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의 경계
화염이 꺼진 지 반나절이 지났다.
기억 중개소의 후미진 방에서 루시안은 손거울을 들었다. 표면이 흐릿해서 얼굴이 제대로 비치지 않았다. 손가락을 들어 확인했다. 새끼손가락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약지는 손등이 보일 정도로 반투명했다. 중지까지 이미 변해 있었다.
투명해진 손가락들. 루시안은 그것을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 나를 천천히 지워내고 있는 것처럼. 공포가 목을 조였다. 하지만 그 공포마저도 멀게 느껴졌다. 감정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또 팔아야 해."
입술을 깨물었다.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어제 밤 지하실에서 화염을 피하며 누군가의 기억을 추출했다. 라헬 공주의 것이었나? 아니면 대주교 추종자들의 것이었나?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카이젤을 만나기 위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뿐이었다.
손거울을 내려놨다.
거울 속 얼굴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뺨의 윤곽이 점점 옅어지고,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안의 손이 떨렸다.
"안 돼. 아직…"
중얼거렸다. 자신을 다독이려는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미 감정이 없었다. 공포도 없었다. 있어야 할 공포도, 있어야 할 절박함도 없었다. 단지 기계적인 인식만 있었다. 루시안이 소멸 중이라는 인식. 그것뿐이었다.
문이 열렸다.
"루시안."
마크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손에는 번들거리는 약병이 들려 있었다.
"또 이걸?"
루시안이 물었다.
"헬렌이 줬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마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희미한 등불에 비쳤다. 눈빛에는 뭔가 있었다. 루시안이 그것을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름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온몸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마크."
루시안이 말했다.
"내 손가락 봤어?"
그녀의 손을 들어 보였다. 마크의 호흡이 멈췄다.
"이전보다 더 투명해졌어. 어제밤에도 기억을 팔았거든. 그러면 이렇게 돼."
루시안이 손을 돌려보며 말했다.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이거 다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거야. 그게 규칙이야."
"그럼 약을 마셔. 지금 바로."
마크가 약병을 밀어 넣었다. 루시안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액체가 흔들렸다. 황금색이었다. 마치 액화된 빛 같았다.
"이걸 마시면?"
"기억이 돌아와. 그러면 몸도 다시 색이 돌아온다고."
"헬렌이 이 약을 왜 지금 줬어? 이전에는 없었잖아."
루시안이 약병을 들었다. 투명해진 손가락으로. 유리병이 손가락을 통과해 보일 정도였다.
마크가 오래 침묵했다.
"그녀도 선택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하지만 이제는... 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태야."
"그리고? 대가는?"
루시안이 물었다.
"고통도 돌아온다. 기억과 함께. 하지만 그것이 너를 다시 만든다."
"그것만?"
루시안의 목소리에 의심이 묻어났다. 헬렌이 그렇게 간단하게 약을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헬렌은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런 약은... 대가가 있는 법이야. 기억을 되찾는 것도, 감정을 되찾는 것도 모두."
루시안은 약병을 들었다. 황금색 액체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크."
"응?"
"내가 기억을 마시면… 나는 누가 되는 거야? 기억이 나를 만드는 건가, 아니면 감정이?"
마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루시안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약을 마셨다.
황금색 액체가 목을 통해 흘러내렸다. 순간, 세상이 타올랐다.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저택이 불타던 밤. 카이젤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던 순간. 그 앞의 수많은 밤들. 카이젤과 함께한 시간들. 그의 입술.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 모든 것이 돌아왔다.
그리고 고통도.
루시안의 팔에 검은 자국들이 나타났다. 피부가 타는 듯한 느낌. 아니, 더 깊었다. 영혼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녀의 몸이 경련했다.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처음으로 이 모든 과정 동안 순수한 감정을 드러냈다. 공포. 절망. 그리고 그 아래 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다시 깨어났다.
마크가 그녀를 잡았다.
"견뎌. 견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안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손가락들이 다시 색을 띠기 시작했다. 투명함이 빠져나가고 살의 따뜻함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의미했다.
"나 왜… 이러는 거야?"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이 기억들 때문에 죽었잖아. 이 감정들 때문에…"
"넌 여전히 여기 있어."
마크가 말했다. 그의 팔이 루시안을 더 단단히 안았다. 루시안의 투명한 손가락들이 마크의 팔에 닿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감쌌다. 마치 그것으로 루시안의 존재를 붙잡을 수라도 있듯이. 따뜻한 온기가 투명한 손가락들을 통해 전해졌다.
"넌 사라지지 않았어."
루시안은 그 온기에 집중했다. 마크의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감각. 그것이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었다.
거울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제 다시 보였다. 뺨도, 눈도 모두. 하지만 피부 곳곳에는 검은 자국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기억을 팔 때마다 조금씩 탈진해가는 과정의 흔적들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여럿이었다.
"가야 해."
헬렌의 목소리가 복도 어딘가에서 들렸다.
"대주교 측에서 나왔어. 루시안을 체포하려는 거야."
마크가 루시안의 손을 잡았다.
"밖으로."
그들은 뒷문으로 향했다. 루시안의 팔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검은 자국들이 피부에 선명했다. 기억의 대가. 감정의 대가.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 정확히 알았다.
뒷문을 열었을 때, 횃불이 밝혔다.
대주교의 사람들이 골목을 포위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 기억을 파는 자를 체포한다!"
누군가 외쳤다.
루시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 황제의 명령? 카이젤이 이것을 명령한 건가? 아니면 누군가 카이젤의 이름을 빌려 명령한 건가?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마크가 반대 방향으로 루시안을 이끌었다. 그들은 지붕으로 향했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따라왔다. 점점 가까워졌다. 루시안은 자신의 팔을 봤다. 검은 자국들이 밝혀 보이는 불빛 속에서 더욱 선명해 보였다.
"마크…"
"끝까지 가."
그는 루시안을 안았다. 지붕 모서리에서. 아래는 어둠이었다. 위는 별이었다. 뒤에는 횃불을 든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루시안은 마크의 팔 안에서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했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감정은 여전히 희미했다.
"우리 어디로?"
루시안이 물었다.
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뛰었다.
지붕 모서리를 박차고 뛰어내린 순간, 루시안의 몸은 공중에 떠올랐다. 마크의 팔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감만 생생했다.
옆 건물의 처마에 착지했을 때, 루시안은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검은 자국들이 손등을 덮고 있었다. 기억을 마셨을 때 돌아온 감정의 흔적들. 그런데 그것도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까의 고통이 점점 멀어졌다. 마치 꿈에서 깬 후 꿈의 내용을 잊어가듯이.
"여기서!"
마크가 손을 잡아당겼다. 목재 창고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내부는 어두웠고, 건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두 사람이 숨어들자마자 횃불의 불빛이 창문을 스쳐 지나갔다.
"숨을 죽여."
마크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 소리가 창고 밖을 지나갔다. 하나, 둘, 셋. 적어도 다섯 명 이상. 모두 황제의 칙령을 따르는 대주교의 추종자들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파는 자를 체포하라. 운명을 거스르는 자를 제거하라.
루시안은 자신이 왜 달아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카이젤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혹은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본능적으로?
마크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것을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억을 파는 자를 찾아라!"
외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더 가까워졌다. 창고의 문이 흔들렸다.
마크가 루시안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들은 창고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나아갔다. 루시안의 손가락들이 나무 더미에 닿았다. 닿는 감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손인지 다른 누군가의 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여긴 아니야."
누군가 밖에서 말했다.
"옆 건물을 봐."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루시안은 창고의 벽에 등을 기댔다. 마크도 옆에 섰다. 둘은 말없이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크."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응?"
"나 왜 도와주는 거야?"
마크가 오래 침묵했다.
"처음에는 돈이 목적이었어. 그건 사실이야."
"그럼 이제는?"
루시안이 물었다.
"이제는... 넌 누가 죽여도 될 사람이 아니니까."
마크가 루시안의 투명한 손가락들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마치 그 손가락들이 녹아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으려는 듯이. 따뜻한 손이 차가워진 손가락들을 감싸며 온기를 전달했다.
"그리고 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 기억이 돌아왔으면, 감정도 돌아올 수 있어. 약이 완전한 회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있으면..."
루시안은 그 말을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봤다.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난 누구야?"
루시안이 물었다.
마크가 답하려던 순간, 창고의 문이 열렸다.
"거기야!"
횃불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루시안과 마크의 그림자가 벽에 크게 드리워졌다.
"도망쳐!"
마크가 루시안을 밀어냈다. 뒤쪽 문으로. 창고의 뒤편으로. 그곳은 다시 거리로 통했다. 골목. 또 다른 골목. 지붕. 또 다른 지붕.
루시안은 마크를 따라 달렸다.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봤다. 자신의 숨이 가빠지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른 누군가의 것처럼 느껴졌다.
"셀린!"
기억 중개소의 2층 창문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셀린이었다. 그녀의 팔에는 무수한 검은 자국들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로!"
셀린이 손을 뻗었다. 마크가 루시안을 들어올렸다. 루시안은 셀린의 팔에 안겼다. 그리고 기억 중개소 내부로 떨어졌다.
바닥에 닿은 순간, 루시안은 거울을 봤다. 중개소의 복도에 걸려 있던 거울. 그 안의 자신의 얼굴을 봤다.
얼굴이 희미했다. 마치 수채화가 물에 녹아내리듯이. 눈은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입은 있었지만 표정이 없었다. 피부에는 검은 자국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들. 손가락들은 여전히 투명했다. 아니, 더 투명해졌다. 마치 이미 반은 사라진 것처럼.
"넌 여전히 여기 있어."
마크가 뒤에서 말했다. 그의 손이 루시안의 어깨에 닿았다. 루시안은 그 손을 느끼려고 애썼다. 그 온기를 붙잡으려고.
"정말?"
루시안이 거울 속의 자신에게 물었다.
"난 여기 있는 게 맞아?"
거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거울 속의 루시안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셀린이 찾고 있어."
마크가 말했다.
"2층으로 가."
루시안은 마크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크의 손이 자신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2층의 방에서 셀린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루시안을 본 순간, 뭔가 흔들렸다. 마치 거울이 거울을 마주보듯이. 두 인물의 눈빛이 만났을 때, 그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셀린은 루시안 안에서 자신을 본 것이고, 루시안은 셀린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 것이었다.
"넌 이미 너무 멀리 왔어."
셀린이 말했다.
"내가 몇 번을 경고했는데."
루시안이 셀린의 팔을 봤다. 검은 자국들. 자신의 팔과 같은 자국들. 하지만 셀린의 자국들은 더 진했다. 더 깊었다. 마치 오래된 상처처럼.
"넌?"
루시안이 물었다.
"넌 어디까지 팔았어?"
셀린이 한숨을 쉬었다.
"내 기억은 이미 다 팔았어. 남은 건 다른 사람의 기억뿐이야."
"그럼 넌 누야?"
루시안이 물었다.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것이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질문이었다.
"난 모르겠어."
셀린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픈 웃음이었다.
"그래서 난... 기억을 찾으려고 했어. 다시 누군가 되기 위해. 하지만 기억 거래는 불가역적이야. 한 번 팔면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런데..."
셀린이 루시안을 바라봤다.
"넌 황금색 약을 마셨어. 그걸로 기억이 돌아왔지. 하지만 그것도 완전하지 않아. 약은 기억의 형태만 돌려주고, 감정은 천천히만 복구돼.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부작용도 있어. 이 검은 자국들처럼."
루시안은 셀린의 말을 들었다. 약의 정체가 조금 명확해졌다.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 검은 자국들이었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영혼의 일부가 타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루시안이 물었다.
"넌 선택해야 해."
셀린이 루시안의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가락들을 감싸며.
"계속 기억을 팔아서 카이젤을 구할 건지, 아니면 지금 남은 것이라도 지키면서 살아갈 건지. 기억을 팔수록 넌 사라져. 그건 피할 수 없어. 하지만 멈추면... 넌 여전히 누군가가 될 수 있어."
루시안은 셀린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진정한 선택지였다. 기억을 계속 팔 것인가, 아니면 멈출 것인가. 카이젤을 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지키는 것인가.
"난 이미 너무 많이 팔았어. 하지만 넌 아직 돌아올 수 있어."
셀린이 계속했다.
"마크도 있고, 헬렌도 있고... 나도 있어. 우리가 너를 기억할 테니까."
그때였다. 아래층에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막혀 있어!"
누군가 외쳤다.
"이 건물을 포위해!"
헬렌의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렸다.
"2층으로 가. 서쪽 창으로."
마크가 루시안의 손을 잡았다. 루시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크."
"응?"
"난 이제 뭘 해야 돼?"
마크는 루시안을 안았다. 가슴에 안겼다. 루시안의 투명한 손가락들이 마크의 등을 감싸려고 했다. 마크는 그 손가락들을 느꼈다. 가볍고, 차갑고, 사라져 가는 것 같은 손가락들. 하지만 분명히 자신을 안고 있는 손가락들.
"살아. 넌 살아야 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사라져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그 말이 루시안의 귀에 들렸다. 이번엔 가슴에도 닿은 것 같았다.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그런데 마크."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면?"
"그럼 내가 너를 기억할게."
마크가 말했다.
"그리고 셀린도, 헬렌도. 우리가 너를 기억하는 동안, 넌 사라지지 않아."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봤다. 투명함이 손가락을 넘어 손목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크의 손을 잡은 손가락들은 조금 더 진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있으면서 다시 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발걸음 소리가 계단에서 들렸다. 점점 가까워졌다.
마크가 루시안을 들어올렸다. 창으로 향했다. 아래는 어둠이었다. 옆은 다른 건물의 지붕이었다. 뒤에는 횃불을 든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루시안은 마크의 팔 안에서 자신의 손을 봤다. 투명한 손가락들이 마크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확실함이었다. 그 접촉. 그 압력. 그 온기.
"마크..."
"끝까지 가. 약속해."
마크가 말했다.
"넌 누가 뭐라고 해도, 루시안이야."
루시안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마크의 팔 안에서 자신이 누군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완전하게,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마크가 뛰었다. 지붕 모서리에서. 루시안을 안고. 아래로. 어둠 속으로.
뒤에서 대주교의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빠르게 멀어졌다.
공중에서, 루시안은 자신의 투명한 손가락들이 마크의 팔을 얼마나 단단히 잡고 있는지 느꼈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옆 건물의 지붕에 착지하는 순간, 루시안의 눈이 뒤를 향했다. 기억 중개소의 창문에는 여전히 횃불이 보였다. 아직 포위는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저 위, 루시안과 마크가 방금 뛰어내린 창문의 가장자리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셀린이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보듯이.
"셀린..."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야 해. 지금은."
마크가 루시안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녀도 자신의 선택을 했을 거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붕을 넘어 다음 건물로, 또 다음 건물로. 황제의 명령이라는 것이 뒤를 따라왔다. 기억을 파는 자를 체포하라. 운명을 거스르는 자를 제거하라.
그런데 루시안의 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황제의 명령? 정말 카이젤의 명령인가?
아니면 누군가 카이젤의 이름을 빌려 내린 명령인가?
그리고 저 대주교의 사람들은 정말 황제의 칙령을 따르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의도 아래 움직이고 있는 건가?
내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면, 누가 나를 기억해줄 거야?
그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루시안은 답을 알고 있었다.
마크가. 셀린이. 헬렌이. 그들이 기억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카이젤은 어디에 있는가. 황제의 명령이 정말 카이젤의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누군가가 정말 존재하는가.
루시안은 마크의 팔 안에서 그 질문들을 품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크의 팔 안에서, 마크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셀린과 헬렌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기억하는 한, 루시안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