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새벽 2시, 샤워실의 수증기가 준호의 얼굴을 흐렸다. 손가락은 여전히 경련하고 있었다. 떨림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의료팀의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또 다른 경기가 5일 남아 있었다. 플레이오프 2라운드. 부산 드래곤즈와의 경기.
준호는 손을 쥐었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마치 누군가 가는 바늘로 신경을 건드리는 듯한 통증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밤 2시 15분. 화면에는 '서윤'이 떠 있었다.
"지금 뭐 해?"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지."
"집에 있어?"
"응."
"나 지금 가. 30분이면 된다."
준호가 무언가 말하려 했을 때 전화는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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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은 실제로 25분 만에 도착했다. 준호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 손가락으로 초인종을 눌렀고, 눈을 비비며 나온 준호와 마주했다. 서윤의 얼굴은 진지했다. 농구화 끈이 제대로 묶여 있지 않았다. 차에서 재빨리 내려온 흔적이었다.
"손 봐."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서윤은 그걸 잡고 손가락을 펼쳐 보았다. 경련은 이미 멈춰 있었다. 하지만 손의 미세한 진전은 여전했다.
"얼마나 됐어? 이 정도면."
"모르겠어."
"거짓말하지 마."
서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전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당황이나 연민이 아니라, 뭔가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분노처럼 보였다.
"1주일 전부터 심해졌어. 경기 후 회복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 한 경기에 3회, 4회씩 쓰다 보니..."
준호가 말을 완성하지 않아도 서윤은 알았다. 그의 눈이 준호의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갔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경기 영상에서 본 준호의 움직임이 점점 경직되는 것을 이미 감지했던 것이다.
"코치한테 얘기했어?"
"아니."
"이은철한테?"
"경영진에겐 절대 안 돼. 계약 조건이 경기 출장 기준이잖아."
"그래서?"
서윤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아파트 복도의 불빛이 그의 턱을 비스듬히 비췄다.
"그래서 그냥 계속 하는 거야. 다음 경기도, 그다음도."
"미쳤다."
서윤의 목소리가 나왔다. 곧 그가 준호의 팔을 잡았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따라와. 지금."
"어디로?"
"코치를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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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15분, 강민준 코치의 집 앞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10초 뒤 문이 열렸고, 회색 스웨트 셔츠를 입은 코치가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엔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다음 준호와 서윤을 보자 표정이 변했다. 경고에서 깨달음으로.
"들어와."
거실은 차갑고 정적했다. 농구 전술 보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코치는 준호를 소파에 앉혔다.
"손을 펼쳐."
준호가 손을 펼쳤다. 코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눌러 보았다. 반응 속도, 근력, 경련의 흔적. 의료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5년을 선수들과 함께해온 눈은 정확했다.
"언제부터?"
"1주일 전."
"얼마나 자주?"
"경기마다 3회, 4회..."
코치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준호를 관통했다.
"의료팀에 본다고 해. 지금."
"안 돼요. 구단이..."
"내 말이 끝나지 않았어."
코치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고 번호를 누르는 동안 준호와 서윤은 숨을 쉬지 않았다. 통화 연결음이 울렸다. 새벽 3시 20분인데도 의료팀장은 금세 받았다.
"지금 우리 집으로 와. 준호를 봐야 한다... 응,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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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팀장 이영준은 새벽 4시에 도착했다. 응급 진료 가방을 들고. 그는 준호의 손, 팔, 척추를 차례로 검사했다. 초음파 기계까지 들고 왔다. 거실의 소파는 임시 진료실이 되었다.
검사가 끝나는 데 40분이 걸렸다. 이영준은 노트에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 동안 코치는 부엌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었고, 서윤은 준호 옆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무릎이 준호의 무릎과 닿아 있었다.
"결과가 좋지 않다."
이영준이 말했다. 그는 노트를 펼쳤다.
"척추 쪽에 미세 골절 징후가 보인다. 아직 방사선 촬영이 필요하지만, 초음파상 염증이 심각하다. 무릎은 반월판에 부종이 생기고 있는데, 지금 크기로 보면 탁구공 정도다. 2주 안에 계란 크기까지 커질 수 있다."
"얼마나 자주 능력을 써야 이 정도가 돼요?"
준호가 물었다.
"주 3회 이상, 경기당 3회 이상. 그리고 회복 시간을 제대로 갖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능력 사용 후 최소 2시간의 회복이 필요한데, 준호는 경기 당일 재활을 하고 있었어. 신체가 회복될 기회를 주지 않은 거다."
이영준이 시선을 들었다.
"월 15회 이상 사용하면 척추와 무릎 관절에 영구 손상이 올 수 있다. 지금 이미 월 18회를 사용했고, 앞으로 플레이오프가 3주 남아 있다. 결승전까지 가려면 예상 경기 수만 해도 3경기 이상이 될 텐데, 제한하지 않는 한 회복 불가능한 수준까지 갈 거다."
침묵이 거실을 채웠다. 코치는 커피 잔을 내려놨다. 서윤은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의 얼굴은 창백했다.
"남은 능력 사용 횟수는?"
코치가 물었다.
"이 상태에서라면,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최대 6회. 그 이상은 영구 손상 수준으로 진입한다."
"6회."
코치가 중얼거렸다.
"플레이오프 예선 2경기, 결승 1경기. 총 3경기에 6회면 경기당 2회 정도다. 결승전 상대가 강팀이라면 그것도 턱없이 부족해."
"그것도 위험한 선에 가깝다."
이영준이 덧붙였다.
"이상적으로는 경기당 1회 이하로 제한하고, 그 외는 팀 플레이에 의존해야 한다."
준호가 눈을 감았다. 신체의 모든 신경이 척추와 무릎으로 모아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그곳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는 듯.
"알겠습니다."
코치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팀에는 이 내용을 알리지 않는다. 의료 기밀이다. 하지만 준호, 넌 지금부터 다르게 움직인다. 능력에만 의존하면 넌 죽어. 이건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다."
코치가 준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넌 팀을 믿어야 해. 능력 없이. 이 팀이 너를 믿은 만큼, 넌 이 팀을 믿어야 한다. 이해했어?"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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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서윤은 거실의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나가기를 거부했다. 준호가 혼자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펼쳤다 쥐었다를 반복했다. 이제 떨림이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능력 없이 플레이할 수 있을까?
지난 5년간 그는 완벽함을 위해 싸웠다. 완벽함이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결정적 순간에서 지는 건 패배자야. 최고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
능력이 없으면 자신은 무엇인가? 그 질문이 가슴을 짓눌렀다.
과거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전국 대회 결승전. 그때도 마지막 슛을 놓쳤다. 능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팀을 믿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결과는 패배였다. 경기장을 나가며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했다. "완벽함을 버린 놈은 패배자야."
그 이후로 준호는 다시는 능력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완벽함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팀을 믿는 것은 약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척추의 통증이 다시 울렸다. 마치 신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능력을 써야 한다고. 완벽함으로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고. 아니면 죽는다고.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공포였다. 능력 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공포. 팀을 믿었다가 또 다시 실패할 공포. 그 공포가 손끝까지 내려와 신경을 흔들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밤 6시 42분.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떠 있었다. 준호는 받았다.
"안녕, 준호."
신비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어제 이후 처음 들었다.
"어디에서..."
"넌 이제 깨달았지? 능력이 저주라는 걸."
"맞습니다."
"그런데 넌 아직 모르는 게 있다."
노인이 말했다.
"능력이 없을 때가 더 강하다는 것. 넌 지금까지 완벽함을 쫓았어. 하지만 그건 너 자신을 죽이는 거야. 팀을 믿는 것. 그것이 진정한 강함이야."
"어떻게 팀을 믿습니까? 팀이 나를 믿을 리 없잖아요."
"이미 시작됐어. 너 자신은 모르겠지만."
전화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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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7시 30분, 준호는 거실로 나갔다. 서윤은 여전히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떠 있었다.
"못 잤어?"
"넌?"
"나도."
서윤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피곤했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오늘 훈련?"
"오후 3시."
"그 전에 뭐 할 거야?"
준호가 물었다.
"밥 먹고, 너랑 얘기하고, 그 다음은 김태현이 올 거야. 내가 불렀어."
"왜?"
"넌 알아야 해.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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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은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그는 준호의 아파트 현관에서 발을 굴리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오면서 눈이 자꾸만 준호를 향했다. 준호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서윤은 부엌에서 물을 데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태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침 8시, 학교에 가야 할 시간에 갑자기 준호를 만나라는 연락을 받은 터였다.
"앉아."
준호가 말했다.
김태현이 앉았다. 준호와 서윤 사이의 공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준호가 말했다.
"뭘요?"
"4경기 전, 넌 마지막 슛 기회를 받지 못했어. 넌 그걸 이해 못 했고, 울었어. 그건 내 책임이야."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항상 완벽함만을 원했어. 그래서 나만 완벽하게 끝내려고 했어. 팀원들이 뭘 원하는지, 뭘 필요로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넌 나의 우상이 되고 싶었다고 했잖아. 근데 내가 보여준 건 완벽함이 아니라 고독함이었어. 그걸 미안해해."
김태현의 눈이 눈물로 가득 찼다.
"선배님은... 완벽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야. 완벽한 선수가 아니라 신뢰하는 선수가 돼야 해. 그리고 나도 너를 믿어야 해. 지금부터는 그렇게 하겠어."
준호가 김태현의 눈을 마주했다.
"그런데 내가 너를 믿을 수 있을까? 넌 정말 날 믿어줄 거야?"
김태현이 물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응. 그 약속을 지켜 줄 수 있어?"
"네."
"경기가 끝나고 로커룸에서 만나자. 그때 이 얘기를 또 하자. 더 구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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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훈련장. 서울 타이거스는 부산 드래곤즈를 상대로 한 오늘의 훈련에 몰입하고 있었다. 강민준 코치의 지시는 평소보다 더 정확했다.
"준호, 넌 이번엔 슈팅만 해. 리바운드 운동 빼."
"알겠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서윤이 옆에서 준호를 바라봤다. 코치의 지시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준호를 보호하는 전술.
훈련 중간, 코치가 전체 팀을 모았다.
"우리는 이제부터 다르게 간다. 한 선수에게만 의존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움직인다. 이해했어?"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 넌 지금부터 조용히 플레이해. 능력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기본에 충실해. 서윤, 넌 더 많이 슈팅을 찾아 줘. 김태현, 넌 수비에 집중해. 박진수는..."
코치의 눈이 박진수를 향했다. 박진수는 훈련 코트의 끝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넌 팀을 생각해.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박진수가 대답하지 않았다. 코치는 그의 침묵을 본 후 돌아섰다. 그 뒷모습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훈련이 끝나갈 무렵, 박진수는 로커룸으로 향했다. 준호가 복도를 돌아 그를 따라갔다. 로커룸 입구에서 박진수가 멈췄다. 돌아서며 준호를 노려봤다.
"뭐 하는 거야?"
박진수의 목소리가 낮았다. 위협처럼 들렸다.
"그냥..."
"그냥? 넌 코치 말을 듣고도 그냥이야?"
박진수가 한 발 다가섰다. 그의 주먹이 천천히 쥐어졌다. 손가락이 꽉 움켜잡혔다.
"넌 이 팀을 망치고 있어. 능력 없이 플레이한다고? 그게 뭐 하는 짓이야. 그럼 우리가 뭐 하는 거야? 너 같은 패배자 때문에 우리도 떨어지는 거야."
박진수가 로커룸 벽을 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음 경기에서 뭘 하든 상관없어. 넌 이 팀의 짐이야. 그리고 난 그걸 모두에게 보여 줄 거야."
박진수가 로커룸으로 들어갔다. 준호는 그 뒤를 따르지 않았다. 복도에 서서 박진수의 말을 되새겼다. 그의 목소리, 주먹, 그 뒷모습에 담긴 다짐. 박진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경기에서 준호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공포가 아니었다. 뭔가 더 큰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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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부산 드래곤즈와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 경기. 인천 삼성라이온즈 경기장.
서울 타이거스는 2쿼터 중반부터 밀리고 있었다. 부산 드래곤즈의 풀 코트 프레싱이 효과적이었다. 점수는 42:38로 부산이 리드 중이었다.
3쿼터, 준호가 투입됐다. 서윤과 함께. 코치는 준호에게 손가락으로 숫자 1을 보여줬다. 이 쿼터에서 능력을 1회만 사용하라는 뜻이었다.
준호는 코트에 들어섰다. 박민석이 그를 압박했다. 준호의 등에 손을 얹으며 움직임을 제한했다. 준호가 공을 받으려 할 때마다 박민석의 팔이 날아왔다.
3분 20초, 서윤이 준호에게 패스를 던졌다. 박민석이 즉시 몸을 붙였다. 준호는 공을 드리블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박민석의 손이 공을 향해 뻗어 나왔다.
그 순간, 준호는 리와인드를 할 수 있었다. 박민석이 공을 건드리기 전으로 돌아가면 된다. 공을 다시 받고,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된다.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아침부터 느껴온 떨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만들어지는 떨림이었다. 능력을 쓰고 싶은 욕망이 신경을 타고 손끝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완벽함으로 이 순간을 끝내고 싶다는 절박함. 그것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을 펼쳤다. 그리고 그것을 서윤에게 보였다. 아직 능력을 쓰지 않겠다는 신호.
두려움이 밀려왔다. 능력이 없으면 자신은 누구인가? 박민석의 손이 공을 건드렸다. 드리블이 끊겼다. 공이 박민석의 손으로 넘어갔다. 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맞는 선택인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패배자는 이렇게 움직여. 결정적 순간에 능력을 버리다니.'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것이었다. 능력 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는 순간. 완벽함을 버리고 팀을 믿는 순간.
준호는 앞으로 나아갔다. 손으로 공을 쳐내려 했다. 그러면서 서윤의 눈이 보였다. 서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박민석의 움직임을 읽고, 패스 라인을 예상하고 있었다.
서윤이 공을 잡았다. 빠른 드리블로 세 칸을 전진했다. 김태현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가고 있었다. 서윤이 공을 김태현에게 던졌다. 김태현이 슈팅을 날렸다.
골.
로커룸이 터져 나왔다. 4쿼터로 넘어가면서 스코어는 76:75로 타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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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쿼터 후반, 8초 남음. 점수는 98:98.
서울 타이거스의 공이었다. 코치가 타임아웃을 불렀다. 전술 보드에 선을 그었다. 준호에게 마지막 슛을 주지 않았다. 대신 서윤에게 줬다.
"서윤, 넌 공을 받아. 준호는 스크린을 줘. 이해했어?"
서윤과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8초, 경기가 재개됐다. 준호가 서윤을 위해 스크린을 세웠다. 서윤이 박민석을 따돌렸다. 공을 받으면서 4초.
서윤이 슈팅을 날렸다. 그 사이 준호는 리바운드 라인에 있었다. 공이 림에 닿았다.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2초 남음. 준호가 점프했다. 공을 손에 넣었다. 동시에 부산 드래곤즈의 센터 이준호(다른 준호)가 준호의 팔에 올라탔다.
페널티. 준호는 프리스로우 라인에 섰다.
1초 남음.
준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손가락을 펼쳤다. 떨림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손가락은 떨렸다. 하지만 그건 공포의 떨림이 아니었다. 결정적 순간 앞에서 신체가 만드는 자연스러운 진동이었다.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척추에서 통증이 울렸다. 무릎의 부종이 느껴졌다. 신체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능력을 써야 한다고. 완벽함으로 이 순간을 끝내야 한다고.
준호는 공을 들었다. 손가락이 공의 표면을 감지했다. 가죽의 질감, 공기 밸브의 위치, 무게 중심. 손가락 끝에서 손목으로 전해지는 온기. 림까지의 거리는 정확히 4.6미터. 공의 회전 속도는 초당 3회전. 이 모든 정보가 신체에 입력되었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계산하지 않았다. 대신 관중석을 봤다. 서울 타이거스의 응원단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능력을 쓰든 안 쓰든 상관없이. 그저 팀의 일부로서 이 순간을 함께하는 자신에게.
준호는 림을 봤다. 공과 림 사이의 거리. 그 거리는 예전과 달랐다. 완벽함의 거리가 아니라, 신뢰의 거리였다. 팀이 자신을 믿고, 자신이 팀을 믿는 그 거리.
준호가 슈팅을 날렸다. 손가락에서 떨림이 없었다. 척추에 통증도 무릎의 부종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해방감만 있었다. 완벽함을 버렸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그 감각. 팀을 믿고 자신을 내맡기는 것의 쾌감.
공이 공중을 그렸다. 호(弧)를 그리며 림을 향해 날아갔다. 손가락을 떠난 공은 더 이상 준호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팀의 것이었다. 서윤의 응원이, 김태현의 믿음이, 코치의 신뢰가 담긴 슈팅이었다.
골.
100:98. 서울 타이거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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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커룸. 준호가 들어왔을 때 팀원들은 이미 모여 있었다. 코치도, 서윤도, 김태현도.
강민준 코치가 일어났다.
"모두 들어와. 이제부터 우리는 다르게 움직인다. 한 선수에게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팀이다. 팀이 이기는 거야. 개인이 아니라."
코치의 말이 끝나자 팀원들이 박수를 쳤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척추와 무릎의 통증이 사라졌다. 대신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 부풀어 올랐다.
서윤이 준호의 어깨를 안았다.
"우리가 이 경기를 이겼어. 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준호가 서윤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눈빛이 다르다. 완벽함을 쫓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믿고 있는 눈이었다.
김태현이 다가왔다.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의심이 없었다.
"고마워요, 선배님. 나를 믿어줘서."
준호가 김태현을 안았다.
"고마운 건 나야. 넌 나를 믿어줬고, 그게 나를 구했어."
로커룸은 웃음과 박수로 가득 찼다. 팀원들이 준호를 둘러싸고 축하했다. 신뢰로 이룬 승리.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팀의 믿음으로 얻은 결과였다.
그 순간, 로커룸 문이 열렸다. 박진수가 나타났다. 수건을 걸친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준호를 바라봤다. 그 다음 코치를, 서윤을 봤다. 마지막으로 문을 향했다.
박진수가 로커룸을 나갔다. 뒷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준호는 박진수의 주먹이 쥐어져 있다는 걸 봤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음 경기에서 끝낸다... 반드시..."
박진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말은 협박이자 다짐이었다. 박진수는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다음 경기에서 직접적인 방해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준호를 무너뜨릴 것인가. 무엇이든 준호를 고통스럽게 할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준호를 지탱했다. 팀이 있고, 코치가 있고, 서윤이 있다. 그들이 자신을 믿는다면, 자신도 그들을 믿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준호의 손가락이 펼쳐졌다.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