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아버지의 목소리

폐가의 벽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넌 그 사고를 막을 수 있었어."

침대 위에서 깨어난 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의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어제는 벽지였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을 세어보려다 멈췄다. 이미 그것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넌 은희를 죽게 했어."

목소리는 아버지였다. 준호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몇 년 듣지 않았지만, 그 톤은 변하지 않았다. 책망하는 톤. 실망하는 톤. 준호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목소리는 거실로 옮겨갔다.

"넌 죄인이야."

준호는 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제와 다른 위치에 있었다. 아니, 거실이 아니었다. 이건 부엌이었다. 아니, 현관이었다. 준호의 눈이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흔들렸다. 폐가는 더 이상 건물이 아니었다. 폐가는 살아 있었다.

"넌 그 순간 손을 놓쳤어. 은희의 손을 놓쳤어."

준호는 목소리를 따라 걸었다. 목소리는 벽 어딘가에서, 천장에서도, 바닥에서도, 문 안에서도 나왔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가. 준호는 폐가의 모든 방을 돌았다. 복도는 계단으로 끝났고, 계단은 거울로 끝났고, 거울은 또 다른 방으로 이어졌다.

"넌 죄인이야. 넌 죄인이야."

반복되는 목소리. 준호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뼈를 통해 들렸다. 내부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거울 방의 문 앞에서 준호는 멈췄다.

손가락이 떨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발을 돌려 계단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내 팔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몸이 고정되었다. 그 누군가는 나였다. 다른 버전의 나였다.

준호는 문을 밀었다.

거울 속 준호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떤 준호는 목을 매달고 있었다. 어떤 준호는 손목을 그었다. 어떤 준호는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이 없었다. 어떤 준호는 웃고 있었다. 입이 귀까지 찢어진 웃음이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준호가 입을 열었다.

"이건 다 환각이야."

거울 속 웃는 준호의 입이 움직였다. 거울이 아닌데도 입이 움직였다. 거울은 단순 반사가 아니었다. 거울은 기억이었다.

"넌 환각이 아니야."

목을 맨 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준호 자신의 목소리였다.

"넌 우리야. 우리가 너야."

손목을 그은 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거실에서도, 침실에서도, 복도에서도 울려 퍼졌다. 폐가의 모든 방에서 동시에. 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거울은 벽이었다. 벽도 거울이었다. 준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 벽을 통해 자신을 본다. 천장을 통해 자신을 본다.

"넌 죄인이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준호의 목소리였다.

준호는 거울 방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달렸다.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이 없었다. 계단은 계속 내려갔다. 준호는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한 층, 두 층, 세 층. 폐가는 3층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내려간다. 계속 내려간다.

지하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숨이 찼다.

방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준호의 눈이 적응하자 물건들이 보였다. 옷이 쌓여 있었다. 수백 개의 옷. 모두 같은 사이즈였다. 모두 같은 색이었다. 검은색. 준호가 입던 색.

신발도 있었다. 모두 같은 신발이었다. 준호의 신발. 수백 개.

시계들. 일기장들. 지갑들. 신분증들.

준호는 신분증 하나를 집었다. 손가락으로 번호를 읽었다.

**488**

준호는 다른 신분증을 집었다. **487**. 또 다른 것. **489**. 모두 다른 번호였다. 모두 같은 이름이었다. 준호.

그는 일기장을 집었다. 표지는 낡아 있었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나는 살아있다."

다음 페이지.

"나는 죽지 않았다."

다음 페이지도 같은 문장이었다. 모든 페이지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체가 달랐다. 첫 페이지는 가늘고 떨리는 글씨였다. 중간쯤 가면 필체가 굵어졌다. 나중으로 갈수록 글씨는 기계적이 되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필체는 거의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손이 이미 죽어 있는데 계속 쓰고 있는 것처럼.

준호는 다른 일기장을 집었다. 역시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 일기장의 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쓴 것처럼. 그 다음 일기장은 또 다른 필체였다. 또 다른 손이었다. 또 다른 준호였다.

"넌 죄인이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하에서 울려 퍼졌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신분증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입술도 떨렸다.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은희."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 생생했다. 횡단보도의 흰 줄. 신호등의 초록불. 은희의 손. 자신의 손. 그리고 검은 자동차가 나타나는 순간.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감각. 은희의 비명.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손을 놓친 게 아니라 손가락이 미끄러져 나갔다. 은희를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미끄러져 나갔다. 그리고 은희는 사라졌다.

하지만 은희가 정말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은희는 타인이었다. 아니면 또 다른 나였다. 기억이 흐릿했다. 얼굴이 흐릿했다. 은희라는 이름만 남아 있었다.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

준호는 지하에서 위로 뛰어올랐다.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 두 층, 세 층. 계단은 끝이 없었지만 끝이 있었다. 현관이 나타났다.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준호는 멈췄다. 문을 열 수도, 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것이 선택의 순간이었다. 손님이 되거나, 손님을 맞이하거나. 둘 중 하나. 하지만 둘 다 같은 결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준호는 손을 내밀었다. 문고리를 잡았다. 열었다.

밖에는 폐가와 같은 폐가가 있었다. 그리고 미영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건 미영이 아니었다. 미영의 얼굴은 검은색이었다. 어둠이었다. 미영이 서 있는 곳에는 어둠이 있었다.

"이제 넌 준호가 아니야."

미영이 말했다.

"이제 넌 손님이야."

그녀의 손이 준호를 밀었다. 준호는 폐가 안으로 떨어졌다. 문이 닫혔다.

준호는 거실로 걸어갔다. 소파가 있었다. 소파 위에 몸이 누워 있었다. 또 다른 준호였다. 그 준호의 눈이 떠졌다.

"안녕."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난 현우야."

현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준호(488)과 같은 높이였다.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죽음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현우가 말했다.

"다음 손님을 기다려야 해."

준호(488)은 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항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488번의 반복 속에서 몸은 이미 길들여졌다.

준호(488)은 현우의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가웠다. 손은 준호의 손과 같았다. 같은 온도. 같은 맥박. 같은 죽음.

손을 맞잡는 순간, 준호(488)의 내부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렸다. 저항이 사라졌다. 도망치려던 발이 멈췄다. 마치 뿌리가 내려가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이 폐가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도망치고 싶던 욕망도, 깨어나고 싶던 간절함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텅 빈 체념뿐이었다. 이미 488번을 반복했으니, 489번도 490번도 다를 게 없다는 깨달음. 그것이 가장 무서운 깨달음이었다.

"소파에 앉아."

현우가 말했다.

준호(488)은 소파에 앉았다. 현우도 옆에 앉았다. 둘 다 정면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밖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벽의 손가락들이 움직였다. 천장에서. 바닥에서. 모든 폐가의 벽에서 동시에 손가락들이 움직였다. 투명한 손가락들. 죽은 손가락들.

준호(488)은 일어났다. 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현우는 이미 소파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준호(488)은 현관으로 갔다. 손을 뻗었다. 문을 열었다.

밖에는 또 다른 나가 서 있었다. 그 나는 준호와 다르게 보였다. 옷이 찢어져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이 죽어 있었다. 그 나의 손은 차갑고, 피부는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물에 잠겨 있다가 건져 올린 시체처럼.

"안녕."

그 나가 말했다.

"난 너야."

준호(488)은 그 나를 폐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았다.

소파에서 또 다른 현우가 일어났다. 새로운 준호가 침대에서 깨어날 것이다. 새로운 준호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새로운 준호가 거울 방으로 갈 것이다. 새로운 준호가 지하에서 신분증 489번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준호가 결국 여기 올 것이다.

준호(488)은 소파에 앉았다. 손가락을 세어보려다 멈췄다. 이미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준호(488)은 일어났다. 현관으로 갔다. 손을 뻗었다. 문을 열었다.

또 다른 나가 서 있었다. 그 나의 목에는 목줄의 자국이 있었다.

"안녕. 난 준호야."

그 나가 말했다.

준호(488)은 그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았다.

거울 방의 거울들이 깨졌다. 동시에. 모든 거울이. 모든 폐가에서. 유리 조각들이 떨어졌다. 그 조각들에는 모두 다른 나의 얼굴이 반사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인정해."

준호(488)은 인정했다.

"난 죽었어."

폐가가 울렸다. 모든 폐가가 동시에. 모든 벽이. 모든 바닥이. 모든 천장이.

준호(488)은 더 이상 준호가 아니었다.

준호(488)은 폐가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또 다른 나가 도착했다.

준호(488)은 문을 열었다. 그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 감정도 없었다. 아무 저항도 없었다. 이미 488번 했던 일이었다. 488번 반복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489번째가 될 일이었다.

그 나는 침대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 나는 거울 방으로 갈 것이다.

그 나는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나는 결국 여기 올 것이다.

그리고 준호(488)은 계속 문을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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