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미로
새벽 4시 47분, 이준호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병원 입원실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그는 손을 들어올리려 했다. 단순한 움직임이었다.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는 것. 하지만 손가락은 자신의 신경 신호에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저 혼자 천천히,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다른 이가 그의 손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이준호는 손을 내려놨다.
기억이 맞지 않기 시작한 것은 어제였다. 아니, 어제가 맞나? 시간 감각이 흐릿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며칠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입원 기록을 보여줬고, 그 기록에는 분명히 5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준호의 기억 속에는 3일밖에 없었다.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가장 끔찍한 부분은 자신의 첫 범행을 기억하려 할 때였다.
박영미. 그 여자의 이름은 박영미였다. 명확했다. 하지만 그 여자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준호가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여자의 손이었다. 손목이 정말 가늘었고, 손가락에 물든 매니큐어가 벗겨지고 있었고—
아니다. 손톱이 깎여 있었다.
이미지가 변했다.
그 여자의 옷은? 검은색 원피스였다. 가슴팍에 흰색 자수가 있었다.
아니다. 흰색 셔츠였다. 소매가 걷혀 있었고, 팔뚝에 상처 자국이 있었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억이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붙잡으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는 침실 모서리에 설치된 거울을 바라봤다.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만 밝혀지는 복도 조명이 거울에 반사되어 자신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얼굴이 달라 보였다.
어제와 다른 얼굴이었다. 왼쪽 광대뼈가 더 튀어나와 보였다. 아니, 오른쪽이었나? 눈꼬리가 내려갔다. 아니, 올라갔다.
이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화장실에 가야 했다. 정신병원의 규칙은 엄격했다. 밤 10시 이후 독립적인 화장실 사용 금지. 간호사 호출 필수. 하지만 이준호는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입원실 문을 조용히 열었다. 복도는 침묵하고 있었다. 야간 간호사는 간호 스테이션에서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고, 그의 모습은 입원실 카메라 각도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복도를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의 거울은 더 컸다. 형광등 아래에서 자신의 얼굴이 명확하게 비쳤다. 이준호는 거울을 직시했다.
처음 본 얼굴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더 젊았다. 아니, 더 늙었다. 눈썹이 다르게 자랐다. 눈의 초점이 이상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의 몸을 빌려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누구세요?"
거울 속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준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 속 남자는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거야."
거울 속 목소리는 이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았고, 더 거칠었다. 이준호가 입을 열기 전에 이미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이준호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래? 정말?"
거울 속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었는가? 아니면 비명인가? 이준호의 입술과 거울 속 입술이 어긋났다. 자신의 목소리와 거울 속 목소리가 겹쳤다. 한 박자 늦게.
이준호는 거울을 떠났다.
복도로 돌아온 그는 기록실의 방향으로 향했다.
정신병원의 기록실은 1층에 있었다. 의사실 옆, 잠금 장치가 달린 철문 너머. 이준호는 이곳에 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찾아야 했다.
그는 의료진 카드키를 훔쳤다. 며칠 전 누군가가 침대 옆에 두고 간 카드였다. 하지만 카드는 작동했다.
철문이 열렸다.
기록실의 형광등은 자동 센서로 작동했다. 밝음이 터졌고, 이준호의 눈이 휘어찬다. 파일 캐비닛이 벽을 따라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
'ㅇ' 카테고리를 찾았다.
"이준호"라고 적힌 폴더들이 보였다.
여러 개였다.
첫 번째 폴더. 표지에는 "이준호 (1984년생, 의사, 서울대 졸업)"라고 적혀 있었다. 파일을 열었다. 의료면허증 사본. 병원 입사 기록. 환자 치료 기록.
이준호는 치료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진료한 환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김민수. 박지영. 이혜진. 모두 친숙한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진료 내용은 달랐다.
'김민수 - 초진일 2024년 3월 15일. 진단: 조현병. 처방: 올란자핀 10mg'
이준호는 이 환자를 기억했다. 분명히 자신이 진료했다. 하지만 진단이 다였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김민수는 우울증 환자였다. 약물 처방도 달랐다. 세르트랄린이었다.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차이가 명확했다. 진단도 다르고, 약물도 다르고, 치료 기간도 다였다. 이것은 기억의 왜곡이 아니었다. 객관적인 모순이었다.
다음 기록을 읽었다.
'박지영 - 초진일 2024년 2월 22일. 진단: 불안장애. 처방: 프로프라놀롤 20mg'
이준호는 이 환자도 기억했다. 하지만 진단이 다였다. 자신의 기억에는 박지영이 강박장애 환자였다. 초진일도 3월 8일이었다. 한 달 이상 차이가 났다.
손이 떨렸다. 종이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인장이 찍혀 있고, 서명이 있고,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이것은 추상적인 기억의 왜곡이 아니었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모순이었다.
이준호는 다른 폴더들을 펼쳤다.
두 번째 폴더. "이준호 (1982년생, 건설 노동자, 고등학교 졸업)". 파일을 열었다. 건설 현장 안전 교육 이수증. 보험 가입 기록. 경찰 조사 기록. 폭력 사건 피의자. 약물 소유.
세 번째 폴더. "이준호 (1988년생, 심리치료사, 대학원 중퇴)".
네 번째 폴더. "이준호 (1979년생, 무직, 정신질환자)".
다섯 번째 폴더. "이준호 (1992년생, 학생, 현재 행방불명)".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다섯 개의 다른 이준호가 있었다. 각각 다른 생년월일, 다른 직업, 다른 기록을 가진 다섯 명의 이준호.
그는 모든 폴더를 들었다.
무게가 있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종이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종이에는 인장이 찍혀 있었고, 서명이 있었고,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
"뭘 찾고 계신가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돌아섰다. 30대 중반의 여성 간호사가 기록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놀라움이 아니라 동정이었다.
"저는... 제 기록을 확인하려고..."
"의사 선생님께 말씀하셔야 합니다. 환자분이 임의로 자신의 기록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환자분. 그 단어가 이준호를 무릎 꿇혔다.
"내가... 환자인가?"
간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준호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온기가 있었다. 간호사의 손은 따뜻했다. 그런데 그 따뜻함이 진짜인가? 아니면 이준호의 무의식이 그렇게 인식하도록 조종한 건가?
"침대로 돌아가시겠어요?"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로 돌아온 이준호는 오전 8시까지 깨어 있지 못했다. 의식이 흐릿해졌고, 어딘가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간호사가 수액에 무언가를 섞었을 것이다.
오전 9시, 첫 번째 의사가 들어왔다.
"이준호 씨, 저는 박준영 의사입니다. 정신과 전문의입니다."
박준영 의사는 50대 후반으로 보였다. 안경을 쓰고 있었고,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기록실을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준호는 입을 열려 했다. 말해야 했다. 자신의 기억과 기록이 다르다고, 다섯 명의 이준호가 있다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억에 혼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약물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박준영 의사는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주사기의 바늘이 정맥을 찾았다. 액체가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왔다.
"이 약은 당신의 신경을 안정시킬 것입니다."
"제 환자 기록이 제 기억과 다릅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의 목소리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증상입니다."
박준영 의사는 주사기를 빼냈다.
"당신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의료 기록이 객관적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갔다.
오전 11시, 두 번째 의사가 들어왔다.
"이준호 씨, 저는 김혜정 의사입니다. 신경생물학 전문의입니다."
김혜정 의사는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뇌파 검사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태블릿 화면을 보였다. 그래프와 수치가 가득 찼다. 뇌파의 진동이 표시되어 있었다. 정상인의 뇌파와 이준호의 뇌파가 나란히 표시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정신질환자와 다릅니다. 신경 전달 물질의 수치가 정상이고, 뇌 활동도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건강한 건가요?"
이준호의 목소리에 희망이 담겼다. 하지만 김혜정 의사의 다음 말이 그것을 꺾었다.
"신경생물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김혜정 의사는 태블릿을 기울였다. 다른 이미지가 나타났다. 뇌의 단면도였다. 특정 부위가 빨간색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다만 이곳을 보세요. 전두엽과 편도체 간의 신경 연결이 비정상적으로 강합니다. 이것은 기억 왜곡과 정체성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이준호는 앞으로 몸을 굽혔다. 의사의 말에 집중하려 했다. 뭔가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치료? 이것은 치료의 문제가 아닙니다."
김혜정 의사는 태블릿을 내렸다.
"이것은 설계입니다."
"설계?"
"당신의 뇌가 이렇게 설계되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 말이 이준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치료가 아니라 설계. 질병이 아니라 제작.
"누가... 그렇게 한 건가요?"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갔다.
오후 1시, 세 번째 의사가 들어왔다.
"이준호 씨, 저는 이상호 의사입니다. 해리성 정체성장애 전문가입니다."
이상호 의사는 60대 초반으로 보였고, 흰머리가 많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이준호를 바라봤다. 손에는 파일 하나를 들고 있었다.
"당신의 입원 의뢰서를 읽었습니다."
이상호 의사가 파일을 펼쳤다.
"의뢰인: 윤영호."
이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윤영호?"
"당신을 입원시킨 사람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이상호 의사는 침묵했다. 오래된 침묵이었다. 마치 이 침묵이 몇 년이나 지속되었다는 듯한, 그런 침묵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제 이름은 이준호입니다."
"그것은 이름입니다. 정체성이 아닙니다."
이상호 의사는 파일을 닫았다.
"당신은 여러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각각 다른 기억, 다른 신원, 다른 목적을 가진."
"그렇다면 제가 조종당하는 건가요?"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조종? 그건 아닙니다. 당신의 여러 인격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뭐가 되는 건가요? 다섯 명인가요? 한 명인가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포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입니다. 단지 분열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상호 의사는 일어났다.
"거울을 봐야 합니다. 거울 속 인물이 당신을 인정하면, 그것이 답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갔다.
오후 3시, 이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세 명의 의사, 세 가지 진단. 약물 치료. 신경생물학적 설계. 해리성 정체성장애.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마치 각각의 의사가 서로 다른 이준호를 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윤영호의 이름. 자신을 입원시킨 사람. 자신의 상사인가? 자신의 무엇인가?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야간 간호사에게 요청했다. "제 입원 전 기록을 보고 싶습니다. 입원 의뢰서를 포함해서."
간호사는 의아해했지만, 곧 파일을 가져왔다.
이준호는 서류를 읽었다.
입원 의뢰서. 의뢰인: 윤영호. 진단: "정신적 불안정성 및 기억 이상". 추천 치료: "장기 정신과 입원".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환자가 자신의 임상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치료진 신뢰도 저하. 격리 권장."
그 옆에는 손글씨 메모가 있었다. 윤영호의 서명 아래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가 깨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라."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격리. 정리. 그것은 무엇인가? 치료인가? 아니면 감금인가?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 7시. 창문은 강화 유리로 되어 있었고, 열리지 않았다.
오후 8시 30분, 저녁 약물 투여 시간이 되었다. 간호사가 약을 가져왔다. 흰색 알약 세 개. 이준호는 삼키려 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약을 집어 들 수 없었다. 손가락이 자신의 명령을 거부했다.
"약을 드셔야 합니다."
간호사가 손으로 약을 집어 이준호의 입에 넣었다. 이준호는 삼켰다. 목구멍이 타는 듯했다.
약이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의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침대의 천장이 흔들렸다. 아니, 이준호가 떠다니고 있었다. 신체가 무거워졌다. 팔다리가 납처럼 무거워졌다. 움직일 수 없었다. 약의 부작용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그를 조종하고 있는 건가?
밤 10시, 복도의 조명이 꺼졌다.
이준호는 침대에 누워 어둠 속을 바라봤다. 눈은 떠 있었지만 신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비된 상태였다. 신체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이가 그의 육체를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밤 11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탁탁탁.
이준호는 눈을 돌렸다. 창문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의 얼굴. 그의 얼굴. 하지만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더 날카로웠고, 더 차갑고, 더 사악했다.
탁탁탁.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이번엔 여성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도 이준호의 얼굴이었다.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 다만 더 늙어 있었다.
탁탁탁.
세 번째 얼굴. 나이 든 남자. 하지만 역시 이준호였다. 젊은 시절의 이준호.
창문이 여러 개의 이준호 얼굴로 가득 찼다. 각각 다른 나이, 다른 성별, 다른 표정. 하지만 모두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은 이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이준호를 심판하고 있었다.
마지막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너야."
목소리는 이준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마치 합창단이 같은 음을 내는 것처럼. 다섯 개의 목소리가 한 음절을 함께 발음하고 있었다.
"넌 우리 모두야."
창문의 손이 움직였다. 유리를 긁기 시작했다. 손톱이 아니라 뭔가 더 날카로운 것으로. 금속음이 났다. 손톱이 깨지고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 손은 계속 움직였다.
"이제 그것을 인정해."
현실이 갈라졌다.
이준호의 침대가 흔들렸다. 아니, 침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계가 흔들렸다. 벽이 신축했다. 천장이 내려왔다. 바닥이 솟아올랐다. 공간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침묵이 돌아왔다.
창문 너머의 얼굴들이 사라졌다.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둠이 일반적인 어둠으로 돌아왔다.
이준호는 숨을 쉬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신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약의 효과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은 진짜였나? 아니면 약의 부작용이었나?
침대 옆의 시계를 봤다. 밤 11시 47분.
13분이 지나갔다. 아니, 13시간이 지나갔는가? 시간이 무의미했다.
그 순간, 이준호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려 했다. 무의식의 투시. 이 상황의 진실을 꿰뚫어야 했다. 창밖에 있던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다.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의 능력이 발동되기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능력이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준호는 눈을 떴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조종하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자신의 신체였다. 다른 무언가가 아니었다.
능력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 순간, 병실의 문이 열렸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이준호는 그 얼굴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었다.
"거울을 봤나?"
남자가 물었다. 목소리는 이준호의 목소리였지만, 더 단호했다.
"거울 속 인물이 당신을 인정했나?"
이준호는 입을 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신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비된 상태에서 이 남자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이상호 의사의 웃음이 아니었다. 더 깊었고, 더 오래되었고, 더 사악했다.
"나는 이상호 의사가 아니다."
남자가 말했다.
"나는 윤영호다. 당신 속에 있던 나다. 이제 나가기로 했다."
이준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이 자신의 명령을 거부했다. 능력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무력했다.
"당신은 다섯 명이 아니다. 당신은 하나다. 단지 다섯 개의 기억을 가진 하나일 뿐이다."
윤영호는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들을 만든 자다."
병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또 다른 남자들이 들어왔다. 모두 흰 가운을 입고 있었고,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준호의 얼굴.
"이제 시작이다."
윤영호가 말했다.
"당신이 누구인지 배우는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