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눈을 뜨는 순간 손에 돈이 없었다. 대신 손가락이 투명했다.

어제 받은 100만원. 아니, 어제가 맞나? 시간이 다시 점프했다. 거실 소파에서 깨어났고, 달력을 확인하니 사흘이 지나있었다. 손목시계의 시간도 이상했다. 자정을 넘겼는데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준호는 손가락으로 시계를 톡 쳤다. 바뀌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회색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글씨가 흐릿했다. 손에 힘을 주지 않은 채 쓴 것처럼. 준호가 종이를 들었다. 자신의 필체였다.

'은희를 기억해. 은희는 우리를 잊지 않아.'

준호는 종이를 집어던졌다. 그 순간,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저녁도 아닌데. 손님이 오는 건 항상 밤이었다. 준호는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도어락을 누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잠긴 것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폐가의 문이 잠긴 적이 있었나?

현관에 여자가 서있었다.

다른 손님들과 달랐다. 그들은 준호를 보지 않았다. 투명한 존재처럼 준호의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이 여자는 준호를 직접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검은색이었다. 완전히 검은색이었다. 흰자위가 없었다.

"안녕, 준호."

그 목소리는 물 속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울음도 아니고 숨소리도 아닌 뭔가. 준호는 한 발 물러났다.

"나는 은희야. 넌 나를 기억해야 해."

여자는 현관에서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준호를 지나쳤다. 물기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냉기가 남았다. 준호는 그 차가움을 느꼈다. 피부가 소름 돋았다.

은희는 거실 정중앙에 멈췄다. 천천히 돌아서 준호를 봤다. 그 검은 눈동자가 준호를 뚫어질 듯 봤다.

"인정해야 해, 준호. 우리는 죽었어."

"나는 살아있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도 들었다. 그 떨림을. 은희는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였다.

준호는 거실을 돌아 복도로 나갔다. 은희는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목소리가 벽을 통해 들렸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이건 너의 집이야. 너의 죽음이야."

준호는 복도를 뛰었다. 폐가의 구조가 자꾸만 바뀌었다. 왼쪽으로 가야 할 방이 오른쪽에 있었다. 계단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벽이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달렸다. 그냥 앞으로만. 앞으로만.

결국 무언가에 부딪혔다.

벽이 아니었다. 창문이었다. 준호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봤다. 사진처럼 고정된 세상. 움직이지 않는 하늘. 움직이지 않는 나무. 움직이지 않는 차들. 그리고 거리 한복판에서 멈춰있는 검은 자동차 한 대. 그 자동차는 1년 전 횡단보도에서 자신과 은희를 친 바로 그 차였다. 앞 범퍼에는 혈흔이 있었다. 마치 시간이 그 순간에서 멈춘 것처럼.

준호는 창문을 돌아 거실로 돌아왔다. 은희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아니, 은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거울 방의 문이 열려있었다.

거울 속에서 여러 준호들이 보였다. 각각 다른 장면에 갇혀있었다. 하나는 자동차에 치이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건물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물에 잠기고 있었다. 모두 죽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희가 그 중 하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거울 속 준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은희의 물소리 웃음과 같았다.

"봤지? 그게 너야. 넌 이미 여기 있어. 이미 죽어있어. 그냥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야."

준호는 입을 열려 했다. 뭔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세상이 회전했다.

횡단보도. 준호는 횡단보도에 서있었다. 은희가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은 따뜻했다. 정말 따뜻했다.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준호와 은희가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검은 자동차가 나타났다.

엔진음. 타이어음. 브레이크음. 모든 게 동시에. 준호는 은희를 밀어냈다. 자신은 그대로 있었다. 아니, 자신도 밀려나갔다. 차의 범퍼가 준호의 옆구리를 쳤다. 그리고 은희의 등을 쳤다.

통증이 없었다.

준호는 아스팔트에 누웠다. 하늘이 보였다. 은희가 그 옆에 누워있었다. 은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알겠지? 우리는 죽었어. 함께."

준호의 몸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손가락부터. 손목부터. 팔이 사라졌다. 다리가 사라졌다. 가슴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오직 차가움만 있었다. 모든 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아, 죽음은 이런 거구나.'

준호의 생각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깨어났다.

거실 소파. 준호는 소파에 누워있었다. 손에 100만원이 들어와있었다. 새 지폐였다. 여전히 따뜻했다. 은희의 손처럼. 준호는 그 돈을 떨어뜨렸다. 돈이 바닥에 흩어졌다. 준호는 소파에서 일어나 돈을 밟고 서있었다.

현관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남자였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은희처럼 검은 눈동자는 아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남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친절한 미소. 하지만 그 미소가 얼굴에 그려진 것처럼 보였다.

"안녕, 준호. 난 현우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준호는 그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확실했다. 그런데 현우는 준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우는 준호를 보는 방식이 이상했다. 마치 준호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뭘... 도와주려고?"

"여기서 나가는 거. 폐가에서. 이 악순환에서."

현우가 한 발 다가왔다. 준호는 물러났다. 하지만 뒤에는 소파가 있었다. 준호는 소파에 넘어졌다. 현우는 소파 옆에 앉았다.

"나갈 수 있어?"

"물론이지. 하지만..."

현우가 말을 멈췄다. 준호를 보고 있었다. 그 검은 옷을 보고 있었다. 아니, 검은 옷이 아니었나? 준호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자신도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언제부터? 처음부터? 항상?

"폐가를 떠나면 넌 사라져. 여기만 넌 존재해. 폐가 안에서만 넌 누군가야."

"나가고 싶어. 진짜."

준호가 외쳤다. 목소리가 떨렸다. 손도 떨렸다. 발도 떨렸다. 모든 게 떨렸다.

현우가 웃었다. 그 웃음이 은희의 물소리 웃음과 다를 바 없었다.

"너는 이미 나갔어. 그리고 죽었어. 지금 넌 손님이 되는 중이야."

거울 방의 문이 열렸다. 거울 속에서 또 다른 준호들이 나왔다. 그리고 또 다른 준호. 그리고 또. 그들은 모두 준호를 바라봤다. 그 검은 눈동자로.

준호는 소파에서 튀어나왔다. 현우의 팔을 밀어치며 거실을 향해 달렸다. 발이 흩어진 100만원을 밟았다. 지폐가 공중에서 소용돌이쳤다. 현관 쪽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어야 했다. 밖으로 나가야 했다. 폐가 밖에는 뭔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누군가.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더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아팠다.

"열려, 제발."

중얼거렸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문이 있는데 왜 열리지 않아."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현우였다. 현우의 손이 준호의 어깨에 닿았다. 그 손은 차가웠다. 은희의 손처럼.

"폐가는 나가는 방법을 모르지. 들어오는 방법만 알아."

준호가 돌아섰다. 현우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현우는 준호와 같은 나이였다. 기본적으로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 모양이 조금 달랐다. 코의 각도가 조금 달랐다. 준호는 거울을 보고 있는 건가?

"그 자동차. 은희와 함께였지? 횡단보도에서?"

"그건 은희의 죽음이야. 내 거 아니야."

준호가 반박했다. 하지만 말하는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현우가 손을 뻗었다. 준호의 팔을 잡으려 했다. 준호는 몸을 날렸다. 거실로. 현우를 피해 거실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책장이 있었다. 책장 뒤에 문이 있었다. 어제는 없었는데 오늘은 있었다. 항상 이랬다. 폐가는 준호가 도망칠 때마다 새로운 방을 만들어줬다.

문을 열었다.

계단이 보였다.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어둠이 있었다. 아래에서 뭔가 냄새가 났다. 썩은 냄새. 아니, 오래된 냄새. 오래 묵은 것의 냄새.

"여기가 어디야?"

중얼거렸다. 한 발을 내딛었다. 계단이 삐걱거렸다. 목재 소리였다. 나무가 부식되는 소리. 준호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빛이 줄어들었다.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가지 마. 그게 아니야. 진짜 나가는 길이 아니야."

준호는 내려갔다.

현관에서는 소파가 보이지 않았다. 벽이 더 가까워졌다. 천장이 더 낮아졌다. 계단이 좁아졌다. 준호의 어깨가 벽에 닿았다. 계단 폭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폭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폐가가 준호를 삼키려 하는 것처럼.

준호는 멈췄다.

"이건... 함정이야."

목소리가 작았다.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의 작은 목소리였다.

계단을 올라갔다. 현우가 여전히 거실에 서있었다. 현우의 얼굴이 변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음이 아니었다. 그냥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현우의 입을 위로 잡아당긴 것처럼.

"나 봐. 넌 나갈 수 없어. 모든 길이 여기로 돌아와."

현우가 손을 펼쳤다. 손에는 현금이 들려있었다. 100만원씩 여러 장.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이게 뭐야?"

"넌 지금까지 얼마나 받았니? 한 달? 3개월? 1년? 기억 안 나지? 그래. 시간이 점프하니까. 하지만 돈은 남아. 돈만 남아."

준호의 손이 떨렸다. 돈을 받으려는 손이 아니었다. 떨림 자체였다. 근육의 떨림. 신경의 떨림.

"나 한 명이 아니야. 그거... 너 봤어. 거울에서. 넌 많아. 아주 많아."

현우가 한 발 다가왔다.

"그리고 넌 이제 선택할 수 있어. 손님이 되거나. 아니면 폐가 자체가 되거나."

준호의 귀에서 울음이 들렸다. 귀울림이었나? 아니면 폐가의 울음이었나? 구분이 안 됐다. 모든 소리가 섞여있었다. 은희의 물소리 웃음. 자동차의 타이어음. 자신의 비명. 아버지의 목소리.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목이 메었다. 진짜 목이 메인 건지, 아니면 목이 메인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게 섞여있었다.

"왜? 그건... 넌 이미 죽었으니까. 죽은 건 죽은 대로 처리되는 거지. 죽은 건 손님이 돼야 해."

"규칙?"

"폐가의 규칙. 여긴 폐가야. 그리고 넌 거기 살고 있는 거야. 아니, 갇혀있는 거야. 아니, 이미 죽어있는 거야."

현우가 웃었다. 이번엔 웃음이 맞았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현우에게 웃으라고 지시한 것처럼. 정확히 5초 동안 웃고 멈췄다.

준호는 거실의 다른 쪽으로 달렸다. 창문 쪽이었다. 창문 너머 세상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는 사진처럼. 하지만 사진이라도 밖은 밖이었다. 창문을 깼다. 손가락이 베였다. 유리 조각이 손에 박혔다.

손가락을 들었다. 검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마치 펜으로 그려진 것처럼. 손가락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손목도. 팔도. 피부가 유리처럼 맑아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뼈가 보였다. 그리고 뼈도 사라지고 있었다. 뼈 자리에 뭔가 자라고 있었다. 가느다란 실 같은 것들. 뿌리처럼.

"이건 현실이 아니야."

준호가 외쳤다. 손을 바라봤다.

"맞아. 여긴 현실이 아니야. 넌 현실에 있지 않아. 넌 여기 있어. 그리고 여긴 널 놓아주지 않아."

현우가 준호 뒤에 있었다. 언제 따라온 거지? 준호는 현우가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냥 뒤에 있었다. 현우가 준호의 귀에 속삭였다.

"폐가를 떠나면 넌 사라져. 넌 여기서만 존재해."

준호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했다. 손가락 끝에서 뿌리 같은 것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들이 공중으로 뻗어나갔다. 벽으로. 천장으로. 바닥으로. 마치 준호의 몸이 폐가와 일체화되고 있는 것처럼. 그 뿌리들이 벽을 뚫고 나가고 있었다.

벽 너머로 또 다른 현관이 보였다. 그곳에 누군가 서있었다. 자신과 같은 얼굴로. 손에 100만원을 들고.

"안녕, 준호. 난 현우야."

준호는 알았다. 이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자신이 현우가 되고, 다른 준호가 깨어나고, 또 다른 현우가 나타나고... 그리고 그 모든 죽음이 폐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준호는 선택했다. 의식적으로. 손님이 되기를. 폐가가 되기를 거부하고.

하지만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선택한 지 오래라는 것을. 그 순간부터 자신은 이미 손님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손님이 되는 것도, 폐가가 되는 것도 결국 같은 죽음의 반복이라는 것을.

벽 너머의 거실에서 또 다른 현우가 웃음을 멈추고 다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