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락 끝의 불꽃
낡은 빌딩의 지하 주차장. 콘크리트 벽에 물이 맺혀 있고, 형광등이 깜박인다. 박지은은 대상자의 손목을 잡았다. 남자는 서른 중반, 눈빛이 불안했다.
"이게 끝이에요?"
지은이 고개를 끄덕했다. 말은 필요 없다. 모두 같은 질문을 한다. 이게 정말 작동할까. 이게 정말 나를 구해줄까.
"한 번에 끝나요. 아무것도 못 느낄 거고."
거짓말이 아니다. 대상자는 못 느낀다. 지은이 느낀다.
손가락이 남자의 이마에 닿는 순간, 세상이 반으로 쪼개진다. 지은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남자의 기억이다. 술 냄새나는 아버지. 피 흘리는 엄마. 자신의 손에 묻은 핏자국.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자신의 표정.
지은은 그 기억을 집어 들었다. 마치 더러운 헝겊을 집듯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남자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동공이 흔들리다가 멈췄다. 마치 오래된 비디오 테이프가 끝나갈 때처럼, 화면이 하얀색으로 변하는 그런 느낌.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불안함이 사라지고 평온함만 남았다.
"어? 나 여기서 뭐하는 거지?"
남자는 자신의 손목에 남아 있는 지은의 손가락 자국을 내려다봤다. 그것도 곧 잊을 것이다. 기억이 지워지면 그 기억에 연결된 모든 것이 끊어진다. 손목의 자국, 지은의 얼굴, 이 지하 주차장, 모든 것.
"기억 안 나? 그럼 된 거야."
지은이 돌아섰다.
"어, 잠깐. 돈은..."
"강태현이 줄 거야."
지은은 계단을 올라갔다. 발걸음이 가빠졌다.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등에 뭔가 따뜻한 게 흐른다. 코에서 나온 피다. 휴지가 필요했다.
지은은 주차장을 빠져나가 골목에 들어섰다. 벽에 기대 앉으며 휴지를 코에 밀어 넣었다. 손등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또 하나."
중얼거렸다. 이건 셀 수 없는 일이었다. 지은도 세기를 포기했다. 첫 번째가 어느 날이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 아, 이건 농담이 아니다. 진짜로 기억 안 난다.
***
오후 5시, 낡은 건물의 2층. 강태현의 사무실. 아니, 사무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공간이었다. 책상도 없고, 소파만 있고, 벽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처럼.
강태현은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잘했어."
그가 입을 열었다.
"다음 의뢰 있어?"
지은이 물었다.
"있지. 근데 이번엔 좀 다를 거야."
강태현이 일어나 앉았다. 그의 눈이 지은을 향했다.
"이번엔 기억 하나가 아니야. 한 사람의 모든 기억을 지워야 해."
지은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건... 못 해."
"왜?"
"대가가 너무 커. 그 정도면 내가..."
"내가 알아. 그래서 너한테 시키는 거야. 다른 놈들은 못 해. 넌 할 수 있어."
강태현이 일어섰다. 지은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넌 거절 못 해. 알지?"
공기가 변했다. 강태현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던 신사적인 톤이 사라졌다. 그 뒤에 있던 진짜 것이 드러났다.
"왜냐면 넌 엄마가 있거든."
지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뭐라고?"
강태현이 핸드폰을 켰다. 화면에 사진이 떠올랐다. 소호 요양원의 정문. 그리고 그 앞에서 산책하는 여자. 지은의 엄마, 유미영이었다.
"유미영. 소호 요양원에 있지? 초기 치매 진단 받은. 매주 목요일 오전에 딸이 찾아온다고 했어."
강태현이 사진을 넘겼다. 다음 사진은 요양원의 내부였다. 침대, 의료 기록, 그리고 엄마의 이름이 적힌 차트.
"의료 기록도 있고, 일상 패턴도 파악했어. 요양원 직원들이랑도 친해졌고.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언제 산책을 가는지, 누가 방문하는지. 다 알아. 그리고 이것도."
강태현이 마지막 사진을 보였다. 지은의 원룸 건물 입구였다. 그 앞에 선 지은의 뒷모습.
지은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넌 일주일 안에 대상자의 모든 기억을 지울 거야. 그리고 나한테 보고할 거고. 만약 못 하거나 경찰한테 간다면..."
강태현이 엄마의 사진을 다시 보였다.
"엄마도 기억을 잃을 거야. 완전히. 넌 누구인지도 모르게. 치매가 급진행되는 건 의료 기록에 남지 않거든."
지은의 손가락이 떨렸다.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은은 그것도 느끼지 못했다.
"일주일."
강태현이 반복했다.
"그리고 하나 더. 엄마 잘 챙겨. 요양원 면회도 자유롭지만, 갑자기 안 나타나면... 글쎄. 뭐가 생길지 모르니까."
지은은 사무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며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손끝이 계속 떨렸다.
***
저녁 6시 30분, 소호 항구 근처의 작은 카페 '더 헤이'에 들어갔을 때 이준호가 카운터에 서 있었다. 검은 에이프런, 흰 셔츠. 언제나 같은 모습. 지은이 들어오자 그가 웃었다.
"오늘도 왔네."
지은은 바 의자에 앉았다. 손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응."
이준호가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콩을 갈고, 물을 데우고, 천천히 추출했다. 모든 동작이 정해진 리듬처럼 느껴졌다. 지은은 그 리듬을 본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었다. 정해진 것. 변하지 않는 것. 예측 가능한 것.
커피가 나왔다. 하얀 잔에 검은 액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요즘 자주 오는데, 얼굴이 자꾸 안 좋아 보여. 뭐 있어?"
이준호가 카운터에 기대며 물었다. 그의 눈빛이 지은을 관통했다. 지은은 눈을 돌렸다.
"없는데?"
"넌 언제나 멀리 있네."
"뭐라고?"
"여기 앉아 있는데도 어딘가 다른 데 있는 것 같아. 항상."
지은은 커피를 마셨다. 뜨거웠다. 입안이 데었다. 하지만 느낌이 좋았다. 뭔가 확실한 것. 뜨거움. 아픔. 현재.
"그냥 피곤한 거야."
"그런 피곤은 아닌 것 같은데?"
지은은 웃음으로 답했다. 가짜 웃음. 이준호는 그걸 알았을 거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했다.
"넌 지금 누구랑 있고 싶어?"
"뭔 말이야?"
"여기? 아니면 다른 데?"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를 마셨다. 이번엔 천천히. 이준호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말 마."
그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다른 손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은은 그의 모습을 봤다. 소박한 움직임들. 손수건으로 테이블을 닦고, 메뉴판을 정렬하고, 손님에게 인사하고. 아무것도 거짓이 아닌 일상.
지은은 그런 일상이 부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에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
오후 8시 20분, 지은의 원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지은은 한참을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울음이 그치고 화면이 어두워졌다. 10초 뒤 문자가 왔다.
"박지은. 이건 강태현이다. 대상자는 이준석. 나이 48세. 아파트 주소는 따로 보낼 거고. 일주일 안에 끝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하지? 그리고 하나 더. 엄마 잘 챙겨. 요양원 면회도 자유롭지만, 갑자기 안 나타나면... 글쎄. 뭐가 생길지 모르니까."
지은의 손가락이 다시 떨렸다.
원룸의 불을 켰다. 좁은 방이 드러났다. 침대. 책상. 벽에 붙은 달력. 아무것도 없는 공간.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엄마였다. 유미영.
지은은 한참을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화면이 자동으로 꺼질 때까지.
그 다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딸, 내일 병원 같이 가줄래? 수진이가 검사 결과 얘기해주래. 엄마 혼자 가기가..."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 마지막 문장이 완성되지 않은 채.
지은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놨다. 다시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카메라 앱을 켰다. 셀카 모드로 전환했다. 핸드폰 카메라에 비친 얼굴이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 눈 밑의 검은 그림자. 손등에 말라붙은 피. 그리고 떨리는 손가락.
지은은 자신의 얼굴을 몇 초 동안 봤다.
그게 자신의 얼굴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손가락을 펼쳤다. 닫았다. 펼쳤다.
여전히 떨렸다.
지은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 나갔다. 소호의 야경이 보였다. 항구의 불빛들. 멀리서 배의 경적음이 들렸다. 밤 8시 40분. 엄마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요양원의 침대에 누워 있을까. 아니면 이미 잠들어 있을까.
지은은 문자를 다시 읽었다.
"딸, 내일 병원 같이 가줄래?"
그 문장의 끝부분이 자르르 떨렸다. 마지막 물음표 앞까지 글씨가 완벽했지만, 그 뒤는 엄마가 뭔가를 하려다 멈춘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잊었을 수도 있었다. 초기 치매. 그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지은은 알고 있었다.
기억이 흐릿해진다. 점점.
그리고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진다.
손가락을 다시 펼쳤다.
지은은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응, 딸. 깜짝 놀랐어. 넌 왜 연락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숙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불안한.
"내일 몇 시에 병원 가?"
"아, 10시에. 수진이가 10시라고..."
"내가 갈게. 아침 9시에 집에서 만나."
"정말? 고마워, 딸."
지은은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 누웠다.
손가락을 펼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오래되고, 반복되는, 절대 멈추지 않는 소리. 그 소리와 손가락의 떨림이 같은 리듬으로 움직였다.
일주일.
강태현의 말이 다시 들렸다. 일주일 안에 한 사람의 모든 기억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도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하지만 내일 아침 9시에는 엄마를 만나야 했다.
지은은 손등에 말라붙은 피를 긁어냈다. 손가락 끝이 빨갛게 변했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 펼쳤다 오므렸다. 반복했다.
강태현의 협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상상했다. 엄마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모습.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엄마. 그리고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모습.
아니면 반대로.
자신이 모든 기억을 지우고 나서, 엄마 앞에 서 있는 모습.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 채, 엄마를 보는 모습. 엄마를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으로 보는 모습.
둘 다 끔찍했다.
지은은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마치 불꽃처럼. 작고, 약하고, 언제든 꺼질 수 있는 불꽃처럼.
그런데 불꽃은 계속 타올랐다.
지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으로 갔다.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있었다. 어린 지은과 엄마. 엄마가 지은을 안고 웃고 있는 사진. 지은이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사진. 엄마의 얼굴이 선명했다. 그 당시의 엄마는 기억을 잃지 않았다. 모든 것을 기억했다. 지은을 낳은 날도, 처음 웃던 날도, 첫 단어를 말한 날도.
지은은 사진을 들었다 놨다. 다시 들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내일 아침 9시, 엄마를 만날 때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강태현의 협박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손가락이 떨렸다.
지은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그것이 자신을 파괴할 것이라는 것도.
하지만 엄마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손가락을 펼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마치 불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