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퇴고본

병원 응급실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이준호는 대기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의 뉴스 앱을 내려 읽고 있었다.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심장이 작은 박자로 뛰었다.

**'강남역 부근 여성 시신 발견... 타살 가능성 수사 중'**

어제 밤 폐건물에서 박영미라고 부르던 여자는 자살했다. 이준호가 그녀의 무의식 깊숙이 들어가 심기를 조종했고,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깔끔했다.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뉴스는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타살의 가능성이 높다고 경찰은 발표했습니다. 피해자의 목에 타박상이 발견되었고...'

이준호의 눈이 움직였다. 타박상? 자살했는데 타박상이?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더 크게 확대했다. 뉴스 기사 아래 피해자의 사진이 떴다. 갈색 단발머리, 하늘색 원피스. 이준호는 그 사진을 본 순간 뭔가 어긋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그 여자가 검은 긴머리였다. 검은 긴머리가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화면에는 갈색 단발이 보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 미안합니다.'

누군가 이준호의 어깨에 부딪혔다. 간호사였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재빨리 내렸고, 침착한 얼굴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기억이 틀렸단 말인가? 아니면 뉴스가 잘못된 건가?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어차피 진료 시간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15층 정신과 클리닉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춘 엘리베이터 벽면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항상 침착한 자신의 얼굴이 있어야 했는데, 오늘따라 그 얼굴이 낯선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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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40분, 세 번째 환자가 들어왔다.

한지은. 해리성 정체성 장애로 진단받은 지 2년이 된 환자다. 이준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특별히 봤다. 그녀의 무의식이 너무나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층의 방어막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각각의 층마다 다른 인격이 숨어 있었다. 완벽한 장난감이었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준호는 항상 하던 대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눈빛은 진심으로 가득 찼다. 그것이 그의 재주였다.

한지은은 손가락을 비틀었다. "의사님, 제 기억이 자꾸 바뀌어요."

이준호의 펜이 멈췄다.

"어떤 식으로요?"

"어제는 분명히 다르게 기억했는데, 오늘 아침에 생각해보니 완전히 다른 거예요. 어제 제가 뭘 했는지 기억을 못 해요. 제 일기장에 써 있는 것도 제 필체인 것 같은데... 이상해요."

이준호의 호흡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의 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 움직임은 전과 달랐다. 기계적이었다.

"그것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당신의 여러 인격 중 하나가 어제의 기억을 만들었고, 다른 인격이 오늘 아침에 깨어났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준호는 자동으로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기억들이 바뀌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지은은 잠시 생각했다. "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그런 것들요. 의사님, 혹시... 누군가 제 기억을 조작하는 건 아닐까요?"

이준호는 펜을 놨다. 그의 손이 책상 위에서 떨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억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특히 당신처럼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가진 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준호의 말은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 여자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갔던 수십 번의 순간을 기억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녀의 욕망과 공포를 만지고, 조종했다. 그리고 매번 그녀의 기억을 덮어씌웠다. 완벽하게.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바뀐다고.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한다고.

이준호는 그녀의 무의식을 투시하려고 했다. 평소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도했다.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깊게 들어갔다.

그리고 본 것은 자신이었다.

그의 모습이 그녀의 무의식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다른 각도에서, 다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조종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 순간 이준호의 시야가 왜곡되었다. 한지은의 얼굴이 두 겹으로 보였다. 하나는 앞에 있고, 하나는 뒤에서 겹쳐 있었다. 음성이 들렸다. 한지은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음성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준호 자신의 목소리였다.

'깨어나. 이준호. 깨어나.'

이준호의 팔이 경직되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팔이 굳어갔다.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자신의 손이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펜이 책상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신체를 통해 말하고 있었다.

이준호는 투시를 끝냈다. 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호흡이 빨라졌다. 한지은의 얼굴을 다시 봤을 때, 그녀도 같은 공포로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무언가 다른 것이 그녀의 눈을 통해 이준호를 관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약물 치료로 증상을 관리했는데, 이번 달부터는 요법을 조정하겠습니다."

이준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몰랐다. 그냥 말을 멈췄다. 침묵이 상담실을 가득 채웠다.

"의사님?"

한지은이 물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컴퓨터를 켰다. 그녀의 상담 기록을 불러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멈췄다. 지금이 적절한 순간이 아니었다. 환자 앞에서 자신의 동요를 드러낼 수 없었다.

"처방약을 바꿔드리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상담은 끝났다. 한지은이 나가자, 이준호는 즉시 그녀의 기록을 열었다. 마우스를 움직여 지난 3개월간의 상담 기록을 스크롤했다.

그리고 멈췄다.

2024년 9월 15일, 상담 시간 14:00~15:30. 상담 내용: 해리성 정체성 장애 심화, 기억 편화 증상 악화, 인지행동 요법 시행...

이준호는 그날을 기억하려고 했다. 9월 15일. 그 날 자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자신은 매일 하는 일들을 대체로 잘 기억했다. 환자들, 환자들의 증상, 그리고 밤의 활동들. 하지만 9월 15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 자체가 흐릿했다. 그 날의 오후를 생각해보려 하면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 날의 일정표를 다시 확인했다. 14:00~15:30. 그 시간에 자신은 응급실에 있었다. 응급실 당직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떻게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컴퓨터 앞에서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이 떨렸다. 이번에는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 없었다. 손이 마우스를 쥔 채로 떨렸다.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미지의 번호였다. 어제와 같은 번호였다. 이준호는 주저했다. 하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숨을 쉬고 있었다. 이준호의 숨소리가 아닌 다른 숨소리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낯선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했다. 자신의 것과 유사한 톤, 유사한 리듬, 하지만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안녕, 나는 너야."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어? 기억을 더듬고 있지?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어. 그게 정말 슬프네."

"누구야?"

이준호가 겨우 말했다.

"나는 너라고 했잖아. 나는 너고, 너는 나고. 우린 같은 사람이야. 다만 너는 깨어 있고, 나는... 깨어나고 있는 거야."

통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진료실의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리고 무언가 다르게 보였다. 어제보다 더 다르게.

퇴근 시간, 이준호는 집으로 돌아갔다. 강남의 고급 아파트. 34층의 넓은 거실. 그곳에는 큰 거울이 여러 개 있었다. 이준호는 각각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비교했다.

거실 거울: 눈이 진하게 보인다. 호텔 거울: 눈이 밝아 보인다. 침실 거울: 눈이 어딘가 이상하게 보인다.

이준호는 자신의 일기장을 꺼냈다. 지난 한 달간의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9월 12일, 박영미 환자와의 상담. 효과적인 진행. 내일 최종 단계로...'

'9월 13일,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었다. 환자들과의 정기 상담만 진행.'

'9월 14일, 강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기억을 바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준호는 손글씨를 바라봤다. 9월 14일의 필체는 이상했다. 살짝 기울어진 각도, 일반적이지 않은 획의 강도.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그는 더 넘어갔다. 9월 15일, 16일, 17일...

기록이 끊어져 있었다. 빈 페이지가 있었다. 그리고 9월 18일에 다시 시작되었다.

'9월 18일, 요즘 이상한 일들이 많다. 내가 정말 나인가?'

이준호는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옆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그 순간, 거울 속의 자신의 손이 움직였다.

이준호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 속의 손은 계속 움직였다. 천천히. 거울 속의 손이 이준호의 손보다 늦게 움직였다. 아니,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마치 거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손인 것처럼. 손가락이 펼쳐졌다. 다시 구부러졌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 저항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손은 독립적으로 계속 움직였다.

거울 속의 자신이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야?"

음성이 들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자 목소리였다. 방금 통화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이준호는 거울에서 물러났다.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손을 내렸을 때, 거울은 이미 정상 상태였다. 자신의 얼굴만 비춰져 있었다. 창백하고, 경악한 표정의 자신.

이준호는 침대에 앉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가락을 펼쳤다. 떨리고 있었다. 통제 불능. 자신의 신체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 없이 움직였다.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원격으로 조종하는 인형처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미지의 번호. 어제와 오늘 두 통. 번호 추적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차단된 번호. 또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

그는 병원 전산실로 향했다. 의사라는 직책이 주는 권한이었다. 응급실 당직표를 직접 확인했다.

9월 15일, 14:00~18:00. 응급실 당직.

그런데 진료 기록을 보면 같은 시간에 상담실에서 환자 한지은과의 세션이 기록되어 있었다. 지속 시간: 90분. 기록자: 이준호.

불가능했다. 한 사람이 두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이준호는 기록을 다시 읽었다. 분명히 14:00부터 15:30까지 상담실에서의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당직표에도 같은 시간 응급실 근무가 표기되어 있었다. 이 모순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준호는 당직표의 서명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서명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서명이었다. 그런데 필체가 조금 달랐다. 9월 14일의 일기 필체처럼.

그는 한지은의 상담 기록을 열었다.

**[상담 기록 - 환자명: 한지은 / 날짜: 2024.09.15 / 담당의: 이준호]**

*환자는 오늘도 기억의 불일치를 호소했다. 어제는 분명히 다르게 기억했던 일들이 오늘 다시 생각해보니 완전히 다르다고 함.*

*환자의 무의식을 투시한 결과, 좌측 전두엽의 기억 영역에서 반복적인 신경 신호 교란이 감지되었다. 이는 외부의 심리적 조종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치료 방침: 지속적인 최면 유도를 통해 환자의 기억을 재구성하기로 결정.*

이준호는 이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외부의 심리적 조종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쓴 글이었다. 자신의 필체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 상담이 일어났을 때 자신은 응급실에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글을 썼는가? 누가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했는가?

컴퓨터 화면이 흔들렸다. 이준호의 눈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려 했다. 9월 15일 오후 2시. 자신이 응급실에 있었다는 기억. 그 기억을 구체적으로 되살리려 했다. 응급실의 냄새, 환자들의 소리, 간호사들의 목소리.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개만 있었다. 기억의 안개. 그 안개 속에서 자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그것도 이상했다.

병원을 나갔다. 복도의 조명이 너무 밝았다. 간호사들이 자신을 보고 인사했다. 자신은 인사를 돌려주지 못했다. 눈이 앞을 보지 못했다.

응급실로 향했다. 9월 15일의 당직 기록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응급실 간호사 최영미는 5년 이상 같은 자리에서 일해온 베테랑이었다.

당직표를 다시 들었다. 9월 15일 오후 2시 30분, 기록 옆에 작은 글씨로 '2시 30분 외출'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누군가의 서명. 최영미의 서명이었다.

이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렇다면 자신은 응급실에 있었다. 하지만 2시 30분에 나갔다. 그리고 언제 돌아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공백. 기억의 공백. 그 공백 속에서 자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누가 자신을 대신했는가? 누가 자신의 이름으로 상담을 진행했는가?

그는 최영미에게 물었다. "9월 15일 오후에 제가 외출했나요?"

최영미는 잠시 생각했다. "네, 맞습니다. 2시 30분쯤 나가셨어요. 그런데 돌아오신 시간이 정확하지 않네요. 제가 퇴근할 때 이미 계신 걸 봤는데..."

"정확히 몇 시에 돌아왔어요?"

"그건 기억이 안 나요. 그날따라 응급실이 바빴거든요."

이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병원을 나갔다. 밤 11시. 거리는 어둡고 비어 있었다. 강남의 고급 거리도 밤이면 이렇게 낯설어진다. 이준호는 걸었다. 목적지 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위해.

휴대폰이 울렸다. 미지의 번호가 아니었다. 병원 번호였다. 원장실이었다.

"이준호, 지금 와."

윤영호 원장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이준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밤 11시. 병원은 조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갔다. 원장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들어와."

이준호는 문을 열었다. 윤영호 원장은 자신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요즘 넌 뭔가 이상해. 진료 기록에 오류가 많아. 같은 시간에 두 곳에서 환자를 본 기록이 있다. 설명해봐."

이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그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지은이 오늘 응급실에 왔어. 자살 시도. 살아났지만, 그 여자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어. '의사님이 내 기억을 지우고 있다'고."

"그것은..."

"가만. 아직 안 끝났어. 경찰에서 연락이 왔어. 박영미라는 여자가 강북에서 발견됐어. 자살로 보이지만, 수사팀장이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 여자가 우리 병원 환자였다고 하네. 넌 그 환자를 봤니?"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술이 떨렸다.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이 메었다.

"대답해."

"네. 봤습니다."

"최근에?"

"네."

윤영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문으로 나가 서울의 야경을 바라봤다. 그의 뒷모습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긴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이준호는 자신의 숨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불규칙한 호흡. 통제 불능.

"넌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 이준호?"

"예?"

"내가 묻는 거야. 넌 정말 이준호니? 아니면 다른 누군가니?"

이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주머니에 집어넣어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했지만, 자신이 그곳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영호는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 보였다. 그 눈빛은 자신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아니, 자신의 눈빛이었다. 다른 얼굴에 박혀 있는 자신의 눈빛.

"나는 너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어. 너의 비밀을 말이야. 그리고 3개월 전부터 이재훈이 너의 환자들을 먼저 만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넌 그걸 눈치 채지 못했지. 하지만 지금 그것들이 드러나고 있어. 그리고 넌 더 이상 통제 가능하지 않아 보여."

"원장님..."

"가. 내일 진료를 쉬어. 그리고 한지은은 더 이상 보지 마. 내가 다른 의사한테 넘길 거야. 이건 우리 병원을 위한 결정이야. 넌 나한테 신뢰를 잃었어."

이준호는 원장실을 나왔다. 복도의 조명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의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려 저항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자신의 의지를 무시하고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 있었다. 거울로 된 벽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졌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속도로.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펴졌다. 다시 구부러졌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것처럼. 거울 속의 손은 현실의 손과 다른 리듬으로 움직였다. 조금 늦게. 조금 더 우아하게. 이준호는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 저항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손은 계속 움직였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휴대폰이 울렸다. 미지의 번호였다. 이번에는 남자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아니, 자신이 아닌 다른 자신의 목소리였다.

"안녕, 이준호. 나는 이재훈이야. 너는 3개월 전부터 날 복제했어.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나를 만들려고 했지. 하지만 봐라. 지금 누가 누구를 조종하고 있는지. 우린 곧 만날 거야. 그리고 그때 넌 깨달을 거야. 넌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통화가 끊겼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 11시의 병원 로비는 적막했다. 이준호는 밖으로 나갔다. 거울 속의 손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지 않으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서도 손가락이 움직였다.

거리는 어둡고 비어 있었다. 강남의 고급 거리도 밤이면 이렇게 낯설어진다. 그는 걸었다. 목적지 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위해.

그리고 거울 속에서 자신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움직임도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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