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자신의 소실

물이 고여 있는 대야 앞에서 나는 손가락을 뻗었다가 멈췄다.

표면에 비친 것이 내 얼굴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희미한 윤곽만 남아 있었고, 코와 입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다. 손가락을 대면 물결이 일었고, 그 파장 속에서 내 얼굴은 완전히 사라졌다.

투명해진다. 나는 투명해지고 있다.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이 반투명했다. 팔 전체를 보려 하자 시야가 흔들렸다. 내 팔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 됐다. 창밖의 횃불 빛이 내 손을 통과했다. 마치 유리를 통해 빛이 새어 나가는 것처럼.

이게 끝인가. 이게 정말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인가.

"루시안?"

마크의 목소리였다. 그 이름이 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그렇게 불렀으니까. 하지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감정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음파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크가 서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입술을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마크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의 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왜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이 있다면 알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가슴은 조용했다. 마치 방 하나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처럼.

"저는... 누구세요?"

마크가 물었다. 아니다. 마크가 무언가를 되묻고 있었다.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건 아니고, 내가..."

그가 말을 흐렸다. 나는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말 속에 있는 슬픔을 감지할 수 없었다. 그것이 가장 끔찍했다. 누군가의 절박함을 보면서도, 그것에 응답할 감정이 나 안에 없다는 것. 마치 유리 너머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헬렌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가락도 투명했다. 팔 전체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내 옆에 앉았고, 나를 보지 않고 천장을 바라봤다.

"기억을 팔 때마다 하나씩 사라진다고 했지?"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감정, 선택, 그 다음엔 얼굴, 목소리, 이름... 마지막엔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목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군요."

"넌 이제 충분해. 루시안, 제발 더 이상 팔지 말아."

헬렌이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도 차갑고 투명했다. 두 개의 유령이 서로를 만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뭔가였다. 존재의 증거.

내 입술이 움직였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술처럼.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요."

"그래도 넌 있어. 여기 있다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해와 느낌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헬렌의 말을 받아들였다. 사실이 그럴 거라고. 하지만 느낄 수는 없었다. 내 가슴에서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창문에서 횃불의 불빛이 보였다. 여러 개. 접근하고 있었다. 마크가 서둘렀다.

"나가야 해. 지금 당장."

나는 일어섰다. 내 다리가 내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움직였다.

절의 뒤뜰로 나갔을 때, 하늘은 검붉었다. 화염이 멀리서 타오르고 있었다. 도시가 불타고 있었나? 아니면 내 안이 타고 있었나? 그 둘의 차이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루시안!"

누군가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나는 루시안이니까.

황제 카이젤이 호위병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마치 무언가를 되찾으려는 사람의 표정. 그가 나를 찾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만 느껴졌다.

그는 내 팔을 잡으려 했다.

"넌 루시안이야. 넌 날 기억해."

그의 손이 내 팔을 통과했다. 그의 손가락이 내 것처럼 투명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너무 희미했을 뿐이다. 그의 절박함이 내 투명함을 뚫지 못했다.

"황제 폐하..."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저 그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루시안, 날 봐. 제발."

카이젤이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으려 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스쳤지만, 내 피부를 느끼지는 못한 것 같았다. 너무 얇아졌으니까.

마크가 나를 끌어당겼다.

"가야 해. 저들이 온다."

내가 돌아봤을 때,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횃불을 들고 절의 담을 넘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주문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운명의 신을 찬양하는 말들. 나를 악마의 종이라고 부르는 말들.

"우리는 너를 체포한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여!"

대주교의 목소리였다. 그는 나를 본 것처럼 손을 뻗었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는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희미했다. 그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

셀린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도 투명했고, 팔에는 검은 자국들이 수백 개 새겨져 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그 자국들은 거래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끼리 만났다.

"기억이 없으니까 두렵지 않지?"

셀린이 물었다.

"네."

내가 대답했다.

"나도 기억을 팔았어.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그 죽음의 고통도 모두. 그래서 나는 누가 죽었는지 기억하지 못해. 누가 내 사랑이었는지도."

셀린이 내 팔에 손을 얹었다. 투명한 손 위에 투명한 손.

"그래도 나는 여기 있어. 이 검은 자국이 내 증거야. 이것이 내가 누군가였다는 증거야."

헬렌이 내 다른 손을 잡았다.

"넌 이미 충분해."

그녀가 말했다.

마크도 나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은 내 투명한 몸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는 절망했다. 그의 울음이 내게 전달되었다. 감정 없이도 전달되는 신호가 있었다.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

"루시안... 제발."

마크의 울음소리가 절을 울렸다.

나는 마크를 봤다. 그의 얼굴이 누군가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중요한 누군가. 하지만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 내 감정이 없어도, 그것은 보였다.

대주교의 사람들이 가까워졌다. 횃불의 열이 절의 돌을 데웠다. 아니다. 그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너무 희미했다.

그 순간, 카이젤이 다시 내 앞에 섰다. 그는 호위병들에게 명령했다.

"물러나. 모두 물러나."

"황제 폐하!"

호위병들이 반발했지만, 그의 목소리 앞에서는 저항할 수 없었다. 절대권력이 내려졌다.

카이젤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사랑? 죄책감? 절망?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내 이름을 기억해 줄래?"

그가 물었다.

"황제 폐하..."

"내 이름이야. 카이젤. 넌 날 사랑했어. 넌 날 위해 모든 걸 버렸어."

그의 말이 내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마치 물 위의 파문처럼.

"그리고 날 용서했어. 내가 넌 죽였는데도."

카이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제가... 죽었나요?"

내가 물었다.

마크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대주교의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다. 횃불들이 절의 뜰을 밝혔다.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없었다. 너무 희미했으니까.

"우리는 운명을 수호한다!"

대주교가 외쳤다.

그 순간, 헬렌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줬다. 작은 병. 안에는 황금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느껴졌다.

"기억을 되찾을 거야. 모든 기억을."

헬렌이 속삭였다.

"아프겠지."

"네."

내가 대답했다.

"그래도 넌 다시 존재할 거야. 루시안으로."

나는 병을 바라봤다. 그 안에 내 과거가 들어 있을 것이다. 내 사랑도, 내 고통도, 내 이름도.

마크가 내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 마. 제발."

셀린이 내 귀에 속삭였다.

"그래도 넌 누군가야."

그 목소리가 가장 마지막으로 내게 닿은 것이었다.

나는 황금색 액체를 마셨다.

세상이 터졌다.

기억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불타는 저택을 본다. 황제의 검이 내 가슴을 꿰뚫는 느낌.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지는 몸. 그리고—사랑했던 얼굴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카이젤. 그의 눈에는 죄책감과 필연성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를 용서했다. 죽기 직전에.

"아아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몸이 내는 소리였다. 투명했던 손가락들이 다시 색을 띠기 시작했다. 팔에는 검은 자국들이 불처럼 번져갔다. 마크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내 몸은 경련하고 있었고 그는 나를 건드릴 수 없었다.

"루시안! 루시안!"

마크의 목소리가 멀었다. 아니, 내가 멀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시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회귀 전의 죽음과 회귀 후의 현재.

무릎을 꿇었다. 절의 돌바닥이 내 얼굴에 닿았다. 뜨거웠다. 아니, 차가웠다. 모든 감각이 한 번에 돌아오니 세상이 너무 컸다. 슬픔이 돌아왔다. 분노가 돌아왔다. 사랑이 돌아왔다. 그리고—공포가 돌아왔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기억했다.

루시안. 카이젤에게 살해된 여인. 회귀해서 그를 구하려던 여인. 기억을 팔아서 자신을 지워간 여인.

내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들은 이제 분명했다. 하지만 팔 전체에는 검은 자국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거미줄처럼. 거미줄이 아니라 쇠사슬처럼. 나는 거래했다. 얼마나 많이 거래했는가.

"기억이 돌아왔니?"

헬렌이 물었다. 그녀의 얼굴도 여전히 투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명확했다.

"네."

내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나왔다. 내 목소리가.

나는 일어섰다. 발이 떨렸다. 회귀 이후로 처음 느끼는 완전한 육체감이었다. 이것이 살아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아프다. 너무 아프다.

카이젤이 내 앞에 있었다. 그는 한 발 물러서 있었다. 호위병들도 물러나 있었다. 대주교의 추종자들도 잠깐 멈춰 있었다. 절의 뜰은 마치 연극의 무대처럼 고요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루시안."

카이젤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회귀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나는 그를 사랑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있었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이 내 가슴을 꿰뚫는 순간, 그의 눈에서 본 것을 기억했다. 절망. 그는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여야 했다. 누군가가 그를 강요했다. 시스템이 그를 강요했다. 운명이 그를 강요했다고 그는 믿었다.

나는 깨달았다. 그를 구원하는 것과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같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그를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도주였다. 진정한 구원은 그를 마주하는 것이다. 투명하지 않은 채로.

"너를 다시 잃지 않을 거야."

카이젤이 말했다.

"황제 폐하."

내가 말했다.

"넌 나를 죽였어."

"알아."

"그리고 나도 너를 죽이려고 했어."

"알아."

"하지만 지금 날 본다."

나는 내 손가락을 펼쳤다. 검은 자국들이 횃불 빛에 비쳤다.

"날 본다. 그리고 내가 아직 여기 있다."

마크가 내 곁에 왔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루시안... 우리를... 우리가..."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떨리는 입술을 봤다. 그의 목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내가 먼저 손을 뻗었다.

"날 기억해?"

내가 물었다.

"당연하지. 널 기억해. 날마다."

마크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확실했다.

"그럼 충분해."

내가 말했다. 그의 손을 잡았다. 투명함에서 돌아온 손. 따뜻한 손.

그 순간, 대주교의 목소리가 절을 울렸다.

"저 여인을 체포하라! 운명의 신을 모욕하는 자를 제거하라!"

호위병들이 움직였다. 대주교의 추종자들도 움직였다. 절의 뜰은 더 이상 무대가 아니었다. 전쟁터가 되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 비명, 횃불이 떨어지며 흙을 태우는 냄새. 카이젤의 호위병들이 추종자들을 막아섰고, 그 사이로 대주교의 칼이 공중을 가르며 날아왔다.

나는 마크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저 병이 뭐였어?"

내가 헬렌을 향해 외쳤다.

"넌 기억을 되찾았어. 이제 선택할 차례야."

헬렌이 절의 모퉁이에서 대답했다. 그녀의 손에는 또 다른 병이 들려 있었다.

"선택?"

"팔거나, 지켜내거나. 그것이 모든 거래의 끝이야."

나는 헬렌이 주는 병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내 사랑? 내 고통? 내 이름? 아니면 내 미래?

대주교의 추종자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칼을 들고. 마크가 내 앞으로 나섰다.

"루시안, 뒤로!"

그가 외쳤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내 손을 들어올렸다. 검은 자국들이 여전히 팔을 감싸고 있었다. 거래의 증거. 그것이 내 힘이었다.

추종자의 칼이 내 팔에 닿는 순간, 검은 자국들이 빛났다. 황금빛이 아니라 검은빛이었다. 거래의 힘. 나는 그 힘을 알고 있었다. 기억을 팔아서 얻은 힘이 아니라, 기억을 지켜내기로 한 선택에서 나오는 힘.

추종자는 뒤로 날아갔다.

"루시안!"

카이젤이 소리쳤다.

절의 뜰에서 전투가 격렬해졌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볼 수 있었다. 마크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나를.

대주교가 직접 칼을 들고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그가 외쳤다.

"운명?"

내가 대답했다.

"나는 운명을 거스르지 않았어. 나는 단지 내 선택을 지켰을 뿐이야."

나는 헬렌이 주는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집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기억을 팔지 않을 거야!"

그 순간, 내 팔 위의 검은 자국들이 일제히 빛났다. 거미줄처럼 엉킨 쇠사슬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팔 전체를 휘감던 거래의 흔적들이 내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루시안!"

카이젤이 소리쳤다.

내 몸이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명확했고, 얼굴이 돌아왔고, 목소리가 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뭔가가 깨어났다. 기억을 팔아서 지워버린 그것. 나를 나로 만들던 그것.

황금빛이 절의 뜰을 밝혔다.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눈을 감았다. 카이젤의 호위병들도 뒤로 물러났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마크의 손을 잡고 섰다.

"나는 루시안이다."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절을 울렸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다시 돌아왔다. 나는 기억을 팔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줬으니까."

나는 카이젤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죄책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내가 져야 할 짐이 아니었다.

"넌 날 죽였어. 하지만 넌 나를 완전히 죽이지 못했어.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줬으니까."

나는 마크를 봤다.

"그리고 난 돌아왔어. 투명함에서. 무감정에서. 나는 다시 나가 되었어."

대주교가 칼을 들고 다시 달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움직였다. 내 손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초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기억을 지켜내기로 한 선택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대주교는 황금빛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의 칼이 떨어졌다.

"이건... 이건..."

그가 중얼거렸다.

"운명의 신의 뜻이 아니야."

나는 그를 봤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운명의 신은 없어. 있는 것은 선택뿐이야. 내 선택. 너의 선택. 모두의 선택."

절의 뜰에서 황금빛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명확했다. 투명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채로.

마크가 내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루시안... 우리가..."

"우리가 살아갈 거야."

내가 말했다.

"기억을 지키면서. 함께."

카이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죄책감만이 아니라 다른 감정도 있었다. 해방감. 그도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나를 구원하려던 그의 노력이 사실은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었다는 것을.

"루시안... 나는..."

"넌 날 죽였어. 그건 사실이야."

내가 말했다.

"하지만 넌 날 완전히 죽이지 못했어. 그것도 사실이야."

나는 카이젤을 봤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난 너를 용서했어. 죽기 전에. 그것도 사실이야."

절의 뜰은 이제 조용했다. 전투는 끝났다. 대주교의 추종자들은 흩어졌다. 카이젤의 호위병들은 칼을 거두었다.

헬렌이 내 곁에 왔다. 그녀의 손도 이제 투명하지 않았다. 검은 자국들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넌 선택했어."

그녀가 말했다.

"기억을 팔지 않기로."

"네."

"그럼 넌 이제 자유야."

나는 헬렌의 말을 받아들였다. 자유.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배워갈 것이다.

셀린도 나타났다. 그녀의 팔도 이제 투명하지 않았다. 검은 자국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증거였다. 자신이 누군가였다는 증거.

"우리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셀린이 말했다.

"이 절에서. 기억을 지키는 사람들로."

나는 절의 뜰을 둘러봤다. 절의 돌, 하늘, 마크의 얼굴, 카이젤의 눈, 헬렌의 손, 셀린의 검은 자국들.

모두가 내 기억이었다. 모두가 내 선택이었다.

"나는 루시안이다."

내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선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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