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시한과 마을의 음성
"87일이 맞나?"
유진의 목소리는 낮고 차갑다. 새벽 안개가 당 뒤뜨락을 반투명하게 물들고 있을 때였다. 소연은 응혼을 들었던 손가락들을 반복해서 펴고 구부렸다. 손가락 끝이 아직도 따끔거렸다. 검을 놓자마자 손끝부터 팔뚝까지 저린 감각이 흘러내렸고, 지금도 그것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응. 음력 초하루까지."
"생명이?"
"3개월."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소연을 훑어내렸다. 마치 마지막을 보는 눈. 소연은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어 응혼을 들었던 손을 내렸다. 손톱 아래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응혼의 피일까, 요괴의 피일까. 아니면 자신의 피일까.
"다른 방법은 없나?"
"없다."
소연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검이 말했다. 검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유진이 돌아섰다. 어깨가 움찔했다. 화내는 것도 아니고, 포기하는 것도 아닌 그 어떤 감정이 그의 등을 굳혔다. 소연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자신도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것을 지킬 수 없다는 절망.
그 시간부터 마을은 움직였다.
당 앞의 제단이 정리되었고, 횃불이 세워졌다. 날이 밝자 사람들이 몰려 왔다. 처음에는 몇 명, 그 다음엔 몇십 명. 영월마을의 모든 가구가 당 앞에 모이는 데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소연은 제단 위에 서 있었다. 응혼은 그녀의 옆에 놓여 있었다. 검신이 햇빛을 받아 차가운 은색으로 빛났다. 어제 밤의 붉은 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야차가 온다."
소연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제단 아래까지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무녀의 목소리는 그런 것이었다.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울림의 깊이가 중요했다.
"음력 초하루. 87일 뒤. 그 날 야차가 이 마을을 집어삼킬 것이다."
누군가가 신음했다. 여인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소연은 그 여인의 이름을 알았다. 김 씨 집의 며느리. 남편은 작년 초하루에 야차에게 가져갔다.
"응혼이 나타났다."
소연이 검을 들었다. 가벼워 보이지만 무거운 그 검을. 햇빛이 검신을 타고 흘러 내렸다. 제단 아래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검으로 야차를 막을 수 있다."
"당신이?"
누군가가 물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명확했다. 소연은 그 방향을 봤다. 이장 이준호였다. 양반가 출신의 남자. 당 앞의 제단 왼쪽에 서 있는 그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아직도 벗지 못한 신분의 옷.
"나다."
"당신이 어린 시절 마을을 망친 그 소연이?"
말이 끝나자 주변이 달아올랐다. 몇몇 주민들이 동시에 말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장님."
"응혼이 나타난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닙니까."
"그럼 당신이 야차를 막으실 건가요?"
이준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턱이 경직되었다. 소연은 그 표정을 읽었다. 책임을 피하려는 표정. 동시에 권력을 유지하려는 표정.
"저 검이 진짜라는 보장이 있나?"
다른 목소리였다. 양반가 출신의 여인. 소연은 그녀를 봤다. 이장의 아내였다. 흰 머리를 쪽지어 올린 얼굴에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 크다.
"150년 전 저주가 내려진 건 마을 전체의 책임이 아니었나? 왜 소녀 한 명이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건..."
"우리 남편의 형이 벌인 일 때문에 마을 전체가 저주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 전체가 나서야 하지 않나?"
소연은 그 말을 들었다.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옳은 것만으로는 야차를 막을 수 없었다. 야차는 죄책감을 먹는다. 집단의 죄책감도, 개인의 죄책감도. 그것이 야차를 강하게 만들었다.
"당신들의 죄책감이 야차를 강하게 만든다."
소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무녀의 눈.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야차는 더 강해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 누군가는 죄책감 없이 검을 들어야 한다."
"그게 당신이라고?"
이준호가 다시 물었다. 소연은 그를 봤다.
"응."
제단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아이의 목소리.
"소연 누나가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
민준이가 앞으로 나섰다. 여덟 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 엄마를 잃은 아이. 아빠가 술에 빠져 있는 아이. 그런데 그 아이의 눈은 맑았다.
"우리가 두려워할수록 야차가 강해지는 거라고 소연 누나가 말했어. 그럼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 소연 누나를 믿어야 해."
민준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제단 아래를 가득 채웠다. 아이의 목소리는 어른의 말보다 무겁다. 그것은 죄책감이 없기 때문이었다.
소연의 손이 떨렸다. 응혼을 들었던 손이. 손끝부터 시작된 저림이 멈췄다. 정확히는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덮혔다.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무거움이.
숨을 쉬기가 쉬워졌다. 어제부터 누르고 있던 가슴이 조금 풀렸다. 죄책감으로 호흡을 조절하던 그 패턴이 깨졌다.
그 순간, 뒤에서 손이 소연의 팔을 잡았다.
"소연아."
덕순 할머니였다. 무녀 월희의 어머니. 소연의 할머니뻘 되는 여인. 그녀의 손은 차갑고 가벼웠다. 마치 종이처럼 얇은 손.
제단 아래의 사람들은 여전히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준호와 그의 아내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자신들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목소리.
할머니가 소연을 제단 뒤로 이끌었다. 할머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소연을 놓지 않으려는 손.
"할머니?"
할머니는 소연을 당 안으로 데려갔다. 방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150년 전이란다."
소연은 할머니의 손을 따라 이동했다. 할머니는 제단 뒤 작은 방으로 향했다. 벽에는 낡은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무녀들의 초상화였다. 그 중 가장 낡은 것은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양반가의 아들이 있었어."
할머니가 가장 낡은 초상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 할머니와 같은 나이쯤의 아이였어. 그 아이가 벌인 일 때문에 한 여인이 죽었고, 그 여인의 아버지가 저주를 내렸지."
할머니가 방의 한구석에 앉았다. 소연도 옆에 앉았다.
"근데 말이야, 그 아이도 죽고 싶어했단다. 죄책감으로 자살했단다."
소연의 몸이 경직되었다.
"150년 전의 야차는, 사실 그 아이의 죽음이 아니라 그 아이가 느꼈을 죄책감에서 탄생했어. 죄책감이 형체를 갖춘 거야."
할머니의 눈이 소연을 찾았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그 눈은 날카로웠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야. 당신이 죽으면 또 다른 야차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할머니가 소연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 검은 죄책감을 먹고 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야차를 진정으로 멈출 수 없어. 왜냐하면 야차 자체가 죄책감이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건 내가 보여줄 거야."
할머니의 의식이 완전히 희미해졌다. 소연이 할머니를 받쳐 옆자리에 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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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소연은 응혼을 들었다.
마을 가장자리. 산림과 마을의 경계. 그곳에서 요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야차의 부하처럼 보이는 것들. 작은 것들. 마을 주민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사이에, 소연은 검을 휘둘렀다.
한 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검이 공기를 가르며 내려왔고, 요괴들의 울음이 멈췄다. 검신이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소연의 손은 떨렸다. 저린 감각이 돌아왔다. 어제보다 더 강했다. 어제는 죄책감이 섞여 있었지만, 이번에는 순수한 책임감만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감이 검을 타고 마을 전체로 흘러내렸다.
소연은 느꼈다. 자신의 의도가 마을을 감싸는 것을. 마치 그물처럼. 보호의 그물이 아니라, 책임의 무게.
마을의 주민들이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이장 이준호는 죽은 여인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 얼굴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이 그 여인이 되어 죽어가는 꿈을 봤다. 민준이는 밤중에 깨어났다. 악몽 속에서 야차의 형태가 희미해졌다 또렷해졌다. 엄마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형태가. 유진은 소연이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꿈을 봤다.
87일이 시작되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마을은 신음으로 가득 찼다.
소연은 당의 방에 누워 있었지만 잠들지 못했다. 응혼은 자신의 곁에 놓여 있었고, 검신 위의 빛이 천천히 맥박치듯 희미해졌다 밝아졌다. 생명력을 빨아먹는 리듬이었다. 소연은 손가락으로 검날을 따라 그었다. 피가 나지 않았다. 응혼의 검은 주인에게는 상처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만진 순간 소연의 손목이 저렸다. 시간이 깎여나가는 감각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직 86일 22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 이렇게 두려운가.
밤 3시경, 유진이 당의 문을 두드렸다. 세 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리듬.
"들어와."
소연이 일어나 앉았다. 유진은 들어오면서 방 안의 응혼을 바라봤다. 검은 어제보다 더 검어 보였다. 소연의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일까.
"잠을 못 자고 있는 건가?" 유진이 물었다.
"너도 그런 모양이네."
유진은 소연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응혼이 놓여 있었다. 유진은 검을 만지지 않았다. 손을 뻗었다가 멈춰 세웠다.
"그 검이... 정말로 3개월 동안만 너를 살려두는 건가?"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소연이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이 기다렸다. 오래 기다렸다. 마침내 소연이 입을 열었다.
"소멸한다고 했다. 흔적도 남지 않고."
유진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그럼 다른 방법은? 다른 사람이 그 검을 들 수는 없나?"
"응혼은 주인을 선택한다고 했다. 죄책감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그럼 넌..."
유진이 소연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아프고 분노했다. 하지만 소연은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 전체를 향한 것임을 알았다.
"죄책감으로 죽으려고 했구나."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단언이었다. 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택 아저씨 때문에."
"그 일은 넌 책임이 아니다."
유진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넌 아이였어. 그때 넌 아이였다고."
"그래도 내 판단이 잘못됐고, 그 때문에..."
"그 때문에 뭐? 15년을 죄책감으로 살았어? 마을을 위해 제를 올리고, 영력을 키우고, 야차를 막기 위해 준비했어? 그게 부족한 거야?"
유진이 일어났다. 그의 발걸음이 방 안을 오갔다.
"내 가족도 이 저주 때문에 죽었다. 엄마, 아빠, 여동생. 다 죽었어. 하지만 난 너를 원망한 적 없다. 왜냐하면 넌 죄책감으로 죽으려고 했으니까. 그게 너의 방식인 줄 알았거든. 자책하고, 자학하고, 결국 자살하는 게."
그는 소연을 마주 봤다.
"근데 이제 와서 정말로 죽을 거야? 그 검의 대가로?"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건 다른 문제다!"
유진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는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가슴이 격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미안해. 난... 난 알고 있었어. 너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그런데도 넌 그 검을 들었고, 나는... 나는 그걸 막지 못했어."
유진이 다시 앉았다. 이번에는 응혼의 반대편에. 소연과 검을 사이에 두고.
"야차를 막을 다른 방법이 없나?"
"모르겠다."
"그럼 시도는 해 봐. 고서를 찾아 봐.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모아 봐. 150년 전 일을 정확히 알아내 봐."
유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3개월 동안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반드시."
"어떻게?"
"모르겠지. 하지만 넌 죄책감을 버려야 한다. 홍택 아저씨 때문에 느껴왔던 모든 죄책감을."
"그건..."
"불가능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야 해. 3개월 동안 죄책감을 버리고 살아 봐."
유진이 일어서려다 멈췄다. 손을 뻗어 소연의 어깨를 잡았다.
"넌 죽으면 안 돼. 나한테 약속해. 87일이 끝나기 전에 다른 방법을 찾을 때까지 죽으면 안 된다고."
소연이 그의 손을 바라봤다. 떨리고 있었다. 유진은 당을 나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소연은 유진이 떠난 후 고개를 들었다. 응혼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손을 뻗어 검에 닿으려다 멈췄다. 손가락이 떨렸다. 또 시간이 깎여나갈 것 같았다. 고서를 펼쳐야 했다. 마을의 기록을 찾아야 했다. 150년 전의 진실을 파헤쳐야 했다.
3개월. 86일 21시간.
소연은 촛불을 켰다. 당의 서고로 향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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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마을에 긴장이 흘렀다.
밤새 꾼 악몽 때문이었다. 주민들이 당으로 몰려왔다. 일부는 소연에게 물었다.
"밤중에 뭐 한 거야?"
"왜 우린 다들 악몽을 꿨어?"
"당신이 검을 휘둘렀나?"
소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응혼의 대사로 하자면, 그것이 '신뢰의 침묵'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답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한 일이 마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자신의 책임감이 마을을 감싼다는 사실이 소연을 말 잃게 했다.
이장 이준호와 그의 아내가 나섰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밤새 악몽에 시달린 흔적이 선명했다.
"소연 당주, 밤중에 검을 휘둘렀나?"
"마을 가장자리의 요괴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악몽을 보내셨다는 뜻인가?"
이준호의 목소리에는 비난이 섞여 있었다. 그의 아내가 덧붙였다.
"당신이 죽인 요괴들의 한이 우리에게 옮아온 건 아닐까요?"
"그럴 리 없다."
소연 뒤에서 덕순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오늘 할머니의 의식은 맑았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죽은 요괴는 한을 남기지 않는다. 응혼의 검은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할머니가 제단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너희가 꾼 악몽은 너희 자신의 죄책감이다. 150년 전, 양반가의 아들이 벌인 일로 한 여인이 죽었다. 그 책임을 피하려고 마을 전체가 눈을 감았지. 그 집단적 죄책감이 야차를 만들었고, 지금도 마을을 먹고 산다."
할머니의 말이 제단 위에 떨어졌다. 무거운 돌처럼.
"그 악몽은 그 죄책감이 깨어난 것이다. 응혼의 검이 마을을 감싸면서, 너희가 외면해 온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거야."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불안감이 퍼져 나갔다. 그들의 죄책감이, 그들이 외면했던 것들이 이제 눈앞에 떠올랐다.
이준호의 아내가 소리쳤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죄책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다."
할머니가 대답했다.
"150년 동안 마을은 그 죄책감을 외면했다. 그 외면이 야차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
제단 아래에서 상인 집단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노인층은 침묵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150년 전의 일을.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이 죽을 필요가 없어요."
민준이가 손을 들었다. 작은 손. 아홉 살의 손. 모두가 아이를 바라봤다.
"우리가 죄책감을 받아들이면 야차도 약해져요. 그럼 당신이 죽을 필요가 없어요."
소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9살 아이의 순수한 관찰이 모든 것을 정면으로 부딪혔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도 알았다. 죄책감을 받아들인다? 150년 동안 쌓인 집단의 죄책감을 3개월 안에?
이준호가 소리쳤다.
"어린 아이의 말을 어떻게..."
"침묵해."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위력이 있었다.
"그 아이가 맞다."
할머니의 눈이 소연을 찾았다. 그리고 이준호 부부를 향했다.
"응혼의 검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진정한 속죄가 필요하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준호의 아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150년 전의 죄를 지금 어떻게 속죄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넌 그 일을 본 적도 없나?"
할머니의 질문이 날카로웠다.
"본 적이 없다면, 왜 악몽에서 죽은 여인의 얼굴을 봤나? 왜 그 여인이 되어 죽어가는 꿈을 꿨나?"
이준호의 아내가 입을 다물었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일을. 그런데 외면했다. 그 외면이 죄책감이고, 그 죄책감이 야차를 만들었다."
할머니가 제단에 올랐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었지만, 그 움직임에는 무녀의 위엄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 외면을 끝내야 한다. 150년 전의 그 여인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외면했는지 직시해야 한다. 그것이 속죄의 시작이다."
"할머니."
소연이 할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할머니가 돌아봤다.
"150년 전 일을... 알 수 있나요?"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야차를 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할머니의 눈이 마을 사람들을 훑었다.
"누군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이 아니라면 기록으로. 고서나 족보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찾아야 한다."
할머니가 소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넌 그 검으로 마을을 지켜야 한다. 3개월 동안. 그 사이에 우리가 진실을 찾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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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다시 내려앉았다.
소연은 당의 뒤쪽, 마을을 보호하는 결계를 그었다. 응혼의 검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공격이 아니라 보호였다. 마을을 감싸는 빛. 책임감으로 그은 결계.
검신이 공기를 가르며 원을 그렸다. 은빛이 마을을 감쌌다.
그리고 그 결계 밖에서, 야차가 움직였다.
음력 초하루까지 86일이 남았다.
야차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소연이라는 새로운 존재—자신과 같은 '죄책감의 존재'를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계의 경계에서 야차는 반응했다. 은빛에 닿은 그것의 형태가 일렁였다. 마치 물 위의 그림자처럼. 야차는 검의 울림을 느꼈다. 그 안에 담긴 것을 감지했다.
죄책감.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책임감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있으려는 의지가.
야차는 입을 벌렸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나왔다.
"넌 죄책감으로 죽고 싶은 게 아니구나."
그것이 야차의 첫 말이었다. 소연을 향한 첫 인사였다. 목소리는 바람처럼 결계를 흔들었다.
"넌 살고 싶어 하고 있다. 그 검을 들면서도."
응혼이 울렸다. 검신이 밤하늘을 비췄다. 소연의 손이 멈췄다. 검신의 빛이 흔들렸다.
"아직 아니다."
소연이 중얼거렸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아직은."