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밝은 햇살이 병원 대기실의 창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 지은은 엄마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 햇살을 느끼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자꾸만 떨렸다.

"지은아, 많이 피곤해?"

엄마 유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은은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눈가에 새로운 주름이 생긴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엄마가 이렇게 작아 보인 적이 있었나.

"아니, 괜찮아."

말이 거짓처럼 들렸다.

"박지은 환자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은과 엄마는 일어났다. 진료실의 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손가락이 또 떨렸다.

신경과 의사 박수진은 친구였다. 대학 때부터 밤을 새며 공부했던 친구였고, 지은이 유일하게 자신의 비밀의 일부를 나눈 사람이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MRI 사진을 들었다.

"유미영 님, 이 사진을 보시겠어요?"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이가 사진을 들어 올렸을 때, 지은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하얀 부분들. 그 텅 빈 공간들. 뭔가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

"초기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입니다."

수진이의 목소리는 의료진의 목소리였다. 친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혈색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얼굴에서 색을 빨아내고 있는 것처럼.

"치료는... 어떻게?"

엄마의 목소리가 작았다. 지은은 엄마를 봤다. 엄마의 손이 자신의 손을 찾아 잡았다. 따뜻했다. 지은은 그 따뜻함을 느끼려고 애썼다.

"현재로서는 진행을 늦출 수 있는 약물 치료가 전부입니다. 완치는..." 수진이가 말을 끊었다. "불가능합니다."

그 단어가 진료실 안에 떨어졌다. 불가능. 지은은 그 단어를 씹었다. 불가능이라는 게 뭐였나. 자신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닌가.

"인지 기능이 점진적으로 감퇴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아직 큰 문제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고, 결국 기억 대부분을 잃게 될 것입니다."

수진이는 계속 설명했다. 통계를 말했다. 진행 속도를 말했다. 요양원 입소 시기를 말했다. 그 모든 말이 지은의 귀를 통과했지만 뇌에 닿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만 남았다.

기억을 잃는다.

엄마가 자신을 잊는다.

"유미영 님, 가족 분들의 정서적 지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환자분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지은은 손가락을 폈다. 닫았다. 폈다. 닫았다.

진료실을 나왔을 때, 엄마가 지은의 팔을 링크했다.

"괜찮아. 우린 함께니까."

엄마의 목소리는 지은을 위로하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은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신의 내면에서 다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 로비는 밝았다. 사람들이 오갔다. 지은은 엄마를 벤치에 앉히고 자신은 서 있었다. 엄마가 지은을 바라봤다.

"혹시 내가 너를 잊으면..."

엄마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지은은 그 말의 나머지를 알고 있었다. 엄마의 눈빛이 그것을 말했다.

혹시 내가 너를 잊으면... 넌 날 버릴까?

그 질문은 오래된 것이었다. 지은은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엄마가 일을 하느라 자신을 할머니 집에 맡긴 날들. 그리고 언젠가, 엄마가 자신을 데리러 늦어서 할머니가 "엄마가 널 버렸나 봐"라고 농담처럼 말한 날. 그 말이 얼마나 오래 지은의 가슴에 박혀 있었는지 자신도 몰랐다.

지은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절대 안 돼. 절대."

그 순간, 지은의 머릿속에 명확한 그림이 떠올랐다. 엄마의 모든 기억을 지우는 것. 그렇다면 엄마가 치매로 고통받지 않을 거야.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은 자신이 조금씩 죽어가는 것 같은 고통이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기억이 없다면? 그 고통도 없을 거야.

지은은 그 생각에 매달렸다. 절망적인 힘으로.

병원을 나가면서 수진이가 지은을 따라왔다.

"지은."

지은은 멈췄다. 엄마는 화장실에 가 있었다.

"기억을 지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이야."

수진이의 목소리가 낮았다. 지은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아."

"정말로 알아?"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병원 엘리베이터 안. 지은과 엄마는 조용히 서 있었다. 엄마는 지은의 손을 쥐고 있었다. 지은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손의 떨림이었다.

엘리베이터 불빛 아래에서, 지은의 손가락 끝에 작은 빛이 맺혔다. 처음에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히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피어나는 작은 빛.

"지은, 뭘 봐?"

엄마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지은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지은은 엄마를 요양원에 데려다주고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주던 반찬 통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 반찬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엄마가 자신을 위해 반찬을 만들지 못할 날이 올 거야. 그래서 지은은 그 반찬을 오래 보관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먹고 싶었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밤 11시경, 지은은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켰다. 알 수 없는 번호에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일주일. 잊지 말고."

강태현이었다. 지은은 메시지를 읽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새로운 생각을 덧붙였다.

아, 그렇구나. 이건 기회야.

엄마의 기억을 지우면, 강태현도 만족할 거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셈이니까. 그리고 엄마도... 엄마도 고통받지 않을 거야.

지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요양원이 가깝지 않았다. 차로 20분이 걸렸다. 하지만 지은은 옷을 입었다.

밤 11시 반, 지은은 요양원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 요양실로 올라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환자들의 코고는 소리만 들렸다.

엄마의 방에 들어갔을 때, 엄마는 잠들어 있었다. 침대 위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지은은 엄마의 침대 옆에 앉았다.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잠든 얼굴은 평화로웠다. 마치 아무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은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엄마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손이 떨렸다.

손가락 끝에서 빛이 맺혔다. 처음과는 다른 강도였다. 능력이 깨어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빛처럼. 지은의 손가락 끝은 밝게 빛났다. 그 빛이 엄마의 얼굴을 비추었다.

하지만 손은 멈췄다. 엄마의 이마에서 1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손가락 끝의 빛이 흔들렸다. 마치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지은의 온몸이 거부했다. 이것이 맞는 일인가? 엄마의 기억을 지우는 것. 엄마가 자신을 잊도록 하는 것. 그렇게 되면 엄마는 자신을 찾아 손을 뻗을 때 누구를 찾는 걸까. 누구의 이름을 중얼거릴까.

엄마가 잠결에 몸을 뒹굴었다. 그리고 지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꿈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지은아..."

엄마가 잠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은의 손이 흔들렸다. 손가락 끝의 빛도 함께 흔들렸다. 엄마의 손이 공중을 헤매다가 지은의 팔을 찾아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지은은 엄마의 손 온도를 느꼈다. 따뜻함. 생생한 체온. 자신을 찾는 손의 무게.

마음이 부서졌다. 그리고 명확해졌다.

엄마가 자신을 잊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은 거짓이었다. 자신이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진짜였다. 엄마가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사라져야 할 것은 엄마의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엄마를 포기하려던 마음이었다.

지은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마치 불꽃을 끄듯이. 손가락 끝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손은 계속 떨렸다.

지은은 그대로 엄마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엄마의 손이 자신의 손목을 감싸 안고 있었다. 잠든 사람의 손이 이렇게도 강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엄마."

지은이 속삭였다.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의 힘은 더 세져 갔다.

요양원의 벽시계가 자정을 향해 갔다. 지은은 그렇게 한 시간을 더 앉아 있었다. 엄마의 손이 느슨해질 때까지. 그리고 그 손을 다시 침대 위에 내려놓을 때까지.

돌아가는 길, 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태현이었다. 지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대신 메시지 알림만 떴다.

"요양원 CCTV 확인했다. 잘 생각하고 있는 것 같네. 내일 사무실로 와. 일주일 계획을 짜자."

지은의 손가락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강태현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그 일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

원룸으로 돌아온 지은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피부를 데웠다. 하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물리적인 추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추위였다.

침대에 누웠을 때, 지은은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 반복했다. 마치 그 손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확인하려는 듯이.

핸드폰을 켰다. 박수진의 번호를 눌렀다. 밤 1시였다. 하지만 수진이는 답전했다.

"뭐야? 이 시간에."

"수진아. 엄마를 도울 방법이... 정말 없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수진이가 앉아 있는 소리,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지은아, 뭘 생각하고 있어?"

"그냥... 물어보는 거야."

"초기 치매는 약물 치료와 인지 훈련으로 진행을 늦출 수 있어. 완벽한 치료는 아니지만, 엄마가 지금 이 순간을 더 많이 기억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필요한 건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을."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은이 뭘 하려고?"

"아무것도."

"거짓말하지 마. 넌 항상 모든 걸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

"엄마가 고통받는데 뭘 하지 말라고?"

"고통받으면서도 살아가는 거지. 우리 모두 그렇게 하는 거야."

지은은 전화를 끊었다. 수진이가 다시 전화했지만, 지은은 받지 않았다.

새벽 3시, 지은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은의 눈에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잠든 엄마의 얼굴. 자신을 찾아 손을 뻗는 엄마의 손.

그리고 또 다른 이미지. 강태현의 얼굴.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 "일주일. 잊지 말고."라는 목소리.

지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 끝을 자세히 봤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이 있었다. 그 능력이.

아침이 되었을 때, 지은은 출근 준비를 했다. 강태현이 지정한 사무실로 가기 위해. 복도를 나서는 순간, 지은은 자신의 발걸음이 요양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강태현의 사무실이 아니라.

30분 후, 지은은 요양원의 로비에 있었다.

"어제 밤에 오셨죠?"

요양원 간호사가 물었다.

"네."

"어머니가 아침에 일어나셨을 때 정말 좋아하셨어요. 밤중에 딸이 왔다고, 손을 잡고 있었다고 자꾸 말씀하셨어요."

지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잠든 상태에서도.

3층 요양실로 올라갔을 때, 엄마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엄마."

엄마가 돌아봤다. 그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은아! 어제는 밤중에 왔더니 몰랐어. 오늘은 낮에 왔네."

지은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은 따뜻했다. 생생했다.

"엄마, 나 물어볼 게 있어."

"뭘?"

"내가 너를 잊으면... 넌 날 버릴까?"

어제 병원 로비에서 엄마가 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지은이 하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우리 지은이가 뭐 하는 소리야. 날 잊을 리가 있니? 그리고 설령 잊더라도..."

엄마가 지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엄마가 너를 버릴 일은 절대 없어. 알겠어?"

지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종류의 눈물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강태현이었다. 지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대신 핸드폰을 껐다.

"누가?"

"아무도 아니야, 엄마."

지은은 엄마의 품에 안겼다. 요양원의 창가에서. 아침 햇살 속에서.

그 순간, 지은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엄마의 등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 떨림은 두려움도 욕망도 아니었다. 그것은 결정의 떨림이었다.

지은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엄마를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자신의 몫이었다. 비록 엄마가 자신을 잊더라도, 자신은 엄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요양원을 나가는 길, 지은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강태현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지은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문자가 왔다.

"박지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내일 정오, 사무실에 와. 그 여자 목숨이 필요 없다면."

지은의 피가 식었다. 알 수 없는 번호였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강태현이 자신을 압박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지은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시동을 켜지 않은 채로. 손이 떨렸다. 이번에는 어떤 종류의 떨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내일 정오. 엄마와의 약속과 조직의 최후통첩 사이에서. 그때까지 남은 시간은 19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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