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 포르쉐의 시간
회색 포르쉐는 강북 산업도로를 따라 내달렸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핸들을 움켜쥐고 있었고, 백미러 속 얼굴은 여전히 그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비웃고 있었다. 경찰의 사이렌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
신문실을 나간 것이 오후 3시. 차에 탄 것이 3시 47분. 대시보드의 시계는 오후 11시 2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사이 7시간이 없었다. 강남 경찰서에서 강북 산업도로까지는 20분 거리인데.
차가 폐공장 입구에서 멈췄다. 이준호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는데 차는 멈춰 있었다. 발이 페달 위에 없었다. 엔진음이 꺼졌다.
문을 열고 나갔다.
폐공장 내부는 어둠이었다. 창문은 모두 검은 테이프로 막혀 있었고, 바닥에는 녹이 슨 기계 부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금속 냄새가 났다. 어딘가 익숙한 장소였다.
발소리가 났다. 뒤에서.
이준호가 돌아섰을 때 남자가 서 있었다.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눈썹, 같은 콧대, 같은 입술의 모양. 하지만 다했다. 이 남자의 얼굴은 더 깊은 주름으로 파여 있었고, 왼쪽 관자놀이에는 길게 흉터가 가로질러 있었다. 눈빛은 차갑고 명확했다. 마치 수십 년을 같은 것만 봐온 사람의 눈이었다.
"당신을 찾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이준호와 비슷했지만 더 낮고 무거웠다.
"누구야?"
이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봤지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남자의 무의식은 검은 벽처럼 닫혀 있었다.
"이재훈이다. 이름은 의미 없어. 나는 너의 미래 버전이야."
남자가 한 발 다가섰다. 이준호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당신의 기억들이 조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리고 그것이 나의 작업이라는 것도?"
침묵이 폐공장을 채웠다. 자신의 의심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느껴온 모든 어긋남, 모든 불일치, 모든 거울 속 낯선 얼굴—전부 현실이었다.
"박영미는? 한지은은? 내가 한 일들은?"
이준호가 물었다.
이재훈이 웃었다. 웃음은 이준호의 웃음과 같은 리듬이었지만 감정이 없었다. 기계가 웃음소리를 재생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한 일? 그게 뭐지? 당신이 정말 한 일인가? 아니면 내가 당신에게 기억하게 한 일인가?"
폐공장의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준호의 눈이 움직였다. 벽은 그대로였고, 이재훈의 몸은 세 개가 되어 있었다. 어떤 것이 진짜인가.
"현실을 확인하려고 해봐도 소용없어. 당신의 신경계가 이미 내 손에 있거든."
이재훈이 손을 들어올렸다. 이준호의 팔이 그에 맞춰 들어올려졌다. 이준호가 팔을 내리려고 해봤지만 팔은 들려 있었다.
"내 능력으로 저항할 수 있어."
"당신의 능력? 당신은 지금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가?"
이재훈의 눈빛이 변했다. 그 순간, 이준호의 눈도 같은 색으로 변했다. 이재훈의 능력은 역방향이었다. 타인의 무의식을 조종할 때 자신의 기억이 손상되는 이준호의 능력을 역으로 사용하는 것. 이준호가 기억을 조작할수록, 이재훈은 그 기억의 흐름을 타고 이준호의 신경계에 침투했다. 능력이 능력을 먹어치우는 순간이었다.
폐공장이 흔들렸다. 천장의 철제 프레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준호는 몸을 날렸지만 프레임은 그를 따라갔다. 도망치려고 뛰어갔지만 바닥은 자꾸 뒤로 밀려났다.
세상이 흐릿해졌다.
---
을지로 208호 여관 침대. 천장에는 습기로 인한 물얼룩이 있었다.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이재훈이었다. 그는 이준호와 정확히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옆으로 누워서, 한쪽 팔을 배 위에 얹고, 다른 팔은 침대 가장자리에 늘어뜨려 있었다. 호흡도 같았다. 들숨 셋, 멈춤 하나, 날숨 넷.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깼나?"
이재훈이 눈을 떴다.
"우리는 하나야. 당신이 밤에 누군가를 죽일 때, 나는 낮에 당신의 진료실에서 웃고 있었어. 당신이 기억을 잃을 때, 나는 당신의 기억을 조종하고 있었어. 그리고 지금 당신이 깰 때, 나는 당신의 눈으로 보고 있어."
이재훈이 손을 들었다. 이준호의 손도 들려 있었다. 그들의 손이 만났다.
한 손이었다.
"당신은 누구야?"
이준호가 물었다.
"나는 너의 미래다. 10년 뒤의 너. 내가 너에게 한 일들을 당신도 할 거야. 그리고 10년 뒤에 너는 나처럼 될 거야. 그리고 그때 너도 너의 미래 버전을 만날 거야. 이건 끝나지 않아. 절대."
이준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만 계속 박동했다.
침대 위의 두 몸이 일어났다. 움직임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한 몸처럼.
창문 너머로 새벽빛이 들어왔다. 을지로의 골목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거울이 흔들렸다. 유리가 깨졌다. 산산조각난 거울 속에는 수백 개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모두 다른 표정으로.
을지로 208호의 거울이 바닥에 쏟아졌다. 파편들이 흩어지면서 각각이 작은 거울이 되었다. 이준호는 그 파편들 사이에 서 있었다.
"나가야 해."
그가 말했다.
"어디로?"
이재훈이 물었다. 명확하게 다른 톤이었다. 낮고, 차갑고, 금속성이었다.
"아무데나. 여기가 아닌 곳으로."
"여기가 아닌 곳은 없어. 당신의 무의식 안에서는 모든 곳이 같은 곳이야."
이재훈이 거울 파편을 밟았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이준호는 문으로 향했다. 손이 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열렸다.
복도는 어두웠다. 양쪽이 모두 거울이었다. 무한히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이 양쪽으로 뻗어 있었다.
"도망치지 마."
이재훈의 목소리가 뒤에서, 앞에서, 양쪽에서 들렸다.
이준호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 한 발, 한 발.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1층의 여관 프론트 데스크는 비어 있었다. 의자만 있었다. 누군가가 방금 떠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당신은 여기 있을 때부터 이미 갇혀 있었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나를 찾아왔어?"
"당신을 완성하려고. 당신의 무의식이 자신을 완성하려고. 당신의 그림자가 당신을 파괴하려고. 모두가 같은 이유야."
여관 밖이었다. 을지로의 밤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시간은 새벽 4시 47분. 시계가 움직이지 않았다.
골목 너머에서 차 엔진음이 났다. 경찰차였다. 그 다음 또 다른 차의 엔진음. 수십 대의 차가 을지로를 포위하고 있었다. 아니, 한 대의 차가 수십 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준호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리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골목의 끝에는 폐공장이 있었다. 벽에는 낙서가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반복되어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만나야 해."
이재훈이 옆에 있었다.
"누구와?"
"한지은과. 당신의 환자와. 당신이 조종했던 그 여자와."
폐공장의 문이 열렸다. 의자에 앉은 여자가 있었다. 한지은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러 개였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다른 표정으로 바뀌었다. 슬픔. 분노. 공포. 무표정.
"의사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하나였지만 입술의 움직임은 여러 개였다.
"당신은 나를 조종했어요."
표정이 바뀌었다. 웃음에서 분노로.
"당신은 내 기억을 지웠어요. 내 정체성을 부수셨어요."
다시 무표정으로.
"그리고 이제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당한 일을 당해야 해요."
이준호는 한지은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너를 조종하지 않았어. 나는 단지 치료했을 뿐이야."
그가 말했다. 거짓이었다. 자신이 그녀를 조종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짓이야.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한지은의 다른 인격이 말했다. 목소리는 거칠었다.
"당신은 우리 중 하나였어요. 우리를 부수려던 그 손가락."
"나는 의사야."
"아니에요. 당신은 거울이에요. 자신을 비추는 거울. 자신을 조종하는 그림자. 그리고 지금 당신이 우리처럼 되어가고 있어요."
이준호는 뒤로 물러났다. 이재훈이 앞을 막았다. 앞으로 나갔다. 한지은이 앞을 막았다. 양옆을 봤다. 거울이었다.
"내가 너를 조종하지 않았다면, 누가 너를 조종했어?"
그가 물었다.
한지은의 모든 얼굴이 동시에 말했다.
"당신이요."
그 순간, 이준호의 손이 들려졌다. 누군가의 의지였다. 손이 한지은을 향했다. 손가락이 펼쳐졌다. 그리고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빛이었다. 에너지였다. 이재훈의 역방향 능력이 이준호의 신경계를 타고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한지은의 눈이 텅 비었다. 입이 열렸다.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이게 뭐야?"
이준호가 소리쳤다.
"당신의 능력이 역으로 작동하는 거야."
이재훈이 말했다. 그의 손이 이준호의 손에 닿았다. 이미 닿아 있었다. 분리되지 않는 손이었다.
"당신이 한지은을 조종했듯이, 당신도 조종당해. 당신이 한지은의 기억을 지웠듯이, 당신의 기억도 지워져. 당신이 한지은을 부수려 했듯이, 당신도 부서져."
이준호는 자신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봤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계속 움직였다. 한지은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멈춰."
그가 말했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멈춰!"
더 큰 목소리였다. 여전히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폐공장의 벽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그 먼지 속에서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박민재였다. 아니, 박민재의 시체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열려 있었다. 죽어 있으면서도 보고 있었다. 이준호는 박민재를 죽였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조작된 것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넌 누구야?"
박민재가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였다. 죽어 있으면서도.
"난... 난 모르겠어!"
이준호가 소리쳤다.
"넌 나야. 난 너야. 우리 둘 다 누군가의 환상일 수도 있어."
박민재가 가까워졌다. 손이 이준호의 얼굴에 닿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죽은 손이었다.
"이제 깨어나."
모든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한지은의 목소리, 이재훈의 목소리, 박민재의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
---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회색 포르쉐 안. 운전석. 엔진은 꺼져 있었다. 시간은 오전 7시 23분. 차는 경찰청 정문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손은 핸들을 잡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경찰청 신문실. 김수진 팀장이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을지로 208호의 CCTV 영상이 재생 중이었다.
화면에는 두 명의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같은 얼굴. 다른 옷. 한 명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한 명은 서 있었다.
그 순간, 서 있던 남자가 누워 있던 남자 위에 누웠다.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영상의 타임스탬프가 깜빡였다. 3시간 24분이 건너뛰어져 있었다.
영상이 끝났다. 김수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이준호는 차 밖으로 나갔다. 경찰청 정문으로 들어갔다. 누군가가 그를 막지 않았다.
신문실에 들어갔다.
김수진이 있었다. 그녀의 눈이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표정이 바뀌었다. 공포였다.
"당신... 당신은?"
그녀가 물었다.
이준호는 답하려 했다. 입을 열었다. 이재훈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 자신의 목소리였다. 아니, 둘 다였다.
"나는..."
말이 끝나지 않았다. 거울이 깨지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신문실의 거울이. 모든 것이 거울이었고, 모든 거울이 동시에 깨졌다.
파편들이 떨어지면서 각각이 작은 거울이 되었다. 그 속에는 수백 개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이준호는 떨어지는 파편들 사이에서 자신의 손을 봤다. 그 손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손이 이재훈의 손과 겹쳐 보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어느 손인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