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궁의 무도회
황궁의 정문 앞에서 루시안은 숨을 고르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내렸다. 마차에서 내려 돌계단을 올라가는 귀족 부인들의 뒤를 따라가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투명해진 손가락들이 촛불빛에 반투명으로 빛났다.
카이젤을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질문이 루시안의 가슴을 짓누른다. 손가락을 팔 때마다 자신이 조각조각 사라지는 것을 느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걸어갔다. 이 순간을 위해 세 번의 기억 거래를 감수했으니까.
"루시안."
뒤에서 마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황궁 하인의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들키면 끝이야."
루시안은 계단을 내려가며 마크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넌 이미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어. 헬렌이 말했잖아. 내 기억을 본 사람은 내가 어디에 있든 알 수 있다고."
마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안과 함께 황궁의 기억 중개소에서 기억을 본 후, 그는 변해버렸다. 그 안에 루시안의 절박함, 죽음의 순간, 카이젤에 대한 사랑이 모두 들어있었다. 그는 루시안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없음도 알았다.
"혹시 넌... 정말 카이젤을 사랑해?"
마크의 질문에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을 팔 때마다 감정이 희미해졌다.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도, 증오라고 부르던 것도 이제 흐릿했다. 남은 것은 오직 목표뿐이었다. 카이젤을 다시 만나고, 그의 기억을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을 찾는 것.
"지금은 시간이 없어."
황궁의 현관에 들어서자 화려한 불빛이 쏟아져나왔다. 루시안은 숨을 멈췄다.
대리석 바닥에 반사된 천 개의 촛불이 춤을 추고 있었다. 천장에는 황금으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고, 계단 양쪽으로는 늘어선 귀족들의 향수가 공기를 진하게 물들였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현악기의 부드러운 선율이었다.
이곳이... 어디지?
루시안의 발이 멈췄다. 마크가 그녀의 팔을 밀어 움직이게 했다.
그 순간이었다.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기억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는 느낌. 따뜻한 손. 남자의 손. 무도회장의 음악이 귀에 들어온다. 자신은 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아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의 얼굴은 희미했지만, 목소리는 명확했다.
"루시안."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루시안은 현관에 멈춰 섰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자신의 기억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을 봤을 때 남겨진 조각인가? 기억 거래를 거듭하며 자신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뒤엉켜버렸다. 무엇이 자신이고 무엇이 다른 사람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루시안! 움직여."
마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루시안은 현관홀을 지나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은 더욱 화려했다. 귀족 남녀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음식을 들고 다니는 하인들이 분주했다. 루시안은 마크의 뒤를 따라 벽 쪽으로 몸을 날씬하게 숨겼다. 마크는 포도주를 담은 잔을 들고 다시 떠났다. 그의 역할은 황궁 하인으로 위장하면서 루시안이 안전하게 움직이도록 돕는 것이었다.
루시안은 무도회장의 모서리에서 연회를 관찰했다. 귀족들의 웃음소리, 악기들의 선율, 샹들리에에서 떨어지는 초의 향취.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동시에 친숙했다. 왜일까? 이 황궁이, 이 연회장이, 이 음악이 자신의 몸에 흐르는 기억과 맞아떨어졌다.
한때 나도 여기 있었어.
루시안은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쌌다. 투명해진 손가락들이 자신의 팔에 닿았다. 그것은 마치 유령의 손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종이 울렸다.
황궁의 큰 종이 울렸고, 연회장의 음악이 멈췄다. 모든 귀족이 정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황제 카이젤이 계단 위에 나타났다.
루시안의 숨이 멎었다.
카이젤은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황금 휘장이 달려있었고, 그의 검은 눈은 냉정했다. 그는 계단을 내려왔고, 모든 귀족들이 절을 했다. 루시안도 몸을 낮췄지만, 눈은 카이젤을 놓치지 않았다.
전생에서 자신을 죽인 손. 전생에서 자신을 사랑했던 목소리. 전생에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사람.
그는 지금 루시안을 보지 않고 있었다. 그저 황제로서 연회장을 훑어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루시안의 맥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심호흡을 했지만 가슴은 좁혀만 갔다. 마크가 옆에서 그녀를 관찰했다. 마크는 루시안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봤다.
루시안은 연회장의 모서리를 따라 이동했다. 카이젤이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심장은 광란했다. 손가락이 저릿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 하는 손처럼.
카이젤이 와인잔을 들었다. 그것이 신호였다.
루시안은 마치 실수로 넘어지는 척하며, 카이젤의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카이젤의 손등을 스쳤다.
접촉은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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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방. 벽을 둘러싼 귀족들의 얼굴들이 그림자 속에서 떠오른다.
대주교 에르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폐하, 그 여인이 제국의 위협이 됩니다. 제거하셔야 합니다."
카이젤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손이 책상 위에서 떨린다. 무거운 침묵이 방을 가득 채운다.
라헬의 목소리. 더 높고 날카롭다. "오빠, 나를 황제로 만들어주면 모든 게 끝난다고. 그 여인만 죽으면."
"폐하,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대주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더 강해진다. 더 절박해진다. 마치 칼끝처럼 카이젤의 가슴을 찌른다. 카이젤은 눈을 감는다. 루시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의 웃음소리, 그녀의 손의 온기, 그녀를 바라볼 때 가슴을 적시는 것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가슴을 짓누른다.
"폐하?"
대주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더 강하게. 카이젤은 눈을 뜬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황제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운명이 그렇게 명령한다.
카이젤의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펜을 집어든다. 그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다. 문서 위에 서명해야 한다. 루시안의 죽음을 명령하는 문서에.
펜이 종이에 닿으려 하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는다.
따뜻한 손. 절박함으로 떨리는 손. 그 손을 통해 흘러오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공포.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용서.
카이젤은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 루시안이다.
루시안의 기억이 자신의 기억 속으로 스며든다. 그녀가 죽는 순간.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 그 눈 속에 담긴 슬픔과 사랑. 자신이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는지, 그 모든 것이 전해진다. 마치 자신이 직접 그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죽음보다 고통스럽다.
그 깨달음이 카이젤을 짓누른다. 그리고 그 순간, 카이젤의 기억도 루시안에게 전해진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그를 파괴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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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안은 카이젤으로부터 손을 빼냈다.
그녀의 손가락은 더욱 투명해졌다. 이제 반쯤 사라진 상태였다.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빛이 그대로 통과했다.
카이젤은 놀란 표정으로 루시안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이미 깨달음이 맺혀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루시안..."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은 사람처럼.
루시안은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모두가 자신을 죽인 황제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루시안이 본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본 기억 속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압박.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고 싶은 약함. 카이젤도 피해자였다. 카이젤도 운명의 포로였다. 그리고 그는 루시안을 사랑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도 남을 만큼.
루시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이젤이 다가오려 했지만, 그 순간 귀족 부인이 그를 막았다. 루시안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현관의 계단을 내려가며, 루시안의 발걸음은 흔들렸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느껴왔던 증오와 사랑이 뒤섞여 한 덩어리가 되어 목을 조였다. 카이젤도 자신처럼 고통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루시안의 마음은 더 이상 단순하지 않았다.
마크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했어?"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의 기억을 봤어."
"그리고?"
루시안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본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것들이 모두 자신의 확신을 흔들어놓았다.
"그는... 나를 기억해. 무의식적으로라도, 깊은 곳에서 내 이름을 알고 있어."
마크는 루시안의 떨리는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투명한 손을 통과했다. 그 순간, 마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궁을 빠져나가며, 루시안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의 절반이 이미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손가락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 대신 다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허함이었다. 마치 자신의 내부가 천천히 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기억 중개소로 돌아온 루시안을 헬렌이 맞이했다. 그녀의 표정은 심각했다.
"카이젤의 기억을 봤다고?"
"네."
헬렌은 루시안의 손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미 손의 절반이 사라졌네. 계속 이렇게 가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는 상관없어. 그의 기억을 더 알아야 해."
헬렌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루시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슬픔이 있었다.
"만약 네가 카이젤의 기억을 더 깊이 팔면, 황실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을 거야. 그의 기억 속에는 제국의 모든 것이 들어있거든."
루시안은 침묵했다. 헬렌의 말이 맞았다. 카이젤의 기억 속에는 자신이 죽임을 당한 이유도, 그가 자신을 사랑했던 이유도 모두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넌 더 이상 루시안이 아니게 돼. 넌 그저 기억의 껍질이 될 거야."
헬렌의 말이 루시안의 귀에 들어왔다. 마치 저주처럼. 하지만 루시안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필요한 건 자신이 아니라 진실이야."
헬렌은 루시안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자신이 이미 경험한 슬픔이 그 눈에 맺혀있는 것처럼.
"넌 거래자였어. 기억을 팔았던 사람."
헬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도 루시안처럼 자신을 팔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마크가 기억 중개소의 문에서 루시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절망이 있었다. 그는 루시안이 자신을 지워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루시안, 제발..."
루시안은 마크를 보지 않았다. 만약 그를 본다면, 자신이 흔들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혔다.
"내일 밤에 다시 황궁에 들어가야 해. 이번엔 더 깊은 기억을 봐야 해."
헬렌은 책상 위의 지도를 펼쳤다. 그 위에는 황궁의 구조가 표시되어 있었다.
"내궁의 서쪽 복도. 거기에 카이젤의 비밀 서재가 있어. 만약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의 기억이 더 강하게 나올 거야. 더 깊은 것들이."
루시안은 지도를 바라봤다. 그 위의 붉은 선들이 황궁의 길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길들을 따라가면, 자신이 죽임을 당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카이젤이 자신을 사랑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내일 밤이면 충분해?"
"충분할 거야. 하지만..."
헬렌이 루시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투명한 손가락들이 헬렌의 손 위에서 빛났다.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한 번 더 깊이 들어가면, 넌 자신을 완전히 잃을 거야."
루시안은 헬렌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슬픔만 있었다. 그리고 경고가 있었다.
"기억을 팔 때마다 넌 사라진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것처럼, 넌 너 자신을 잃어간다. 그리고 한 번 그 경계를 넘으면..."
"돌아올 수 없다는 거죠."
루시안이 말을 끝냈다. 헬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중개소를 나간 루시안은 밤거리를 걸었다. 가로등의 불이 희미하게 흔들렸고,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루시안은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들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얼마나 더 팔면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내일 밤, 황궁의 비밀 서재에서 루시안은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카이젤이 자신을 왜 죽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다시 돌아왔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카이젤이 자신을 정말로 사랑했는지. 그 진실 앞에서, 루시안이라는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저 필요한 대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크지는 않을까? 루시안의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자신을 완전히 잃고도 그 진실이 의미가 있을까?
기억 중개소의 창문에서 마크는 루시안의 투명한 손가락들이 가로등의 빛에 반사되는 것을 지켜봤다. 그 손가락들은 마치 유리처럼 부서질 것 같았다. 마크는 주먹을 쥐었다. 그의 얼굴이 단단해졌다. 루시안이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기 전에, 자신이 그녀를 구해야 한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마크는 헬렌에게 돌아갔다. 기억 중개소의 어두운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헬렌."
헬렌이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루시안을 구할 방법이 있어?"
헬렌은 마크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슬픔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었다. 죄책감이었다.
"있어. 하지만 그 방법은 더 위험해."
"상관없어. 말해줘."
헬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결정을 내리는 듯했다. 그 결정이 자신에게 어떤 대가를 가져올지 알면서도.
"황궁의 비밀 서재에 들어가서, 카이젤의 기억을 기록한 원본을 찾는 거야. 기억 중개소의 모든 거래는 기록돼. 그 기록을 찾으면, 루시안이 팔아버린 것들을 복구할 수 있어."
마크의 눈이 밝아졌다.
"그럼 내일 밤, 루시안이 서재에 들어갈 때 나도 함께 들어가면 돼."
"그건 자살 행위야. 황궁의 경비는..."
"상관없어."
마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루시안을 구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그리고 나는 그걸 할 거야."
헬렌은 마크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이해가 있었다. 그녀도 한때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어. 그럼 내가 도와줄게."
헬렌은 책상 아래 숨겨진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황궁의 경비 일정표와 수십 장의 기록 문서들이 들어있었다.
"이건 내가 예전에 모아둔 자료야. 황궁 내부의 거래 기록과 경비 순찰 시간이 모두 기록돼 있어. 이걸 이용하면 루시안이 서재에 들어갈 때 경비를 피할 수 있을 거야."
마크는 그 자료들을 들었다. 종이는 낡았고, 글씨는 작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기억 기록을 찾은 후에는? 그걸 어떻게 루시안에게 돌려줄 거야?"
헬렌은 마크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결의가 있었다.
"내가 직접 기억을 이식해줄 거야. 내가 거래자였던 만큼, 역으로 기억을 복구하는 방법도 알아. 하지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도 위험해질 수 있어. 카이젤의 기억을 다루는 것은 제국 전체의 비밀을 다루는 것이거든. 만약 들킨다면, 나는 죽을 거야."
헬렌은 말을 멈췄다. 그 다음 말은 더 작은 목소리로 나왔다.
"그리고 루시안도."
마크는 헬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고마워. 정말로."
헬렌은 마크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루시안의 투명한 손과는 다르게.
"내일 밤 자정이 되면, 황궁의 동쪽 정원에서 만나. 거기서 루시안을 데리고 서재로 들어가야 해. 그리고 너는..."
헬렌은 마크에게 작은 열쇠를 건넸다.
"이 열쇠로 서재의 기록실을 열어. 거기서 루시안의 기억 기록을 찾으면 돼. 하지만 경비가 올 수 있으니까 빨리 해야 해."
마크는 열쇠를 받았다. 그것은 작지만 무거웠다. 그 안에는 루시안을 구할 수 있는 모든 희망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위험이 담겨있었다.
"내일 밤, 모든 게 결정될 거야."
마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결연했다.
"루시안이 자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내가 그녀를 구해야 해."
헬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슬픔과 함께 희망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희망 아래에는 불안이 숨어있었다. 내일 밤 일이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실패한다면?
헬렌은 그 생각을 떨쳐냈다. 지금은 희망만 필요했다.
기억 중개소의 어두운 방에서, 세 사람의 운명이 내일 밤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루시안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찾으려 하고 있었고, 마크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헬렌은 자신의 과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려고 했다.
내일 밤, 황궁의 비밀 서재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루시안의 운명도, 카이젤의 운명도, 그리고 제국 전체의 운명도.
하지만 그 전에, 루시안은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카이젤이 자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면, 왜 자신을 죽였는가? 그 질문의 답이 서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알게 될 때, 루시안은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위해 자신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위해 자신을 지킬 것인가.
내일 밤, 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