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면
정신병원의 철제 침대는 이준호의 몸무게를 지탱했지만, 그의 정신을 잡아두지는 못했다. 밤 11시 42분, 복도의 간호사 교대 시간에 그는 일어났다. 손가락들이 떨렸다. 발은 움직였다. 퇴원 동의서를 들고 있었다. 이상호 의사가 서명한 종이였다.
그런데 글씨가 자꾸 변했다. 이준호가 읽을 때마다 다른 의료진의 이름이 나타났다. 박민재. 한지은. 윤영호.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병원 현관에 도달하는 데는 7분이 걸렸다. 야간 경비실의 직원은 이준호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의사 복장이 그를 보호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경비는 없었을 수도 있다.
강남역 출구에서 택시를 탔다. 기사는 말이 없었다. 이준호가 주소를 말했을 때, 기사는 그 주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해진 길을 따라 운전했다.
을지로 208호 여관에 도착했을 때, 이재훈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재훈. 이준호와 정확히 같은 자세였다. 마치 거울상처럼.
"왔네." 이재훈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준호 자신의 목소리였다. 정확히 같은 음색, 같은 리듬, 같은 숨소리. "생각보다 빨리."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은 닫혀 있었고, 방의 크기는 이전과 달랐다. 더 크거나, 더 작거나, 아니면 크기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되었거나.
"날 잡아야겠나?" 이재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면 날 죽여야겠나? 아니면..." 그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은 이준호의 눈이었다. "날 자신이라고 인정해야겠나?"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재훈이 일어섰다. 그의 동작은 이준호가 생각하기 전에 나타났다. "당신이 지금 보는 이 방이 정말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증거는?"
이준호는 벽을 만지려 했다. 손가락이 반응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지 누군가의 의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벽은 차갑고 거친 느낌을 전달했다. 하지만 그 감각도 신뢰할 수 없었다.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나?" 이재훈이 한 발 가까워졌다. "당신의 눈이 진짜인가? 당신의 기억이 진짜인가?"
"모두 진짜다."
"그렇다면 박영미는 누구인가?"
이준호의 숨이 멈췄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기억이 산산조각이 났다. 박영미. 여자. 검은 머리. 갈색 머리. 금발. 20대. 30대. 여러 개의 박영미가 동시에 떠올랐다. 각각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 다른 죽음의 방식으로.
"넌 그 여자를 죽였어. 최면으로. 폐건물에서." 이재훈이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여자가 죽었는가? 아니면 그 여자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기억을 누군가가 넣어줬는가?"
"당신이..."
"나? 나는 누구인가?" 이재훈이 손을 들었다. 그 손에서 이준호는 자신의 손에 있던 떨림을 본다. 같은 마비. 같은 통제 불가능.
문이 열렸다.
박민재가 들어왔다.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입술 움직임은 목소리와 맞지 않았다. 더빙 영상처럼.
"이준호. 당신도 나처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박민재가 말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누군가의 시나리오에 불과한 건 아닌가?"
"박민재, 당신은..."
"나? 나는 당신의 일부일 수도 있고, 당신을 조종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이 만든 환상일 수도 있다." 박민재가 이재훈 옆에 섰다. 두 얼굴이 겹쳐 보였다. "우리가 모두 당신 아닌가?"
이준호는 벽을 짚었다. 벽이 아니었다. 공기였다. 아니, 없음이었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한지은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이준호는 기억하지 못했다.
"의사님."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여러 색깔로 동시에 빛나고 있었다. "난 사실 당신의 환자가 아니었어요. 난 당신을 관찰하고, 당신의 능력을 측정하고, 당신의 한계를 찾기 위해 보내진 사람이었어요."
"누가 보냈는가?"
"당신이."
문이 다시 열렸다.
윤영호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젊어지다가 늙어지고, 다시 젊어지고. 시간이 그의 얼굴 위에서 앞뒤로 움직이는 것처럼.
"나는 당신의 상관이 아니었다." 윤영호의 목소리도 변하고 있었다. 때로는 깊고, 때로는 높고, 때로는 이준호 자신의 목소리였다. "나는 당신을 감시하는 사람이었다. 혹은 당신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혹은..."
"혹은?"
"당신이 나를 만들었다."
이준호는 손을 들었다. 손은 움직였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손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갔다. 이준호는 그것을 막으려 했다. 손은 계속 갔다. 얼굴을 만지는 순간, 얼굴이 이탈했다. 가면을 벗는 것처럼.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얼굴.
그리고 또 다른.
무한히 겹쳐 있었다.
"김수진."
경찰청 심리분석팀장 김수진이 나타났다. 수사 파일을 들고 있었다. 수백 장의 종이가 그 파일에 들어 있었다. 모두 이준호의 얼굴 사진이었다. 다른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같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당신을 추적했던 것이 정말 당신의 범행 때문일까요?" 김수진이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면 나도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걸까요?"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입니다." 모두가 동시에 말했다.
방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니, 방이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준호의 인식이 회전했다. 모든 벽이 거울이 되었다. 모든 거울에서 이준호가 보였다. 하지만 모두 다른 이준호였다.
이재훈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이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렌즈가 초점을 잃은 것처럼. 화면이 깜빡였다.
"이제 알겠지?" 이재훈이 말했다. 그의 얼굴이 변했다. 더 이상 이재훈의 얼굴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이재훈의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이준호의 얼굴이었다. "넌 존재하지 않아."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사라지고 있었다. 손가락부터. 하나씩 투명해졌다. 손목. 팔. 가슴.
"넌 누군가의 상상이야." 그 얼굴이 말을 계속했다. "넌 누군가의 정신 속 환상이야. 그리고 그 누군가는..."
얼굴이 더 변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훨씬 더 오래되고, 더 피폐하고, 더 깊은 절망이 새겨진 얼굴.
입술이 움직였다.
"...너 자신이야."
이준호의 마지막 손가락이 사라졌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검게 물들었다. 방도 없었다. 사람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목소리만 들렸다.
여러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
"넌 누구인가?"
"난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검은 공간에서 이준호의 의식이 떠내려갔다. 시간이 흐르는지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혹은 시간이 원래 없었을 수도 있었다.
목소리들이 계속했다.
"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너는 어디서 끝나는가?"
"너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너를 조종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너와 같은 사람이라면?"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계속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갑자기.
빛이 터져 나왔다. 마치 누군가가 막막한 어둠을 손가락으로 뚫어버린 것처럼.
이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하얀 천장. 깨끗한 천장. 정신병원의 천장.
침대에 누워 있었다. 손목에는 가죽 밴드가 채워져 있었다. 의료용 제약 밴드. 이중 잠금 장치가 달린.
"깨어났군요."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호 의사였다. 하지만 벽에서 들렸다. 침대 옆이 아니라 벽 자체에서.
이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거울이 있었다. 큰 거울. 환자들의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깨지지 않는 거울. 거울 속에서 이상호는 입체적으로 움직였다. 거울 밖의 현실과 무관하게.
"당신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거울 속 이상호가 말했다. "당신은 계속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건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꿈의 일부입니다." 이상호가 거울 속에서 웃음을 흘렸다.
거울이 깨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중심에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거울은 실제로 깨지지 않았다. 단지 이미지만 깨졌다. 거울 속 이상호의 얼굴이 산산조각이 났다.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각 조각에는 다른 얼굴이 있었다.
박민재. 한지은. 윤영호. 김수진. 이재훈. 그리고 이준호 자신.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모두 다른 얼굴이었지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망의 표정.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나요?" 모두의 얼굴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당신의 기억이 진짜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한 일들이 진짜라고 생각하나요?"
"난 기억한다." 이준호가 외쳤다. "난 분명히 기억한다."
"그 기억도 누군가가 당신에게 심어준 것일 수 있습니다." 거울 조각들이 말했다. "당신이 박영미를 조종했다고 기억하나요? 그건 진짜였나요? 아니면 당신이 박영미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나요? 아니면 박영미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나요?"
침대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준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팔은 밴드로 묶여 있었다. 하지만 침대는 계속 회전했다. 침실의 벽들이 흐릿해졌다. 벽이 사라지고 있었다.
"멈춰." 이준호가 말했다.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무의식에 침투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능력.
침대가 멈췄다.
하지만 그것은 이준호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침대가 멈춘 것이 아니라, 이준호의 인식이 멈춘 것이었다. 혹은 그 둘이 같은 것이었다.
벽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이전의 벽이 아니었다. 다른 병실이었다. 더 작은 병실. 더 어두운 병실. 그리고 그 병실의 벽에는 손톱 자국이 가득했다.
"이건 어디지?" 이준호가 물었다.
"당신의 진짜 방입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 아래에서.
침대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또 다른 이준호가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이준호. 하지만 이 이준호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에 죽은 것처럼.
"당신은 이 방에서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침대 아래의 이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본 모든 것은 이 방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강남 클리닉도, 폐공장도, 정신병원도. 모두 이 방 안에서. 당신의 정신 안에서."
"거짓이야." 이준호가 외쳤다. "난 밖에 나가본 거야. 난 사람들을 만났어. 난 일들을 했어."
"그렇다면 증명해보세요." 침대 아래의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그 손은 살갗이 없었다. 뼈만 남아 있었다. "당신이 한 일들이 진짜라는 증거를 보여보세요. 당신이 만난 사람들이 진짜라는 증거를."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기억할수록,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박영미의 얼굴. 몇 번이나 변했다. 한지은의 목소리. 여러 번 다르게 들렸다. 김수진의 눈빛. 매번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혹은 그것이 그의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가 심어준 기억이었다면?
혹은 그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면?
"난 의사야."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난 정신과 의사야. 난 강남에 클리닉이 있어. 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침대 아래의 이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생각과 사실은 다릅니다. 당신이 의사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뭘까요?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까요?"
침대 아래의 뼈 손이 위로 올라왔다. 이준호의 가슴을 가리켰다.
"당신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준호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가슴이 투명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장도 없었다. 폐도 없었다. 다만 거울이 있었다. 자신의 가슴 안에 거울이 박혀 있었고, 그 거울에는 또 다른 가슴이 비쳤고, 그 안에는 또 다른 거울이...
"멈춰!" 이준호가 외쳤다.
모든 것이 멈췄다.
침대도. 벽도. 침대 아래의 뼈 손도.
세상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이준호는 깨달았다.
이것이 멈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방이 다시 밝아졌다. 거울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문이 나타났다. 흰 문. 닫혀 있는 문. 그 문 위에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진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밴드가 풀렸다.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 발. 또 한 발. 발이 바닥을 딛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걸어갔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손잡이.
현실적이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은 질감.
이준호가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방이 있었다.
그 방에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의자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역광이 심했다. 역광 너머로 보이는 것은 실루엣뿐이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았다.
그것이 누구인지.
그것이 자신과 같은 형태의 존재라는 것을.
의자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보였다.
이준호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준호가 아니었다.
더 오래된 이준호. 더 피폐한 이준호. 더 깨어 있는 이준호.
그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기억하나?"
이준호는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정체성의 마지막 끈이었다.
그것을 놓으면 자신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의자의 사람이 웃음을 흘렸다.
"말할 수 없지? 그렇지. 넌 이름이 없거든."
이준호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정신병원의 침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목의 밴드는 여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밴드였다.
색깔이 달랐다.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름을 확인할 수 없음"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투명했다.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발걸음.
하지만 그것은 여러 명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같은 한 사람이.
여러 몸으로.
여러 목소리로.
동시에 걸어오고 있었다.
이준호는 마지막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엄지손가락.
그것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사라지는 순간, 이준호는 알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이름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누군가의 상상."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다음에는 침묵만 있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문이 열렸다.
여러 개의 발걸음이 들어왔다.
침대 주변을 둘러섰다.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이준호의 얼굴.
하지만 모두 다른 표정이었다.
하나는 웃고 있었다.
하나는 울고 있었다.
하나는 무표정이었다.
하나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준호를 내려다봤다.
"안녕."
모두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는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