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마크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그는 루시안의 손을 잡고 있었고, 투명해진 손가락들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였다. 마치 유리잔처럼.
"떨어지지 마. 제발."
마크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루시안은 그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자신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랐다. 감정이 없으면 얼굴도 흐릿해 보인다. 그런 것 같았다.
"떨어질 리 없지."
루시안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자신이 이미 떨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부터, 손목부터, 이제는 팔 전체로 번져가는 투명함.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변화가 아니었다. 감정이 빠져나가는 과정이었다.
"루시안."
마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절박함이 그의 목소리에 떨렸다.
"나 여기 있어."
루시안이 대답했지만, 자신이 정말 여기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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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중개소의 지하실은 화염에 휩싸였고, 그들은 헬렌이 준 지하 통로를 통해 탈출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도시 외곽의 낡은 창고였다. 벽은 곰팡이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창문은 대부분 깨져 있었다. 마크는 루시안이 추위에 떨까봐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었지만, 루시안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감정이 희미해질수록, 신체 감각도 함께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마크가 즉시 루시안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고, 그녀는 숨을 죽였다. 아니, 숨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죽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창고의 문이 열렸다.
헬렌이었다.
"여긴 위험해. 나를 따라와."
헬렌의 얼굴은 창백했다. 기억 중개소의 화재로 그곳의 모든 기록이 타버렸을 것이다. 그녀의 제국이 한 순간에 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차갑고 명료했다.
"헬렌, 넌—"
마크가 말을 꺼냈다.
"의심하지 마. 나도 루시안처럼 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온 거야."
헬렌이 로프를 던졌다. 루시안을 옮길 수 있는 거리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밤새 이동했다. 헬렌이 이끄는 길은 도시의 지도에는 없는 곳들이었다. 좁은 골목, 버려진 건물의 지하실, 물이 고인 수로. 루시안은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 움직임이 자신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새벽이 되었을 때, 그들은 낡은 절의 창고에 도착했다.
헬렌이 문을 닫았다. 마크는 여전히 루시안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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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대주교가 뭐 하는 놈인지 알아?"
헬렌이 물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모르지."
루시안이 대답했다.
"운명의 신을 숭배하는 놈들이 있어. 대주교 에르난과 그 추종자들."
헬렌이 창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예리했다.
"그들은 모든 게 정해져 있다고 믿어. 죽음도, 삶도, 심지어 네가 여기서 죽을 것도. 하지만 넌 달랐어. 죽음을 되돌렸고, 기억을 조작했고, 미래를 바꾸려고 했어. 그건 그들의 신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증거야."
헬렌이 마크를 바라봤다.
"대주교는 너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 운명을 거부한 증거를 없애야 한다고."
"내가... 뭘 했다고?"
루시안이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헬렌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라헬 공주는 카이젤을 제거하려고 해. 너 때문에 그 황제가 약해졌거든. 대주교와 손을 잡고 말이야."
마크가 루시안의 손을 놓고, 헬렌에게 걸어갔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뭘 하려는 거야?"
헬렌이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루시안은 그제야 깨달았다. 헬렌의 손가락도 투명했다. 손목 위로는 검은 자국들이 팔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헬렌도 기억을 팔았다. 많이.
마크가 헬렌의 팔을 잡았다.
"넌 언제부터 알았어?"
"어제부터. 내 사람들을 통해서."
헬렌이 창밖을 내다봤다. 아직 어두웠다.
"대주교는 오늘 밤 카이젤을 암살하려고 해. 라헬이 황제를 절궁 뒷뜰로 유인할 거야. 거기서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기다리고 있어. 황제는 죽을 거고, 라헬은 권력을 장악할 거야."
헬렌이 마크를 바라봤다.
"그리고 루시안도 제거할 거야. 루시안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니까."
"왜? 루시안이 뭘 잘못했는데?"
마크가 물었다.
"루시안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하지만 루시안은 운명을 거부한 증거야. 대주교는 그걸 없애고 싶어. 완전히."
헬렌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도시를 바라봤다.
"라헬은 루시안을 제거해서 카이젤을 완전히 약하게 만들려고 해. 황제가 루시안을 잃으면, 판단력을 잃을 거야. 그러면 라헬이 쉽게 지배할 수 있어."
마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우리가 뭘 해야 해?"
"루시안을 숨기거나..."
헬렌이 말을 멈추고 마크를 바라봤다.
"루시안이 직접 나서야 해. 카이젤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고, 황제를 유인해야 해. 그럼 대주교와 라헬의 계획이 틀어질 거야."
"그럼 루시안이 잡혀갈 거잖아."
마크가 외쳤다.
"맞아. 그래서 선택이야. 루시안은 선택해야 해."
헬렌이 창고의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루시안이 앉아 있었다. 투명한 팔을 가슴에 모으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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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다.
루시안은 헬렌이 가져온 종이와 펜을 들었다. 카이젤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크가 그 곁에 앉았다.
"뭘 쓸 거야?"
"모르겠어."
루시안이 대답했다.
"내가 뭘 느껴야 하는지, 뭘 말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펜을 들었다. 손가락이 투명해서 펜을 쥐기가 어려웠다. 마치 공기를 쥐려고 하는 것 같았다. 펜은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시 집었다. 또 떨어졌다. 루시안은 계속 시도했다. 손가락이 공기처럼 느껴졌지만, 마침내 펜을 쥐었다.
*카이젤에게,*
글씨가 나왔다. 하지만 그 글씨는 흐릿했다. 마치 물속에서 본 것처럼. 루시안은 자신의 필체를 인식할 수 없었다. 이것이 자신의 글씨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나는 너를 죽인 그 황제에게 죽었던 여인이다. 하지만 내가 돌아왔다.*
루시안이 멈추고 다시 읽었다. 글자들이 차갑고 거리감 있게 보였다. 이것은 자신이 쓴 글이 맞지만, 자신의 마음이 아니었다.
펜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떨렸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루시안은 자신에게 물었다. 용서? 구원? 그런 건 아니었다. 자신은 카이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를 구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려는 건가?
손가락이 더 투명해졌다. 손목 위로 검은 자국이 팔 전체로 번져가고 있었다. 감정이 빠져나갈수록, 자신도 함께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아주 작은 것. 마치 깨진 종처럼 울리는 무언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것이 남아 있다는 것도.*
루시안은 펜을 다시 집었다.
마크가 루시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넌 여전히 그 황제를 사랑하니?"
물음이 떨어졌다. 마크의 목소리에는 뭔가가 들렸다. 두려움? 절망? 루시안은 그것을 명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감정을 잃어가니까.
루시안은 펜을 내려놨다. 투명한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떨렸다.
"사랑을 느껴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냥... 공허해. 모든 게 공허해."
루시안이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이 거의 완전히 투명해져 있었다. 손목 위로는 팔 전체를 뒤덮는 검은 자국들이 있었다. 마치 불에 탄 것처럼.
"그럼 멈춰. 제발. 이 모든 걸 멈춰."
마크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못 해. 멈출 수 없어."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왜? 왜 그래?"
마크의 손이 루시안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
루시안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투명해지는 손가락들. 그것은 단순한 신체의 소실이 아니었다. 감정이 빠져나가는 증거였다. 사랑도, 분노도, 슬픔도 모두.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하나의 감정만은 남아 있었다.
*책임.*
"누군가는 이 모든 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
루시안이 대답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카이젤을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죽음을 거부했던 그 선택이, 이제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루시안이 펜을 다시 집었다. 손가락이 투명해서 펜을 쥐기가 어려웠지만, 그녀는 계속 썼다.
*너를 용서하려는 선택. 너를 구원하려는 선택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선택이다.*
글씨가 나왔다. 여전히 흐릿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자신의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죽음도, 내 돌아옴도, 그리고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받아들여야 해.*
펜을 놨다.
마크가 루시안의 손을 잡았다.
"뭘 하려고 하는 거야?"
"나가."
루시안이 대답했다.
"나가서 그들을 만나."
"그럼 죽어."
마크가 외쳤다.
"알아."
루시안이 일어섰다. 투명한 팔이 몸 옆에서 떨렸다. 손가락들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움직임도 없이.
창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멀었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졌다. 말발굽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횃불의 빛이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
마크가 창문으로 달려갔다.
"황제가 왔어. 혼자가 아니야. 호위병들이... 많아."
동시에, 다른 쪽에서 또 다른 횃불이 나타났다.
"대주교의 추종자들이야."
헬렌이 창문의 다른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기... 라헬의 근위병들도 오고 있어."
세 개의 길이 창고를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카이젤의 호위병들이 오는 길,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드리운 횃불, 그리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라헬의 근위병들.
루시안은 창고의 중앙에 섰다. 투명한 팔을 들어 올렸다. 어느 방향으로도 뻗어질 수 없었다. 마치 신체가 마비된 것처럼.
창밖에서 카이젤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안!"
황제가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그 순간, 루시안의 안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깨진 종처럼. 사랑도 미움도 아닌, 더 단순하고 강렬한 것.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존재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헬렌."
루시안이 말했다.
"이 편지를 황제에게 전해줘.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
마크가 루시안의 팔을 잡았다.
"뭘 하려고 하는 거야?"
"나가."
루시안이 대답했다.
"나가서 그들을 만나."
"그럼 죽어."
마크가 외쳤다.
"알아."
루시안이 창고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투명한 팔이 흔들렸다. 손가락들이 공중에서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헬렌이 루시안의 길을 막았다.
"이건 자살이야."
"아니야."
루시안이 대답했다.
"이건 선택이야. 내 선택. 운명을 거부하는 선택."
그리고 루시안은 창고의 문을 열었다.
밤하늘이 그녀를 맞이했다. 세 개의 길이 교차하는 그곳으로, 루시안은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