다. 하지만 어제 강태현의 협박 메시지를 받은 후, 지은은 이미 결정했다. 이 고통에 맞서기로. 기억을 지우지 않기로.
"나 지은이야. 너 기억 안 나?"
엄마의 눈이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수십 초가 흘렀다. 지은은 그 사이에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지은이? 내 딸?"
"응. 엄마."
엄마가 일어나 앉았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오늘 뭐 해?"
지은은 백팩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냈다. 김밥, 계란말이, 딸기. 엄마가 좋아하던 것들. 지은은 어제 밤 카페 문을 닫은 후 이준호에게 물었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곳, 있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지은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바다 봤어? 소호 해변."
"안 봤어."
"그럼 오늘 가봐."
요양원을 나온 지은과 엄마는 버스를 탔다. 엄마는 창밖을 계속 봤다. 지은은 엄마가 이 길을 다니는 게 처음인 줄 알았지만, 엄마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 않은 듯했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흐릿하지만.
해변에 도착했을 때 햇빛이 강했다. 지은은 엄마의 팔을 잡았다. 모래 위에서 넘어질까봐.
"와. 예쁜데?"
엄마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웃었다. 지은은 엄마를 해변 벤치로 이끌었다. 한두 명의 사람들이 산책 중이었지만, 대부분 비어 있었다. 11월의 해변은 고요했다.
"엄마, 앉자."
벤치에 앉은 엄마는 계속 바다를 봤다. 파도가 밀려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지은은 도시락을 펼쳤다.
"밥 먹자."
"응."
엄마는 김밥을 집어 먹었다. 천천히. 마치 맛을 음미하려는 듯.
"이거 누가 만들었어?"
"나."
"정말?"
"응."
엄마가 지은을 봤다. 눈이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지은은 숨을 참았다. 이 순간이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지은이 이렇게 잘했어?"
"응, 엄마."
엄마는 다시 김밥을 집어 먹었다. 지은은 그 모습을 봤다. 엄마의 손, 엄마의 턱, 엄마가 씹는 방식.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했다.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엄마의 기억 속에 자신이 남기 위해.
"지은아."
"응?"
"고마워."
그 말이 나올 때, 지은은 눈물이 맺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닦지 않았다. 눈물도 이 순간의 일부였다.
해변을 걸었다. 엄마는 지은의 팔을 잡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가까워졌다. 모래가 발 아래서 부드럽게 밀렸다.
"우리 몇 번 와봤어?"
엄마가 물었다.
"처음이야."
"그래? 처음 같은데 익숙한데?"
"그래?"
"응. 좋아. 이런 곳이 있으면 자주 와야 해."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의 손을 더 꽉 잡았다.
해변의 북쪽 끝, 낡은 카페 근처에서 누군가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였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 옷이 헐거웠고, 표정이 멍했다. 하지만 눈은 맑았다.
지은과 엄마가 지나가자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어? 안녕?"
엄마가 멈췄다.
"안녕하세요."
"너 우리 친구지? 좋네."
할머니가 웃었다. 지은은 할머니를 봤다. 그 웃음이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기억이 없다는 것. 하지만 누군가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는 것.
"앉아."
할머니가 벤치 옆을 톡톡 쳤다. 엄마가 앉았다. 지은도 앉았다.
"날씨 좋지?"
"응. 정말 좋아."
"우리 여기 많이 와?"
"처음 와봐."
"그래? 처음 같은데 좋네. 또 와야겠다."
할머니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지은은 그 모습을 봤다. 두 사람이 서로를 모르지만, 손을 잡고 있었다. 파도 소리 속에서. 그리고 웃고 있었다.
엄마가 지은의 어깨에 기대었을 때, 지은은 세상이 멈춘 줄 알았다. 파도 소리도, 갈매기 울음도, 바람도 모두 그 순간을 위해 잠시 숨을 쉬지 않는 듯했다. 엄마의 머리카락이 지은의 뺨에 닿았다. 소금기 섞인 냄새가 났다. 해변의 냄새, 아니면 엄마의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고마워, 우리 딸."
엄마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명확했다. 지은은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아니, 기억하려는 게 아니라—이미 기억 속에 있는 것을 더 깊이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엄마의 무게, 엄마의 온기, 엄마의 숨소리. 모든 것을 몸으로 새기고 싶었다.
옆에서 유진숙 할머니가 웃고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손을 맞잡고 있었다. 기억이 없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니, 기억이 없기 때문에 항상 처음 만나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지은은 그것을 봤다. 기억이 지워져도 남는 것들. 웃음. 손의 온기. 누군가를 보고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호감. 기억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는 감정들.
'내가 엄마의 기억을 지우면 이것도 사라질까?'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이미 지워진 사람이었다. 지은의 능력으로 지워진 건 아니지만, 시간이 빼앗아간 기억들이 남긴 것들이 이 정도라면—능력으로 의도적으로 지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더 철저히 사라질까. 아니면 할머니처럼, 감정만 남을까.
지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능력의 떨림이 아니었다.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버스 안에서 엄마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지은이 어깨를 내주자 엄마는 거기 기대어 코를 곤다. 지은은 창밖을 봤다. 회색 빌라촌이 지나가고, 낡은 편의점과 세탁소들이 줄을 섰다. 항구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간판들이 삐걱거렸다.
이 도시에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지은은 생각할 수 없었다. 시간의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5년 전 사고 이후 모든 날들이 뒤섞여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의 의뢰들, 강태현의 사무실, 원룸의 혼자만의 시간들. 그리고 이제 해변. 엄마와의 해변.
지은은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렸다. 도구? 딸? 아니면 둘 다 아닌 무언가? 5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는지 세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기억이 사라진 만큼, 지은 자신의 기억도 조각조각 떨어져나가고 있었다. 지난주에 뭘 했는지, 지난달에 누굴 만났는지, 작년의 날씨가 어땠는지—모두 흐릿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은의 몸이 경직됐다. 엄마가 팔에 기대어 있었지만, 모든 근육이 얼어붙었다. 화면을 봤다. 강태현.
"지은아."
"네."
"새 의뢰가 들어왔어."
지은의 목이 조여 왔다. 아직 지난 의뢰를 완료하지 않았다. 강태현이 준 시간은 이미 대부분 흘렀고, 지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해변에만 가 있었다. 엄마와.
"아직 지난 의뢰를..."
"이번 건 달라."
강태현의 목소리가 변했다. 부드러움이 걷혀 나갔다. 그 아래 무언가 차갑고 단단한 것이 드러났다.
"엄마 때문에 거절할 수 없어."
침묵이 흘렀다. 버스가 신호등에서 멈췄다. 옆자리의 할머니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지은은 그 할머니의 얼굴을 봤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표정.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는 표정.
"누구... 의뢰인데요?"
"내일 사무실 와. 그럼 알게 돼."
강태현은 의뢰인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협박. 엄마를 건드리겠다는 협박.
"거절하면?"
"거절하지 마."
전화가 끊겼다.
지은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능력의 떨림이 맞았다. 능력이 깨어나는 신호. 누군가를 지워야 한다는 신호. 하지만 손가락을 펼쳐 봤을 때, 빛은 아직 희미했다. 아직 사용할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버스가 다시 움직였다.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고, 기계음이 울렸다. 지은은 엄마의 머리를 더 깊이 자신의 어깨에 얹어줬다. 엄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깊은 잠 속에 있었다.
'내일 사무실에서 뭘 보게 될까.'
지은은 생각했다. 새로운 의뢰인. 지우고 싶은 기억을 가진 누군가. 그리고 그 기억을 지우는 대가로, 지은 자신의 뭔가가 사라질 것이다.
지난 의뢰도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그 의뢰인의 기억을 지우지 않은 채로 새로운 의뢰를 받는다는 건, 대가가 두 배가 된다는 뜻이었다. 지은은 이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의 무언가들이 이미 사라졌고, 최근의 기억들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니면 오늘의 해변까지 사라질까?
지은은 그 생각에 눈을 떴다. 오늘은 절대 지워지면 안 된다. 엄마의 웃음, 할머니의 손, 파도 소리, 햇빛. 이것들은 기억이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깨달은 이 순간. 이것이 지워지면 지은은 다시 혼자가 된다.
하지만 강태현은 그것을 모를 것이다. 또는 알면서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버스는 소호 시내를 향해 달렸다. 회색 건물들이 점점 더 높아졌다. 지하 주차장도, 뒷골목도 가까워졌다. 지은은 그곳을 봤다. 그곳에서 자신은 누군가였다. 능력 있는 도구. 강태현의 소유물. 돈을 버는 기계.
그런데 해변에서는?
해변에서 자신은 누군가의 딸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지은이 엄마를 깨웠다.
"엄마. 도착했어."
엄마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처음엔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 다음, 어딘가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지은을 봤다.
"어? 우리 여기 어디야?"
"집 가는 길이야. 일어나."
지은이 엄마의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거리의 냄새가 달랐다. 바다의 짠 냄새가 아니라, 콘크리트와 자동차 배기가스의 냄새. 그리고 뭔가 더 어두운 냄새. 지은은 그것을 알았다. 도시의 냄새. 거래와 거짓의 냄새.
"저기 우리 요양원이지?"
엄마가 앞을 가리켰다. 맞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요양원이 있었다. 회색 건물. 창문이 많지 않은 건물. 엄마는 그곳을 봤지만,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곳이 자신의 집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지은이 엄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응. 가자."
두 사람이 거리를 걸었다. 지은의 목덜미가 서늘했다. 뒷골목의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지은을 봤다. 여러 개의 시선. 조직의 부하들이었다. 해변에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강태현은 지은의 모든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유진숙 할머니의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엄마를 봤다.
"유미영님. 잘 지내셨어요?"
"네. 오늘 바다 다녀왔어요."
엄마의 대답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매일 바다에 가는 사람처럼. 아니,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잊은 것처럼.
지은은 엄마를 방으로 데려갔다. 할머니의 아들은 지은을 봤다.
"요즘 자주 데려가세요?"
"네. 날씨 좋을 때."
"좋은 일이네요. 우리 엄마도 저렇게 웃는 모습이 오래됐거든요."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무거웠다.
엄마가 침대에 누웠다. 지은이 담요를 덮어줬다. 엄마는 천장을 봤다.
"우리 딸?"
"응?"
"너 누구니?"
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또 시작되었나. 기억의 소실. 하지만 엄마가 웃었다.
"농담이야. 넌 내 지은이지. 우리 딸."
엄마의 손이 지은의 머리를 쓸었다. 약한 손이었지만, 따뜻했다.
"고마워. 오늘 좋았어. 너랑 있으니까."
지은은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렀다. 조용하게.
'내일 사무실에 가면 뭘 잃을까.'
생각했다. 이 순간을 잃을 수도 있다. 엄마의 손의 온기. 엄마의 목소리. 엄마가 자신을 "딸"이라고 부르는 이 순간.
지은은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미세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능력의 신호. 하지만 이번엔 그것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할 수 있을까?'
거절할 수 없다. 강태현이 이미 말했다. 엄마 때문에. 엄마 때문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지은의 선택이 아니라, 엄마의 존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것이 가장 큰 협박이었다. 돈도, 위협도 아닌. 엄마.
밤은 깊어갔다. 요양원의 복도는 조용했다. 지은은 엄마의 방을 나왔다. 밖은 어두웠다. 항구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지은은 손가락을 펼쳤다. 빛이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내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은은 핸드폰을 켰다. 강태현의 새로운 메시지가 있었다.
[내일 오전 10시. 사무실에서 만나자. 의뢰인도 올 거야. 그리고 지은아—이번 건 거절할 수 없다. 엄마 때문에.]
지은은 화면을 내려놨다. 손가락의 빛이 더 밝아졌다. 이제 능력이 완전히 깨어났다. 누군가를 지울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지은은 밤하늘을 봤다. 별들이 흐릿했다. 도시의 불빛이 너무 많아서. 마치 자신의 정체처럼. 도구인지 딸인지, 그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흐릿한 게 아니라 사라지고 있었다. 지난 의뢰들의 대가로 잃어버린 기억들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내일 사무실에서 의뢰인을 만나면 알게 될 것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가진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그리고 지은이 그 기억을 지우는 대가로 무엇을 더 잃을지.
혹시 엄마와의 오늘을 잃을까?
그렇다면 지은은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도구도 아니고, 딸도 아니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겨진 온기도 없는. 그냥 비어 있는 것.
바람이 불었다. 지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해변의 냄새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대신 도시의 냄새, 콘크리트와 거짓의 냄새만 남아 있었다.
지은은 요양원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방 앞에서 멈췄다. 유리창을 통해 엄마가 잠든 모습이 보였다. 평온한 얼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지은은 손가락을 펼쳤다. 빛이 밝았다. 준비 완료. 내일 누군가의 기억을 지울 준비가 되었다는 뜻.
그리고 동시에, 지은 자신의 무언가가 사라질 준비도 되었다는 뜻.
'내일 이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지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자신을 또 잊을까. 아니면 이번엔 기억할까. 그것도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일 지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 모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손가락의 빛을 다시 봤다.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다는 신호.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신호.
내일, 사무실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