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실의 비밀
기억 중개소의 지하실은 횃불의 불빛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루시안은 어둠 속에서 손을 펼쳤다. 손가락들이 반투명해져 있었다. 마크가 그 옆에 서 있었고, 셀린은 벽에 기대어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기억을 사면 안 된다."
셀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팔에는 수십 개의 흉터가 있었다. 각각의 흉터는 하나의 기억을 팔았을 때의 자국이었다.
"내가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알아?"
루시안은 셀린의 팔을 들었다. 흉터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나는 열여덟 번을 팔았어. 열여덟 번 팔고 나서 깨달았지—나는 아무도 아니라는 걸. 기억을 팔 때마다 나를 구성하는 조각이 하나씩 사라졌어. 지금 내 팔에 있는 이 자국들은 내가 누구였는지의 증거야. 사라지기 전에, 내 몸이 기억한 것뿐이야."
헬렌이 지하실의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루시안, 넌 지금까지 몇 개를 팔았어?"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두 개야. 내가 세었어. 황실 귀족 여섯 명의 기억, 그리고..."
"그리고 카이젤의 기억."
루시안이 말을 끝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이 빠져 있었다.
"그건 정신 나간 짓이야. 황제의 기억은 가장 위험해.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어. 너무 많은 비밀이, 너무 많은 죄책감이, 너무 많은..."
헬렌은 말을 멈췄다. 루시안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은 이미 반쯤 돌아가 있었다.
마크가 루시안의 어깨를 잡았다.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넌 복수를 하려던 게 아니었나?"
루시안은 돌아섰다. 마크의 얼굴이 희미했다. 아니, 마크의 얼굴이 희미한 게 아니었다. 루시안의 눈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복수?"
루시안이 되물었다.
"내가 그걸 원했나?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마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루시안."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아직도 여기 있어. 넌 아직도..."
"내가 어디 있는지 확실하지 않아."
루시안이 투명해진 손가락들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공기 속에서 반짝였다. 마치 물에 녹아가는 것처럼.
헬렌은 책상 위에 놓인 기억 판매 기록부를 펼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각각의 항목을 짚었다.
"황실 귀족 여섯 명. 모두 같은 기억을 팔았어. 지난 2년 동안 반복된 회의 기록이야. 그 회의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그 기억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루시안을 제거해야 한다. 황제의 약점을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이 약해진다."
헬렌이 말했다.
"그리고 그 회의를 주도한 사람은 대주교 에르난과 라헬 공주였어. 라헬은 벌써 넉 달 전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했어. 넌 모르고 있었지만, 넌 그녀를 도와준 거야."
루시안의 몸이 경직되었다. 경직된 게 아니라, 그냥 멈췄다. 감정이 빠진 신체의 반응이었다.
"그들이 카이젤을 압박했어. 너를 죽이지 않으면 제국을 보호할 수 없다고. 너는 운명의 신이 내린 약점이라고."
헬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카이젤은... 결국 그들의 말을 들었어."
지하실의 벽에 기억들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루시안이 본 모든 기억들이.
황실의 대회의실에서 귀족들이 모여 있는 장면.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주교 에르난이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억을 파는 자는 운명의 신을 모욕한다."
그 말은 반복되었다. 여러 기억 속에서. 대주교가 여러 귀족 앞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죽음도, 사랑도, 고통도.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신의 적이다."
루시안은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투명해진 손가락들이. 그 손가락들이 기억을 추출했고, 거래했고, 세상의 비밀을 파헤쳤다.
그녀는 운명의 신을 모욕하고 있었다.
"넌 위험한 존재야, 루시안."
헬렌이 말했다.
"넌 죽음에서 돌아왔어. 그건 운명론에 대한 반역이야. 넌 기억을 조작해. 그건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야. 넌..."
"나는 뭔데?"
루시안이 물었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마크가 한 발 다가섰다.
"넌 그를 구하려고 했어. 카이젤을. 넌 그를 사랑했어. 복수가 아니라 구원을 원했어."
"구원?"
루시안이 웃었다. 그 웃음은 공동이었다. 감정이 없는 웃음.
"내가 그를 사랑했어? 정확히 기억이 안 나."
셀린이 루시안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팔의 흉터들이 촛불에 비쳤다.
"기억을 많이 팔면 넌 감정도 함께 잃어. 그리고 감정이 없으면..."
"감정이 없으면 뭐?"
"감정이 없으면 넌 누구도 아니야. 그냥... 흐릿한 그림자 같은 존재가 돼."
셀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처럼."
루시안은 거울을 찾아 벽을 돌아다녔다. 기억 중개소의 지하실에는 거울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알았다. 손가락이 투명하고, 몸의 일부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대주교가 널 찾고 있어."
헬렌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루시안이 돌아섰다.
"황제의 명령이야. 기억 거래자를 체포하고, 그 능력을 제거하라고. 그리고 라헬 공주도 움직이고 있어. 넌 이제 돌아올 수 없어, 루시안. 너무 깊이 빠졌어."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루시안이 물었다.
"도망가야 해. 제국 밖으로."
헬렌이 말했다.
"기억 중개소는 이제 넌 보호할 수 없어. 넌 너무 위험해. 넌 그들이 원하는 그런 존재가 됐어."
"그런 존재?"
"운명을 거부하는 존재. 신을 모욕하는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헬렌이 루시안의 눈을 봤다.
"넌 더 이상 루시안이 아니야."
지하실이 흔들렸다. 위층에서 소리가 났다. 발소리들. 많은 발소리들.
마크가 루시안의 팔을 잡았다.
"넌 도망쳐야 해. 지금 당장."
"도망쳐봤자 뭐야."
루시안이 말했다.
"어디로든 가도 넌 날 찾을 거야. 그리고 결국..."
그녀가 투명해진 손을 들었다.
"결국 난 사라질 거야."
셀린이 루시안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루시안은 셀린의 기억을 본다. 아니, 셀린의 감정을 본다.
그 안에는 사랑했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 누군가의 얼굴은 희미했지만, 사랑했다는 감각만은 남아 있었다. 아주 옅지만, 확실하게.
"기억이 없어도 사랑은 남을 수 있어. 감정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은."
셀린이 속삭였다.
"넌 아직도 뭔가를 사랑하고 있어, 루시안. 그게 뭔지는 넌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넌 그걸 사랑해."
위층의 소리가 더 커졌다. 발소리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루시안이 헬렌을 봤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헬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루시안의 손에 작은 병을 쥐어줬다.
"이건 뭐야?"
"기억을 되돌리는 약이야. 팔았던 기억들을 되찾을 수 있어. 하지만..."
헬렌이 말을 멈췄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고통도 함께 돌아와. 팔았던 기억들 속의 모든 슬픔이, 모든 절망이. 그리고 넌 그걸 견디지 못할 수도 있어. 더 나아가..."
헬렌이 루시안의 눈을 직시했다.
"기억을 되찾으면 동시에 사라져가. 고통이 너무 크면, 너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투명해질 거야."
루시안은 병을 들었다. 그 안의 액체는 금색이었다. 정말로 황금빛이었다.
"운명을 거부할 건가, 아니면 받아들일 건가."
헬렌이 물었다.
발소리가 지하실의 문 앞에 다다랐다.
마크가 루시안을 뒤로 밀었다.
"도망쳐!"
문이 열렸다.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들어섰다. 그들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고, 칼이 들려 있었다.
"기억 거래자를 잡아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외쳤다.
루시안은 손가락을 펼쳤다. 그 투명한 손가락들이 공기 중에서 반짝였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든 게 기억났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이미 팔려버린 기억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되찾으려면, 자신은 황금의 병을 마셔야 했다.
병의 뚜껑을 열었을 때, 황금빛이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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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의 마지막 말이 루시안의 귀를 타고 내려앉았다. 운명을 거부할 건가, 아니면 받아들일 건가.
도망치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루시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발소리들이 계단을 내려오는 이 순간, 제국 어디로 도망쳐도 대주교의 손길은 닿을 것이라는 것을. 라헬 공주의 검은 거미줄은 이미 모든 길을 막아놨을 것이라는 것을.
병의 황금빛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루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크의 절박한 목소리, 셀린의 떨리는 손, 헬렌의 무표정한 얼굴이 모두 흐릿했다. 마치 물 속에서 보는 것처럼. 아니, 이미 자신이 물 속에 잠긴 지 오래였다. 기억 거래의 심연 속으로.
"넌 뭘 하고 있는 거야?"
마크가 외쳤다. 손을 뻗어 루시안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의 손가락이 루시안의 팔을 스쳤을 때, 그는 순간 멈췄다. 그곳이 차갑고, 마치 아침 이슬처럼 축축했기 때문이다. 살이 아니라 연기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병을 마시지 마."
마크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기억이 돌아오면 넌..."
"죽어."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누구 입에서 나온 건지 잠깐 헷갈렸다. 자신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되풀이하는 건 아닐까. 그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투명한 손가락들로 기억을 팔수록,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위층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대주교의 추종자들은 이미 복도에 들어섰을 것이다. 황실 근위대의 갑옷 소리도 섞여 있었다. 라헬 공주의 손길이 여기까지 뻗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헬렌이 루시안의 옆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죄책감? 후회? 아니면 단순한 계산의 결과일까. 기억 중개소의 모든 거래를 조종해온 여인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남아 있단 말인가.
"넌 선택을 해야 해."
헬렌이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이 병을 마시거나."
"아니면?"
루시안이 물었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온 목소리 같았다.
"아니면 도망쳐. 이 병 없이. 기억 없이. 감정 없이. 완전히 투명해진 채로 살아."
헬렌이 루시안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
"그게 더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이 병을 마셔서 모든 슬픔을 한 번에 떠안는 게 더 고통스러울까. 넌 선택해야 해. 기억이 없는 삶, 아니면 기억에 짓눌린 삶."
셀린이 루시안의 손에 닿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유일하게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이 셀린의 손이었다.
"난 알아. 그 기억들이 얼마나 무거운지. 사랑하던 사람을 죽인 범인의 기억, 그 안에 담긴 모든 후회와 절망."
셀린이 속삭였다.
"하지만 그걸 느껴야 넌 살 수 있어. 감정 없이는 살 수 없어. 기억 없이는 너도 아니고."
계단의 문이 열렸다. 대주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억 거래자를 생포하라! 살아있게!"
발소리들이 폭주했다. 마크가 루시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낡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기억 중개소의 서고를 지키던 것이었다. 손이 떨렸다.
루시안은 병을 들었다. 황금빛 액체가 병 안에서 천천히 회전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기억이 돌아오면 뭘 할 거야?"
마크가 물었다. 칼을 들었지만, 이미 패배를 받아들인 듯한 목소리였다.
"카이젤을 사랑할 거야?"
그 질문에 루시안의 손이 멈췄다.
카이젤. 그 이름이 자신의 입에서 나올 때, 뭔가가 떨렸다. 투명해진 심장이 아직도 뛰고 있다는 증거였다.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증거였다.
루시안은 마크를 봤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인 황제를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을 아는 절망.
"난 모르겠어."
루시안이 말했다.
"기억을 되찾으면, 그 안에서 뭘 느낄지 난 알 수 없어. 사랑이 돌아올지, 아니면 증오가 돌아올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라 그저... 이해가 돌아올지."
그녀는 마크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희미해지는 것을 봤다. 자신을 향한 사랑이 절망으로 변하는 것을 봤다.
"미안해."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크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카이젤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일까.
병의 입을 입에 대었다.
"기억을 파는 건 죄일까?"
루시안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니면 기억을 되찾는 게 죄일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추종자들의 발소리가 지하실 입구에 다다랐다. 횃불의 빛이 어둠을 가르기 시작했다. 대주교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라헬 공주가 서 있었다. 검은 드레스에 싸인 그녀의 얼굴에는 냉정한 미소가 떠 있었다.
"잡아라."
라헬이 명령했다.
루시안은 황금빛 약을 마셨다.
순간, 세상이 멈췄다.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루시안의 투명한 손가락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살갗이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그 대신 기억들이 폭주했다.
한 줄기의 기억이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또 한 줄기. 그리고 또 한 줄기. 마치 무너진 둑으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루시안은 소리를 질렀다.
그 안에는 전생에서 자신이 팔아넘긴 모든 슬픔이 있었다. 카이젤의 궁궐에서 느꼈던 절망이 있었다.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그 황제를 향한 이해 없는 분노가 있었다. 그리고 죽음 직전, 자신이 느꼈던 것—증오가 아니라 그저 슬픈 이해가 있었다.
모든 게 돌아왔다.
루시안은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들이 색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색은 정상적인 살색이 아니었다. 마치 피가 역류하는 것처럼, 손가락 끝부터 붉게 물들어갔다. 기억과 함께 돌아온 고통이 신체를 태우고 있었다.
"넌 뭘 한 거야?"
마크가 소리쳤다.
루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투명한 눈물이 아니라, 따뜻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억과 함께 돌아온 감정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억이... 다 돌아왔어."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이제 투명하지 않은 손이었다. 온전한 살갗을 가진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 위에는 셀린처럼 무수한 자국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기억을 되찾으면서 함께 돌아온 고통의 흔적들이었다. 마치 영혼이 신체를 태우고 나가는 것처럼.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한 발 물러섰다.
"마녀다."
누군가가 외쳤다.
"기억을 되찾은 마녀다."
하지만 루시안은 마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낸 여인일 뿐이었다. 카이젤에게 살해당한 여인. 그리고 그것도 모르고 황제의 약점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여인. 그 피해자.
루시안이 천천히 일어섰다. 손가락들이 빛을 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투명한 빛이 아니었다. 황금빛이었다. 마치 기억 거래의 모든 에너지가 한 점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그리고 그 빛은 점점 강해졌고, 그녀의 몸을 태워가고 있었다.
"넌 누구야?"
라헬 공주가 물었다.
루시안은 대주교를 봤다. 그리고 라헬을 봤다. 그리고 마크를 봤다. 그리고 셀린을 봤다. 그리고 헬렌을 봤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난..."
루시안이 말했다.
"운명을 거부하는 자야."
대주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난 이제..."
루시안의 손가락에 황금빛이 더 강해졌다. 손가락이 아니라 전신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실을 알아야 해. 왜 나를 죽였는지. 왜 카이젤은 내 손을 잡고 나를 죽이라는 명령에 순응했는지."
루시안이 한 발 나아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황금빛이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대주교, 넌 그 명령을 내렸지. 아니면..."
루시안이 라헬을 바라봤다.
"라헬, 넌 이 모든 걸 계획했지?"
라헬 공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넌 정말로 모든 기억을 되찾았구나."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넌 이제 알겠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지."
라헬이 한 발 물러섰다. 그 순간, 지하실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그리고 위층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황실 근위대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 이곳을 습격했다는 뜻이었다.
라헬 공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늦었어. 이미 다 시작됐어."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을 그었다. 지하실의 벽에 검은 기호가 나타났다. 마치 누군가의 피로 그려진 것처럼.
"난 벌써 넉 달 전부터 준비했어. 대주교와 함께. 넌 기억을 팔면서 제국의 모든 비밀을 손에 넣었지. 그리고 난 그 비밀들을 이용해서 제국의 모든 것을 장악했어. 넌 날 도와준 거야. 모르고 있었지만."
셀린이 루시안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루시안의 팔은 이미 반투명해져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지 몇 초밖에 안 됐는데, 벌써 사라져가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으면..."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계속 사라져가."
마크가 루시안의 다른 팔을 잡았다.
"도망쳐! 지금 당장!"
하지만 루시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하실의 모든 것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화염이 천장을 뚫고 내려왔다.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라헬이 그은 검은 기호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기억 중개소의 지하실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루시안은 한 가지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이미 지나갔다는 것. 그리고 이제 자신의 선택이 무엇이든,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것.
셀린이 루시안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루시안! 나랑 같이 가!"
셀린이 소리쳤다. 그녀는 루시안을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루시안의 손은 이미 반투명해져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동시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루시안!"
마크가 외쳤다.
"넌..."
"난 알아."
루시안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정말로 희미해지고 있었다.
"난 이미 아무것도 아니야."
그 순간, 화염이 그들을 가르고 내려왔다. 마크가 루시안을 밀어냈다. 그의 몸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마크!"
루시안이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도 이미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지하실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돌이 떨어졌다. 먼지가 소용돌이쳤다. 그 속에서 루시안은 자신의 손을 들었다.
투명하고, 희미하고, 곧 완전히 사라질 손.
그 손가락들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집으려 했을까. 카이젤의 기억일까. 마크의 손일까. 셀린의 따뜻함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일까.
루시안은 알 수 없었다.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검은 연기가 모든 것을 삼켰다. 그 속에서 루시안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확실히 느꼈다.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라짐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의 손이 자신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
그 손이 누구의 손인지, 그 손이 자신을 구하려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데려가려는 건지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