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새벽 네 시

신청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의사선생님, 죄송한데... 이상해요. 뭔가 이상한데..."

이준호는 차 안에서 핸들을 움켜쥐고 있었다. 신청은 자신의 환자였다. 불면증과 사회불안증으로 석 달을 치료받은 삼십 대 중반의 여성. 지난 밤 진료실에서 이준호는 그녀의 무의식에 닿으려 했다. 깊숙이.

"어디세요? 지금 어디세요?"

"강남역... 근처. 가는 길인데 왜 이렇게... 자꾸만 방향이..."

신청은 이미 자신의 암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어야 했다. 한강대교 아래 폐건물로. 그곳에서 자신이 준비한 끈으로. 박영미처럼. 정확하게.

그런데.

이준호의 손가락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마치 누군가가 신경을 하나하나 끊어내는 것처럼.

"의사선생님?"

신청의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이상하게도 더 명확하게. 마치 약속된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처럼.

"네, 여기 있어요. 근데 왜... 왜 자꾸 이 길이 이상해?"

이준호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차 앞유리에 맺힌 이슬처럼. 아니,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눈이 흐려지는 것이었다. 투명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들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것은 능력의 부작용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었다. 자신이 환자들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신청씨. 계속 가세요. 그냥... 계속."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움직였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귀에서 떨어뜨렸다.

그 순간, 신청의 비명.

"누가... 누구세요?!"

그리고 끊어진 통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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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는 운전석에서 몸을 날렸다. 엔진을 끄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시 걸었다. 응답이 없었다. 다시. 또 다시. 신청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강남역 근처. 신청은 거기 있었다.

이준호는 차를 시동 걸고 출발했다. 도로는 혼란스러웠다. 신호등이 모두 초록색으로 보였다가 빨간색으로 보였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이상했다. 차량들이 움직이지 않거나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

결국 강남역에 도착했을 때, 경찰차가 이미 세 대 서 있었다.

이준호는 차를 세우지 않고 통과했다. 목 뒤의 근육이 경직됐다. 손가락들이 여전히 마비된 채였다. 이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능력이 역으로 작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인가?

거울을 봐야 했다. 자신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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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 여관

여관은 을지로 뒷골목에 있었다. 이준호는 현금으로 방을 얻었다. 주인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방 208호. 낡은 벽지, 곰팡이 냄새, 침대 위의 얼룩.

그리고 거울.

이준호는 거울 앞에 섰다. 손을 올렸다. 얼굴을 만졌다. 손이 거울을 통과했다.

거울이 아니었다. 창문이었다.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안녕, 이준호."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정확히 같은 음색, 같은 톤, 같은 억양.

"난 이재훈이고, 넌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고 했지. 기억해?"

이준호는 한 발 물러섰다. 그 무언가가 창문 너머에서 웃음을 흘렸다. 자신과 정확히 같은 각도로.

"넌 지금 뭐가 됐는지 아니? 넌 이제 나야."

손이 창문을 통해 뻗어 나왔다. 이준호의 손과 정확히 같은 손. 같은 흉터. 같은 손톱. 그 손이 자신의 얼굴을 잡았다.

온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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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일곱 시, 경찰청 강력팀 사무실

김수진은 신청의 진술을 듣고 있었다. 신청은 응급실 침대에서 신경과 검사를 받은 상태였다. 목에 벗겨진 피부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가 목을 조른 흔적이었다.

"의사라고 했어요? 정신과?"

신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아파서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준호라고... 강남에서 진료를..."

김수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팀장실로 들어갔다. 모니터를 켰다. 강남역 CCTV 영상. 22시 15분부터 23시 47분까지. 다섯 대의 차량이 해당 지역을 지나갔다. 하나는 회색 포르쉐. 번호판 확인.

등록자: 이준호.

그녀는 라디오를 집어 들었다.

"전국 경보. 용의자 이준호, 남성, 삼십 팔세, 강남구 신사동 거주. 정신과 의사. 살인 미수 혐의. 회색 포르쉐 추적 중."

---

이준호는 여관 방에서 자신의 모든 기억을 뒤지고 있었다.

박영미. 여자. 불면증. 자신이 조종했고, 그녀는 죽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검은 머리였나? 갈색 머리였나? 키는 어느 정도였나? 기억 속에서 그 여자의 형태가 흐릿해졌다. 마치 누군가 다른 손으로 그 기억을 지워버린 것처럼.

실제로 박영미라는 이름을 떠올리기조차 힘들었다. 그 이름이 자신의 기억에 속한 건지, 아니면 누군가 심어준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한지은. 해리성 정체성장애. 다중인격. 자신이 조종했다. 그녀를 더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선명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이 겹쳐 보였다. 누구의 기억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강북의 폐건물. 그곳에서 몇 명을 더 했다. 아니다. 정말 했던가? 기억 속에는 시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체들의 얼굴이 모두 자신의 얼굴이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다시 마비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발가락부터.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알려지지 않은 번호.

"여보세요?"

"안녕, 이준호. 난 이재훈이야."

음성은 명확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 멀리서. 하지만 동시에 가까이서.

"넌 지금 여관 208호에 있지? 내가 보고 있거든."

"누구야? 정말 누구야?"

"넌 알아. 거울을 봐. 거울에 너한테 물어봐."

이준호는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표정이 달랐다. 눈빛이 달랐다. 입가의 웃음이 달랐다.

"넌 박영미를 죽였어? 정말?"

거울 속의 것이 말했다. 하지만 이준호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다. 정말 아니다."

그러자 거울 속의 것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넌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난 했지만."

경찰 사이렌이 여관 앞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준호는 창문으로 나갔다. 빗물로 젖은 지붕. 을지로의 야간 조명. 그리고 아래.

아래에서 누군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 정확히 같은 얼굴이었다.

"안녕, 이준호. 이제 넌 나가 되는 거야. 나는 이제 너가 될 거고."

이준호는 몸을 날렸다.

그런데 땅에 닿지 않았다. 공중에서 멈췄다.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손.

"이제 들어와. 들어와."

그리고 어둠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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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여덟 시, 경찰청 강력팀 사무실

김수진은 을지로 여관의 CCTV 영상을 보고 있었다. 23시 42분. 회색 포르쉐가 도착. 24시 03분. 경찰차 도착. 24시 07분. 용의자 추적 시작. 24시 12분. 지붕에서의 추락.

하지만 시체가 없었다.

지붕 위에는 피만 있었다. 많은 피. 그리고 발자국. 두 사람의 발자국. 같은 크기. 같은 패턴. 하지만 방향이 다르다. 올라온 발자국과 내려간 발자국.

"팀장님."

후배 경찰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용의자의 병원 진료 기록을 다시 확인했어요. 9월 15일... 3개 지역에서 동시에 진료한 기록이 있습니다. 강남 클리닉, 서초구 상담실, 그리고 강북 정신건강센터."

김수진의 눈이 좁혀졌다. 한 사람이 동시에 세 곳에 있을 수 없다. 불가능한 시간대. 불가능한 거리. 그런데 기록은 명확했다. 진료 시간. 환자 서명. 진료 수가 청구까지 모두 일치했다.

직관이 울렸다. 논리가 거부했다. 그 사이의 간극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후배가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CCTV 스틸컷들이었다. 같은 병원 로비에서 촬영된 이미지들. 날짜별로 정렬되어 있었다.

"지난 한 달간의 용의자 영상을 분석한 결과, 체격과 키, 심지어 얼굴 구조까지 미세하게 달라져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맞나요?"

"같은 이름으로 등록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후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화면에는 다섯 개의 이준호가 있었다. 모두 다른 얼굴. 모두 같은 이름. 9월 15일. 9월 18일. 9월 22일. 10월 1일. 10월 5일.

시간이 지날수록 변한다. 얼굴이 변한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점진적으로 교체되고 있는 것처럼.

김수진은 화면에 손을 가져갔다. 터치펜으로 첫 번째와 마지막 사진의 얼굴을 비교했다. 코의 높이가 다르다. 눈썹의 각도가 다르다. 턱선이 다르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이다. 성형수술을 받았다 해도 이렇게 변하지는 않는다.

"팀장님, 이건..."

"잠깐."

김수진이 손을 들었다. 그녀의 눈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10월 5일의 이미지. 가장 최근의 사진. 그 사진 속의 남자는 이전의 이준호와 완전히 달랐다. 더 젊어 보였다. 더 차갑고 정제된 표정이었다.

"이 날짜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환자 상담 기록이 있습니다. 환자 한지은, 14시 30분. 그리고..."

후배가 노트를 넘겼다.

"그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16시 45분. 자해 시도. 손목 절단. 응급 봉합 수술 받았습니다."

패턴이 보였다. 모든 사건의 전후에 있는 패턴. 이준호의 진료 기록. 그 직후의 사건. 자살. 자해. 그리고 기억의 불일치. 김수진의 입술이 일직선이 됐다.

"한지은이 뭐라고 했어요?"

"상담 중에 의사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료 기록에는 '환자의 해리성 정체성장애 악화로 인한 혼동'이라고 진단됐습니다."

김수진은 일어났다. 창문을 통해 서울의 아침이 보였다. 강남의 고급 빌딩들. 병원 간판들. 그 어딘가에 이준호가 있을 것이다. 아니, 이준호들이.

핸드폰이 울렸다. 내부 통화였다. 강력팀장.

"김 팀장, 을지로 여관에서 추가 증거가 나왔다. 지붕 위에서 발견된 혈액 샘플이 두 가지다. 혈액형이 다르다."

김수진의 손이 경직됐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그것만이 아니다. DNA 분석 결과... 혈액 샘플 중 하나는 이준호 본인의 DNA와 일치한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팀장이 숨을 들었다.

"...이준호의 DNA와 99.9% 일치한다. 쌍둥이거나, 아니면..."

"아니면?"

"...같은 사람의 다른 시간대 세포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다."

통화가 끝났다. 김수진은 을지로 여관의 CCTV 영상을 다시 봤다. 지붕 위의 발자국. 두 개. 올라온 발자국과 내려간 발자국. 발사이즈는 같다. 패턴도 같다. 하지만 방향이 다르다.

누군가 올라왔다. 누군가 내려갔다.

그런데 발자국은 하나의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수진은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노트북을 열었다. 지난 한 달간의 이준호 행동 기록을 시간 단위로 정렬했다. 9월 15일. 14시 30분 강남 클리닉 진료. 16시 45분 서초구 상담실 진료. 19시 20분 강북 정신건강센터 진료.

세 곳의 거리. 강남에서 서초까지 차로 15분. 서초에서 강북까지 40분. 강북에서 강남까지 50분.

총 105분 안에 세 곳의 진료를 끝내고, 각각 환자의 진료 기록을 작성했다.

불가능하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차를 여러 대 사용한다면?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김수진은 환자들의 증언을 다시 읽었다. 모두 같은 내용. '의사 선생님이 저를 봤을 때, 마치 제 마음을 다 읽는 것 같았어요.' '저는 무엇을 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는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 이후로 제 기억이 자꾸 바뀌어요.'

기억이 바뀐다. 모든 환자들이 같은 증상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준호 자신도.

김수진은 을지로 여관 현장에서 수거한 증거물 목록을 봤다. 여관방 침대 위에는 일기장이 있었다고 했다. 경찰이 압수했고, 필적 감정을 위해 보관 중이었다.

"이 일기장, 꺼내줄 수 있어요?"

후배 경찰이 증거실에서 일기장을 가져왔다. 검은색 가죽 표지. 페이지는 100여 장. 그 중 절반이 채워져 있었다.

김수진은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9월 1일. 오늘 박영미를 봤다. 약한 정신이었다. 쉬웠다.'

'9월 8일. 한지은의 기억을 다시 조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완벽하다.'

'9월 15일. 세 곳에서 진료했다. 모두 성공했다. 내 능력은 여전히 강하다.'

하지만 그 다음 페이지부터 변했다. 필체가 달라졌다.

'9월 20일. 나는 누구인가? 기억이 자꾸 섞인다. 내가 한 일이 맞는가?'

'9월 25일.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다. 누군가 나를 바꾸고 있는 건가?'

'10월 2일. 나는 이준호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10월 5일. 더 이상 모르겠다. 나와 내가 다르다. 같은 몸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있다. 우리.'

마지막 페이지의 글씨는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펜이 종이를 뚫은 흔적도 있었다.

'그가 온다. 그가 온다. 그가 온다. 그가 온다.'

같은 문장이 반복되어 있었다. 수십 번.

김수진은 일기장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이것은 정신질환의 기록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체성의 붕괴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공포.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경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내부 통화였다. 경찰청 출입구.

"팀장님, 용의자가 나타났습니다. 자수했습니다."

김수진은 일어섰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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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입구

경찰청 출입구에는 회색 포르쉐가 정문에 멈춰 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렸다.

남자가 나왔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차분했다. 차갑고 정제된 표정이었다.

이준호.

아니다.

다른 이준호.

그는 자신의 손을 경찰에게 내밀었다.

"나를 속박해 줄 수 있겠습니까?"

목소리가 이상했다. 깊고 정제된 음성이었다. 이전의 이준호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이름이?"

"이준호입니다. 당신들이 찾는 사람입니다."

김수진이 1층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미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CCTV 영상에서 본 가장 최근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더 강해 보였다. 더 위험해 보였다.

"을지로 여관은 당신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거기서 뭘 했어요?"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아주 짧은 웃음.

"내 다른 쪽을 만났습니다."

"다른 쪽?"

"나 말입니다. 또 다른 나. 그는 절단신공으로 나를 조종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가 됐습니다."

경찰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질환자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김수진의 눈은 달랐다. 그녀는 남자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미쳐 보이는 광기가 아니라,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

"당신이 박영미를 죽였습니까?"

"박영미? 누구 말입니까?"

"당신이 조종해 자살하게 만든 환자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처음 듣는 이름인 것처럼.

"나는 박영미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그 이름은..."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

"...내 다른 쪽의 기억인 것 같습니다."

"당신 말은,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살인을 저질렀다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그 다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입이 움직이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목을 죄고 있는 것처럼.

그의 눈이 김수진을 바라봤다. 도움을 청하는 눈이 아니었다. 경고하는 눈이었다.

"그가... 온다."

그 순간, 경찰청 건물의 모든 모니터가 꺼졌다.

정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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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

어둠 속에서 경찰들이 손전등을 켰다. 남자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김수진이 손전등을 들었다.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눈이 감겨 있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이준호?"

대답이 없었다.

"이준호!"

경찰이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다. 남자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경찰이 받아냈다.

"의무실! 의료팀 호출!"

혼란이 시작됐다. 경찰들이 남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의무실 방향으로.

김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전등은 여전히 남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눈이 감겨 있지만,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빠르게. 양쪽 눈동자가 반대 방향으로.

마치 두 개의 의식이 한 몸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경찰청의 조명이 돌아왔다. 정전은 2분 53초 동안만 지속됐다.

그 사이에 경찰청 1층 로비의 CCTV는 먹통이었다.

정전이 풀린 후, 출입구 카메라만 다시 작동했다.

화면에는 회색 포르쉐가 정문에 멈춰 있었다. 운전석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정확히 같은 얼굴.

하나는 핸들을 잡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창문 밖으로 몸을 빼내고 있었다. 마치 빠져나가려 하는 것처럼.

차가 움직였다.

경찰들이 뛰어나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포르쉐는 강남대로로 빠져나갔다.

김수진은 CCTV 영상을 계속 봤다. 차 안의 두 남자. 한 명은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다른 한 명은 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이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그리고 그 손은 투명했다. 햇빛이 통과했다. 손의 형태는 보였지만, 실체는 없었다.

거울상이었다. 거울 속에만 존재하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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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격

차가 강남대로를 달릴 때, 각 지점의 CCTV는 서로 다른 장면을 기록했다.

강남역 사거리에서는 회색 포르쉐 한 대가 남쪽으로 향했다.

강남대로 중간에서는 같은 포르쉐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테헤란로 입구에서는 같은 포르쉐가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모두 같은 시간. 모두 같은 번호판. 모두 다른 방향.

경찰이 추격했지만, 차는 마치 공기처럼 분산됐다. 강남역 사거리에서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모니터에는 세 대의 포르쉐가 나타났다.

모두 같은 차. 모두 같은 번호판. 모두 다른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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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무실

경찰청으로 돌아온 김수진은 의무실로 향했다. 의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만 남아 있었다.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의사가 다가왔다.

"남자가?"

"깨어났습니다. 30분 전에."

"지금 어디에?"

"자기 발로 나갔습니다. 우리가 말릴 수 없었습니다."

"왜?"

의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은 두렵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명령했습니다. 모두가 그를 놔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마자..."

"자마자?"

"우리가 깨어났습니다. 마치 최면에서 풀려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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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력팀 사무실

김수진은 강력팀 사무실로 돌아갔다. 모니터들이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서울 전역의 CCTV. 강남의 클리닉. 강북의 여관. 강서의 지하철역.

모든 화면에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정확히 같은 얼굴. 정확히 같은 시간. 다른 위치.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 여러 명이 아니라 한 명. 동시에 다른 곳에 있는 한 명.

김수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알려지지 않은 번호.

"여보세요?"

"안녕, 김수진."

남자의 목소리였다. 깊고 정제된 음성.

"당신은 절대 나를 잡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음성이 변했다. 다른 남자의 목소리.

"...나는 이미 여기 있으니까."

통화가 끝났다.

김수진은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니터만 켜져 있었다. 그리고 모니터 속 CCTV 영상에는, 자신의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정확히 이준호와 같은 형태로.

하지만 두 개였다.

한 명은 실체가 있었다. 다른 한 명은 투명했다.

실체가 있는 남자가 말했다.

"안녕, 김수진. 나는 이준호야. 진짜 이준호. 그리고 저 쪽은..."

투명한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사무실의 모든 스피커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나도 이준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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