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의료 학회장의 복도는 한낮의 햇빛이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공간이었다. 이준호는 학술 포럼을 빠져나와 사람이 적은 통로로 향했다. 세 시간 동안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참기만 했다. 어제 자택의 거울에서 본 그것—자신이 쓰지 않은 필체의 문장. '당신은 누구인가?' 그 질문이 자신의 뇌를 계속 파고들었다.

"이준호."

박민재가 복도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흰 셔츠 소매를 걷은 팔, 반쯤 열린 칼라. 동창이자 현재 같은 병원의 신경과 의사.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만날 때마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박민재."

"좋은 강의였지? 당신의 임상 성공률에 대한 논의가 많더라. 기적의 의사라고들 하던데." 박민재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실제로 당신의 환자들은 정말 특이해. 모두 당신을 신처럼 따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준호는 박민재의 얼굴을 읽으려 했다. 무의식 영역으로 침투하려 집중했다. 하지만 그 순간 뭔가 튕겨 나갔다. 마치 손을 뜨거운 물에 담갔을 때의 그것. 재빠르게 침투 시도를 멈추고 일상적인 대답을 뱉어냈다.

"공감입니다. 환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박민재는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진심으로 이해한다. 좋은 답변이야. 하지만 우리 둘 다 알지 않나. 의료계에서 성공은 공감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박민재가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그 손의 압력은 친근하면서도 단호했다. "따로 만나지 않을까? 오늘 저녁."

"내일은 어떨까."

"오늘이 좋겠어. 강남 파크타워 앞의 카페. 여덟 시."

박민재는 이준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복도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움직임이 인사인지 위협인지 이준호는 판단할 수 없었다.

오후 여섯 시. 이준호는 진료실에 앉아 있었다. 환자는 없었다. 윤영호 원장이 지난 이틀간 신규 환자 예약을 모두 취소했기 때문이다. '조사 협조'라는 명목 아래 이준호의 외래 진료는 중단 상태였다. 책상 위에는 자신의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그 안의 페이지를 펼치자 익숙하지 않은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9월 15일. 넌 그날 뭘 했니? 정말로?'

'9월 18일. 너는 박영미를 죽였다. 아니, 나는 박영미를 죽였다. 우리는 박영미를 죽였다.'

'9월 21일. 당신은 누구인가?'

이준호는 일기장을 집어던졌다. 책장 위의 거울을 바라봤다. 그 속의 자신은 정상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눈동자의 색이 며칠 전보다 더 밝아졌다. 예전의 검은색이 아니라 갈색에 가까웠다. 혹은 자신이 너무 많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며 변화를 찾으려 하니, 없던 것도 보이는 게 아닐까.

전화가 울렸다. 박민재였다.

"조금 일찍 나올 수 있을까? 강남 파크타워 옥상. 일곱 시."

"왜 옥상으로 장소를 바꾸는가."

"더 사적이니까. 넌 사적인 대화를 좋아하지 않나?"

전화가 끊어졌다.

강남 파크타워의 옥상은 서울의 야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장소였다. 한강이 검은 띠처럼 흘러갔고, 강 너머 강북의 불빛들이 산처럼 솟아 있었다. 박민재는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준호가 알기로는.

"처음 담배를 피우나."

"처음이 아니야. 그냥 사람들 앞에서는 안 했을 뿐이지." 박민재가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뱉었다. "당신도 많은 것을 숨기지 않나. 사람들 앞에서는."

"모두가 그렇다."

"맞아. 하지만 당신은 다르다." 박민재가 이준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이 숨기는 것의 크기가 다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아냈다."

이준호의 호흡이 깊어졌다. 가슴 안에 뭔가가 차올랐다.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무엇을 알아냈는가."

"당신의 환자들의 뇌파 데이터를 구했어. 정신 건강 기록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박민재가 담배를 던졌다. 불이 꺼진 채 아래로 떨어졌다. "당신의 환자들은 모두 공통된 뇌파 패턴을 보여. 특히 대뇌 전두엽과 편도체 사이의 동기화. 그건 최면이나 심리 암시 수준에서는 불가능한 패턴이야."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아니다."

"증거? 나는 증거가 필요 없어." 박민재가 한 발 더 다가왔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함께 하고 싶어."

이준호는 박민재의 무의식으로 침투하려 했다. 이번에는 더 깊게, 더 강하게. 그의 숨겨진 욕망, 두려움, 약점을 모두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또다시 무언가가 튕겨 나왔다. 더 강하게. 이준호의 코에서 피가 났다. 한 방울, 두 방울. 코끝에서 턱으로.

"보이지? 당신은 나를 지배할 수 없다." 박민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당신처럼 타인을 조종하는 것을 배웠거든. 하지만 나는 그것을 당신처럼 쓰지 않아. 나는 더 똑똑하게 써."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과 같은 것. 아니, 당신보다 나은 것." 박민재가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에는 따뜻함이 없었다. "나와 함께하면, 우리는 이 도시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어. 의료계, 경찰, 언론. 모두."

이준호는 박민재의 손을 뿌리쳤다. 옥상의 바람이 불었다. 한강 너머의 불빛들이 흔들렸다.

"내 제안을 생각해봐. 그리고 당신이 이미 누군가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도."

박민재는 옥상을 떠났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준호는 난간에 기대어 서서 코의 피를 닦았다. 손가락이 빨갛게 물들었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는 것. 그리고 그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

밤 열한 시. 경찰청 심리분석팀. 김수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이준호 클리닉의 CCTV 영상이 떠 있었다. 재생, 일시정지, 재생. 같은 장면을 몇십 번 봤다. 9월 18일 오후 2시 35분. 이준호가 진료실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간다. 그 영상에서 그의 키는 179센티미터. 그런데 9월 15일 오전 11시의 영상에서 그의 키는 175센티미터였다. 같은 사람이 사흘 만에 4센티미터가 늘어날 수는 없다.

김수진은 영상을 멈추고 스크린샷을 저장했다. 그리고 그 다음 프레임을 켰다. 그 프레임에서 이준호의 얼굴은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카메라 각도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수진이 본 것은 각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같은 얼굴이었지만 다른 눈빛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강남 경찰서였다.

"팀장님, 강남 파크타워에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옥상에서 남성이 추락했다고."

"누구인가."

"신원 확인 중입니다. 다만 사건 현장에서 이준호 의사 이름이 적힌 명함이 발견되었습니다."

김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입 중인 사건들이 한 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선이 꼬이고, 매듭이 지어지고, 뭔가가 터져 나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밤 열시 오십팔분. 강남역 인근 오피스텔. 이준호는 자신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박민재와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경찰 신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휴대폰 뉴스로 봤다. 강남 파크타워. 추락. 신원 불명.

박민재가 죽었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이준호의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그 순간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이미 안에 있다는 것.

문을 밀었다. 거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두었는지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흔들렸다. 그리고 거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 사람이 돌아섰다.

이준호는 숨을 멈췄다. 그것은 자신이었다. 정확히 같은 얼굴. 같은 눈빛. 같은 키. 같은 옷. 심지어 같은 상처—코에서 흘렀던 피의 자국까지 같았다.

"안녕." 그 '자신'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이준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톤은 이준호가 낸 적 없는 낮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넌 날 찾아 헤맸지. 거울 속에서, 전화 속에서, 기억 속에서. 근데 이제 알겠지?"

"너는 누구인가."

"너야. 아니, 너는 나야. 우리 중 누가 진짜인지 궁금해?" 그것이 웃음을 흘렸다. "박민재가 말했잖아. 당신은 나를 지배할 수 없다고. 맞아. 왜냐하면 내가 너기 때문이야. 그리고 넌 이미 알고 있지. 박영미는 누가 죽였는지. 한지은을 조종한 게 누구인지. 9월 15일에 넌 정말 어디에 있었는지."

이준호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 '자신'은 한 발 앞으로 나아왔다. 거울이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것은 이미 거울 밖에 있었다.

"경찰이 올 거야. 곧. 그들은 박민재를 찾을 거고, 그를 찾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박민재는 옥상에서 떨어지지 않았거든. 넌 떨어졌어. 아니, 나는 떨어뜨렸어. 그리고 넌 여기 있고. 그게 문제야."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이 말하는 모든 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옥상에 있었다. 박민재와 함께. 그리고 박민재는—

"너는 누구인가." 이번에는 더 이상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절망적으로 반복되는 말이었다.

그것이 다시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이준호는 자신을 봤다. 자신의 모든 욕망, 모든 죄악, 모든 광기를 응축한 형태로. 그것이 이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 있었다. 이준호의 반지였다.

"오늘 밤 경찰이 올 때까지 우리는 함께여야 해. 우리는 하나니까. 같은 기억을 가진. 같은 죄를 가진. 같은 얼굴을 가진."

거실의 거울이 여전히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하나인지 둘인지 알 수 없는 형상으로.

# 욕망의 거울

의료학회 컨퍼런스 홀. 오후 3시 15분.

이준호는 패널 토론을 마친 직후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주제는 '난치성 정신질환의 치료 혁신'이었고, 그는 당연히 사례 발표자로 초대받았다. 한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임상 성공률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했다. 환자들의 회복률 87%, 재발률 9%, 자해 사건 제로. 청중들은 박수를 쳤다. 의료계의 동료들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다가왔다.

박민재. 같은 병원 신경과 의사. 대학 동창.

"훌륭한 발표였어." 박민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너의 환자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어. 모두들 너를 신처럼 따르더라."

"공감이 기본이지. 환자들의 감정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면 자연스럽게—"

"공감?" 박민재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이준호의 대답을 믿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넌 한지은 환자를 기억하나? 해리성 정체성장애 환자."

이준호의 손가락이 커피잔을 내려놨다. 박민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지은의 이름. 그 환자에 대해.

"그 환자가 우리 신경과에 왔었어. 잠깐, 한 달 전. 당신이 추천한 약물 요법에 대해 물었거든. 근데 흥미로운 건, 그 환자가 말한 거야. '의사님 말씀이 제 머릿속에 직접 들어오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지 않아도 움직여요. 제 기억이 자꾸 바뀌어요.'"

이준호는 박민재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에는 호기심과 탐욕이 뒤섞여 있었다.

"그건 전형적인 해리성 증상이야. 환자가 자신의 다중인격을 통합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착각이지."

"그럼 한지은 환자의 진료 기록을 봤나?" 박민재가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로비의 다른 의료인들이 지나갔다. 아무도 그들의 대화에 주목하지 않았다. "특정 날짜에 두 개의 다른 필체로 같은 진료 기록이 적혀 있어. 한 번은 너의 필체고, 한 번은 다른 누군가의 필체야."

"시스템 오류일 수도 있지."

"그럼 CCTV는?" 박민재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준호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박민재가 화면을 그의 눈 앞에 가져왔다. "9월 15일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 너는 진료실에 있었어. 근데 같은 시간에 강북 지역 CCTV에도 너처럼 생긴 사람이 찍혔어. 키도 비슷하고, 체형도 비슷하고, 입고 있는 옷도 비슷해."

이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넌 동시에 두 곳에 있었던 거야. 아니면 정확히 같은 사람이 두 명 있었던 거야." 박민재가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좀 더 창의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너한테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거야. 의료 기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 그리고 나는 그걸 알고 싶어." 박민재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따로 만날까? 오늘 밤. 자네 시간이 괜찮으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민재는 이미 답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밤 8시. 강남역 뒷골목의 조용한 바.

박민재는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위스키 잔 하나를 들고 있었다. 이준호가 앉자마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처럼 특별한 능력은 없어. 하지만 관찰력이 뛰어나지. 사람들을 보는 게 취미야. 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

"그리고?"

"그리고 난 너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넌 완벽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이상해. 환자들의 반응, 치료 결과, 진료 기록의 일관성. 모든 게 완벽하지만, 그 완벽함이 인위적인 거야. 마치 뭔가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완벽함처럼."

"내가 좋은 의사라는 뜻이군."

"좋은 의사? 넌 의사가 아니야. 넌 마술사야. 뭔가를 조종하는 사람이야." 박민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능력을 나한테 가르쳐 줄래? 아니, 가르쳐 줄 필요는 없어. 그냥 함께 일해 주면 돼. 너와 나. 우리는 의료계에서 무적이 될 거야. 어떤 환자든 치료할 수 있고, 어떤 진단도 조작할 수 있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이준호는 박민재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이성이 아니라 욕망만 담겨 있었다.

"거부할 거 같은데?" 박민재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너는 거부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난 이미 알아. 너의 집 주소, 너의 일상, 너의 외로운 저녁들. 넌 누구하고도 친하지 않아. 환자들과의 관계도 일방적이고. 그래서 넌 혼자야. 나는 그런 너를 도와주려고 해."

이준호가 능력을 사용하려 했다. 박민재의 무의식으로 침투하려 했다. 그 남자의 욕망을 읽고, 약점을 찾고, 조종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가 막혔다.

박민재의 무의식 영역이 마치 거울처럼 이준호의 침투를 반사했다. 능력이 돌아왔다. 이준호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코에서 피가 흘렀다.

박민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봤지? 넌 나한테 능력을 쓸 수 없어. 왜냐하면 난 너를 기대하고 있거든. 넌 나한테 통하지 않아."

"넌 뭐야?"

"넌 아직도 모르니?" 박민재가 테이블 위의 냅킨에 손을 닦았다. "나는 너를 관찰한 거야. 그리고 난 너의 약점을 찾았어. 그 약점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어. 넌 자신의 기억을 신뢰하지 못하지 않나? 자신이 뭘 했는지, 뭘 하고 있는지. 그게 나한테 기회를 줘."

이준호는 박민재를 봤다. 그 남자의 얼굴이 점점 모호해졌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처럼.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박민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밤 파크타워 옥상에서 뭔가 일이 생길 거야. 넌 거기 가야 해. 왜냐하면 넌 이미 가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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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58분. 이준호의 집.

그가 문을 열었을 때, 거실의 불이 이미 켜져 있었다. 커튼이 흔들렸다. 누군가가 창문을 열어두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이준호는 한 발 물러섰다. 그 형상이 돌아섰다.

정확히 같은 얼굴. 정확히 같은 눈. 정확히 같은 키. 정확히 같은 옷. 심지어 코에서 흘렀던 피의 자국까지.

"안녕." 그것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이준호의 목소리였지만, 톤은 다였다. 낮고, 부드럽고, 절대적이었다. "넌 날 찾아 헤맸지. 거울 속에서, 전화 속에서, 기억 속에서. 근데 이제 알겠지?"

"너는 누구인가."

"너야. 그리고 너는 나야. 우리 중 누가 진짜인지 궁금해?" 그것이 한 발 앞으로 나아왔다. "박민재가 말했잖아. 당신은 나를 지배할 수 없다고. 맞아. 왜냐하면 내가 너기 때문이야. 그리고 넌 이미 알고 있지. 박영미는 누가 죽였는지. 한지은을 조종한 게 누구인지. 9월 15일에 넌 정말 어디에 있었는지."

이준호가 다시 한 발 물러났다. 그것은 한 발 앞으로 나아왔다. 거울이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것은 이미 거울 밖에 있었다.

"경찰이 올 거야. 곧. 그들은 박민재를 찾을 거고, 그를 찾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박민재는 옥상에서 떨어지지 않았거든. 넌 떨어졌어. 아니, 나는 떨어뜨렸어. 그리고 넌 여기 있고. 그게 문제야."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말하는 모든 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옥상에 있었다. 박민재와 함께. 그리고 박민재는—

기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기억인지 그것의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너는 누구인가." 이번에는 더 이상 질문이 아니었다. 절망적으로 반복되는 말이었다.

그것이 다시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이준호는 자신을 봤다. 자신의 모든 욕망, 모든 죄악, 모든 광기를 응축한 형태로. 그것이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 있었다. 이준호의 반지였다.

"오늘 밤 경찰이 올 때까지 우리는 함께여야 해. 우리는 하나니까. 같은 기억을 가진. 같은 죄를 가진. 같은 얼굴을 가진."

거실의 거울이 여전히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하나인지 둘인지 알 수 없는 형상으로.

이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의 손과 만났을 때, 세상이 한 번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강남경찰서였다.

"이준호 의사님? 강남 파크타워 옥상에서 남성이 발견됐습니다. 신원은 박민재 의사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신의 명함이 현장에 있었는데..."

이준호는 수화기를 내려놨다. 거실 거울 앞에서 그것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정확히 같은 얼굴로. 정확히 같은 웃음으로.

"이제 시작이야."

그것이 말했다.

그 순간, 이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한 건 이미 일어난 일이 어떤 방향으로든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기억이든, 행동이든, 죄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이제 경찰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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