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응혼 사용과 죄책감의 악순환
마을의 동쪽 경계에서 울음소리가 터졌다.
야차의 분신들이었다. 아이 키만 한 검은 형체들이 여덟 구, 제단의 결계 가장자리를 짓고 있었다. 소연은 응혼을 들었다. 검의 무게가 손바닥에 와 닿는 순간, 세상이 다시 울음으로 채워졌다. 아니면 애초부터 울음이 있었고, 소연이 비로소 그것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가!"
유진이 소연 뒤에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찬 것이었지만, 손은 떨렸다. 소연은 그것을 봤다.
응혼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내려왔다.
첫 번째 요괴가 두 토막이 되었다. 그 순간, 소연의 손가락 끝이 따끔거렸다. 마치 누군가 바늘로 살을 뜯어내는 것 같은 감각. 하지만 그것보다 강한 것이 있었다—온몸을 관통하는 쾌감. 요괴가 베어지는 느낌. 검기가 대기를 가르며 흩어지는 모습. 그것이 자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강하다. 나는 강하다.
소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두 번째 요괴가 소연을 향해 부리를 펼쳤다. 응혼이 울었다. 소연은 자신이 울음을 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검이 요괴의 몸을 관통했고, 그것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손가락이 다시 따끔거렸다. 이번엔 손목까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소연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마치 자신이 처음 배운 검술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응혼의 검이 공중에서 호를 그렸고, 여섯 번째 요괴가 그 호 속으로 사라졌다.
일곱 번째 요괴. 여덟 번째 요괴. 마지막 것이 결계 안으로 침투하려 할 때, 소연의 검이 그것을 가로챘다. 검의 끝이 요괴의 중심을 꿰뚫었다. 검은 연기가 흩어졌다.
그리고 멈췄다.
소연의 호흡이 끊어졌다. 응혼의 울음도 사라졌다. 마을의 밤이 다시 소음으로 돌아왔다. 올빼미 울음. 바람 소리. 그리고 유진의 숨 쉬는 소리.
"소연!"
유진이 뛰어왔다. 소연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멈췄다. 그의 손가락이 소연의 팔 위에서 어정쩡히 떨어졌다.
"뭐... 뭐야?"
소연은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투명했다. 피부가 빠져나간 것처럼 맑은 투명함. 손등의 정맥이 검은 줄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팔목까지 그 투명함이 뻗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소연을 천천히 지우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그 사라짐이 점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소연, 대답해. 괜찮아?"
유진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소연이 그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은 두렵고, 입은 떨리고 있었다.
"수 시간이 깎인다고 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소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차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허함이었다.
"여덟 번. 여덟 번 휘둘렀으니까..."
"소연!"
유진이 소연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소연은 자신의 손을 계속 봤다. 손가락에서 팔목까지 뻗어 있는 투명함. 그 위에 혈관이 검은 줄처럼 그려져 있었다.
"87일이 남았다고 했는데, 여덟 번만 휘둘러도 이 정도면... 얼마나 많이 휘둘러야 야차를 막을 수 있을까?"
"다른 방법이 있어. 응혼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
소연이 유진을 봤다. 그의 얼굴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아니다. 초점을 잃은 건 소연의 눈이었다.
"응혼이 처음부터... 나를 선택하지 않았어."
소연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응혼이 나를 선택한 건 내가 죄책감으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죄책감을 느낄수록 검이 강해지는 거고. 내가 죄책감으로 죽으려 할수록, 검은 그걸 먹고 더 강해지는 거야."
유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이건..."
"악순환이야."
소연이 손가락을 펼쳤다. 달빛 아래에서 그 투명함이 더 선명해 보였다. 마치 유리처럼. 마치 죄책감처럼.
"내가 야차를 막으려고 검을 휘두르면, 내 죄책감이 커져. 그럼 검이 더 강해지지만, 동시에 야차도 강해져. 왜냐하면 야차는 죄책감으로 태어났으니까. 내 죄책감이 야차를 먹이는 거야."
유진이 소연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투명한 피부 위에서 떨렸다.
"그럼... 응혼을 놔둬. 놔두면 되잖아."
"마을이 남아 있어."
소연이 마을 쪽을 봤다. 당의 불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불 아래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도 있고, 노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소연의 눈에 떠올랐다. 홍택의 얼굴. 민준의 얼굴. 덕순 할머니 얼굴. 그리고 소연이 죽인 사람의 얼굴.
"내가 뭘 하든 지옥이네."
소연이 중얼거렸다.
"검을 휘두르면 죄책감으로 죽고, 검을 놔두면 마을이 죽고. 어느 쪽이든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니..."
"소연, 그게..."
"뭐가 다르냐고 물어봤어. 뭐가 다른 거야?"
소연이 유진을 봤다. 그의 입이 벌어졌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지. 난 이미 답을 정했으니까. 나는 죄책감으로 죽기로 했어. 그게 내 선택이고, 내 책임이야."
"그건 책임이 아니야!"
유진이 소연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투명한 피부 위에서 떨렸다.
"그건 자살일 뿐이야! 죄책감에 짓눌려서 죽는 건 책임이 아니야, 소연! 그건... 그건..."
유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는 소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모르겠어. 뭐가 책임이고 뭐가 자살인지. 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거야."
소연이 응혼을 들었다. 검의 표면이 달빛을 반사했다. 그 안에 소연의 얼굴이 비쳤다. 창백한 얼굴. 그리고 투명한 손가락.
유진이 소연을 붙잡으려 했지만, 소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마을 안쪽으로. 당 뒤쪽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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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뒤쪽의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연은 거울을 꺼냈다. 손거울. 할머니가 주었던 것. 표면은 검은 얼룩으로 가득했지만, 여전히 상을 비출 수 있었다.
소연의 손가락이 거울에 비쳤다.
투명함이 더 진행되고 있었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손등, 손목, 팔까지. 마치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아니다. 안에서 밖으로. 내부에서 표면으로.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소연이 손을 움직였다. 거울 속에서 투명한 손이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거울 속의 손도 구부러졌다. 하지만 거울 속의 손은 반투명해서 손가락 뼈만 보였다. 살이 없었다. 피부가 없었다. 오직 뼈와 혈관만.
그것이 강함이었다.
응혼의 검을 휘둘렀을 때, 그것이 강함이었다. 요괴들이 베어지는 그 순간의 감각. 자신의 의지가 세상을 가르는 그 느낌. 그것이 강함이었다.
그리고 그 강함이 자신을 죽이고 있었다.
소연은 거울을 내려놨다. 손가락의 투명함이 사라졌다. 마치 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단지 소연의 눈에만 들어오지 않을 뿐. 투명함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로.
"응혼이 죄책감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선택한다고 했어."
소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럼 내 죄책감이 검을 만든 거고, 검이 내 죄책감을 먹는 거고... 내 죄책감이 야차를 강하게 만드는 거야."
소연이 손을 펼쳤다. 거울 없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투명한 손가락이 밤빛에 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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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덕순 할머니가 당을 찾아왔다.
소연은 제단 앞에 앉아 있었다. 응혼을 무릎에 올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응혼을 휘둘렀구나."
할머니가 소연의 옆에 앉았다. 그의 무릎을 봤다. 응혼의 검이 미세하게 울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잃었어?"
"아직은."
소연이 손을 펼쳤다. 투명함이 손가락에서 손목까지 뻗어 있었다.
"여덟 번 휘둘렀어. 여덟 번에 이 정도면... 얼마나 많이 휘둘러야 야차를 막을 수 있을까?"
"모르겠지."
할머니가 소연의 손을 만졌다. 투명한 부분에. 할머니의 손가락이 소연의 투명한 손을 통과했다. 마치 물을 헤치는 것처럼.
"응혼의 검은 죄책감을 먹이로 삼는다고 했지. 그럼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내 책임을 지고 있어."
"책임이 죄책감과 다르냐?"
소연이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는 웃지 않았다. 그 얼굴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응혼이 너를 선택한 건 너의 죄책감 때문이야. 그리고 응혼을 휘두를 때마다, 그 죄책감이 커진다고 했지. 그럼 넌 지금 자살을 하고 있는 거야. 아주 천천히, 아주 고통스럽게."
"마을을 지켜야 해."
"마을을 지키는 방법이 응혼만 있냐?"
할머니가 일어섰다. 그의 무릎이 작게 신음했다.
"내일 밤에 다시 오거라. 너에게 보여줄 게 있다."
"뭘?"
"150년 전의 기록이다. 응혼의 검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 야차가 왜 이 마을에 왔는지의 이야기."
할머니가 제단을 바라봤다. 제단 위의 돌이 검게 변해 있었다. 소연의 피로. 매 초하루마다 조금씩 더 검어지고 있었다.
"응혼이 없었던 시절도 있었고, 무녀가 죄책감으로 죽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이 어떻게 달랐는지 알아야 넌 다음 선택을 할 수 있다."
할머니가 떠났다.
소연은 다시 응혼을 봤다. 검의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손가락이 투명한 얼굴.
야차가 울음을 냈다. 멀리서. 마을 바깥에서.
그 울음 속에 소연이 들었다. 자신의 죄책감. 자신의 절망.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갈망.
야차는 자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야차를 죽인다는 것은 자신을 죽인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은 야차를 살린다는 뜻이었다.
응혼이 울음을 그쳤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소연은 검을 내려놨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투명했다. 그리고 그 투명함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팔목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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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 당 문을 밀고 들어온 것은 해가 중천일 때였다.
"소연."
소연이 고개를 들었다. 유진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요괴의 검은 피였다.
"어제 밤 마을 경계에서 뭔가 움직였어. 넌 왜 알려주지 않았어?"
소연이 일어섰다. 응혼을 들었다.
"응혼이 울기 전까지는 몰랐어. 응혼이 울면 야차가 가까워진다는 뜻이니까. 어제 밤 처음 들었어."
"응혼이 울었다고?"
"응혼이 울면 야차가 가까워진다. 그 울음을 따라갔을 때..."
소연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녀는 창을 통해 마을 경계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압박감.
"몇 개를 봤어?"
"셋. 아니, 넷. 정확히 세지 못했어."
유진이 제단 앞에 섰다. 그의 눈이 소연의 손을 찾았다. 손가락의 투명함. 그것을 본 순간 유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게 뭐야?"
"응혼의 대가야."
"몇 번을 휘둘렀어?"
소연이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이 다가왔다. 그는 소연의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가락을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놨다. 자신의 손을 통해 보이는 소연의 손가락. 마치 없는 것처럼.
"이렇게 계속하면 안 돼."
"마을을 지켜야 해."
"마을을 지키는 게 뭐야? 넌 마을을 위해 죽는 거야? 그게 마을을 지키는 거냐?"
소연이 손을 빼냈다. 그녀의 손이 유진의 손을 통과했다. 마치 공기를 헤치는 것처럼.
"어제 밤에 뭘 했어?"
"야차의 분신들과 싸웠어. 응혼으로."
"분신?"
"야차의 일부야. 영력이 약한 것들. 하지만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어."
유진이 제단으로 다가갔다. 돌 위에 묻은 검은 피. 소연의 피. 그것을 본 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넌 피를 흘렸어?"
"응혼을 휘둘 때마다 죄책감이 커져. 그 죄책감이 마을로 퍼져. 어제는 그 파동이 너무 커서..."
"파동?"
"마을 사람들이 악몽을 꿨어. 어제 밤. 모두가."
유진이 뒤돌았다. 그의 눈이 소연을 마주쳤다. 그 눈에는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분노의 대상이 소연이 아니라는 것을 소연은 알았다.
"응혼이 뭐하는 거야? 넌 마을을 지키려고 검을 들었는데, 검이 오히려 마을에 악몽을 주고 있잖아."
"응혼은 내 죄책감을 먹어. 내가 죄책감을 가질수록 응혼이 강해지고, 응혼이 강해질수록 나는 더 죽어가고, 내가 더 죽어갈수록 내 죄책감이 커지고..."
소연이 무릎을 꿇었다. 제단 앞에서. 응혼은 여전히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악순환 속에서라도 마을을 지키는 게 내 책임이야."
"책임이 죽음이냐?"
유진이 소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제단 앞에서 마주 앉았다. 유진의 손이 소연의 손을 다시 잡았다. 투명한 손가락을 다시 만졌다.
"내가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응혼이 아닌 다른 방법. 약속했잖아."
"유진..."
"약속했어. 넌 죽지 않는다고.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유진이 일어섰다. 그는 당을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내일 밤에 할머니한테 물어봐. 야차가 왜 이 마을에 왔는지. 어쩌면 그 답이 다른 방법일 수도 있어."
유진의 목소리가 더 깊어졌다. 결연함으로.
"그리고 나도 알아낼 거야. 응혼이 아닌 방법. 너를 죽이지 않으면서 마을을 지키는 방법."
유진이 떠났다.
소연은 제단에 남겨졌다. 응혼과 함께. 그리고 자신의 투명한 손가락과 함께.
밤이 내려앉았을 때 소연은 당 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래된 기록들이 있었다. 대대로 내려온 무녀 가문의 기록. 제의 방법, 영력의 수련, 요괴 퇴치의 전승.
그리고 그 기록 맨 뒤에는 다른 글씨가 있었다.
'150년 전 초하루 밤. 마을을 집어삼킨 원귀의 탄생.'
소연이 그 페이지를 펼쳤을 때, 누군가가 당 문을 두드렸다.
"소연이 있나?"
덕순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들어와요."
할머니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더 오래된 기록이 들려 있었다. 종이가 누렇게 변한, 150년은 되어 보이는 기록.
"읽어봐라. 이 마을이 어떻게 저주받았는지. 야차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응혼의 검이 왜 그렇게 절망적인 자를 선택했는지."
소연이 기록을 펼쳤다. 첫 줄이 눈에 들어왔다.
'150년 전, 양반가 이준호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죄.'
소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준호. 지금의 이장. 그의 이름이 150년 전 기록에 있었다.
"이장이... 관계가 있어?"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이야."
할머니가 앉았다.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더욱 깊어 보였다.
"150년 전 이 마을은 지금과 달랐다. 양반가가 더 강했고,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짓밟았어. 그 중심에 이준호의 아버지가 있었어. 그는 상인 김 씨 가문의 딸을 욕보였어.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소연이 기록을 더 읽었다. 글씨가 흔들려 있었다. 분노로 쓴 글씨처럼.
"그 여인의 아버지는 뭘 했어요?"
"복수했어. 마을 전체에 저주를 내렸어. 그 저주가 구체화되어 야차가 되었고, 음력 초하루마다 마을 사람 일곱 명을 데려가기 시작했어. 150년. 그동안 몇 명이 죽었을까?"
할머니가 창을 통해 마을을 바라봤다.
"천오백 명. 정확히 천오백 명이 야차에게 죽었어. 그 모든 죽음이 한 사람의 욕심에서 시작된 거야. 그리고 그 욕심을 막지 못한 마을의 죄책감. 그 죄책감이 야차를 먹여 키웠어."
소연이 기록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럼 야차는 피해자야?"
"그래. 야차도 피해자야. 억울하게 죽은 여인의 한이 구체화된 것이니까. 하지만 그 한이 천오백 명의 죽음을 만들었어. 그리고 지금도 계속 죽음을 만들고 있어."
할머니가 소연을 봤다.
"응혼이 너를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니?"
"죄책감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선택한다고 했어."
"그래. 그리고 응혼은 너의 죄책감을 먹으며 강해져. 그 죄책감이 야차를 만들었고, 그 야차가 또 다른 죄책감을 만들고. 이 모든 악순환이 뭘로 시작된 줄 알아?"
소연이 기록을 들었다. 첫 줄. 이준호의 아버지의 욕심.
"죄를 짓는 것."
"그래. 그리고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 책임지지 않는 것. 미루는 것."
할머니가 일어섰다. 그의 무릎이 다시 신음했다.
"진정한 속죄는 너 혼자 죽는 게 아니야. 너를 만든 마을의 죄책감을 함께 나누고, 그 죄책감을 마주하고, 함께 용서하는 거야."
"어떻게?"
"그건 내일 밤에 보여줄 거야."
할머니가 당을 나가려 했을 때, 밖에서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녀님! 무녀님!"
소연이 밖으로 나갔다. 민준이 제단 앞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뭐 어디 다쳤어?"
"아니... 아빠가..."
민준이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소연의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을 마주친 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아빠가 뭐해?"
"집을 나갔어. 밤중에.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빠 몸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게..."
소연의 몸이 굳었다. 검은 연기. 그건 야차의 기운이었다.
"어디로 갔어?"
"마을 경계 쪽으로... 아, 그리고..."
민준이가 뭔가를 꺼냈다. 종이였다. 술에 젖은, 구겨진 종이. 그 위에는 글씨가 있었다.
'날 데려가줘. 이 고통에서.'
소연이 종이를 받아들었을 때, 응혼이 울음을 냈다.
처음과는 다른 울음. 더 크고, 더 절박한 울음. 마치 무언가를 재촉하는 듯한.
소연이 응혼을 들었다.
"유진을 찾아. 민준이는 할머니와 함께 있어."
"무녀님, 아빠가..."
"내가 데려올 거야."
소연이 당을 나갔다. 밤의 마을로. 응혼을 들고.
그리고 그 손가락은 이제 팔꿈치까지 투명해져 있었다.
---
마을 경계에 다다랐을 때, 소연은 처음 마주쳤다.
민준이의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미 죽은 것처럼. 그리고 그의 뒤에는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야차였다.
야차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여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고통으로 뒤틀려 있었다. 150년의 한이 응축된 얼굴. 그 눈이 소연을 바라봤다.
"안녕, 소연."
야차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았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 천오백 명의 목소리.
"넌 그를 구하고 싶어? 아니면 그를 포기하고 싶어? 둘 다 죄책감이 될 텐데?"
소연이 응혼을 들었다.
"둘 다 아니야."
"뭐?"
"셋째 길이 있어."
소연이 검을 휘들려 했을 때, 갑자기 응혼이 울음을 그쳤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순간 소연은 깨달았다. 응혼도, 자신도, 그리고 야차도 모두가 같은 죄책감 속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죄책감을 끊는 방법은 검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소연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마을 쪽에서 횃불이 올라왔다. 여러 개의 횃불. 사람들이 들고 있는 횃불.
유진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왔다.
이장 이준호. 홍택. 덕순 할머니. 그리고 마을의 모든 주민들.
그들은 마을 경계에 서 있었다. 야차를 마주하기 위해. 소연 뒤에 서서.
유진이 소연 옆에 섰다. 그의 손이 소연의 투명한 손을 잡았다.
"혼자가 아니야."
유진이 중얼거렸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그 순간, 야차의 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