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절의 돌바닥에서 손가락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대주교 에르난의 추종자들이 횃불을 들고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이미 그들의 기억이 손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신앙, 그들의 두려움, 그들이 왜 나를 죽여야 한다고 믿는지. 모든 것이 내 손가락 끝에서 투명하게 빛났다.

"멈춰."

카이젤의 목소리가 절의 어둠을 가르며 들렸다. 그는 호위병들을 이끌고 돌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투명해진 내 몸이 색을 되찾는 것을 느꼈다. 아니—이건 색을 되찾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본다는 것. 카이젤이, 마크가, 헬렌과 셀린이 나를 본다는 것.

대주교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의 흰 예복은 절의 촛불에 번쩍였고, 그의 얼굴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신앙심이 아니라 두려움. 권력의 상실에 대한 공포.

"운명의 신께 거역하는 자여."

대주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대의 존재는 절대 신의 질서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그대가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그대가 운명을 거부했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절의 모든 벽을 울렸다.

마크가 내 옆에서 숨을 고르며 기다렸다. 헬렌은 손가락이 아직도 투명한 채로, 셀린은 팔의 검은 자국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들 모두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대주교의 기억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의 어린 시절, 운명의 신전에서 처음 촛불을 켰던 순간. 그의 어머니가 죽어가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졌다"고 중얼거렸던 그 밤. 그 순간부터 그는 운명을 믿기로 결심했다. 운명을 믿으면 자신의 선택이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놔둔 것도, 이 제국의 비극을 지켜본 것도, 모두 정해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기억 속에는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가 몰랐던 것. 그의 아래 제사장이 독약을 어머니의 약에 탔다는 것. 운명이 아니라 사람의 선택이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 그 진실이 그의 기억 가장 깊은 곳에, 평생을 부정하려 했던 것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기억을 꺼냈다.

대주교의 몸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서 신앙심이 벗겨져나갔고, 남은 것은 오직 한 남자의 절망이었다. 운명이 없다면, 자신의 모든 선택은 죄였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이었다.

"거짓이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울음처럼 들렸다. "거짓이야."

"진실입니다."

나는 그의 기억을 돌려주었다.

손가락이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또 다른 기억을 팔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당신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주교는 무릎을 꿇었다. 횃불을 들었던 추종자들이 하나둘 손을 놨다. 그들도 같은 기억을 본 것처럼 보였다. 운명의 신이 아니라 사람의 선택. 그것이 그들의 세계를 부수는 진실이었다.

라헬 공주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절의 기둥 뒤에 숨어 있었고, 그녀의 암살자들은 이미 사라졌다. 카이젤이 그녀를 찾자 천천히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 아래로 무언가 흔들리고 있었다.

"형이여."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매끄러웠다.

"그대가 제국을 버릴 작정인가? 운명의 신을 거역하고, 기억을 파는 여인을 황제비로 앉히고? 이것이 제국을 위한 선택인가?"

카이젤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 선택이다."

"선택?" 라헬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날카로웠고, 절망적이었다. "형은 항상 그렇게 말했지. 선택한다고. 하지만 형의 선택은 항상 나를 버렸어. 어머니를 버렸고, 나를 버렸고—"

"그렇다."

카이젤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 내가 버린 것들이 있다. 어머니를. 너를. 루시안을. 나는 그 모든 선택에 책임진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다르게 선택하겠다."

라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슬픔처럼 보였다. 권력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형의 사랑을 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카이젤이 손을 내밀었을 때, 라헬은 돌아섰다.

"나가겠습니다. 황제 폐하."

그녀는 절을 떠났다. 호위병들이 그녀를 따랐다. 아무도 막지 않았다. 그것도 선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나와 카이젤뿐이었다.

절의 중앙에서 그는 내 앞에 섰다. 투명해진 내 손이 그의 손을 만났을 때, 색이 돌아왔다. 노을처럼 붉고, 따뜻한 색.

"루시안."

"네."

"기억이 돌아왔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많은 것이 희미했다. 내가 누구였는지, 왜 살아있는지, 어디서 온 것인지.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기억 안 나는 게 많아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당신이 날 보고 있다는 건 느껴져요."

카이젤의 손이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우리 함께 살자. 새로 살자."

그 순간, 절의 천장이 무너졌다.

아니—무너지지 않았다. 황금빛이 절의 모든 돌을 감싸고, 그 빛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내 손가락에서 나오는 황금빛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군가를 지우는 빛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탱하는 빛이었다.

절 안의 모든 것이—대주교의 신앙, 라헬의 욕망, 내 절망—모두 그 빛 속에서 형태를 잃었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어졌다.

마크가 내 등을 밀었다. 그의 손은 이제 투명하지 않았다. 헬렌도, 셀린도. 모두 색을 되찾았다.

"나가. 빨리."

절의 밖으로 나왔을 때, 제국의 밤은 새벽으로 변해 있었다.

---

1년이 지났다.

황궁의 정원에서 나는 카이젤과 함께 걸었다. 벚꽃이 떨어지고 있었고, 그 꽃잎들이 우리의 머리에 소복이 내렸다.

"기억이 더 돌아왔나?"

"음... 조금."

정직했다.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완전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기억이 없어도, 나는 여기 있었고, 누군가가 나를 본다는 것—그것이 충분했다.

제국의 종교 체계는 흔들렸다. 운명의 신전은 여전히 서 있었지만, 대주교 에르난은 물러났다. 그 자리에는 젊은 제사장이 들어왔다. 그는 운명이 아닌 선택에 대해 설교했다.

마크는 황실의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안에 새로운 페이지들이 추가되고 있었다. 기억 거래에 관한 것, 회귀에 관한 것, 운명을 거부한 여인에 관한 것.

셀린은 자신의 기억을 찾기로 결심했다. 고통도 함께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헬렌은 기억 거래 시스템 자체를 개혁했다. 더 이상 감정을 빼앗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이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것도 선택이었다.

"난 너를 잃지 않을 거야."

카이젤이 말했다.

정원의 벤치에 앉아서,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완전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확실했다. 그의 손, 그의 목소리, 그가 나를 보는 방식.

나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슬픔? 기쁨? 용서? 희망?

다 맞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것이 선택된 미소라는 것. 내 선택. 내 삶. 내 순간.

손가락이 투명해지지 않았다. 황금빛이 나오지 않았다.

오직 따뜻한 햇살과 떨어지는 벚꽃과, 함께 손을 맞잡은 두 사람만 있었다.

"우리 함께 살자."

나는 다시 말했다.

"처음부터."

카이젤이 내 손을 꼭 쥐었다. 그 손은 황제의 손이 아니라, 한 남자의 손이었다. 선택하는 손. 약속하는 손. 사랑하는 손.

절의 돌바닥에서 시작된 것이 정원의 벤치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운명을 거부했으니까.

# 본문

절의 돌바닥에서 시작된 것이 정원의 벤치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운명을 거부했으니까.

---

황금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을 때, 절의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대주교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절 주변에 원을 그리듯 서 있었고, 그 사이를 라헬 공주의 암살자들이 누비고 있었다. 횃불의 불빛이 어둠을 찢어냈다. 그들은 절의 붕괴음을 들었을 것이고, 황금빛을 봤을 것이고,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몰려오고 있었다.

내 손에서 흘러나오던 황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손가락이 다시 투명해졌다. 아니—이번에는 다르다는 것을 느껴졌다. 이전의 소실이 아니라, 고갈이었다. 모든 것을 다 썼다는 의미였다.

마크가 내 팔을 잡았다. "나가요. 지금 당장."

헬렌이 절의 뒷벽을 가리켰다. "비밀 통로가 있어. 저 벽 뒤에."

"우리가 어디로?"

"그 다음은 중요하지 않아."

헬렌의 목소리가 차갑기도, 따뜻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투명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이 벽을 뚫고 들어갔다. 실체를 잃은 손이 실체 있는 돌을 움직였다. 이것도 능력인가, 저주인가—구분이 더 이상 의미 없었다.

셀린이 나를 밀었다. 그 손은 따뜻했다. 색을 되찾은 손이었다. "넌 살아야 해. 우리가 아니라 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셀린이 왜 자신의 팔에 상처 같은 자국들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그것은 기억을 팔아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 기억을 되찾으면서 생긴 흔적이었다. 고통의 증거. 살아있었다는 증거.

절의 입구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루시안!"

카이젤이었다.

그는 호위병들을 이끌고 있지 않았다. 혼자였다. 황제의 복장을 벗어던지고, 황금 팔찌도 풀어버린 채로.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지만, 그것도 곧 떨어뜨렸다.

"넌 죽지 않았구나."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너를 죽였는데, 넌 살아있었고, 돌아왔고..."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하지만 카이젤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얼굴만 바라봤다. 투명해져가는 내 얼굴을.

"우리 함께 살자."

내가 말했다.

카이젤의 눈이 흔들렸다.

"새로 살자. 복수 없이. 미워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한가? 내가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내 목소리였고, 내 선택이었다. 기억이 없어도, 감정이 옅어져도, 이것은 선택이었다.

카이젤이 손을 내밀었다. 절의 어둠 속에서 그 손이 내게 닿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나를 잡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멈췄다. 라헬의 암살자들도. 심지어 공기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 손에서 황금빛이 다시 솟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형태였다. 개인의 기억을 파고드는 빛이 아니라, 제국 전체의 기억을 뒤흔드는 빛이었다.

카이젤이 절의 중앙으로 나섰다. 내 손을 잡은 채로.

"운명은 없다."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제국에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말해왔다. 황제도, 신민도, 죽음도.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대주교 에르난이 절 밖에서 비명을 질렀다. "이교도! 운명의 신을 모욕하는 자!"

카이젤이 계속 말했다.

"내 신하 루시안은 죽었다. 하지만 돌아왔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여인이 증명한다. 운명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라헬 공주가 나타났다. 절의 입구에서, 칼을 들고. "황제의 말은 광기다. 이 여인의 마법에 취한 것이다."

"마법이 아니다."

카이젤이 내 손을 들어올렸다. 황금빛이 절 전체를 비추었다.

"선택이다."

그 순간, 절의 천장이 무너졌다. 정말로.

하지만 무너지면서 빛이 나왔다. 내 손가락에서 나오는 황금빛이 돌들을 붙잡았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절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시 지어졌다. 하지만 이전의 절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그 안에 대주교는 없었다. 라헬도 없었다. 그들은 황금빛 속에서 뭔가를 봤고, 그것이 두려워 달아났다.

헬렌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가."

"넌?"

"나는 여기 남아."

그녀의 투명한 손이 절의 벽을 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를 기억하기 시작한 것처럼.

"너는 기억하니?"

내가 물었다.

헬렌이 미소 지었다. "기억해도, 안 해도 상관없어. 나는 여기 있으니까."

마크가 나를 밀었다. 비밀 통로로. 셀린이 따라왔다. 절이 뒤에서 황금빛으로 다시 폭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괴의 빛이 아니었다. 재생의 빛이었다.

---

절에서 나온 우리는 제국의 밤거리를 헤맸다.

마크는 길을 알고 있었다. 황실 기록 담당자로서, 그는 황궁으로 가는 모든 비밀 경로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갔다. 셀린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카이젤이 우리를 따라왔다. 절에서 나온 후, 그는 호위병들을 모두 물리쳤다. 황제의 권력으로 명령했다. 그리고 황궁으로 향했다. 우리와 함께.

"넌 왜?"

내가 물었다.

"왜 날 따라와?"

카이젤이 내 손을 잡았다. "왜냐고? 넌 날 용서했으니까."

"기억이 없어도?"

"기억이 없기 때문에. 너는 기억 없이도 날 용서했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라는 뜻이다."

황궁의 문이 열렸을 때, 제국의 귀족들과 관리들이 모두 나왔다. 카이젤이 황제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카이젤이 선언했다.

"운명의 신전은 폐지된다. 그 자리에 새로운 신전이 서게 될 것이다. 선택의 신전이."

"황제께서 미쳤습니다!"

"아니다. 이제 깼다."

그리고 그는 나를 모두에게 보였다.

"이분이 루시안이다. 내가 전생에서 죽인 여인이다. 그리고 돌아왔다. 운명을 거부하고 돌아왔다. 이것이 증명이다. 운명은 없다. 선택만 있다."

제국이 떠들썩했다. 일부는 황제를 따랐다. 일부는 대주교를 따라 절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카이젤의 손을 잡고 황궁의 뒷정원으로 갔다.

---

1년이 지났다.

황궁의 정원에서 나는 카이젤과 함께 걸었다. 벚꽃이 떨어지고 있었고, 그 꽃잎들이 우리의 머리에 소복이 내렸다.

"기억이 더 돌아왔나?"

"음... 조금."

내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기억이 없는 것도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 있었고, 누군가가 나를 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종교 체계는 흔들렸다. 운명의 신전은 여전히 서 있었지만, 대주교 에르난은 물러났다. 그 자리에는 젊은 제사장이 들어왔다. 그는 운명이 아닌 선택에 대해 설교했다. 여전히 신앙은 있었지만, 그것이 자유를 빼앗지는 않았다.

마크는 황실의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안에 새로운 페이지들이 추가되고 있었다. 기억 거래에 관한 것, 회귀에 관한 것, 운명을 거부한 여인에 관한 것. 그는 여전히 날 본다. 색을 되찾은 눈으로.

셀린은 자신의 기억을 찾기로 결심했다. 고통도 함께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말했다. "기억이 돌아오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거야."

헬렌은 기억 거래 시스템 자체를 개혁했다. 더 이상 감정을 빼앗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선택이었다. 그녀는 절에서 색을 되찾은 후, 자신도 누군가를 잃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라헬 공주는 도망쳤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도 선택을 했으니까.

카이젤이 내 손을 잡았다. 정원의 벤치에 앉아서.

"난 너를 잃지 않을 거야."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움이 아니라 다짐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완전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확실했다. 그의 손, 그의 목소리, 그가 나를 보는 방식. 그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슬픔이 담겨 있었다. 기억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 내가 누구였는지 완전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슬픔.

기쁨도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것이라는 기쁨. 내가 선택했다는 기쁨.

용서도 담겨 있었다. 카이젤을 용서하는 것.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희망이 담겨 있었다. 내일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함께 살아갈 내일이.

손가락이 투명해지지 않았다. 황금빛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따뜻한 햇살과 떨어지는 벚꽃과, 함께 손을 맞잡은 두 사람만 있었다.

"우리 함께 살자."

내가 말했다.

"처음부터."

카이젤이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그 손은 황제의 손이 아니라, 한 남자의 손이었다. 선택하는 손. 약속하는 손. 사랑하는 손.

정원의 벤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운명을 거부했으니까.

손을 맞잡은 채, 우리는 정원을 걸었다. 벚꽃 떨어지는 길을 따라. 제국의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우리의 그림자는 하나로 겹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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