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의 거부
절의 돌바닥은 차갑고, 그 위에서 나는 손가락 끝부터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황금빛이 흐르는 손끝. 마크는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나는 그 따뜻함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절 밖에서는 횃불의 불빛이 흔들렸다. 대주교의 신자들. 그들은 나를 악마의 종이라 부르고 있었다. 카이젤의 호위병들도 절을 포위했다. 운명의 신전에서 내려온 체포령 때문이었다. 헬렌은 절의 뒤쪽 문으로 도망칠 길을 준비했고, 셀린은 옆방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척했다.
"루시안." 마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넌 루시안이야. 제발 기억해."
나는 그를 바라봤다. 투명해진 내 눈으로. 그 청년의 얼굴이 흐릿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든 것이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기억을 팔 때마다 내 일부가 사라졌다. 처음엔 슬픔이었다. 그 다음엔 분노였다. 그 다음엔 두려움이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남아 있었다.
절의 창문을 통해 밤하늘이 보였다. 별이 하나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 내 기억이 폭발했다. 헬렌이 주었던 황금색 액체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팔아버린 기억들을 역류시키는 촉매였다. 모든 것이 동시에 돌아왔다.
죽음 직전의 기억.
화염 속에서 카이젤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손이 나를 죽였다. 하지만 내 마지막 감정은 증오가 아니었다. 그것이 지금 깨달아진다. 내가 그에게 느꼈던 것은 **이해**였다. 그도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제국의 체계 속에서, 운명의 무게 속에서.
그리고 **용서**였다.
"마크." 내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내가 누구든... 그건 상관없어. 난 기억해. 한 가지만."
"뭐야?" 마크가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난 루시안이야." 내가 말했다. 손가락이 투명해져도, 감정을 모두 잃어도, 이것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넌 나를 죽였어, 카이젤."
절의 문이 활짝 열렸다. 횃불을 든 신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카이젤이 나타났다. 호위병들을 물리치고 절 안으로 들어온 그.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가 나를 봤을 때, 그의 눈이 흔들렸다.
투명한 나를 봤기 때문이었다.
"루시안?" 그의 목소리는 부서질 듯했다.
나는 마크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투명한 몸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완전히 사라질 듯 차가워졌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카이젤을 향해. 그 황제를 향해.
"난 널 용서해." 내가 말했다. "넌 나를 죽였어. 하지만 넌 선택이 없었어. 체계가, 운명이 널 그렇게 만들었어."
카이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황제의 눈에서. 그가 무릎을 꿇었다. 호위병들이 놀라 움직였고, 신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카이젤은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날 용서하지 말아." 그가 중얼거렸다. "날 용서하지 마, 루시안. 난... 난 널 죽였어."
"그래." 나는 그의 얼굴 가까이 갔다. 투명한 내 손이 그의 뺨을 스쳤다. "그리고 넌 자신을 죽인 체계를 거부해야 해. 그것도 너 자신의 선택으로."
"무슨 말이야?" 카이젤이 내 손을 잡으려 했다. 손이 내 투명한 손을 통과했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야." 내가 말했다. 절의 문에서 횃불이 더 가까워졌다. 신자들의 외침이 커졌다. "기억을 팔 수 있다는 것,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넌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모두가 운명이 절대가 아니라는 증거야."
카이젤이 일어섰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만졌다. 여전히 통과했지만, 그의 의도는 전해졌다. 그는 내 손을 다시 잡으려 시도했고, 이번엔 다르게 움직였다.
"넌 여기 있니?" 그가 물었다.
"여기 있어." 나는 대답했다. "아직."
절의 문이 완전히 부서졌다. 대주교의 신자들이 들어왔다. 횃불과 함께. 헬렌이 뒤쪽 문으로 달아나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젤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거부해야 해." 내가 그에게 말했다. "운명을. 체계를.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카이젤이 물었다.
"함께 살아가는 거야. 다르게."
신자들의 횃불이 절의 천장을 비추기 시작했다. 마크가 내 팔을 잡아 뒤로 당겼다. 카이젤도 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팔을 통과했다. 투명했기 때문이었다.
절의 뒤쪽 어둠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숨겨진 문 너머에서. 나는 그것을 봤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투명한 입술로는.
"가!" 헬렌이 외쳤다. 그녀도 투명했다. 그녀도 기억을 팔아왔으니까.
마크가 나를 안았다. 투명한 나를. 그의 팔은 내 몸을 통과했지만, 그의 몸의 온기는 느껴졌다. 정말로. 차갑게 사라져가는 내 팔에 그의 온기가 전해졌다.
"난 널 기억할게." 마크가 속삭였다. "뭐가 됐든. 투명하든, 없어지든, 난 널 기억할 거야."
셀린이 나타났다. 그녀도 투명했다. 그녀도 기억을 모두 팔아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그것도 통과했지만.
"이쪽이야." 헬렌이 뒤쪽 문으로 달렸다.
우리가 움직이는 순간, 신자들의 횃불이 절의 중앙에 도달했다. 카이젤이 호위병들에게 명령했다. 신자들을 막으라고. 그는 나를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절의 문 앞에서 멈췄다.
"루시안!" 그가 외쳤다.
나는 돌아봤다. 투명한 몸으로. 마지막으로 그를 봤다.
"함께 살아가자." 내가 말했다. "넌 황제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절의 뒤쪽 어둠 속으로 우리가 사라질 때, 대주교 에르난의 목소리가 절 밖에서 들렸다.
"그 여인을 잡아라! 운명의 신을 모욕하는 자를!"
절의 뒤쪽 문이 열렸을 때, 나는 봤다. 절의 뒤쪽 어둠 속에 누가 서 있는지.
라헬 공주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 뒤로는 수십 명의 암살자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카이젤을 제거하기 위해 절의 뒤편에 숨겨두었던 자들이었다.
"재미있는 모임이군요." 라헬이 미소지었다. "우리 오빠를 구하려던 여인? 난 오빠를 죽이려던 여인이에요."
마크가 내 앞으로 나섰다. 헬렌도. 셀린도. 투명한 우리들이 모두 그들 앞에 섰다.
"이제 시작이야." 라헬이 말했다. "진짜 끝을."
칼이 휘날렸다. 절의 뒤쪽 벽이 부서졌다. 절의 모든 출구가 차단되었다.
우리는 포위됐다. 앞엔 대주교의 신자들. 뒤엔 라헬의 암살자들. 그리고 나는 투명해져가고 있었다. 손가락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고, 팔도 반투명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여전했다.
내 손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
마크가 내 손을 다시 잡았다. 투명한 손을. 그의 손이 내 손을 통과했지만, 황금빛은 그의 손가락을 밝혔다.
"뭐가 일어나고 있어?" 마크가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았다. 기억을 팔면서 얻은 이 능력이 깨어나고 있었다. 기억 자체를 물리적 형태로 변환하는 능력. 내가 팔아버린 모든 기억들이 황금빛이 되어 역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절의 공간을 조종하는 힘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절의 벽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서 퍼져 나가는 황금빛이 절의 돌벽 하나둘을 밝혔다. 마치 누군가 잠든 벽을 흔드는 것처럼. 내 손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형상화였다. 내가 팔아버린 모든 기억들이 역류하며 절의 공간 전체를 채워나가는 중이었다.
기억을 팔 때마다 내 몸이 투명해졌다면, 기억이 돌아올 때는 어떻게 될까.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팔아버린 기억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남긴 흔적은 남아 있었다. 내 손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처럼. 그리고 그 흔적들이 물리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절의 공간을 채우며, 절의 벽을 밝히며, 마침내 절 자체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갔다.
"이게... 뭐야?" 마크가 내 손을 더 꽉 쥐었다. 투명한 내 손가락이 그의 손 위에서 황금빛을 그렸다.
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투명하게 흐릿해진 입술로.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내 목소리는 절 전체에 울렸다.
"날 기억해 줄래?"
그 순간, 절의 벽 전체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라헬 공주가 손을 들어 암살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칼들이 한 번에 날아왔다. 마크가 나를 감싸 안았고, 헬렌이 앞으로 나섰다. 투명한 그녀의 몸이 칼을 받아냈다. 그 순간, 헬렌의 팔에서 검은 자국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피가 아니라 기억이었다. 사라져버린 기억의 흔적이었다.
"헬렌!" 셀린이 외쳤다.
절의 천장에서 돌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주교의 신자들이 절을 부수고 있었다. 그들은 내 황금빛을 두려워했다. 운명의 신을 거부하는 증거로 본 그 빛을.
내가 마크의 팔에서 벗어났다. 투명한 몸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라헬 공주를 향해.
"넌 뭔데 여기 있어?" 라헬이 비웃음을 흘렸다. "형이 널 원하고 있다고 생각해? 넌 형의 약점일 뿐이야. 내가 너를 없애면 형은 더 강해져."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다. 투명한 내 손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을 때, 라헬 공주의 눈이 크게 떨어졌다.
"뭐... 뭐야?"
그녀가 본 것은 내 손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팔이었다. 투명해지고 있었다. 내 황금빛이 닿은 곳부터.
기억을 팔아버린 자들이 투명해지듯이, 내 황금빛에 닿은 것들도 그렇게 되고 있었다. 그것은 기억의 형상화가 역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기억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넌 뭘 가지고 있어? 뭘 두려워해?" 나는 물었다. 여전히 입술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절 전체에 울렸다.
라헬 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암살자들이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그들의 칼은 투명한 내 몸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황금빛이 그들을 스쳤다. 내가 닿은 곳마다. 내 황금빛이 닿은 곳마다 그들도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마크가 나의 뒤에서 절규했다.
"루시안! 멈춰! 넌 뭐하는 거야?"
내가 아는 것도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하지만 내 손은 계속 황금빛을 흘렸고, 절의 벽은 계속 그 빛을 받아 타올랐다. 그 빛 속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기억들. 내가 팔아버린 모든 기억들이 절의 공간 속에서 형상을 띠고 있었다.
카이젤이 자신을 죽이기로 결정하던 그 순간의 기억.
그 결정을 내리게 했던 대주교의 목소리.
라헬이 카이젤을 독살하려고 시도했던 기억.
그리고—
내가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정. 그것이 가장 크게 타올랐다.
증오가 아닌 것. 분노가 아닌 것.
용서.
"이해해." 내가 말했다. 이번엔 목소리가 더 분명했다. "나는... 이해해."
절의 벽이 황금빛으로 완전히 밝혀졌을 때, 모든 것이 멈췄다. 라헬 공주의 투명해지던 팔이 멈췄고, 떨어지던 돌들이 공중에서 떠 있었다. 신자들의 횃불도. 칼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내가 돌아섰다. 마크를 향해.
"우리가... 여기서 나가야 할까?" 마크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공포로. 하지만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투명한 내 손을.
"아니야." 나는 말했다. 이번엔 제대로 들렸다. 나의 목소리가. "우리가 여기서... 돌아가야 해."
헬렌이 나를 봤다. 투명한 눈으로. 그리고 천천히 미소지었다.
"기억 없이 다시 살아가는 거구나."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나는 대답했다. "기억과 함께. 하지만 다르게."
절의 벽이 한 번 더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보았다. 나 자신을. 투명한 나 자신이 아니라, 온전한 나 자신을. 손가락도 있고, 팔도 있고, 얼굴도 있는.
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루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루시안이었다.
절의 앞쪽에서 돌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대주교 에르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수백 명의 신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횃불이 들려 있었다.
"여신을 모욕하는 자!" 대주교가 외쳤다. "운명을 거역하는 저주받은 것!"
절의 벽이 황금빛으로 한 번 더 폭발했다. 이번엔 카이젤의 방향에서.
카이젤이 절의 뒷문을 깨뜨리고 나타났다. 호위병들이 그를 따랐다. 그는 내 앞에 섰다. 투명한 나를 보호하듯.
"내가 황제다." 카이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섭게 차분했다. "이 여인은 내가 지킨다."
대주교 에르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폐하께서... 운명의 신을 거역하시다니..."
"운명은 없다." 카이젤이 대답했다. "있는 것은 선택뿐이다. 그리고 나는 선택한다."
그가 투명한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내 손이 그의 손 안에서 색을 띠기 시작했다. 황금빛이 사라지고, 검은 자국들이 나타나고, 마침내 따뜻한 살갗이 돌아왔다.
운명을 거부하는 선택. 그것이 내 몸을 다시 만들고 있었다. 팔아버린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기억들이 남긴 무게와 흔적은 내 몸을 형성했다. 투명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로.
마크가 내 다른 쪽 손을 잡았다. 헬렌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셀린이 내 옆에 섰다.
우리는 포위되어 있었다. 앞으로는 대주교의 수백 명 신자들. 뒤로는 라헬 공주의 암살자들. 위로는 무너지는 절의 천장.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운명의 신이시여." 대주교가 무릎을 꿇었다. 그 뒤로 신자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 반역자들을 심판하소서."
절이 조용해졌다. 조용하고, 황금빛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절의 천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돌은 우리 위에 떨어지지 않았다. 절의 벽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이 그것들을 붙잡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들을 잡아두는 것처럼. 내 손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의 형상화가, 운명을 거부하는 의지가, 절 자체를 움직이고 있었다. 기억으로 만들어진 이 새로운 힘은 물리적 물질까지 조종할 수 있었다. 팔아버린 기억이 남긴 흔적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뜻이었다.
"이게... 뭐야?" 마크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운명의 거부."
그 말과 동시에, 절의 모든 벽이 황금빛으로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