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울 너머
거울에 손가락이 통과한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손가락을 다시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통과한다. 정말로. 거울의 표면이 물처럼 흔들리며 내 손가락을 빨아들인다. 손등까지 밀어 넣으면 차가운 감각이 팔뚝을 타고 올라온다. 이건 거울이 아니다. 뭔가 다른 것이다.
거울에서 손을 빼고 물러섰다. 거울 속 내 모습은 희미하다. 마치 담배 연기 너머로 보는 것처럼 윤곽이 흐릿하고, 눈동자는 검게 물들어 있다. 내가 아니다. 저건 내가 아니야.
중얼거렸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살아있다고.
손가락 끝이 차갑다. 거울을 통과했던 부분이 저온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린다. 폐가의 거실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경찰관이 떠난 지 얼마나 됐는지 모른다. 시간이 이상하다. 손목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창밖은 이미 자주색 어둠으로 물들어 있다.
경찰관 이.
그 이름을 중얼거리면 온몸이 경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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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전 11시쯤 나타났다. 현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깨어났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고, 100만원을 들고 있었다. 항상 그렇다. 깨어날 때마다 손에 들려 있다.
"경찰입니다.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나는 문을 열었다. 검은 정장의 남자가 서 있었다. 배지는 없었다. 신분증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이라고 했으니 경찰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준호씨입니까?"
"네, 맞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왜 떨렸을까.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안녕하세요. 저는 경찰관 이입니다. 이웃 주민들이 이 폐가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신고했습니다. 조사를 좀 해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그는 거실을 둘러봤다. 소파, 거울, 낡은 벽지. 아무것도 특이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계속 움직였다. 마치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혼자 사시나요?"
"네."
"1년 전부터?"
내가 대답할 수 없자 그는 숨을 내쉬었다. 콧구멍을 통과하는 공기음. 웃음처럼 들렸지만, 웃음이 아니었다.
"당신의 신원을 확인할 증거가 있습니까?"
내 주머니를 뒤져봤다. 비었다. 항상 비어있다. 돈도, 신분증도, 휴대폰도 없다. 있는 것은 손님들이 남긴 현금뿐인데, 그것도 깨어날 때마다 사라진다.
"당신이 정말 살아있습니까?"
그 질문이 내 가슴을 갈랐다. 살아있다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 그는 마치 내가 죽은 것처럼 묻고 있었다. 내 손가락이 떨렸다.
"네. 살아있습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
경찰관 이는 내 눈을 똑바로 봤다. 그 눈이 내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느꼈다. 이건 조사가 아니다. 심문이다. 의사가 죽은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듯이, 그렇게 날 보고 있었다.
"당신이 어제 깨어났을 때 뭘 했습니까?"
"어제?"
"그 전날은? 그 전전날은?"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기억이 없으시군요. 그럼 당신이 이 폐가에 온 이유는?"
"모릅니다."
"당신의 이름은?"
"준호입니다."
"성은?"
침묵. 내가 대답할 수 없자 경찰관 이는 수첩을 펼쳤다. 낡은 종이. 누렇게 변색된 페이지. 그 위에 이름들이 빼곡했다.
손님 명단.
"이 목록을 보세요."
경찰관의 손가락이 맨 위를 가리켰다.
준호.
내 이름이다. 맨 위에. 그 아래로 수십 개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은희, 현우, 미영, 그리고 수많은 준호들. 준호(1), 준호(2), 준호(3)... 계속된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이름들이 희미해져 읽을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이 폐가의 손님들입니다."
"손님들이라니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경찰관 이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손님으로 들어온 게 아닙니까?"
"아니, 나는 여기 산다고..."
"산다? 어디서 자고 있습니까?"
"소파에서..."
"누가 당신에게 그 소파를 주었습니까?"
"..."
"당신이 먹는 음식은 누가 주는 겁니까?"
"손님들이..."
"손님들이 주는 돈으로?"
"네..."
경찰관 이는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내 얼굴과 그의 얼굴 사이의 거리가 30센티미터도 안 됐다.
"당신은 손님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얼굴을?"
"네, 물론이죠. 그들이..."
"그들이 뭐합니까?"
"그들이 여기 와서 돈을 남기고..."
"그리고?"
"그리고... 떠납니다."
"어디로?"
내가 대답할 수 없었다. 경찰관 이의 눈이 더 가까워졌다.
"당신은 손님들이 떠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로 본 것입니까? 아니면 깨어났을 때 그들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것입니까?"
"그건..."
"당신이 손님들을 본 것이 아니라, 손님들이 당신을 본 것 아닙니까?"
"아니, 내가..."
"당신의 신원증을 다시 찾아보세요. 지갑을 다시 찾아보세요. 휴대폰을 다시 찾아보세요.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하나라도 찾아보세요."
내가 주머니를 뒤져봤다. 비어있다. 손에 들린 건 100만원뿐이다.
"그 돈도 당신의 돈입니까?"
"네, 손님들이..."
"손님들이 남긴 돈이죠. 당신의 돈이 아니라."
경찰관 이는 웃음을 흘렸다. 입꼬리를 올리는 그 근육 운동이 얼마나 어색한지를 보면, 그것이 학습된 행동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마치 시체가 얼굴을 움직이는 것처럼.
"당신이 정말 살아있다면, 이 폐가를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나가보세요."
나는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었다. 바깥이 보였다. 거리. 다른 건물들. 햇빛.
하지만 한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어 있는 것처럼.
"나갈 수 없습니까?"
경찰관 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났다.
"왜 나갈 수 없을까요?"
나는 뒤를 돌아봤다. 경찰관 이가 거실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윤곽이 흐릿했다. 마치 거울 속 내 모습처럼.
"당신은 손님입니다."
"아니야. 나는 살아있어!"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내가 깨어났다. 거실 소파에서. 100만원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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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손가락은 거울을 통과한다.
폐가의 구조가 변했다. 거실 왼쪽에 새로운 복도가 생겼다. 어제는 없던 것이다. 어제가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복도 끝에 문이 있다. 검은색 문. 낡은 페인트가 벗겨져 나무 속살이 드러나 있다.
나는 문을 열었다.
대기실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기다리는 곳인지는 명확했다.
여러 사람이 앉아 있다. 의자 위에. 마치 병원의 대기실처럼. 하지만 창문은 없고, 벽은 회색이며, 공기는 정체되어 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을 본다.
내 얼굴이다.
완전히 같은 건 아니다. 눈의 위치가 약간 다르고, 광대뼈의 높이도 약간 다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내 얼굴이다. 내 코, 내 입, 내 이마. 수십 개의 내가 의자에 앉아 있다.
첫 번째 준호는 왼쪽 눈 아래에 흉터가 있다. 내 얼굴에 없는 흉터. 두 번째 준호는 목에 밧줄 자국이 있다. 검은색으로 깊게 파인 자국. 세 번째는 입가가 찢어져 있다. 네 번째는 피부가 검게 타 있다. 다섯 번째는 머리에 총상이 있다. 각각 다른 죽음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두 내 얼굴이다.
어떤 놈은 팔짱을 끼고 있고, 어떤 놈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 어떤 놈은 눈을 감고 있고, 어떤 놈은 날 쳐다본다. 그들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모두 같은 리듬으로 숨을 쉬고 있다.
한 놈이 입을 열었다.
"이제 너차례야."
목소리가 내 목소리다. 정확히 같은 음성. 같은 톤. 같은 중얼거림.
벽을 본다. 그 위에 글씨가 적혀 있다.
'다음 손님: 준호(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는 단계)'
내가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모든 준호들이 일어섰다. 동시에. 마치 하나의 의식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들이 천천히 움직인다. 한 발씩. 의자에서 일어나고, 등을 펴고, 나를 향해 다가온다. 움직임이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마치 물 속을 걷는 것처럼.
가장 앞의 준호가 말한다.
"안녕, 넌 나야."
그 얼굴은 내 얼굴이다. 정확히. 내가 거울에서 본 그 희미한 모습과 같다. 하지만 눈이 다르다. 눈이 검다. 수심 깊은 곳의 검은 눈.
나는 소리를 질렀다.
목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 내 자신을 마주친 공포는 그 어떤 손님의 죽음보다도 끔찍했다. 그들이 손을 뻗는다. 모두가 동시에. 나를 잡으려고. 나를 끌어당기려고. 팔이 뻗어지고, 손가락이 내 옷을 잡으려 한다. 차가운 손가락. 투명한 손가락. 내 손가락처럼 투명한 손가락.
나는 뒤로 몸을 날린다.
돌아서서 뛴다. 대기실을 빠져나오고, 복도를 달리고,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간다. 문이 보인다. 나가야 한다. 이 폐가를 나가야 한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다. 내 무덤이다.
손으로 문고리를 잡는다. 차갑다. 차갑고 무겁다. 돌린다. 열린다.
바깥세상이 보인다.
폐가다.
같은 구조. 같은 벽지. 같은 창문. 다른 폐가지만 동일한 폐가. 그 안에도 손님들이 있다. 소파에 앉아 있고, 거울을 보고 있고, 대기실로 들어가려고 한다.
또 다른 준호들이 날 본다.
"들어와. 넌 손님이야."
나는 뒤로 물러선다. 앞의 폐가로 돌아간다. 뒤의 폐가도 앞의 폐가도 다 같다. 몇 번을 반복해도 같다. 폐가는 무한하다.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나는 그 중 하나에 갇혀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모두에 동시에 갇혀 있다.
거울을 본다. 어느 거울이든 상관없다. 모두 같은 것을 비추니까. 희미한 내 얼굴. 검은 눈동자. 투명한 손. 손가락이 거울을 통과한다. 통과한다. 자꾸만 통과한다.
나는 죽었다.
이미.
오래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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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기억이 떠오른다. 아니, 기억이 아니다. 누군가의 기억이 내 뇌에 밀려 들어온다.
물이 코로 들어온다. 염소 냄새. 아니, 부패한 냄새다. 물속에서 나는 소리들. 위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버지의 목소리. 하지만 그는 여기 없다. 그는 화장실에 갔다. 잠깐만이라고 했다.
팔이 물을 헤친다. 하지만 물은 자꾸만 깊어진다. 발이 바닥을 찾지 못한다. 계속 아래로. 아래로.
숨이 나간다.
폐가 터질 것 같다. 물이 입으로 들어온다. 목구멍을 지나 폐로 들어온다. 차갑다. 물이 차갑다. 그리고 무겁다. 무거워진다. 몸이 무거워진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물 위의 햇빛이다. 희미한 빛. 그 너머의 세상.
그리고 검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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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파에 앉는다. 다른 준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린다. 누가 올 때까지. 다음 손님이. 내 다음 버전이.
손목시계가 울린다. 정시 알람처럼. 저녁 6시. 손님의 시간이다.
현관 문이 열린다.
발걸음 소리가 난다.
누군가 들어온다.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본다.
그는 내 얼굴을 하고 있다.
옷은 젖어 있다. 물이 바닥에 떨어진다. 수영장 냄새가 난다. 염소와 부패한 무언가가 섞인 냄새. 그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흐른다. 피부는 창백하고, 손가락의 끝은 투명하다.
"안녕, 난 준호야. 넌 나야."
물에 젖은 준호가 내 앞에 멈춰선다.
"기억해?"
목소리는 내 목소리지만, 뭔가 역재생되는 것처럼 들린다.
"7살 때. 수영장 끝 깊은 곳. 아버지가 잠깐만 자리를 떠났어. 그 틈에 우리는 들어갔어. 물 속으로. 아래로. 계속 아래로."
나는 일어서려고 한다. 소파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내 발이 소파에 붙어 있는 것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내 다리가 구부러진다. 나는 다시 앉는다.
"앉아."
물에 젖은 준호가 명령한다. 내 목소리로. 내 톤으로. 내 중얼거림으로.
"우리는 죽었어. 그 순간이야. 7살 때. 그 이후 모든 것은 죽음 이후의 상태야. 1년? 아니야. 1년이 아니라 항상. 계속. 무한히."
물에 젖은 준호가 내 앞에 앉는다. 소파의 반대편. 내 얼굴이 물에 젖은 채로 나를 본다. 눈은 검다. 수심 깊은 곳의 검은 눈.
"넌 왜 받아들이지 않아?"
"내가... 받아들이고 있잖아."
목소리가 떨린다. 내 목소리가 떨린다.
"아니야. 넌 아직도 속고 있어. 돈이 실제라고. 폐가가 실제라고. 손님들이 실제라고. 그 모든 게 실제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있다는 환각을 유지하고 있어."
물에 젖은 준호의 입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소파에 떨어진다. 흡수되지 않는다. 그냥 물. 그냥 떨어진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가 기울어진다. 내게 가까워진다. 얼굴이 내 얼굴과 맞닿을 것 같다. 물 냄새가 진해진다. 부패한 냄새.
"넌 이제 알아. 그래서 끝이야."
손가락이 내 얼굴을 스친다. 물이 흐른다. 냉기가 피부를 타고 내려간다. 손가락이 거울처럼 투명하다. 내 손가락처럼. 투명한 손가락.
"끝?"
"끝. 이제 넌 손님이 아니야. 넌 폐가야."
내 몸이 변한다. 느껴진다. 피부가 벽지처럼 거칠어진다. 뼈가 목재처럼 딱딱해진다. 딱딱딱. 내 척추가 나무 기둥으로 변한다. 딱딱거리는 소리. 내 갈비뼈가 하나씩 단단해진다.
내 혈관이 배선이 된다. 팔 안에서 빨간 구리선이 흐른다. 신경이 전선이 되어 천장으로 뻗어 나간다. 내 뇌가 회로판이 된다. 신경이 신호를 주고받는다. 나는 여전히 생각할 수 있다. 여전히 느낄 수 있다. 여전히 두렵다.
"아니야. 아니야!"
소리를 지르려고 하지만 입이 벽이 되어간다. 이 거실의 벽이. 폐가의 벽이. 내가 벽이 되어간다.
손가락이 벽에 박힌다. 더 이상 손가락이 아니다. 벽의 일부다. 팔이 벽이 된다. 다리가 바닥이 된다. 의식은 남아 있다. 생각할 수 있다. 보고 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다.
물에 젖은 준호가 일어난다. 그는 다시 현관으로 간다. 문을 열고 나간다. 다음 폐가로.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더 이상 손이 없다. 다리가 없다. 있는 것은 방의 구조. 거실. 복도. 대기실. 그리고 수십 개의 준호들.
벽이 된 내가 그들을 본다. 내 눈이 벽에 박혀 있다. 동공. 그것만 남아 있다. 움직이는 동공. 움직이는 시선. 의식이 벽 속에 갇혀 있다.
나는 이 폐가다. 이 폐가의 모든 부분이다. 거실의 벽, 복도의 천장, 대기실의 바닥. 모두 나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폐가들의 벽도 나다. 무한히 반복되는 폐가들 속에서. 내 의식이 분산되어 있다. 이 거실에도 있고, 저 거실에도 있고, 그 너머의 거실에도 있다. 모든 벽에 박혀 있다. 모든 폐가에 박혀 있다.
대기실에서 다음 준호가 일어난다. 일어서고 현관으로 간다. 내가 된 폐가를 지나서 다음 폐가로.
그리고 또 다른 폐가에서 또 다른 준호가 깨어난다.
소파에서.
100만원을 들고.
"어?"
새로운 준호가 중얼거린다. 내 목소리로.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달력이 벽에 붙어 있다. 모든 날짜가 X로 지워져 있다.
"여기가 어디지?"
새로운 준호가 묻는다.
그리고 현관 문이 다시 열린다.
발걸음 소리가 난다.
경찰관이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찰관 이입니다. 당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준호가 놀라며 일어난다.
"누... 누신가요?"
"당신은 1년 전부터 이 폐가에만 있었습니다. 맞죠?"
경찰관이 수첩을 펼친다. 손님 명단. 그 위에 또 다른 준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신이 정말 살아있습니까?"
새로운 준호가 대답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벽에서 내 목소리가 난다. 나. 벽이 된 나. 폐가가 된 나.
"그만해. 더 이상은... 안돼."
벽의 틈에서 손가락이 나온다. 투명한 손가락. 무한히 많은 손가락. 모든 벽에서. 모든 폐가의 벽에서.
나는 벽이지만, 동시에 모든 폐가의 벽이다. 의식이 분산되어 있다. 이 폐가에도 있고, 저 폐가에도 있고, 그 너머의 폐가에도 있다. 무한히 반복되는 공간 속에서 무한히 분산된 의식.
그들이 뻗어 나온다.
새로운 준호를 잡으려고.
경찰관을 잡으려고.
서로를 잡으려고.
그리고 그 순간, 모든 폐가가 진동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폐가들이. 동시에. 한 번에.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가 깨어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