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의 갈등과 마을의 분열
제단의 기록은 여전히 소연의 손 위에서 떨고 있었다.
손가락부터 팔목까지 진행된 투명함은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덕순 할머니가 펼쳐 보인 문서 위로 소연의 손이 드리워졌을 때, 그 손은 종이를 통과할 것처럼 보였다. 150년 전의 기록. 이장 가의 아버지가 저지른 욕보임. 그로 인해 태어난 저주. 천오백 명이 죽었다는 기록.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소연이 물었다.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연의 손을 잡았고, 그 손은 할머니의 손을 통과했다.
당에서 나온 소연이 마을 입구에 닿을 무렵,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하루 종일 응혼의 결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신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팔 전체가 투명해지는 과정은 통증을 동반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신경이 죽어가는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유진은 마을 회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5년 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다. 당시 유진은 18세였고, 아버지는 야차의 저주로 마을 북쪽 숲에서 사라졌다.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유진만 남았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그는 매해 초하루를 버텨냈다. 누군가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울었고, 유진은 그것을 반복해서 보았다.
"소연을 잠깐 볼 수 있을까?"
유진의 목소리는 낮았다. 소연은 그를 따라 회관 뒤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대낮의 햇빛이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빛 속에서 유진의 눈이 빨갛게 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밤새 울었을 것이다.
"당신이 죽으면 야차도 사라질까?"
유진이 물었다.
소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응혼의 저주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검은 요괴를 베는 힘을 주지만, 그것이 곧 요괴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야차는 150년 전의 저주에서 태어났고, 마을 사람들의 죄책감으로 먹이를 삼았다. 소연이 죽는다고 해서 그 저주가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마을의 죄책감은 더 깊어질 것이다.
"모릅니다."
소연이 대답했다.
유진의 몸이 흔들렸다. 마치 그 대답이 물리적인 충격인 것처럼.
"그럼 당신이 죽을 이유가 없잖아.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마을이 지켜지지 않으면, 모든 게 의미 없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도 죽으려고 하는 건가?"
유진이 소연의 팔을 잡았다. 투명해진 손목을 조심스럽게. 마치 그것이 깨질 것 같이.
"당신은 왜 자꾸 죽으려고만 해? 죄책감을 속죄하려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당신의 죄책감만 사라진다는 건가?"
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가족도 당신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야차 때문에 죽었어. 하지만 당신이 죽으면 내 가족이 돌아올까? 아니잖아. 그럼 당신이 죽는 게 누구를 위한 건데?"
소연이 유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죽으면, 나는 또 누군가를 잃는 거야. 야차한테 잃는 게 아니라, 당신의 죄책감 때문에 잃는 거야. 당신이 죽음으로써 당신의 죄책감을 정리하려고 하면, 그 죄책감은 그대로 내 위에 떨어진다고. 알고 있어?"
유진이 소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미안해."
소연이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야."
유진이 소연의 다른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과 아직 살아있는 손. 그 사이에서 유진의 손이 떨렸다.
"당신의 죄책감도 나와 같다는 걸 알아? 당신도 나처럼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살고 있는 거야. 하지만 당신은 그 죄책감을 혼자 짊어지려고 해. 마치 그게 당신만의 것인 것처럼."
유진이 소연의 얼굴을 들었다.
"죄책감은 공유되는 거야. 당신이 혼자 죽음으로써 정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죄책감을 나누고 살아가는 거야. 그래야 그 죄책감이 야차처럼 괴물이 되지 않는 거고."
소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이 죽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
유진이 소연을 안았다. 투명한 팔이 유진의 등을 감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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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졌을 때, 유진은 마을 회관의 옆방으로 들어갔다. 기록실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나무 상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연도가 적혀 있었다. 100년 전. 120년 전. 150년 전.
유진의 손이 150년 전의 상자에 닿았다. 손가락이 나무 테를 따라 움직였다. 상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150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삐걱거리는 소리가 기록실 전체에 울렸다. 먼지가 일어났다. 유진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 안에는 문서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 먹으로 쓰인 글씨들. 150년의 시간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었다.
유진의 손이 첫 번째 문서에 닿았다. 마을의 호구 기록. 당시 마을에는 정확히 147가구가 있었다. 두 번째는 세금 기록. 세 번째는—
손이 멈췄다.
"야차의 첫 번째 희생자. 1874년 음력 초하루. 김 씨 가문의 장남. 나이 16세."
유진이 중얼거렸다. 그 아래로 더 이상의 기록이 있었다. 1875년. 1876년. 매해 초하루마다. 이름과 나이와 죽음의 방식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씩. 그다음에는 둘씩. 나중에는 일곱 명씩.
손가락이 종이의 결을 따라 움직였다. 한 장, 또 한 장. 150년의 죽음이 손끝을 지나갔다. 그러다가 마지막 문서에서 손이 멈췄다. 그것은 다른 필체로 쓰여 있었다. 더 최근의 글씨였다. 손떨림이 있었다.
"만약 이 기록을 읽는 자가 있다면, 알아라. 야차는 우리의 죄책감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한 가문의 것이 아니라, 이 마을 전체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150년 동안 그 진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대신 무녀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었다. 그것이 또 다른 죄이다. 이 악순환을 끝내려면, 우리가 함께 죄책감을 나누어야 한다. —덕순의 기록"
유진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할머니의 글씨였다. 얼마나 오래전에 쓰인 것일까. 유진은 문서를 다시 읽었다. 한 번, 또 한 번. 글씨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150년의 진실을. 그리고 그것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유진의 눈빛이 변했다. 할머니의 글씨를 따라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치 그 글씨 속에 담긴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것처럼.
"죄책감은 혼자서는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이 괴물이 된다."
유진이 중얼거렸다. 할머니의 말이 자신의 말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그 죄책감을 인정하면, 그것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니다."
유진의 손이 또 다시 떨렸다. 그 손은 기록 위에서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문서를 다시 펼쳤다. 할머니의 글씨를 따라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임을. 소연의 죽음도, 자신의 가족의 죽음도, 150년 동안의 모든 죽음도.
그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의 죄책감으로. 그리고 그 죄책감은 마을 전체의 것이었다.
유진은 기록들을 모두 들었다.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무게는 견딜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것을 혼자 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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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관의 불빛이 켜졌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진이 그들을 불렀다. 소연이 아니라 유진이. 그것이 중요했다.
이장 이준호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뒤를 따라 김 씨 가문의 상인들, 그리고 마을의 노인들과 아이들이 들어찼다. 덕순 할머니는 회관의 한쪽 모서리에 앉았다.
유진이 입을 열기 전에, 회관 뒤쪽 방의 문이 열렸다. 유진은 밤새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들고 나온 것은 150년의 무게였다.
"150년 전 기록을 찾았습니다."
유진이 말했다. 손에는 문서 다발이 들려 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먹으로 쓰인 글씨는 여전히 또렷했다.
회관의 공기가 멎었다.
"야차는 응혼으로만 죽는 게 아닙니다."
유진이 첫 번째 문서를 펼쳤다.
"야차는 150년 전 이 마을의 한 양반가가 저지른 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양반가의 아들이 한 여인을 욕보였고, 그 여인의 아버지가 복수로 마을 전체에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 저주가 구체화된 게 야차입니다."
유진이 문서를 높이 들었다. 회관의 등불이 종이를 밝혔다.
"저주는 죄책감으로만 강해집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우리가 죄책감을 느낄수록 야차는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야차를 진정으로 막는 방법은 응혼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책감을 직시하고, 그 죄책감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장이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응혼이 있으면 충분하다. 소연이 응혼을 들었으니 우리는 보호받는 거다."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시는지 압니다."
유진이 이장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이 있었다.
"당신의 가문이 150년 전의 죄의 당사자라는 게 드러날까봐.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이 마을을 다스리는 자격을 빼앗을까봐."
회관이 요동쳤다.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쳤다. 양반가의 노인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상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무녀 추종자들은 중얼거렸다. 분노, 놀라움, 거부감이 한 공간에 뒤섞였다.
이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건—"
"이장님의 고조부가 그 일을 저질렀습니다. 기록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유진이 문서를 높이 들었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종이를 밝혔다. 그 빛 속에서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름, 날짜, 사건의 경위. 모든 것이.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 죄를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죄를 인정하고, 그 죄책감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장님의 가문도 그 죄책감의 무게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양반가의 노인이 소리쳤다.
"이장 가문이 우리를 속였다는 건가? 150년을 속였다는 건가?"
상인 중 한 명이 일어섰다.
"내 할아버지가 죽었어. 야차 때문에 죽었어. 그런데 그게 다 이장 가문의 죄 때문이라고?"
무녀 추종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우리는 무녀를 탓했어. 무녀가 응혼을 못 들었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회관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각자 다른 이유로, 각자 다른 분노로 목소리를 높였다. 150년의 침묵이 한 순간에 깨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이 깨어지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
이장이 회관을 나가려 했다. 사람들이 그의 길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더 큰 압박이었다. 이장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등이 떨렸다.
"도망치시면 야차는 더 강해집니다."
소연의 목소리가 회관 뒤쪽에서 울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소연에게 쏠렸다. 그녀는 언제 들어왔는가. 아무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 있었다. 손가락부터 어깨까지 투명해진 팔을 드러내며.
"죄책감은 혼자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괴물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그 죄책감을 인정하면, 그것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닙니다."
소연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그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마치 자신의 몸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투명한 팔이 햇빛 속에서 흩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우리 모두가 150년 전의 죄를 나누지 않으면, 계속 누군가가 사라질 것입니다. 응혼으로 야차를 베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책감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소연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죽음을 앞둔 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살기 위해 싸우는 자의 목소리였다.
덕순 할머니가 일어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회관 전체에 울렸다.
"소연의 말이 맞다. 나는 150년의 기록을 지켜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
"그게 뭡니까?"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우리가 함께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 마을의 모든 가족이. 150년 동안 우리가 지켜낸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다."
할머니의 눈이 이장을 바라봤다.
"이준호. 당신의 가문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면, 당신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장이 회관의 문 앞에서 멈췄다. 그의 등이 떨렸다. 어느 쪽으로 돌아설지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손가락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상인의 울음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야차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그 울음은 150년의 슬픔이었다.
"이준호."
할머니가 다시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150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이장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당신이 인정할 수 있어. 그게 처음이야."
유진이 말했다.
이장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마치 말을 하려다가 멈추는 것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내 고조부가... 저질렀다는 거야?"
"네."
유진이 문서를 내밀었다. 이장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회관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봤다. 마을의 이장이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 죄를 몰랐어. 진짜로."
이장의 목소리는 울먹였다.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책임이 없는 건 아니지. 우리는 150년 동안 침묵했어. 그 침묵이 또 다른 죄였어."
이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인정합니다. 우리 가문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는 걸."
그 고백이 나오는 순간, 회관 전체가 움직였다. 상인이 더 크게 울었다.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옆에 앉은 노인이 그의 손을 잡았다. 양반가의 노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손가락이 주먹을 쥔 채로 떨렸다가, 천천히 펴졌다. 무녀 추종자 중 한 명이 무릎을 꿇었다.
"우리도... 죄책감을 나누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나오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동의는 아니었다. 각자의 얼굴에는 고통이 있었다. 150년 동안 지켜낸 침묵을 깨뜨리는 것의 고통.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었는지 깨닫는 것의 고통.
회관은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은 무거웠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의 무게가 아니라, 다른 것의 무게였다. 책임을 나누는 무게였다. 그리고 그 무게 속에서,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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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졌을 때, 소연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투명한 팔을 드러내며. 사람들은 그것을 봤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김 씨 가문의 상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야차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소연은 그의 집 앞에 섰다.
"저를 봐주세요."
소연이 말했다.
상인이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당신이... 여기 왜."
"당신의 할아버지가 죽었어요. 야차 때문에. 하지만 그 야차는 우리 모두가 만든 거예요. 당신도 포함해서."
소연이 투명한 팔을 들었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상인이 그것을 봤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이... 죽고 있는 거군."
"네. 하지만 죽음이 해결책은 아니에요. 우리가 함께 죄책감을 나누지 않으면, 계속 누군가가 죽을 거예요."
상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소연을 집 안으로 들였다. 그들은 밤새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그 이후 150년 동안 그 죽음 위에서 살아온 삶에 대해. 그리고 이제 해야 할 일에 대해. 상인은 울었다. 150년의 울음이 한 밤 사이에 터져 나왔다. 투명한 손이 상인의 손을 통과했지만, 그 손의 온기는 전달되었다. 죽음이 아닌, 살아있는 것의 온기가.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마을의 한 할머니였다. 그녀의 남편은 5년 전에 사라졌다. 야차 때문에.
"당신이 응혼을 들었다고 했지?"
할머니가 물었다.
"네. 하지만 응혼만으로는 부족해요."
소연이 말했다.
"그럼 당신이 죽으면 내 남편이 돌아올까?"
할머니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절망에 가까웠다.
"아뇨. 하지만 우리가 함께 죄책감을 나누면, 더 이상 누군가가 죽지 않을 거예요."
소연이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으로. 할머니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당신의 남편은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주세요. 우리 모두가 그 죄책감을 함께 짊어질 거니까. 그리고 그 죄책감을 함께 짊어질 때, 그것은 더 이상 당신만의 무게가 아니에요."
할머니가 울었다. 그 울음은 5년 동안 참아온 울음이었다. 투명한 손이 할머니의 손을 통과했지만, 그 손의 온기는 할머니에게 전달되었다. 죽음이 아닌, 살아있는 것의 온기가. 할머니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다시 살려낼 것처럼.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은 양반가의 노인이었다. 그의 가문은 이장 가문과는 다른 양반가였지만, 150년 동안 그 진실을 함께 숨겨왔다.
"우리가 뭘 해야 하는 거죠?"
노인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가득 했다.
"인정하세요. 우리가 침묵했다는 걸. 그리고 그 침묵이 또 다른 죄였다는 걸."
소연이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침묵하지 않기로 약속하세요. 우리 모두가 함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150년의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 그 침묵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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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초하루 전날 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회관에 모였다. 이번에는 이장이 그들을 불렀다.
"나는 우리 가문의 죄를 인정합니다."
이장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150년 전 내 고조부가 저지른 죄. 그리고 그 이후 150년 동안 우리 모두가 지켜낸 침묵. 그것도 죄입니다."
회관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속도로.
"앞으로 우리는 그 죄책감을 함께 짊어질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그리고 소연. 당신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으니까."
이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눈물이었다.
소연이 이장을 바라봤다. 그녀의 투명한 팔은 이제 어깨 전체를 넘어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소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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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초하루 아침, 야차의 울음이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예전과 다른 울음이었다. 분노의 울음이 아니라, 혼란의 울음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잃고 있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짊어지고 있는 죄책감이 더 이상 야차를 먹이지 않고 있었다. 그 죄책감이 분산되고, 공유되고, 나누어지고 있었다. 야차를 만들어낸 것은 개인의 죄책감이 아니라 집단의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집단의 죄책감이 변하고 있었다.
마을의 중심에서, 소연의 당의 검이 울렸다. 응혼의 울음이었다. 그 울음은 150년의 침묵이 깨어지는 소리였다.
유진은 소연의 당으로 달려갔다. 밤샘 결계를 유지하던 그녀는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투명함이 이제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살아 있었다. 절망이 아닌, 다른 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뭔가... 바뀌었어."
소연이 중얼거렸다.
유진이 그녀를 안았다.
"마을이 깨어났어. 비로소."
소연의 투명한 팔이 유진의 등을 감싸졌다. 그 팔은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마치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응혼이 울었어. 처음으로."
소연이 말했다.
"야차가 약해졌다는 뜻이야."
유진이 응답했다.
"아니야. 야차가... 뭔지 다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소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150년 동안 너를 먹이로 살던 죄책감이 흔들리니까.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나누고 있으니까."
유진이 소연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은 죽지 않아. 내가 약속할게."
소연이 유진을 봤다. 그 눈빛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어딘가 다른 것이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의 끝에서, 마을의 한복판에서, 두 사람은 함께 새로운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야차는—여전히 하늘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의 울음이 변하고 있었다. 높던 음역이 낮아지고, 분노의 울음이 흔들리는 울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먹이던 죄책감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150년 만에 처음으로.
야차의 울음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 울음 속에는 더 이상 절대적인 분노가 없었다. 오직 혼란만이 남아 있었다. 무엇인가를 잃어가는 혼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무너지는 혼란. 그것은 마지막 울음이 아니었다. 다만 변화의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